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122화 (122/365)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22화>

***

“아! 기억났다.”

사람은 사소한 키워드에서 잊혀진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공길.

어딘가 낯이 익은 이름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저게 색시여 총각이여?”

아까 아찔한 외줄을 타던 남자.

탈을 썼지만 어딘가 재수없게 미남자의 포스가 뿜어져 나온다던 그 남자 말이다.

그 남자는 공연 내내 탈을 쓰고 있다가, 마지막 공연이 끝나자 가면을 벗었다.

관중에 대한 예의 차원인 것 같았는데, 예의고 나발이고.

가면을 벗자마자 예상대로 잘 생겼다라고는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의 미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관중들도 그 미색이라 해야할지에 대한 외모에 수군거릴 정도였다.

그리고 난 이걸 보고 잊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영화 《왕의 남자》의 공길을 말이다.

낯익은 이름이라고 생각했던 공길이란 이름은, 내가 본 영화에 이준기 분(扮)했던 그 공길이었다.

아, 물론 동명이인인지 영화에 나왔던 그 공길이 저 공길이 맞는지 확신은 못 한다.

막말로 그 영화, 실화를 바탕으로 한 건지, 시나리오 작가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건지 조차 모르니까.

다만 확실한 건.

‘저거다.’

지금의 나에게 저 미남자가 영화 《왕의 남자》에 나온 공길인지 그저, 동명이인에 불과한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내게 중요한 건 어마마마의 생신 선물(?)이다.

사람을 생신 선물에 빗대니 좀 이상한가?

그래, 어마마마께 생신 선물로 보여드릴 공연으로 정정하자.

딱 이거다, 라는 확신이 공길패의 공연을 보면서 짜릿한 전율과 함께 들었다.

어마마마께서 좋아하실지는 미지수지만, 분명 색다른 선물은 될 것 같았다.

나는 뭐에 홀린 것처럼 공연이 끝나고 장비를 치우던 공길패에 다가갔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아, 선비님. 감상비는 저쪽에······.”

예의 약팔이였다.

사당패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매춘이 주업인 곳과 공연을 보여주고 쌀과 같은 재물을 걷는 걸립패.

공길패는 후자 같았다.

내가 공연을 보고 감상비(?)를 내러 온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귀찮은 사람 쫓는데는 돈 만한 게 없다.

다이아 수저로 살아보니 알겠더라.

“한 20석쯤 내려고 하는데 저쪽에 낼 순 없잖습니까.”

“예? 2, 20석이나 말입니까요?”

나는 공길이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만한 값은 했으니까.”

“아··· 그러면 또 얘기가 달라집지요. 이쪽으로 오시면 소인이 안내를······.”

“아니, 저자를 좀 보고 싶은데.”

“공길 거사(사당패의 구성원들을 점잖게 이르던 말) 말입니까요?”

“저자가 공길이가 맞는 거요?”

“아··· 그러믄입죠. 우리 공길패의 자랑이자 이 팔도 사당패와 걸립패 누구와 견주어도 뭐랄까요, 감히 최고라 자부 할 수 있달까요? 그런 기예 실력을 가진 자가 바로 공길 거사입지요.”

약팔이가 소개는 안 시켜주고 약팔이 시전만 해댄다.

약팔이를 살포시 무시한 나는 공길에게 다가갔다.

확실히 이 사당패의 우두머리가 맞긴 한지, 사람들을 일사분란하게 부리면서 움직이던 공길은 말끔한 복장을 한 내 등장에, 살짝 놀란 듯 눈을 치켜 뜨다가 이내 두 손을 가지런히 포갠 채 인사를 해왔다.

“선비님의 청안(靑眼)을 망쳤으니 면목이 없사옵니다.”

“탓하려는 건 아니니 그렇게 쫄 거 없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겠습니다. 난 진성대군이라 합니다.”

이 시대는 굳이 명함이 없다.

