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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23화 (123/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23화>

    ***

    삭녕군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들은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본의는 아닐지라도 어쨌건 사헌부의 대사헌으로 있게 된 나였다.

    사헌부는 21세기로 치면 정확하진 않아도 검찰쯤 되는 기관이고, 대사헌이면 난 검찰총장의 직급에 있다.

    그런데 고작 쉬는 날인데 꼭 가야 되냐는 투정이나 부리다니··· 몸에서 나는 땀내 때문에 좀 씻고 가고 싶어 했다니··· 미디어 매체에 등장하던 고위 공직자들의 태도 나의 태도가 얼마나 다른 건가 싶었다.

    뭐,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드는 거고 분노도 함께 치밀었다.

    감격의 분노다.

    나라 꼬라지가 너무도 잘 돌아가서.

    “그럼 최 행대(사헌부에서 사건 지역으로 보내던 감찰원)는 어떻게 하고 있답니까?”

    이 사건은 엄밀히 말하면 사헌부에서 파헤친 사건이다.

    삭녕군수의 악행이 사헌부에 접수가 됐다→ 내가 부임하기 전, 사헌부 장령 이가신이 행대를 파견했다→ 조사 결과 삭녕군수의 악행이 사실로 드러났다.

    다만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사실 그럴 리는 전혀 없겠지만 피의자가 도주할 우려도 있었고 증거를 인멸할 가능성도 있으니까.

    “증거와 증언을 수집하고 있다 하옵니다. 다만 정황상 증언이 속출하고 있으니 증거라고 할 것도 따로 구할 게 없는지라 곧바로 공론화 시킴이 좋겠다는 언질을 보내왔사옵니다.”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합당할 듯 하시옵니까?”

    안처직의 질문이었다.

    그의 질문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일단··· 삭녕군수 김진조가 부임한 게 언제적 일입니까?”

    잠시 장부를 뒤적거리던 이가신이 말했다.

    “올 2월의 일입니다.”

    “천거한 사람은요?”

    “따로 천거한 이는 없었사옵고 다만 전하께서 수령들을 제수하실 적에 이조에 하교하셔서, 그때 물망에 올랐던 자이옵니다.”

    “서경단자좀 볼 수 있겠습니까?

    “서경단자는 어찌······.”

    갑자기 찾는 서경단자에 이가신이 허둥거렸다.

    아, 서경단자는 일반 회사로 치면 이력서에 가깝다.

    아니, 이력서랑은 의미가 좀 다르려나?

    서경은 그 자리에 적합한지 여부를 가리는 심사라고 보면 됐고, 서경단자는 본인부터 조상의 가계를 기록해 제출한 일종의 등본이었다.

    군사독재 정권 시절 공직자를 뽑을 때, 그 가족들 중에 빨치산이나 공산주의자가 있는지 없는지 여부를 가렸던 것처럼 일종의 신원 확인을 위한 등본(?)이었다.

    “확인할 게 있어서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허둥거리던 이가신이 곧 김진조의 서경단자를 가져왔다.

    친가쪽부터 외가쪽까지 그의 조상들 이름이 기록돼 있었다.

    단순히 학생(學生)이라고 기재돼 있는 경우도 있었고, 사간원 헌납이라고 기재된 경우도 있었다.

    집안에서 정승이나 재상이 난 명문가는 아니지만, 일단 벼슬을 지낸 사람이 두어명은 있어 보이니 한미한 가문은 절대 아닌 셈이었다.

    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타인이 강요 할 순 없다는 마인드를 갖고 있다.

    부자의 기부는 진심에서 우러나는 것이지, 타인의 시선에 의해 발생하는 건 옳지 않은 일이라고 보는 것이다.

    단.

    행동거지 정도는 신중해야 한다고 본다.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하지만 김진조의 경우는 행동거지가 가볍다 못 해 천박하기 짝이 없었다.

    본인의 지위를 이용해서 타인을 억압한 건 물론이고, 법적으로 허용된 원고를 강제로 구금했다.

    이런 사람이 사회지도층의 일원중 하나라니, 한심할 지경이다.

    “서경은 언제 된 겁니까. 2월에 부임했을 테니 1월?”

    “아, 예. 아마 1월쯤 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마가 아니라 정확히 언제입니까?”

    “1월이 확실할 것이옵니다.”

    “심사에 참여한 건 누굽니까? 사간원은 됐고 사헌부에서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이가신이 곧 입을 열었다.

    “우리 사헌부에서는 소인과 지평 이성동과 감찰 최두종, 조호수가 서경을 진행할 때 각각 수결(서명)을 했사옵니다. 한데 그건 어찌 하문하시는지······.”

