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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19화 (119/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19화>

    ***

    강녕전이다.

    나는 새삼스럽게 형님의 침소를 둘러봤다.

    오늘은 왕의 동생으로 찾아온 게 아니라 장관 내정자(?)로서 찾아왔다.

    감회가 새로운 것도 잠시.

    “내일이구나.”

    형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입을 열었다.

    “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습니다.”

    열흘의 시간이 흘렀다.

    그 열흘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당사자 없는 인사 청문회도 열렸고 내가 대사헌 직에 적합한지 아닌지를 가리는 심사도 수차례 벌어졌었다.

    도승지 김감에게 얼핏 들었는데 상소문도 몇 개나 올라왔단다.

    내 공이 아무리 커도 현직에 나서게 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 한 일이라는 상소문들 말이다.

    물론, 그 상소문들 따윈 가볍게 읽씹한 형님과 대신들은 날 대사헌에 제수하셨다.

    그리고 바로 내일.

    내일은 진성대군이 아니라 대사헌 이역으로 첫 출근을 하는 날이었다.

    오늘 강녕전을 찾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왕의 동생이 아니라 대사헌에게 해주실 조언들이 있다고 해서.

    “들거라.”

    뭔가 딱딱해진 분위기를 나만 느낀 건 아닌지, 형님은 궁녀가 놓고간 차를 권했다.

    내가 차를 몇 번 홀짝거리자 형님이 말했다.

    “넌 네 할 일을 하면 된다. 다른 말들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굳은 인상 때문에 내가 내일 첫 출근을 걱정하는 것 같았을까?

    근데 정반대다.

    걱정 같은 건 안 하고 있다.

    사실 걱정 같은 거 할 필요가 없잖아?

    형님 말대로 내 할 일만 하면 된다. 누가 욕하건 말건 말이다.

    “걱정마십쇼.”

    호기롭게 자신감을 내보이자 피식거린 형님은 내게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셨다.

    낙하산인 나를 폄훼할 사람들.

    그리고 가까이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

    언관으로서의 자세.

    그리고······.

    “내 딱히 듣기 위함은 아니었다만 안처직이 말하길 네가 허참례를 치루지 않았다 하더구나.”

    알다시피 금부도사 안처직은 이번 인사 조치에서 나와 같은 부서인 사헌부로 발령(?)이 났다.

    내 걱정이 돼서 안처직을 불러다 이것저것 캐묻다 보니 알게 되신 것 같다.

    안 그래도 며칠 전에 안처직이 찾아오긴 했었다.

    허참례 문제로 말이다.

    “네.”

    “왜 아니 하는 것이냐? 너가 종친인지라 대놓고 모욕을 하진 않겠다만 필시 괄시를 할 것이니라.”

    “제가 허참례란 게 뭔지 잘 몰라서 알아 봤거든요.”

    아닌 게 아니라 지난 열흘 동안 나도 놀고 먹지만은 않았다.

    나는 딱히 낙하산인 걸 부정하진 않는다.

    그래도 낙하산으로 자리를 꿰차게 됐으니 노력하는 모습 정돈 보여야지 않겠나?

    그런 생각으로 지난 열흘 동안 이런저런 공부좀 했다.

    조선의 생활 풍습은 이제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얼추 익혔지만, 공직자로서의 생활은 내가 또 모르는 분야잖나.

    허참례는 그 과정에서 알게 됐다.

    신고식이라나 뭐라나.

    “근데 그거 완전 악습이던데요?”

    “아, 악습?”

    “예.”

    여담으로 나는 청개구리 심보가 좀 있다.

    부당한 업무 지시, 부당한 갑질을 당하면 발끈해버리곤 하니, 사실 고용주 입장에선 아무리 싼 맛(?)에 부리는 알바라도 내키지 않았을 터였다.

    그래서 이현호로 살던 시절에도 피곤한 일을 많이 겪었었다.

    이 허참례도 비슷하다.

    부당한 업무 지시와 부당한 갑질은 아니지만, 악습이다.

    딱히 악습에 연연하고 싶진 않았다.

    청개구리 심보라면 청개구리 심보고, 괜한 반발심이라면 반발심이고, 융통성 없는 짓이라면 융통성 없는 짓이지만, 강요에 가까운 신고식을 내가 왜 하나?

    일반적인 신고식도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형님이 무슨 걱정 하시는지 잘 압니다. 근데 사헌부가 명색이 백관들의 기강과 풍속을 바로 잡는 기관인데 제가 앞장 서서 악습을 이어나가면 그게 모순 아니겠습니까? 모순 덩어리인 대사헌이 무슨 백관들의 기강과 풍속을 바로 잡겠어요?”

    피식.

    “그래.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구나. 네가 어련히 알아서 할 텐데 말이다. 아, 그리고 네가 말한 두 번째 조건 말이다.”

    두 번째 조건은 공첩을 한글로 작성하는 것이었다.

