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20화>
***
“들어가시지요. 다른 분들께서 기다리고 계실 것이옵니다.”
병사들의 말에 떨리는 마음이 더 커졌다.
도통 진정이 안 돼서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래, 이게 뭐 어렵다고.’
그리고 마음의 준비가 끝나자, 문을 열고 사헌부로 들어갔다.
***
사헌부 뜰에는 관리들이 줄지어 도열해 있었다.
당연히 못 보던 얼굴들이 대다수였다.
“소관은 사헌부 집의 김물(金勿)이라 하옵니다. 대감께서 드디어 등청하셨으니 실로 광영이옵니다.”
집의면 차관급이다.
내 부재시에 사헌부의 행정을 총괄할 차관 말이다.
인사를 건네는 김물에 자연스럽게 손을 뻗다가, 아차 싶어 손을 도로 거뒀다.
이놈의 악수 습관은 잊을만 하면 튀어 나오려고 한다.
“광영까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반갑습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형식적인 인사에 가깝다.
미안하게도 내 입장에서 이 이름은 듣보잡이거든.
장곤 선생님께 여쭤봤는데도 선생님도 잘 모르신다고만 답하셨었다.
집의 김물을 시작으로 다른 사람들과도 차례, 차례 인사를 나눴다.
총 2원인 장령은, 안면이 있다 못 해 내가 직접 부리기까지도 했었던 안처직과 이가신(李可臣)이었고, 역시나 총원 2명인 지평은 이성동(李成童)과 권헌(權憲), 그 밑으로 권만형(權曼衡)을 필두로 한 열댓명의 감찰들과 수십명의 아전들이 있었다.
인사를 나눈 나는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돌려 보냈다.
지금이 꼭두새벽이다.
엄밀히 말하면 6~7시쯤?
이제 한참 바쁠 시간일 텐데 의전 때문에 귀중한 시간을 날려 보내게 할 순 없잖나.
머뭇거리는 부하 직원들을 돌려보내고 그 대신에 익숙한 안처직에게 청사 안내를 부탁했다.
“여기가 다시청(茶時廳)이옵니다.”
공부를 안 했다면 안처직의 안내에도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공부한 보람이 있다.
이름 그대로 차를 마시는 청사라고 해서 다시청이다.
차를 마신다고 하니 휴게 공간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그건 아니다.
일반 직장으로 치면 다시청이 사무실인 셈이다.
“그럼 저기가 제좌청(齊坐廳)이겠군요.”
다시청이 사무실이라면 제좌청은 회의실이다.
사헌부에서 소관하는 전반적인 업무들을 관원들이 모두 모여 토의하는 장소랄까?
내가 공부한 게 맞다면 바로 저기서 시정 탄핵이 논의 되고, 특정 인사에 대한 탄핵이 결정된다.
평범해 보이는 것과 다르게 탐관오리들에겐 지옥문과 가까운 곳인 셈이다.
“맞습니다. 그리고 저기는······.”
그 다음으로 솟을대문 옆에 행랑 몇 채와 또 다른 부속 건물로, 서리들이 머무는 공간 들이 있었는데 뭐 이건 딱히 볼 필요는 없는 것 같고······.
“들어가시지요. 대감의 자리로 안내하겠사옵니다.”
안내를 끝낸 안처직이 나를 다시청으로 이끌었다.
내가 다시청에 모습을 드러내자 업무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던 관원들이, 군기가 바짝 든 신병들처럼 일제히 기립했다.
갑작스러운 관원들의 기립에 어리둥절해 있던 것도 잠시.
“대사헌께서 개좌하시오!”
안처직의 외침에 기립해 있던 관원들이 우르르 몰려 나오더니 2열 횡대로 도열했다.
“뭡니까?”
어안이 벙벙한 채로 낮게 속삭이자, 안처직 역시 낮게 속삭였다.
“사헌부의 기강을 타관과 비교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사헌부의 기강이 타관에 비해 빡세다는 거?
물론 이건 배웠지.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니었다.
“근데 왜 다들 갑자기······.”
“기강이 엄하기 때문에 상관이 자리에 앉기 전에 먼저 앉아서는 아니 되는 것이고, 등청 때 역시 상관이 오기 전까지 공좌부(출근 장부)에 착명해야 하는 것이옵니다. 이를 어긴다면 백관을 감찰하는 사헌부의 관원이라 할 수 없으니 당연한 행동들입지요.”
당연한 행동들이라는데 내가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자, 여기로······.”
나는 안처직이 권하는 자리에 가서 앉았다.
각 잡고 기립해 있던 관원들도 그제서야 본인들의 자리에 착석했다.
자리에 앉은 나는 새삼스럽게 주변을 훑어봤다.