    이가신의 질문에 나는 입을 오물거리다 곧 닫았다.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이가신과 이성동 그리고 최두종과 조호수에게 하려던 할 말은 당신들이 서경한 사람들이 죄를 지었으니 대죄를 청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래도 되나 싶은 고민이 순간 들어 입을 다물었다.

    따지고 보면 사헌부에 서경권이 있다곤 하지만 아주 강력한 수단은 아니다.

    심사에 참여한 관원들이 모두 불가를 외쳤다고 해도, 결국 수직자가 제수되는 일은 비일비재했으니까.

    그래서 망설이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사람들은 관례대로, 그래서 형식적으로 서경을 집행했을 것 같아서.

    고민은 길었지만 답을 못 구한 건 아니었다.

    나직이 한숨을 내쉰 나는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이 듣기 서운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편히 말씀하십시오.”

    “지금 사헌부에서 서경한 인물이 죄를 짓고 행대에게 발각됐습니다. 그것도 보통 죄가 아닙니다. 죄지은 김진조는 본인의 죄를 알지 모르겠지만, 여러분들은 아시지 않습니까. 김진조는 왕명을 거역했습니다.”

    이런 걸로 무슨 왕명을 거역했다고 하나 싶을 수도 있겠는데··· 음.

    왕명 거역이 맞다.

    부민고소금지법을 경기도 일대에 한해서 폐지한다는 포고가 이미 떨어졌고, 이에 따른 공문도 각 군현에 내려간 지 오래였을 테니까.

    김진조가 그 공문을 확인 못 했을 리가 없다.

    그런데 폐지된 부민고소금지법으로 고소인을 구금하고 고문까지 가했으니······.

    “···그렇지요.”

    “왕명을 거역한 인물이 사헌부의 서경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여러분들이 거기에 수결을 했구요. 저는 이에 따른 책임을 여러분들이 지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오나 너무 심한 처사가 아닐는지······.”

    안처직이었다.

    “과한 처사라서 강요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탁인 거죠.”

    내 말에 제좌청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이가신이었다.

    그는 활짝 웃어보였다.

    “대감의 말이 일리가 있사옵니다. 소인들의 책임이었으니 그 책임을 지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옵니다. 깨우쳐주셨으니 민망하고도 감사한 일이옵니다. 다만 어찌 죄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좋을는지요?”

    “대죄를 청하지요.”

    “대죄 말입니까?”

    “사헌부의 서경을 통과한 인물이 죄를 지은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긴 하지만 이걸로 사직까지 가기에는 과한 감이 분명 있습니다. 전하께 죄를 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처분은 전하께 맡기시구요.”

    곰곰이 생각하던 이가신이 곧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사옵니다.”

    “김진조는 어찌 해야겠사옵니까?”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장리도 보통 장리가 아닌데다 대감의 말씀처럼 왕명을 거역한 인사이니 함부로 둘 수가 없겠사옵니다. 마땅히 삭직하고 자손금고(자손의 출사를 막음)를 주청하는 것이 어떻겠는지요?”

    “이견은 없습니까?”

    이견이 없는지 모두 고개를 끄덕거린다.

    결론이 도출됐다.

    의견을 조율한 우리는 곧바로 성상소(사헌부·사간원의 공무를 임금에게 아뢰거나 반대로, 두 기관과 관련된 공무를 임금이 하교하던 곳)에 사람을 보냈다.

    ***

    흔히 어이가 없는 상황을 두고 요새는 어이가 없다 안 하고, 어이 털린다고 하던가?

    지금 내가 그래, 어이 털린다.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건가?”

    여긴 의금부다.

    대사헌인 내가 의금부에 왜 있냐고?

    죄인 심문을 위해서.

    성상소에 올린 우리의 소는 곧바로 받아들여졌다.

    형님은 그 날 의금부를 통해 죄인 김진조를 압송하라 령을 내리셨고, 김진조는 바로 이틀 뒤인 오늘 서울에 압송이 됐다.

    그거랑 의금부에 있는 게 무슨 상관이 있는 거냐면, 이 죄인 놈의 심문을 내가 맡게됐거든.

    이유는 나도 모른다.

    형님이 내가 제격일 것 같다고 날 시키셨는데··· 거절할 걸 그랬다.

    고구마를 한 열댓개 먹으면 이럴까 싶을 정도로 어이가 없고 답답하다.

    “저, 정말로 몰랐사옵니다. 믿어주시옵소서, 대감!”