가문이 곧 명함이고 신용의 척도니까.

그리고 총 9등급의 신용등급이 있다면 난 그중에서도 1+등급의 신용도를 자랑한다.

종친이니까.

하지만 공길은 내 신용도를 믿지 않는 듯 했다.

처음에는 놀란 듯 눈을 부릅 떴지만 이내 피식 웃는 모습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소인은 옥황상제입지요.”

공길패의 공연은 외줄 타기를 시작으로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리고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죄를 짓고 옥황상제에게 끌려온 선비에 대한 연극이었다.

그리고 공길은 옥황상제로 분해 연기를 했었었다.

비꼬고 있다는 건, 우리 개똥이가 들어도 알 터였다.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다만 기분은 덕산이가 잡쳤나 보다.

“아니, 어디 걸립패 따위가 대군 마마께 무례를 범한단 말이오! 종친을 욕보이면 경을 친다는 것도 모르시오!”

“정말 대군 마마셨사옵니까? 소, 송구하옵니다. 이런 일을 하다보면 같잖은 말들을 하는 종자들이 너무 많은지라······.”

공길이 넙죽 부복부터 한다.

천인이 신분의 최고 끗발인 대군에게 무례를 범했으니 부복을 안 하고 버틸 재간이 있겠냐만.

“송구는 됐고, 공연은 잘 봤습니다.”

“자, 잘 봐주셨다니 몸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다만 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했으니 내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마, 말씀하시옵소서.”

“이 공연, 궐에서도 하실 수 있겠습니까?”

“갑자기 궈, 궐이라 하오시면······.”

이해를 못 하는 공길에 나는 첨언을 이어나갔다.

***

내 설명을 들은 공길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공길은 일개 광대다.

21세기에서 연예인을 광대라고 빗대기도 하지만, 사실 인식 면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극단적으로, 일단 여기서 광대는 천인이다.

한마디로 카스트제도의 불가촉천민 같은 느낌.

그런 천민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현임금의 계모이자 선대왕의 비였던 왕대비의 탄신일에 흥을 돋구기 위해 참석해달라는 제안을 받는다면, 당연히 고민이 될 터였다.

그는 밑에 단원(?)들과 논의를 거듭했다.

장장 반나절이 걸린 논의였다.

물론 논의 결과는 긍정적이었다.

내 제안대로 참석을 해주겠단다.

공길의 확답을 받았으니 이제 남은 건 형님께 허락을 받는 일이었다.

말했다시피 광대는 불가촉천민의 포지션에 있다.

그런 사람들의 궁궐 출입 문제도 있는데다 무엇보다 신원에 대한 증명이 불분명 할 수 밖에 없다.

이 일들은 형님께 맡기는 수 밖에.

그런고로, 지금 나는 기쁜 마음으로 강녕전에 들었다.

“오. 이게 누구신가. 대사헌 대감 아니신가?”

내가 들었다는 상선 대감의 알림에 형님은 버선발로 뛰어 나오시더니 낯부끄러운 말들로 날 쑥스럽게 만드셨다.

“에이, 쑥스럽게 왜 또 이러십니까, 형님.”

“아니, 쑥스럽긴 무엇이 쑥스럽단 말인고? 대사헌을 대사헌이라 부른 것이 그리도 쑥스럽단 말이냐?”

“그건 아닌데··· 흠흠. ”

“안 그래도 너에게 하문 할 것이 있었는데 잘 됐구나. 한데 너는 어쩐 일로 입궐한 것이냐?”

“아, 다른 게 아니라 어마마마의 탄신 문제 때문에 상의 드릴 것이 좀 있어서 입궐했습니다.”

“상의? 말해보거라.”

“혹 이번 연회에 차출하신, 그것도 아니면 염두에 두고 계신 기생 있으십니까?”

“연회에 흥을 돋우는 기생을 말함이렷다?”

“예.”