탐관오리들에게는 저승사자처럼 보여질 사헌부의 사무실이겠지만 특이점은 없었다.
복장과 인테리어만 아니라면 흔한 사무실 같은 배치도였다.
내 자리는 역시 부하 직원들을 감시하기 가장 편한 상석이었다.
“전임 대사헌께서 인수인계를 거치지 못 하고 파직 되신 터라 소인들이 급한대로 준비를 하긴 했사온데 미진한 게 많사옵니다. 부디 헤아려 살펴주시옵소서.”
자, 이제 뭘 하면 되나··· 라는 생각을 하기 무섭게 누가 말을 걸어왔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방금 전까지 없던 사람이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소인은 배녹사(陪錄事) 김희저라고 하옵니다. 놀래킬 의도는 없었사온데 송구하옵니다.”
배녹사는 수행비서의 일종이다.
“괜찮습니다. 어쨌든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말씀 편히 하시옵소서.”
“이게 편합니다. 그래, 이전 대사헌이라면 홍자아(洪自阿)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홍자아는 모두 알다시피 도중에 파직됐다.
인수인계를 할 겨를도 없이 말이다.
“그러하옵니다.”
“음. 문서가 제법 많은 듯 한데 혹시 봐야 할 순서 같은 거라도 있습니까?”
“봐야 될 순서 같은 게 있습니까?”
“지금 급한 것들이 이것과 이것들이니, 이것들부터 살피시옵고, 그 다음 저것들을 살피시면 되옵니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배녹사 김희저가 몸둘 바를 몰라한 채 물러나자, 나는 곧바로 문서들을 읽어 내려갔다.
문서는 읽기 불편하지 않았다.
내가 형님께 부탁한대로 모든 공문서가 한글화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순우리말로 나타내기 어려운 낱말들이다 우리 말로 쓰면 뜻이 전달되지 않는 단어들은 한자로 표기가 됐다만 이만한 게 어딘가?
이게 전부 한자였다면 독해하기 여간 골 아픈 게 아니었을 것이다.
이것 봐, 한글로 공문서 작성하니까 얼마나 편한가?
많던 문서들을 읽는데 걸린 시간도 고작 한시간 밖에 안 걸렸다.
한자 였다면 족히 2~3시간은 잡아 먹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뭐하지.’
말했다시피 문서들을 읽고 검토하는데 걸린 시간은 한시간.
그걸 다 하고 나니 할 게 없었다.
다시청이 왜 다시청인지 알 것 같았다.
아, 옛날엔 대간들의 업무가 엄청 간단했었다.
실무는 맡지도 않고 시정을 탄핵하는 일만 소관하다 보니 관원들이 출근을 해도 할 게 없어서 청사에서 차만 홀짝거렸단다.
그래서 다시청이라 불렸고, 그러던 게 대간들에게도 실무가 주어지면서 차 마시던 공간인 다시청이 업무 공간으로 변경이 됐다.
···라는 게 장곤 선생님의 설명이었다.
“대감. 차 드실 시간이옵니다.”
무료하게 시간을 때우던 찰나.
심심하던 중 반가운(?) 안처직이었다.
아, 그가 말한 다시(茶時)는 은유적인 표현이다.
‘첫 사건이군.’
시정 탄핵인지 인사 탄핵인진 모르겠지만 뭔가 토의할 게 있다는 뜻이다.
“갑시다.”
나는 설렘반 기대반으로 제좌청으로 향했다.
***
“김안국이 공신인 까닭에 학생에서 곧바로 승정원의 주서로 발탁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신래(신입)라고 불린다고 불만을 갖고 전하께 상주했으니 이게 바로 다시를 연 까닭이기도 합니다.”
이가신의 말에 나는 살짝 얼이 나갔다.
내가 조선에 온 지도 어언 2년.
이제 얼추 적응이 됐다고 자부한다.
시대상에 맞는 비유나 은유도 곧잘 알아듣곤 하니까.
하지만 지금 말하는 건 도통 이해불가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요약하면 김안국이 놀림을 받았고, 우연한 계기로 그걸 형님께 아뢨다. 그리고 그게 우리가 모인 이유다?’
주변을 눈치껏 살펴보니 모두들 알아듣는지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다.
나만 이해를 못 한 모양이다.
“세상사란 풍교란 게 있는 법인데 하물며 승정원은 삼사에 해당하진 않을지라도 그 기강이 엄격한 곳입니다. 한데 어찌 그런 일로··· 허어.”
“면신한 뒤에 개좌하는 것 역시 옛날의 풍속중 하나거늘 그런 일로 상주하는 것은 승정원에 미안한 일이 아닐 수가 없겠습니다.”
집의 김물과 감찰 권만형의 첨언이다.
도저히 앞뒤 맥락이 이해가 안 간다.