    “야 김진조.”

    “···예.”

    “당신 악어의 눈물이라고 알아?”

    “아, 악어··· 모, 모르겠사옵니다.”

    도리질을 치는 김진조에 나는 그의 어깨를 부여잡고 마사지하듯 힘주어 눌렀다.

    “변명을 할 거면 좀 그럴싸하게 하던가. 사태 파악 안 되지?”

    “하오나··· 하오나 부민이 어찌 수령을 고소 할 수 있겠사옵니까. 비록 어명이 떨어지긴 했사오나 이는······.”

    “대단하시네.”

    얼굴에 이렇게 철판을 깔았으니 탐관오리 짓도 해먹을 수 있는 거겠지만, 정말 대단하다.

    아주 스고이 해.

    “이미 전하께서 당신 고신해도 좋다는 어명 내리셨는데내가 왜 당신 고신을 안 하는 것 같애? 당신이 누명을 쓴 것 같아서? 아니면 당신 혐의가 가벼워서?”

    “···”

    “내 손에 피 묻히기 싫어서 그래. 근데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내가 어떻게 하겠어?”

    지금도 당장 고신하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지만, 정말로 내 손에 피 묻히기가 싫어서 그렇다.

    이런 새끼 때문에 피 묻히는 건 아깝달까?

    “자, 처음부터 다시 묻는다.”

    “···”

    “최 행대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고소인은 당신이 첩 때문에 부민들을 농번기에 부려 먹었다고 하는데··· 왜 그랬어?”

    제아무리 패악무도한 탐관오리도 끝장을 보려고 하지 않는 이상은 농번기에 부민들을 함부로 동원하지 않는다.

    적당히 흡혈해야 부민들이 고분고분 따르기라도 하지, 있는 피 없는 피 다 수혈해가려고 하면 누가 참고 따르나?

    이건 김진조의 대가리가 데코란 뜻이기도 하다.

    “···”

    “후··· 끝까지 묵비권이네. 하나만 말씀드릴게. 지금 전하께서 당신 신문시킨 게 어째서 그러신 것 같아? 형식이야, 형식. 엊그제 편전에서 난리난 거 모르지? 아주 그냥 당장 잡아다 모가지를 치네 마네 하는 거··· 대신들이 막아서 그나마 당신 모가지 달린 채로 여기 앉아 있을 수 있는 거라고. 그런데 끝까지 입다물고 있는다?”

    “···”

    “나야 일 편하게 해서 좋지.”

    내 말은 절대 거짓이 아니다.

    엊그제 정말 편전에서 난리가 났었다.

    난리가 난 정도가 아니었다. 아예 펄펄 뛰셨다.

    형님의 입장에선 사실 빡칠만한 일이었다.

    부민고소금지법을 시범적으로나마 폐지한 건, 선정을 베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뭐든 손발이 맞아야 선정을 베풀든 말든 하지, 부민고소금지 폐지를 포고한 지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탐관오리 한 놈이 엉뚱한 곳에 스윙질을 하고 있었다.

    빡치지 않고 버틸 재간이 있을까?

    근데 나도 슬슬 한계가 오는 것 같다.

    참는 것도 정도가 있는 건데 한시진 참았으면 많이 참은 거잖아?

    “장령.”

    “예, 대감!”

    “장령이 솜씨 발휘좀 해야겠습니다.”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죄인의 입을 열게 만드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습지요. 기필코 죄인의 막힌 입을 열도록 하겠나이다.”

    고개를 끄덕거린 나는 잊고 있었던 게 기억났다.

    “아, 내가 장령을 소개 안 했네. 지금은 장령으로 계시고, 바로 얼마 전까진 금부에 있었는데 들어보셨을라나? 안처직이라고.”

    사실 우리 안처직 씨의 악명(?)은 자자한 편이다.

    금부도사로 몇 년간 있었고, 그 몇 년 사이에 온갖 사건들의 실무를 맡았으니까.

    이번에 내가 난신이랍시고 재상들의 담벼락을 넘었을 때도 함께 했으니 솔직히 명성 자체만 보면 나보다 더할지도 모른다.

    삭녕 촌구석(?) 수령질을 해먹던 김진조도 익히 들어본 얼굴인지 과연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어갔다.

    그리고 내가 미련없이 등을 돌릴 즈음.

    “부, 불겠사옵니다! 아니, 다··· 다 말씀드리겠사옵니다!”

    “응, 늦었어.”

    “대, 대감! 대감!”

    “장령. 그럼 부탁합니다. 저는 강녕전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예, 걱정마시고 다녀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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