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126화 (126/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26화>

    ***

    모두들 인이 박힐 정도로 들었겠지만 내 꿈은 시인과 작가였다.

    다만 그 한켠에는 시나리오 작가라는 작은 꿈도 키웠었다.

    영화 시나리오를 집필하고, 드라마 대본을 밤을 꼴딱 지새워가며 집필하고··· 그게 이제 스크린이나 브라운관에 영상으로 재연되고··· 상상만으로도 아주 짜릿하잖아?

    물론 학년이 올라가면서 시나리오 수업이 추가되고 어깨 너머로 희곡을 배우게 되면서 이 생각은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안드로메다로 날아갔지만 어쨌든 그런 꿈은 있었다는 소리다.

    그런데 그 꿈을 바로 여기서 실현시켰다.

    비록 영화 각본이나 드라마 대본은 아니지만 그것들의 일종인 희곡, 그러니까 극작가로 활약했으니 그 꿈이 현실이 된 건 팩트가 맞다.

    관객도 무려 500명이 넘었으니 데뷔작(?)치고는 대성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관객들의 반응도 비교적 괜찮은 편이었다.

    내가 쓴 각본을 받고 이 작품의 이름은 도목정사(都目政事)로 붙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공길의 말에 도목정사라고 명명한 연극은 관객들에게 웃음과 해학을 선사했다.

    그 다음은 대사성의 모은(母恩).

    즉 어머니의 은혜라는 제목의 연극이다.

    사실 앞전의 도목정사는 뭐랄까.

    음, 이런 연극에는 익숙지 않을 관객들을 적응시키는 단계였고 이 모은부터가 진짜였다고나 할까?

    나도 사실 도목정사보다는 이 모은에 중점을 맞췄다.

    도목정사는 백관들이 보기 불편한 장면들이 곳곳에 연출됐지만 모은은 아니거든.

    효(孝)라는 기가 막힌 소스가 잔뜩 들어간 작품인데다 사실 벼슬아치들이라고 모두 명문가 출생이거나, 밥 걱정 없이 공부만 한 건 아니라서 극에 몰입이 더 쉬울 거라 판단했었다.

    과연 내 판단대로였다.

    도목정사는 불편하게 보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 대사성의 모은에는 모두가 집중하고 있었다.

    도목정사는 내 머리에서 나온 거지만 이 모은은 아니다.

    GOD의 어머님께를 조선의 사정에 맞게 각색해서 연출했다.

    사실 GOD의 어머님께의 MV는 해외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었다.

    자장면이란 요소가 외국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한국적인 감성을 가진 음식임에도 그랬다.

    좌우지간.

    이 모은의 내용은 간단한 편이었다.

    가난한 집에 시집와 지아비를 먼저 떠나보낸 어머니.

    삼남매를 억척스럽게 키우셨지만 형편은 늘 어렵다.

    그 와중에 아직 어린 막내가 생일날 전을 먹고 싶다는 말에 어렵사리 부식 재료를 구해 전을 부쳐준다.

    물론 이 과정에서 머리카락을 잘라야 했고.

    그렇게 구한 전이지만 어머니는 전은 입에 넣지도 않고 물만 홀짝.

    배가 불러서 그렇다는 말에 주인공.

    그러니까, 어린 대사성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형제들과 다투면서 전을 먹는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어머니는 조용히 방을 나와 아궁이에 남은 찬밥을 긁어 드신다.

    그렇게 해가 지나가고, 어린 대사성은 열 두 살이 된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두각을 나타냈기 때문인지 고을에선 어린 대사성을 물심양면 돌봐줬고, 집안 살림도 조금 펴졌다.

    이제 좀 살 만하다고 느끼던 와중.

    어이없게도, 허무하게도, 이웃집 진사댁에 곡비(장례때 통곡을 해주던 일)를 하러 갔던 어머니가 도적들에게 비명횡사를 당하신다.

    어머니의 장례가 끝나고, 어린 대사성은 공부를 손에서 놔버린다.

    공부를 했던 것도 출세를 위해, 어머니를 위해서가 더 컸는데 어머니가 사라지니 할 이유를 못 느낀 것이다.