“음. 아직 크게 생각해본 건 아니다만 아마 예년대로 장작원의 예기(藝妓)들로 하여금 흥을 돋우지 않을까 싶다. 다만 풍원위의 말로 요새 진주에 경심이라는 아이가 쌍검무를 그리 잘 추고, 나주의 운혜라는 아이가 무희(舞戱)가 뛰어나다니 선상기(選上妓)로 차출할 생각은 하고 있다. 한데 이건 어찌 묻는 것이냐?”

“그게 말입니다.”

나는 저잣거리에서 본 광길에 대한 말을 형님께 드렸다.

관중들의 반응으로 미뤄짐작하긴 했는데, 광길이 페이머스하긴 페이머스 한 모양이었다.

글쎄, 형님도 알고 계시다지 뭔가.

좌우지간.

“그래서 말인데 어마마마 탄신 연회에서 그 광길패를 초대해서 공연을 보여드리면 어떨까 해서 말입니다.”

“공연을?”

“예.”

심장이 콩닥거렸다.

장악원에 속한 예기들의 무용을 보는 것과, 근본 없는(?) 광대패를 공연 시키는 건 의미가 다르니까.

하지만 형님이 또 누군가.

화끈하시기로는 24시 찜질방의 불가마 저리가라고, 화통하기로는 기차 화통 저리가라인 쾌남이 아니신가.

“뭐, 나쁘진 않은 듯 하다. 그리하자꾸나.”

걱정이 무색하게 흔쾌히 허락을 받아 낼 수 있었다.

“다행입니다. 전 형님께서 불허하시면 어쩌나 생각했거든요.”

“네 효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장하고 또한 기특한데 내 어찌 불허한단 말이냐.”

“아, 한데 하실 말씀이 있다는 건 뭔가요?”

형님은, 마침 나한테 할 말이 있었는데 내가 찾아왔다고 하셨었다.

“별 건 아니고······.”

“편히 말씀하십쇼.”

“요새 내가 계산을 해보니 사냥을 나갔던 것이 달포나 됐더구나.”

사냥?

갑자기?

“예.”

“그래서 사냥이나 가면 어떨까 해서 말이다.”

거창한 말씀을 하실 줄 알았는데 사냥이라니··· 뭐, 나쁜 건 아니다.

나도 사냥에 나름 맛들렸다. 이게 또, 즐길거리가 제한적인 16세기에 스트레스 해소에는 이만한 게 없거든.

“가시죠, 그럼.”

“내 얼른 준비하마.”

***

오늘은 소기의 성과가 있었다.

늘 사냥을 나가면 성공하는 것보다 허탕을 치는 일이 많았는데 오늘은 무려 멧돼지를 잡았다.

물론 형님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잡을 수 없었겠지만······.

정확히 말하면 형님의 양보였다.

주몽 뺨치는 궁술 실력으로 멧돼지를 적당히 지치게 만든 뒤, 내게 양보를 하신 것이다.

어쨌건, 멧돼지 사냥에 성공하고 보무도 당당하게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서 멧돼지는 어떻게 할 거냐는 덕산이의 물음에 행랑 식구들끼리 나눠 먹으라 말하던 그때.

“대감마님, 사헌부에서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요.”

“손님? 누구 말입니까?”

“대감마님의 배녹사라 말씀하셨습지요.”

아, 김희저가 찾아온 모양이다.

‘근데 어쩐 일이지?’

오늘은 쉬는 날이다.

조선시대라고 쉬는 날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24절기마다 쉬었고, 오늘은 24절기 중 하나인 소만(小滿)이었다.

휴일이란 소리다.

궁금한 건 배녹사를 보면 알 터였다.

나는 솟을대문으로 향했다. 대문 앞에는 배녹사가 초조한 모습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어쩐 일로?”

“송구하오나 급히 가셔야 할 듯 하옵니다.”

“급히? 어딜 말입니까?”

