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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21화 (121/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21화>

    ***

    “이건 말이 안 되지 않습······.”

    않습니까.

    라고 말하려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천박(?)하고 가벼워 보이는 말투는 어제부로 Bye다.

    지금의 나는 대사헌이다.

    명실상부한 조정의 실세.

    아니, 실세 중의 실세고 백관들의 저승차사라 불리는 사헌부의 우두머리!

    그런 내가 왕자대군으로 살던 시절처럼 아무렇게나 말을 해선 안 된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입궐을 하고 보니 편전에는 이미 재상들이 불려와있었다.

    이번 김안국의 상소 때문에 말이다.

    사적인 자리에서나 하던 말투는 더더욱 쓸 수가 없었다.

    “크흠. 말이 안 되지 않사옵니까?”

    “흠.”

    내 물음에도 형님은 어좌를 툭툭 두들기만 할 뿐,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다.

    대신.

    “대감의 말씀이 틀리진 않았사오나 풍속이란 것은 쉬이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옵니다.”

    오랜만에 뵙는(?) 노공필이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한 자리씩 꿰차거나 파직을 당할 때도 노공필은 여전히 의금부지사로 있었다.

    어떻게 보면 운이 좋다고 볼 수도 있는 셈이었다.

    “만약에 다른 기관에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다면 좌시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간원은 언로를 책임지는 기관입니다. 언로를 책임지는 기관에서 허참례니 면신례니··· 가당키나 한 소리겠습니까?”

    “면신과 허참례의 풍속은 이미 망조에서부터 시작되어 지금은 백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반가에서도 시행하고 있사옵고 군기가 엄정할 군영에서는 특히 이로 말미암아 신참의 기강을 다스리고자 하니, 실로 공사천(公私賤)에 퍼져나간 풍속이라 할 수 있는 것이옵니다. 물론, 신래를 모욕 주는 것이 옳다는 게 아니옵니다. 다만 세속이란 것은 법으로 정한다고 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거니와, 무 자르듯 단칼에 결정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찌 과거 공부를 하는 샌님들이 절간에 틀어박혀 공부를 하겠습니까?”

    노공필이 말한 샌님은 당연히 경전을 깨우치는 학생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과거 공부는 불씨라 얕잡아 이르는 절간에 가서 한다는 모순과, 샌님들의 절간 출입을 법으로 엄금 했음에도 지켜지지 않는 걸 지적하는 것이었다.

    다만.

    비유가 적절치 못 하다.

    “지금 지사께서는 면신례의 일을 논하다가 갑자기 삼천포로 새시는데, 삼천포도 정직하게 샜으면 모르겠지만 엉뚱하게 샜으니 할 말이 없습니다. 하면 샌님들이 절간에 틀어박혀 공부하면서 일으키는 폐해도 하나의 풍속이 된 지 오래이니 묵과해야 된다는 말씀입니까?”

    “그건 아닙니다만, 이제와서 어찌 손을 쓸 수 있겠냐는 말씀이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재상들 중에 면신과 허참례를 안 거친 이는 없사옵니다.”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저 있습니다.”

    “대감은 경우가 다르지 않겠사옵니까?”

    답답하다는 듯 한 노공필의 발언이지만, 답답한 건 오히려 나다.

    “지금 사헌부를 욕보이시는 겁니까?”

    “아니, 사헌부를 욕보이다니요··· 어찌 말이 그리 해석 될 수 있단 말이옵니까?”

    “사간원과 사헌부는 규율의 엄격함이 서로 우위를 가릴 수 없을 만큼입니다. 한데 사간원에선 행해진 면신과 허참의 풍속이, 사헌부에서는 이뤄지지 않았으니 지금 지사께서 사헌부의 관원들이 권력의 눈치를 보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물론 여기서 말하는 권력은 복합적인 의미를 가진다.

    부왕의 적통.

    종친이자 대군.

    공신에 총신.

    거기다 전례를 깨면서 까지 출사한 케이스.

    “···”

    “달리 말씀 드려보겠습니다. 지금 지사께서는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재상들 중에 면신과 허참례를 안 거친 이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맞습니까?”

    “···예, 맞지요.”

    “그걸 달리 표현하면 나도 당했으니 너도 당해라 같은 못 된 심보 아닙니까?”

    “어, 어찌······.”

    “아니라고 부정은 못 하시지요? 이게 풍속이라면, 당장 금하는 것이 맞습니다. 다 큰 어른들이 말입니다, 예? 그것도 언관이란 작자들이 대놓고 저런 폐단을 일으키고 있는데 어찌 방관만 한단 말입니까? 말이 안 되잖습니까.”

    “그래도······.”

    아니, 막말로 면신례나 허참례 못 치러서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나?

    아니면 본인이 신래 때 어지간히 조리돌림(?) 당했었나?

    왜 이렇게 끈질겨?

    지금도 막 반박을 하려고 입을 연다.

    끈질기신 노공필의 입을 가로막은 건 전하였다.

    쓰윽-.