    그렇게 방황을 하던 어느 날.

    어머니가 꿈에 나오신다. 어머니는 꼭 등과(급제)해 주길 바랐고, 비록 꿈이지만 생생했던지라 어린 대사성은 그 날로 다시 공부를 시작한다.

    그로부터 4년 후.

    어린 대사성은 장원급제를 하면서 어사화를 어미의 봉분에 바친다.

    사실 21세기 기준에서 보면 뻔한 클리셰다.

    요샌 너무 뻔해서 쓰지도 않을 클리셰 말이다.

    하지만 원래 뻔한 클리셰가 사람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기 마련이고, 더구나 이런 전개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에겐 그 효과는 배가된다.

    지금처럼 말이다.

    “크흑.”

    울음바다라고 하기엔 어딘가 부족하지만, 모두들 울음을 참고 있는 모양새가 역력했다.

    그건 나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고······.

    힐끗.

    “크흐흑.”

    감상적인 형님도 마찬가지였다.

    앞전의 도목정사는 아주 세상이 떠나가라 웃어제끼던 형님이셨는데, 이번엔 목놓아 흐느끼신다.

    -어미의 은혜··· 인간의 효도에 출세만한 것이 없다더니 나 최승조는 불효가 막심하구나. 내 어머니, 나의 어머니! 아아! 어머니의 아들이 드디어 대사성이 되었습니다.

    나레이션의 말과 함께 연극이 끝이 났다.

    한참을 흐느끼던 형님은 연극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셨다.

    “어찌 박수가 들리지 않는단 말이냐!”

    형님의 외침에 근정전에는 박수 갈채가 쏟아져나왔다.

    ***

    뿌듯하다.

    내가 연출한 작품이 박수 갈채를 받는다니 이래서 사람들이 감독을 하나 보다.

    어머님의 생신 잔치는 공연 덕분인지 훈훈한 분위기 덕분인지 무탈하게 끝이 났다.

    물론 나는 연출자(?)의 한 사람으로서 뒷정리를 하기 위해 자리를 비울 수 밖에 없었지만 잠깐 뵌 어머니는 내 선물에 아주 만족하시는 모습이셨고, 형님은 뭐, 두말 할 나위도 없었다.

    “온몸이 찌릿하구나.”

    이게 바로 연극을 보시고 난 후 형님이 내리신 평이었다.

    이보다 더한 과찬이 있을까?

    어쨌든 뒷정리가 끝난 나는 강녕전을 찾았다.

    당연히 형님의 호출 때문이었다.

    “형님 뒷정리가 늦어져서 좀 늦었습니다. 불러 계시다고 들었는······.”

    내가 말을 채 맺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형님이 쪼르르 달려오신다. 그러고는 내 손을 마주 잡았다.

    “···왜 이러세요?”

    영문을 몰라 묻자 상기된 표정의 형님이 말했다.

    “내 일평생 이런 산대는 본 적도··· 아니, 들은 적도 없다.”

    쑥스럽고 다시 한 번 뿌듯하다.

    “공길 거사. 인사 올리게.”

    형님의 공치사에 어깨가 절로 으쓱거리지만 사실 이번 연극의 일등공신은 누가 뭐래도 공길 거사다.

    공길 거사를 데려온 건 그 때문이기도 하다.

    형님도 보고 싶어하신 것 같았고.

    “소인 공길이라고 하옵니다. 한낱 사당패를 이끌고 있는 우인에 불과한데 이처럼 전하를 알현하니 크나큰 광영이옵고······.”

    수백명 앞에서는 떨지도 않더니 여기선 공길 거사의 음성이 파르르 떨리고 있다.

    뭐, 긴장 할 만도 하지만.

    “과연 훌륭한 연기였도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내 너와 너의 패거리들에게는 큰 상을 내릴 것이니 기대해도 좋다.”

    공길 거사가 고개를 조아렸다.

    형님도 만족해하는 것 같고 일도 잘 풀려서 다행이다.

    나는 공길 거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나가 있으란 소리였다.

    내 눈짓을 받은 공길 거사가 종종걸음으로 물러나고 마침내 육안에서도 사라지자, 형님은 그나마 삼자 앞에서 지키던 체통을 던져버리셨다.