날 이해 시킨 건 안처직이었다.
“하지만 옛 풍속이라고 하는 허참례와 면신들이, 김안국이가 말한대로 치화(어진 정치로 백성들을 이끎)를 손상 시킨 건 사실입니다. 무시할 만한 일은 아닌 듯 합니다.”
이제 이해가 갔다.
그러니까, 형님께서 일전에 걱정하셨던 허참례에 관한 문제였다.
보다시피 나는 허참례나 면신례 같은 거 안 치렀어도 부하 직원들이 깍듯하다.
사실 너무 간단한 문제다.
부왕의 적통인 다이아 수저거든.
하지만 김안국은?
물론 공신인데다 김굉필의 문인이다. 하지만 그게 신고식을 피해 갈 수 있는 이유가 되진 못 한다.
내가 허참례에 관해 잠깐 알아 본 적이 있다.
바로 몇 년 전에는 봉군까지 받은 당상관이 면신례를 안 치렀다고 신고식을 혹독히 치렀단다.
이름이 변··· 뭐였는데 기억이 안 난다.
하여튼.
당상관도 당한 일을 김안국이 피해 갈 순 없었을 터였다.
조정이 물갈이 됐다곤 해도 잠재적인 발암덩어리들은 아직도 암암리에 퍼져있다.
이들의 입장에서 제일 X같은 게 나일 텐데, 말했다시피 나는 대놓고 건들지 못 한다.
그럼 만만한게 누구겠나?
김안국이다.
게다가 명분도 좋다.
관습이라는 명분, 얼마나 좋아?
지금도 봐라.
백관을 감찰해야 할 사헌부의 관리들이 김안국이 당한 신고식을 당연시 여기고 있지 않나.
물론 이들이 잘못됐다고 여기진 않는다.
이들에겐 이 습속이 비리나 악습이 아니라 전통일 테니까.
“하관이 상관을 대할 때, 후진이 선진을 받드는 건 당연한 법입니다. 신래가 신귀로 놀림받는 것은 비록 과한 바가 없잖아 있겠지만 특히 김안국처럼 공신의 예로서 등용 된 자는 기고만장함이 있을 터이니 그 예기를 꺾고 용인하는 덕을 길러주기 위해서 일 테니 어찌 도움이 없고 해악만 있다 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신참 길들이기란 말이었다.
“대감은 어찌 생각하시옵니까?”
유일하게 허참례가 잘못됐다고 말한 게 안처직이었다.
모두 Yes를 외치는 상황에서 홀로 No를 외치던 안처직은 지지를 구하는 듯, 내 의견을 물었다.
그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더군다나 나는 안처직의 생각에 동감한다.
전에도 한 번 말했지만 여기는 뇌물과 선물의 경계가 모호한다.
얼마 이상이면 뇌물이라고 간주하는 현대와는 달리 똑같은 금액이어도 관점에 따라 뇌물이 되는 것이고, 선물이 되는 것이다.
이게 바로 이곳의 풍속이다.
하지만 이게 정으로 포장 할 수만 있는 건 또 아니잖나.
선물이란 이름이든, 뇌물이란 이름이든 결과적으로 청탁하기 위해 물질을 이용하는 개념은 같으니까.
허참례도 같다.
허참례가 이곳의 풍속인 건 인정하는 부분이다.
전통인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관습이라는 이름 아래 신입을 괴롭히는 게 정당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안 장령(안처직)의 말에 동감합니다.”
“···”
“후진이 선진을 받드는 건 이 장령(이가신)의 말씀대로 당연합니다. 하지만 후진이 선진을 받들 듯, 선진도 후진을 대할 때는 덕으로 감싸야 되지 않겠습니까? 거기다가, 김안국이가 기고만장함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있다고 미리 가정을 해버리고 그 예기를 꺾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주위가 술렁이진 않았다.
다만 놀란 기색은 역력했다.
설마하니 내가 김안국을 비호할 줄은 몰라서였겠지.
“특히 사헌부는 백관을 감찰하고 그 기강을 바로 잡는 기관입니다. 전하께서 본인을 대사헌에 제수하실 적에도, 내 가타부타 토달지 않고 응한 것은 다른 명예욕이나 탐욕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점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구요. 한데 간관(諫官) 된 사람들로서 혁파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김안국이가 잘못됐다고 말하는 걸 들으니, 이래저래 실망이 큽니다.”
“그것이 아니오라··· 무릇 풍속이란 것은 함부로 단절 할 수 있는 것아 이나온지라······.”
“풍속을 함부로 단절 할 순 없지요. 하지만 풍속이 정법(定法)의 위에 있는 건 아닙니다.”
“···”
그렇게 말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냐고?
설득이 딱히 통하지 않는 것 같으니 밥값하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