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24화>
***
형님을 뵈러 강녕전을 찾았지만, 막상 도착한 강녕전에는 형님이 안 계셨다.
편전에 계셨다.
불빛하나 들어오지 않는 편전에, 형님은 혼자 고요를 즐기고 있는 듯 어좌에 가만히 앉아만 계셨다.
사실 어좌에 앉아있는 건 확실하지 않다.
실루엣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어쨌든 나는 그런 형님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형님의 사색이 끝나길 기다렸다.
형님이 사색이 끝난 건 정확하진 않지만 30분 뒤쯤이었다.
“상선.”
“예, 전하.”
“내 재상들에게 전할 말이 있으니 속히 패초를 보내도록 하라.”
“그리하겠사옵니다. 하옵고 일식경 전부터 대사헌께서 기다리고 계셨사옵니다.”
“진성이 말이냐? 속히 들여라.”
안으로 들어가자 어딘가 침울해보이던 표정의 형님이 애써 활짝 웃는다.
“이게 누구신가. 대사헌 아우님 아니신가?”
저번에는 낯간지럽게 왜 그러시냐고 불평(?)을 했었지만 이 농을 받아주면 형님의 고민이 조금은 가벼워질 것 같아 나도 방긋 웃고 대꾸했다.
“예, 대사헌 아우 형님께 아뢸 말씀이 있어 입궐했습니다.”
피식거린 형님이 말했다.
“내 본의 아니게 생각할 것이 있어 대신(大臣)을 기다리게 했구나.”
나는 굳이 무슨 생각인지는 여쭙지 않았다.
지난 2년 형님을 봐왔다.
형님은 굳이 묻지 않아도 하고 싶은 말이 있거나 상담(?) 받고 싶은 내용이 있으면 알아서 말씀하셨다.
지금도 그러신다.
“모든 지방관들이 김진조처럼 비리를 저지르진 않겠지만 무릇 미꾸라지 한두마리만 들어가도 청수가 흐려지곤 하니 내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음.”
“게다가 삭녕이 북쪽에 치우쳐져 있다곤 하지만 경기의 속현에 속하는데다 서울과 지척이라면 지척인 거리인데 이런 사건이 일어났으니 변방은 오죽할까 싶구나.”
애석하게도 이번 일은 들어드리는 일 밖엔 못 하겠다.
21세기의 행정 시스템으로도 공직자들의 비리가 발견되곤 하는데 하물며 여긴 16세기다.
서울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수령들의 감투는 거의 왕과 같아진다.
난 이걸 내이포로 여행가는 길에 뒤늦게 깨달았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수령들의 권한이 막대한··· 뭐, 그런 느낌적인 느낌을 받았거든.
“그래, 문초는?”
“아. 죄인이 계속 진술을 거부했사옵니다.”
순간 형님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형님은 표정이 일그러진 채로 어좌에 두 손을 올렸다.
당장이라도 금부로 달려갈 것처럼 말이다.
“완악하기 짝이 없는 놈이로다.”
“예. 신사적으로······.”
또다.
진짜 이놈의 말투는 나아질만 하면 툭툭 지금과 어울리지 않는 말들이 튀어나온다.
“아니, 사람 대우 해주면서 문초를 하려니 도무지 진행이 안 되더군요. 묻는 말에 대답은 안 하고 횡설수설만 하면서 본인은 죄가 없다 말하고만 있었습니다.”
“이런 쳐죽일 놈이 있나! 어찌 고신은 가하지 않은 것이냐?”
“어리석었죠, 뭐. 제가 사람 대우 하면 사람처럼은 알아듣고, 말하겠구나 싶었는데 오산이었습니다.”
“왕명을 거역한 대역죄인이다. 이미 금수나 다름이 없는 자이니 과연 그럴만도 하지.”
“그래도 안처직에게 고신을 맡기고 오는 길이니 곧 입을 열겁니다.”
“으음··· 다행이구나. 아, 한데 그걸 전하기 위해 찾은 건 아닐 테고, 무슨 할 말이 있는 것이냐?”
역시.
이제 척하면 척이고 탁하면 탁이시네.
“이것좀 봐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준비해온 문건들을 형님께 전해드렸다.
무슨 문건이냐고?
일단 심호흡부터 하자.
후··· 하. 후··· 하.
이 문건은 최 행대가 추가적으로 보내온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증언과 증거를 계속해서 확보하던 와중에, 김진조의 여죄를 포착했단다.
그리고 그 여죄는······.
“이런 천하에 찢어 죽일!”
형님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셨다.
“내 이놈의 상판을 직접보고 놈의 여죄를 추궁해야겠다. 상선!”
“예, 전하.”
“재상들은 편전이 아니라 금부로 오라 전하라!”
“알겠사옵니다.”
“가자, 진성아!”
“아, 예.”
***
“진작 토설할 것이지. 대사헌께 토설했으면 이런 욕은 안 당했을 것이 아니오?”
“으으으··· 으으······.”
반병신이 된 김진조에 안처직은 비릿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솜씨 발휘(?)를 했다.