    방방 뛰는 모습이 꼭 크리스마스에 선물 받는 아이 같았다.

    “내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질 않는다. 네가 시와 문장을 사랑하는 것은 알았다만 어찌 산대에도 이리 능하단 말이냐?”

    “과찬이십니다.”

    “아니다. 물론 공길과 그 패거리의 연기가 일품이긴 했다만 내 듣자니 극본을 쓴 것이 진성이 너라 들었다.”

    “아니 뭐··· 굳이 말씀드리자면 제가 쓰긴 했죠. 하하.”

    “원래 민가에서는 사당패들이 이런 산대놀음(연극)을 하는 것이냐?”

    궁궐 외출이 잦은 형님이시지만 사실 외출이 잦다고 해서 서민들의 삶을 완전히 꿰뚫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외출도 제한적이지만 외출하면서 거치는 경로 자체도 제한적일 수 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저런 질문을 하신 것 같다만······.

    “아뇨. 보통은 저런 산대는 없습니다.”

    “역시. 아! 내 너무 오래 세워뒀구나. 어서 앉거라.”

    형님이 권하는 자리에 가서 앉자 형님은 이번 연극의 감상을 잔뜩 토해내셨다.

    손발이 오글거릴 정도의 후기(?)였지만 그만큼 도목정사와 대사성의 모은이 신선했다는 뜻이겠지.

    “···그래서 내 이걸 보면서 계속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다.”

    “말씀하십시오.”

    “이런 걸 나만 볼 순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예?”

    “아니, 내가 말이 헛나왔구나. 그래, 뭐라고나 할까··· 아! 이런 공연을 백성들도 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면 맞겠구나.”

    백성들도?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팔도의 백성 8할은 입에 풀칠하기도 버거워하니 문화란 것이 있겠더냐?”

    잠시 생각하던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 그래서 참수형이 벌어지거나 형벌이 집행되면 너도 나도 모여드는 것이다.

    그만큼 자극적인 구경거리가 없으니까.

    “없죠.”

    “하지만 생각해보면 문화란 곧 교화의 일종이다.”

    문화=교화.

    해석이 이렇게 될 수 있나 의문이 잠깐 들었지만 형님의 말씀은 모두 맞다.

    형님이 문화가 교화라면 문화는 교화인 것이다.

    “계속하십쇼.”

    “내 늘 의문을 갖는 것이 있었다. 사대부들은 백성을 성현의 말씀으로 교화시키고 우리 조선을 군자의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고 외쳐대지만 사실상 글을 아는 백성이 얼마나 되겠으며 책을 구비하고 성현의 말씀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되겠더냐?”

    “열에 여덟이나 되면 다행이겠죠?”

    “맞다! 열에 여덟이나 되면 다행인 수준이다. 하지만 이번 공연을 보아라. 얼마나 교훈적이고 또한 재미가 있단 말이냐. 이걸 만백성들이 보게 하고 싶구나.”

    “하지만 그러려면 예산도 예산이지만 그걸 관할 할 수 있는 관청이 있어야 할 텐데요?”

    내 의문을 기다렸다는 듯 형님이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런 산대들을 총괄할 관청을 신설하면 어떻겠더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 오해는 하지마라.

    뭔가 편견이 있다거나 관청 신설에 부정적인 건 아니니까.

    다만 벌써부터 눈에 선명하다.

    광화문 앞에 진을 친 선비들이 말이다.

    “갑자기요? 갑자기 그러면 반대가 심할 것 같은데······.”

    역시나 의문을 표하는 내 말에 형님이 씨익 웃는다. 그러고는 뜬금없는 사관을 흘겼다.

    “사관은 나가있거라.”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당한(?) 사관이 사초를 쓰다말고 화들짝 놀란다.

    “하오나······.”

    “나가있으라.”

    “···”

    아주 올곧은 사관은 아닌 모양이다.

    눈을 부라리는 형님에 사관이 곧 지필묵을 챙겨들고 조심스레 침소를 빠져나간다.

    “네 상소 하나만 올려 줄 수 있겠느냐?”

    “상소요? 어렵진 않은데 무슨 내용으로···?”