“지금 급히 논의 할 게 있다고 하여 모두 제좌청에 와 계시옵니다.”

킁킁.

김희저의 말에 나는 옷을 집어들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아직 씻지도 못 했다.

쉰내가 진동을 한다.

“제가 꼭 가야 되는 겁니까?”

김희저가 올해 들은 소리 중 가장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신색을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거린다.

“···예.”

“음, 가죠.”

씻고 가려고 했는데 씻고 갈 시간도 없단다.

결국 쉰내 나는 상태 그대로 사헌부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사헌부의 제좌청엔 김희저의 말대로 장령 안처직부터 감찰 권만형에 이르기까지, 사헌부의 중추 모두가 모인 상태였다.

그리고 내가 제좌청에 들어가자마자 자리에 곱게 착석해 있던 전원이 기립했다.

“무슨 일입니까?”

“그게······.”

***

삭녕군(연천군 북서부에 있던 행정구역) 관아.

삭녕군수 김진조(金進祚)가 대청의 의자에 앉자마자 아전 하나가 군사들과 함께 죄인 하나를 끌고왔다.

얼굴에 멍이 한가득인 죄인을 보자, 김진조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등채를 쫙 펴보이면서 죄인을 가리켰다.

“저놈이 그놈이냐!”

“그렇습니다, 사또.”

“저자의 신주는 어찌 되는고?”

“별 볼일 없는 농군이옵니다.”

“농군? 간이 배 밖으로 튀어 나온 놈이 분명렷다!”

“사또··· 고정하시옵소서. 건강에 해가 될까 걱정되옵니다.”

“내 지금 어찌 고정을 한단 말인가? 저놈 때문에 내 장리로 낙인 찍힐 뻔 했음을 병방도 알잖은가!”

“···”

씩씩거린 김진조가 대청뜰로 나아갔다.

그가 씩씩거리면서 다가오자, 죄인은 흠칫 몸을 떨었다.

김진조는 죄인의 코앞에 이르자, 냅다 주먹을 내질렀다.

죄인이 바닥을 나뒹굴고 신음하자, 그것 조차도 꼴불견이라 생각했는지 김진조는 연신 발길질을 해댔다.

퍽! 퍽!

“네놈이 감히 수령을 고소하려 했으니 이만한 각오도 아니하고 그런 못 된 마음을 품진 않았으렷다!”

“하, 하오나 사또께서 농번기인 요즘 소인들을 부역에 동원하였사온데 그 부역이란 것도 결국 사또의 첩 때문에······.”

첩이란 말이 죄인의 입에서 나오자마자 김진조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이놈이! 네놈이 지금 있지도 않은 수령의 축첩을 논한단 말이냐!”

“소인이 비록 까막눈이오나 나라에서도 수령의 잘못이 있다면 부민이 고소 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으로 아온데 어찌 이러시옵니까, 사또······.”

“일자무식인 네놈이 감히 법을 논한단 말이냐? 법이란 것은 본시 세상의 편리함을 위해 만든 것이지, 풍속을 어지럽게 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 부민이 수령을 고소하는 일 또한 같은 맥락일 터이니 네놈이 수령인 나를 고소하려 든 것은 풍속을 어지럽히는 일이다, 이 말이니라!”

“하오나······.”

“이놈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여봐라! 형틀을 대령해라!”

“사, 사또. 혀, 형틀은··· 조정에 무고한 자를 고신했다는 소리가 들어간다면 이로울 게 없사옵니다. 부디 고정하시옵소서.”

“이런 놈 하나 물고(죄지은 사람을 죽임)낸다 하여 조정에서 눈하나 까닥할 것 같은가! 당장 형틀을 대령하라! 내 오늘 본을 바로 세워야겠다!”

서리가 끼다 못 해 속된 말로 꼭지가 돌아버린 김진조를 막을 아전은 없었다.

결국 아전들이 마지못한 채 형틀을 대령하자, 무고한 고신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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