사헌부로 자리를 옮겨가면서 이따금 의금부에 있던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었는데, 덕분에 그때의 추억들이 되살아난 기분이다.
“나, 나는··· 나는, 어찌 되는 것이오······.”
축 늘어진 채 본인의 암흑빛 미래를 걱정하는 김진조에 실소가 새어나왔다.
“왜? 어명을 거역할 땐 아무 생각 없더니, 이제와서 걱정이 좀 되는 모양이지?”
“으으··· 사, 살려주시오··· 제발, 살려주시오······.”
생을 갈구하는 사람의 모습은 언제나 비참하고 안쓰럽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처직은 손을 뻗어가며 목숨을 구걸하는 김진조를 경멸에 찬 눈과 함께 뿌리쳤다.
“어디 감히 더러운 손을··· 뒤질 자리를 스스로 깐 건 바로 그대다. 전하의 왕업에 보탬이 되긴 커녕 누가 되길 스스로 자초하였으니 아직까지 목숨줄이 붙어 있는 것만 해도 백골난망한 일이거늘, 어디 감히··· 퉤. 여봐라.”
“예!”
“이 죄인 놈은 지금 당장 하옥시키고, 또한 이 년놈들의 처자가 형조에 구금되어 있다 하니 당장······.”
“주상 전하 납시오!”
때아닌 가갈에 처직은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휘적휘적 호쾌한 걸음걸이로 걸어오는 전하가 보였다.
화들짝 놀란 처직은 고개를 조아렸다.
“전하.”
“죄인 김진조는 어디 있는가!”
처직의 눈이 자연스럽게 형틀의 죄인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퍽!
“억!”
“전하!”
임금이 주먹질을 하는 광경은 놀랍다는 말로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의 장관이었다.
아무리 분노 하셔도 체통상 주먹질은 삼갔던(?) 전하시니 말이다.
그런데 이건 뭐 복날 개 패듯 김진조를 패고 계셨다.
깜짝 놀란 남녀궁인들이 우르르 몰려왔고, 임금으로서는 체통이 떨어질 돌발 행동에 금군들은 누가 볼까 그 주위를 겹겹이 에워싸며 인의 장막을 쳤다.
“네놈이 날 우습게 알고 왕명을 거역한 것은 내 참을 수 있다. 한데 구휼미를 착복한 데 모자라 내 백성을 노비로 삼아?”
퍽퍽!
“으억. 으······.”
김진조가 몸을 부르르 떨면서 축 늘어졌다.
의식을 잃은 게 분명했지만 융은 분노가 풀리지 않았다.
이놈은 악귀였다. 악귀가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럴 수 없는 일이었다.
2년 전.
삭녕군에 흉년이 들어 조정에서 구휼미를 보낸 일이 있었다.
한데 최 행대의 보고서에 의하면 그걸 착복했단다.
그걸로도 모자라 한 톨 쌀로 백성들을 겁박해 자매(스스로 몸을 팖)를 서게 했단다.
융은 늘어진 김진조의 상투를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금군에게 손을 내뻗었다.
깜짝 놀란 금군이 어리둥절 서있자, 융은 금군의 환도를 빼들었다.
“저, 전하!”
시기적절하게 패초를 받고 금부에 들던 재상들이, 죄인의 목을 칠까 싶어 달려들었지만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융은 다만 죄인의 상투를 잘라냈다.
“이놈은 사람 새끼가 아니라 금수 새끼니 이마에 금수 자(字)를 새겨서 문초하고, 금수에게 봉분은 사치니 이놈의 애비, 애미와 조상놈들의 묘란 묘는 모두 파헤쳐 참시하라!”
그렇게 말한 융은 희번득 눈을 돌렸다.
“경들은 모두 따라 들어오라.”
***
쾅쾅!
의금부 대청.
대청에 마련된 자리에 앉은 융은 팔걸이를 거세게 내려쳤다.
손바닥이 얼얼했지만 이깟 통증 쯤은 삭녕군 백성들이 겪었을 고초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터였다.
“대관절 이게 말이나 되는가 말이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어인 영문이시온지······.”
버럭 소리치려던 융은 입을 다물었다.
대신 진성에게 고개를 돌렸다.
“민망하여 입이 떨어지질 않는구나. 대사헌이 말하라.”
“그게··· 흠. 김진조의 여죄 정황이 포착됐습니다.”
“여죄 말입니까? 어떤 여죄이온지요?”
“2년 전에 조정에서 보내준 구휼미의 7할을 착복하고, 그걸 곧대로 백성들에게 환곡해줬다고 합니다. 곡식을 빌려간 이들이 돈을 갚지 못 하자 자매를 서게 만들었고, 그렇게 노비로 삼은 이들이 아홉이랍니다.”
“허. 어찌 그런 참람한 짓을······.”
“사람 탈을 쓴 금수가 아닙니까?”
“금수도 저리는 못 하지요.”
곳곳에서 김진조에 대한 원성이 터져나왔다.
“경들에게 묻는다. 법이란 무엇인가?”
“통치의 안정을 위한 최소한의 도구이옵니다.”
김굉필의 말에 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사간의 말이 지극히 옳다. 하지만 과연 금수에게도 사람의 법이 통용되겠는가?”