    “그러니까 말이다······.”

    속닥거리는 형님에 나는 자연스럽게 몸을 기울였다.

    ***

    「···하므로 세종대왕께서 박연(朴堧)을 시켜 악학을 흥하게 한 것입니다. 지금 일의 전후를 헤아려 살펴본다면 산대도감은 있지만 정리가 안 되어 중구난방인데다 천인으로 불리니 하려는 사람은 없어 산대를 할 줄 아는 사람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생각해본다면 산대가 무엇입니까? 나라의 경사에 궁중에서 벌이는 뜻도 있지만 대국의 사신을 맞을 때도 이 산대로서 극진히 접대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시간이 흘러 산대를 할 줄 아는 이가 없어진다면 대국의 사신이 오더라도 산대로서 예를 다할 수 없을 터이니 중화를 겉으로만 받들고 있는 모습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는 황제께 불충이니 바라건대 예흥청(藝興廳)을 설치하시어 세종대왕께서 박연에게 시켰던 것처럼 조선 팔도의 산대를 정리케 하소서.」

    “대사헌의 상소다.”

    편전.

    승정원 아전들이 필사한 진성의 상소문을 읽어본 대소신료들은 난감함 때문인지 말문을 열지 못 했다.

    “하오나······.”

    반박이 튀어나오려고 하자 융은 상선에게 눈짓했다.

    눈짓을 받은 상선이 내관들과 함께 또 다른 필사본을 돌렸다.

    “이건 진성이 별도로 내게 올린 서간이다.”

    「···하여 제가 세종대왕 시절의 일을 빗대 청한 것은 불충이지만 이런 논리가 아니라면 대신들이 수긍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도 보셨겠지만 어제 어마마마께서 얼마나 기뻐하셨습니까? 저는 어마마마께서 그리 크게 웃고 즐긴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이에 한 사람의 종친과 사헌부의 장관이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의 아들로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됐으니 그게 바로 산대에 관한 일입니다. 지금 산대도감은 있지만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산대는 특별한 날에만 공연이 됩니다. 하지만 예흥청이 설치된다면 어마마마께서도 필요에 의해 산대를 구경하실 수 있을 테고 또한 이 예흥청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을 교화 할 수도 있을 테니 어찌 무익한 일이겠습니까? 비록 아우의 상소와 이 서간이 철없을진 몰라도 효(孝)가 과연 어디에 있는지 통찰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참으로 기특하지 않은가?”

    “···”

    “진성이 효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이처럼 지극하니 그 마음을 아니 들어준다면 나 또한 임금 이전에 한 사람의 아들로서 어미께 불효를 저지르는 일이니 과연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다소 어이가 없기 때문인지 편전이 쥐죽은 듯 고요할 즈음.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 하였으니 이 말에 어찌 효가 빠지겠사옵니까? 아울러 대비마마만을 위한 기관이 아니라 온백성을 위한 것이기도 하니 신들이 어찌 반대할 수 있겠나이까? 실로 아름다운 모습이라 할 수 있으니 뜻대로 하시옵소서.”

    좌의정으로 영전한 임사홍이 선수를 치고 나오자, 그 다음은 홍문관 대제학으로 영전한 김감이었다.

    “좌상의 말이 참으로 지당하옵니다. 비록 대사헌이 옛날 일을 들먹이면서, 선대왕의 업적을 빗대어 지금의 일을 처리하고자 함은 책잡을 수 있겠습니다만 효를 위한 일이니 어찌 불충이라 하겠사옵니까? 더욱이 전하께서도 바라시는 마음이 큰 듯 하니 이를 반대하는 것은 스스로 불효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거니와 불충함을 자인하는 꼴이니 신들이 어찌 반대하겠나이까. 청컨대 뜻대로 하시옵소서.”

    김감이 쐐기를 박았다.

    이걸 반대하면 너 불충한 신하이면서도 불효자임.

    이라는 프레임(?)이었다.

    그리고 대소신료들이 어버버하던 사이.

    “하면 경들이 모두 찬동한 것으로 알고 내 진행하도록 하겠다.”

    탕탕!

    융의 의사봉이 두들겨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