    전하의 거수 한 번에 반박무새 노공필의 입이 합쭉이가 됐다.

    “지금 성상소(사헌부·사간원의 공무를 임금에게 아뢰거나 반대로, 두 기관과 관련된 공무를 임금이 하교하던 곳)에 김안국의 일을 내린 까닭은 면신과 허참례가 풍속이냐 아니냐를 논하기 위함이 아니었거늘 지사는 어찌 대사헌을 못 잡아 먹어 안달이란 말이냐?”

    “···송구하옵니다, 전하.”

    “내 가만히 듣건대 대사헌의 말이 참으로 타당한 듯 하다. 본시 허참례와 면신은 조종조이래 논의 되어오던 폐해가 아니던가. 비록 지금은 풍속이 됐다 하지만, 폐해인 건 매한가지이니 과연 선인이라 하여 후인을 괴롭히는 것이 정당한가?”

    “···”

    “이건 임금인 내가 그대들을 마음 내키는 대로 다뤄도 된다는 소리와 진배가 없다. 또한 종친인 대사헌이 마음 내키는 대로 횡행해도 된다는 소리와 진배가 없다. 지금 지사가 말한 논리가 바로 이와 같을진대 자꾸 풍속이라고만 하니 의아하다.”

    “소신은 그런 뜻이 아니었사옵고 다만 지금 공사천 모두가 아울러 벌이고 있는 풍속이 되었으니 함부로 논하기엔 어렵다는 차원에서······.”

    반박무새가 아니라 변명무새였구만?

    변명무새의 말에 전하는 획! 고개를 돌렸다.

    눈을 마주친 노공필이 흡! 헛바람을 들이키며 고개를 조아리자, 전하는 고저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예부터 이어 내려오는 풍습이라 하여 계속 이어갈 필요는 없다. 면신례와 허참례는 신래를 괴롭히는 장난에서, 오늘날은 그 정도가 너무 심해 사직하는 자도 나오는데다 또한, 모욕감에 원한을 품고 있는 자들도 있을 지경이니 아름다운 풍습이라 할 수가 없다.”

    “하오나······.”

    “만약 과인의 말이 온당치 못 한 것이라면 글월을 올려도 된다. 다만 지금 이 시간부로 면신례와 허참례는, 폐한다.”

    영화 《불량남녀》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작중 임창정의 명대사가 있다.

    존나 카리스마 있어. 이러니까 여자들이 뻑이 가지.

    지금도 비슷하다.

    존나 카리스마 있다. 이러니까 신하들이 뻑이 가지.

    ***

    허참례와 면신례는 법으로 금지한다는 포고가 내려졌다.

    다만 선대왕들도 이 면신례와 허참례를 법으로 금한다는 포고를 내린 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왔다고 하니 지켜질지는 두고 봐야 할 문제 같았다.

    형님께서 직접 면신례와 허참례를 법으로 금한다는 포고를 내렸는데도 불구하고 지켜지지 않으면··· 음, 그건 뭐 그때가서 생각해봐야지, 별 수 있나?

    아, 김안국은 형님의 비호(?)로 별다른 탈 없이 무사히 복직했다.

    물론, 내부고발자 격에 가깝다 보니 승정원에 계속 두면 불상사가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셨는지, 전출을 시키셨다.

    사실 말이 전출이지 승진에 가까웠다.

    정7품직인 주서에서 종6품 홍문관 부수찬으로 자리를 옮겼으니까.

    따지고 보면 승정원이라는 근무지에 부임하기도 전에, 다른 근무지로 발령이 난 셈이다.

    이에 대한 여론은 두 가지 반응으로 갈렸다.

    드디어 면신이니 허참례니 같잖은 꼴을 안 봐도 되겠구나 반기는 쪽.

    이제 하관과 신래들의 기강이 해이해져 국기가 문란해지겠구나 부정적인 쪽.

    물론 나는 전자다.

    내가 새내기 때도 신고식 같은 건 안 치렀다.

    공대에 진학한 친구 놈들은 뉴스에 나올 만큼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는데, 문창과는 과 특성상 자유로운 분위기가 형성돼 있어서인지 신고식 자체가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 허참례와 면신례에 부정적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법으로 금한 건 잘 한 일이었다.

    또, 종6품으로 승진을 한 것도 잘 된 일이다.

    어느 시대든 내부고발자는 환영받지 못 한다. 배척 당하고 좌천 당하기 쉽다.

    그런데 내부고발자가 좌천이 아니라 아예 승진을 해버렸으니, 조금씩이나마 곪아있던 상처들이 하나, 둘 튀어나오지 않을까?

    뭐, 1년 짜리 비정규직인 내가 생각할 건 아니지만.

    지금 내가 생각할 건 오히려 그게 아니었다.

    “그걸 왜 지금 말해?”

    덕산이에게 따지듯 묻자, 녀석은 어이가 없다는 듯 날 바라본다.

    “아니··· 아닙니다요. 쇤네의 잘못입지요. 다음 부턴 꼭 말씀 올려야겠습니다요.”