“···”
“내 비록 학문이 뛰어나진 못 하지만 법이란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이지 금수에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 그리고 김진조는 경들의 말대로 금수가 따로 없는 자이다. 이 금수만도 못 한 것에게 어떤 벌을 내리면 좋겠는가?”
“김진조가 비록 사람의 탈을 쓰고 금수의 짓을 벌였다곤 하지만 어떤 형벌로 사람과 금수를 구분 할 수 있겠사옵니까? 지금 김진조의 가장 큰 죄는 어명을 거역한 일이니 대역죄로 그 목을 치심이 온당한 줄로 아뢰옵나이다.”
좌의정 임사홍이었다.
“다른 의견은?”
“이전처럼 팽형을 가하긴 무리오나 명예형(名譽刑)으로 팽형을 집행함이 어떻겠사옵니까?”
이번엔 홍문관 전한 이행이었다.
“팽형을?”
“예. 다만 명예형으로 팽형을 집행하는 것은 대역죄를 벌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탐관에게 집행하는 것이 상례이니 팽형을 집행한 연후 참하여 본으로 삼는 것이 온당할 듯 하옵니다.”
“음.”
융은 침음을 흘렸다.
사실 이행의 말대로 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김진조는 왕명을 거역했고 탐관으로서 백성을 착취했다.
단순히 법만 적용하자면 대역죄는 극형으로, 장오의 죄는 팽형으로 다스리는 것이 맞다.
하지만 마음에 차지 않는다.
김진조는 구휼미를 착복했다.
제 고을 백성들이 아사하건 말건, 굶주리건 말건 구휼미를 착복했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제놈은 고깃국에 허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을 배때지에 쑤셔박았을 게 분명하다.
호사란 호사는 다 누린 놈의 목을 쳐서, 고통 없이 가게 하고 싶진 않다.
팽형도 마찬가지다.
사실 명예형의 팽형은 지금 상황에선 의미가 없다.
명예형의 팽형이 뭔가.
팽형을 집행해 인격을 말살하고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대역죄를 적용해 참하게 된다면 팽형을 집행한 의미가 무색해지는 것이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전하.”
어떤 벌을 내려야할지 고민하던 찰나.
문득 들려온 익숙한 음성에 융은 고개를 들었다.
진성대군이었다.
진성대군은 갑자기 시선이 쏠리는 게 부담스러웠는지 허둥거리고 있었다.
“아, 신 대사헌 이역 아뢰옵나이다.”
피식거린 융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보라.”
“송구하오나 김진조를 참형에 처할 순 없사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삭녕의 백성들은 수령 하나 잘못 만난 죄로 고통을 겪었사옵니다. 하온데 그 말로가 참형이라니요. 그런 무책임하고 편한 죽음이 세상 또 어디에 있겠사옵니까?”
그래, 저거다.
진성의 말이 딱 본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였다.
“하면, 하면 어찌 벌해야 삭녕군 백성들의 원통함도 씻어주고, 김진조도 벌하며, 팔도의 수령들에게 본이 될 수 있겠는가?”
“또 송구하고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전하께선 역지사지의 뜻을 아시옵니까?”
“역지사지?”
단번에 역지사지(易地思之)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라는 뜻이 아니냐?”
“신은 달리 알고 있사옵니다.”
역지사지의 뜻이 그것 말고도 또 있었던가?
고개를 갸웃거린 융에 진성이 말했다.
“무엇인가?”
“그전에, 어전 앞에서 무례를 범함을 용서해주시옵소서.”
융은 어리둥절해 한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 그럼··· 역.”
“역?”
“역으로.”
“지?”
“지랄해줘야.”
“허. 사?”
“사람들이.”
“지.”
“지 일인줄 안다. 보다시피 같은 말이나 의미는 다르옵니다.”
“허, 과연 그렇구나.”
“사람이란 본시 아둔한 바가 있어, 타인의 처지를 헤아리지 못 하옵니다. 하물며 금수만도 못 한 김진조가 어찌 알겠사옵니까?”
실소가 터져나왔다.
과연 진성이 다운 발상이었다.
역지사지가 그 역지사지였다니 말이다.
“하면 어찌 하는 것이 좋겠는고?”
“역지사지. 역으로 지랄해줘야 사람들이 제 일인 줄 알 것이오니 김진조 역시 마찬가지이옵니다. 김진조가 대역죄를 저질렀으니 그 재산은 모두 적몰하시옵고, 또한 불법으로 자매를 서게 만든 피해자는 모두 아홉이니, 그 아홉도 모두 방면하시오며, 다만 방면한 피해자의 집에 기간을 정해 노비로 살게 하시옵소서.”
“노, 노비로?”
“예. 먼저 팽형을 집행한 연후 보름이면 보름, 달포면 달포. 아홉 사람의 집에 돌아가면서 노비로 살게 하시옵고 기간을 다 채우면 참하여 본으로 삼으시옵소서. ”
피해자의 집에 노비로 살게 하라니··· 난생듣도 보도 못 한 형벌이었지만 마음에 드는 형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