    “밥값은 하자, 덕산아. 나도 밥값을 하는데 너가 밥값을 못 하면 어떡하냐?”

    “···송구합니다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감히 자부하건대 이번 면신례와 허참례를 법으로 금하게 한 일등공신은 대사헌인 나다.

    자뻑이 심하다고?

    그래, 뭐 자뻑일 수도 있지. 있는데······.

    사실이잖아?

    제좌청에서 김안국 관련한 문제에서 내가 입 하나 뻥긋 안 하고 있었으면 유야무야 넘어갔을걸?

    좌우지간, 이렇게 밥값을 하는 난데 덕산이는 밥값을 못 하고 있다.

    무슨 밥값이냐고?

    글쎄, 한 달 뒤면 내 어머니의 생신이란다.

    한 달이면 많이 남은 것 같지만 많이 남은 것도 아니다.

    어머니의 생신은 공교롭게도 6월 25일.

    지금이 5월하고도 스무날 되는 날이니 한 달 살짝 오버해서 남은 셈이다.

    임금이나 왕비나 대비 같은 왕실의 생일은 이미 한 달도 더 전에 논의가 되곤 한다.

    작년을 기준으로 보자면, 6월 25일 한참 이전인 4월부터 논의가 됐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니 만큼 한 달이란 시간은 많이 남은 게 아니고, 오히려 촉박한 축에 속한다.

    다만.

    내가 좀 바쁜가?

    놀고 먹기 바쁘지, 사헌부에 출근하느라 바쁘지, 형님과 시론(詩論) 하느라 바쁘지··· 선미의 노래처럼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다.

    바쁘게 살아가는지라 당연히 어마마마의 생신을 깜빡하고 있었다. 그러면 당연히, 아주 당연히 덕산이가 일러줬어야 했다.

    맞잖아?

    아, 아니라고?

    아니, 지금 그런 게 중요한가?!

    지금 중요한 건.

    “이번엔 뭐 해드리지. 흠.”

    생신 선물이다.

    작년에는 비누를 해드렸었다.

    비누를 받고 어린아이처럼 함박웃음을 짓던 어머니의 얼굴이 환하다만, 이번에도 비누를 드릴 순 없었다.

    ‘무엇보다 정성이 중요한데.’

    내 어머니는 무려 왕대비(선왕의 비)다.

    이쯤하면 어지간한 선물들은 모두 받아보신다. 심지어 나도 못 구하는 물건이 선물로 들어 올 것이었다.

    그런데 어떤 선물을 한들 경쟁력이 있겠나?

    이럴 땐 정성이다.

    값이 비싸던 저렴하던, 뭔가 공장에서 찍어내는 선물 같지 않고, 어딘가 독창적이면서도 신선하고, 그러면서도 정성이 엿보이는 것.

    이게 중요한 거다.

    문제는 그런 선물이 생각이 안 난다는 거지만.

    “정 생각 안 나시면 저자 구경 하면서 생각해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요?”

    “저자 구경?”

    “네.”

    “너가 구경가고 싶은 건 아니고?”

    “···”

    그래, 비록 밥값은 못 해도 덕산이만한 종이 없다.

    그런 덕산이의 바람이니 못 들어줄 것도 없다.

    덕산이 말대로 저잣거리 구경하다 보면 생신 선물로 드릴 게 번뜩 떠오를지도 모르고.

    그렇게 채비를 갖추고 저잣거리로 나왔다.

    다만 딱히 특색 있는 선물거리는 보이지 않았다.

    비단.

    저건 어머니 입장에선 선물 축에도 못 낄 테고.

    비녀.

    저것도 마찬가지다.

    음.

    저잣거리에 나오자 오히려 고민이 더 깊어지던 즈음.

    “자! 백세 노인도 보지 못 한다는, 천년 묵은 구미호도 쉽게 볼 수 없다는 진귀한 공길패가 왔소이다! 이, 공길패로 말씀 드릴 것 같으면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하느냐, 나랏님도 이 공길패의 공연을 보면 숨이 껄떡거릴 정도시고, 당장 숨 넘어가는 노인들도 차사들에게 노잣돈 쥐어주면서 저것만 보고 가게 해주시오, 부탁하는 그런 패거리라. 평생 못 볼 구경거리가 왔으니 모두 복 받은 셈이라 이 말이외다.”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호객 행위인지 약팔이인지의 외침과 사람들이 어디론가 우르르 몰려갔다.

    덕산이도 부산스럽다.

    “뭔데 사람들 반응이 저러냐?”

    “고, 공길패 모르십니까요?”

    공길패?

    “몰라, 그런 거. 뭔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습지요.”

    덕산이의 손에 이끌려 간 곳엔 왠 사당패가 있었다.

    ‘저 사람이 공길인가?’

    멀찍이 연습 중인지 외줄을 타고 있는 미남자 하나가 보였다.

    아니, 사실 미남자인지도 모른다.

    탈을 쓰고 있었거든.

    다만 사람들의 시선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근데 공길. 공길···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낯이 익은 이름이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공연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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