    장곤 선생님 덕에 깡통 소리만 요란하던 머리가, 제법 굵직해지긴 했지만 한자 생활권이 아니라 한글과 영어를 쓰던 생활권에서 살았기 때문인지 한자는 아직도 외계어 같이 느껴진다.

    게다가 생각해보면 한자로 공문서를 작성하는 것도 비효율적이다.

    아무래도 한글보다 한자가 종이를 더 많이 사용 할 수 밖에 없고, 쓰는 시간도 곱절은 더 든다.

    예를 들어, 만약 촌각을 다투는 공문서라고 치자.

    그걸 어느 세월에 그걸 다 적고있어?

    “네.”

    “관리들의 반발이 심한데다 빈청에서도 완전히 언문으로 사용하는 건 어렵다고 하여 둘을 병행하여 써야 할 듯 싶다.”

    미안한 표정이 한가득인 형님이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것이냐?”

    “그것만 해도 다행인 걸요, 뭘.”

    공문서 한글화를 조건으로 내걸긴 했지만 사실 이게 완전히 이뤄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굳이 말하면 뭐랄까, 장사꾼이 2만원에 팔아야 하는 물건을 손님이 가격을 묻자 3만원을 부른 것과 같달까?

    그리고 적절하게 2만5천원으로 타협을 하고 말이다.

    2만원에 팔아야 할 물건을 2만 5천원에 팔게 됐으니 손해라고 할 순 없다.

    “이해해준다니 다행이구나. 너도 알다시피 언문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뜻을 가진 말도 많다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이해합니다. 아, 그리고 저한테 뭐 물어보실 거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아, 별 건 아니고······.”

    “말씀하십쇼.”

    “민망하다만······.”

    뭔데 얼굴이 이렇게 빨개지시지?

    말하기 껄끄러운 건가 싶을 무렵.

    “그, 네가 예전에 보냈던 서간 말이다.”

    “서간이요?”

    “그래. 내 그 서간을 받아본 날부터 궁금했는데······.”

    “···?”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형님이 소매를 뒤적거리더니, 내가 예전에 올린 서간을 꺼내신다. 그러고는 검지 손가락으로 편지의 말미를 가리켰다.

    “이 파이팅이란 말.”

    “···?”

    “이건 무슨 뜻인 게냐?”

    ***

    임금의 정무를 흔히 만기(萬機)라고들 표현한다.

    그만큼 하루에도 수만가지의 일들을 처리하기 때문이었다.

    지금처럼 말이다.

    “···하니 지금 장례원(노비와 관련한 관청)의 송사가 여러 해 밀려 있사온데 그 일을 헤아려 본다면 송사를 맡는 관원의 인혐(사퇴하던 일)이 잦고 체차(갈아 치움)되는 일이 많아 이같은 폐해가 발생하였으니 태만하면 당연히 좌천하고 징계함이 맞지만 그게 아니라면 조금 더 두고 봄이 어떻겠사옵니까?”

    “음. 장례원의 일은 작년에도 경들이 이른 바 있다만 내 미리 헤아리지 못 했다. 그리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한 사건이 매듭 지어지기 무섭게, 또 다른 사안이 발의(?)됐다.

    “요즘 해안가의 어민들이 내는 세금이 가혹하다 원성이 잦다 하옵니다.”

    정언 김개(金漑)의 말에 융은 그건 또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치켜떴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전하께오서도 아시다시피 해안가의 백성들은 배와 그물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잇는데 작년에 상정청(국가의 제도나 세금을 심의하고 결정하던 관청)에서 배와 그물에 세금을 거두게 하고, 또 호조에서 그 세를 거두게 하였으니 이중으로 세금을 내는 형국이 되었사옵니다. 일이 이 지경이 되니, 이제 해변에 고기 잡는 사람은 없게 되고, 원성만 잦으니 사체(일의 이치와 정황)를 헤아려주시옵소서.”

    “하지만 상정청에서 이미 법을 세웠는데 경솔하게 법을 고친다면 또 말들이 많지 않을까 싶은데···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이번에 영의전으로 영정한 허침이 한 발 자국 앞으로 나왔다.

    “하오나 지금 어민들의 삶을 보자면 세납에 치어 심지어 파산하고 도망하는 자들도 많다 하옵니다.”

    “도망까지?”

    “그러 하옵니다.”

    “상정청에서 응당 여러 해를 두고 결정한 것이겠사오니 경솔히 법을 고친다면 당연히 말들이 많을 것이옵니다. 하오나 작년에 상정청에서 법을 세울 때와 지금의 상황이 판이하게 다른데다, 달라진 상황을 눈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폐단이 이토록 진행 된 것을 알지 못 하는 것이니, 상정청에서도 눈으로 목격한다면 법을 고치자는 말이 나올 것이옵니다. 하오면 조롱이 어찌 나오겠사옵니까?”

    “흐음. 내 그 폐단이 그리 심각한 줄은 몰랐다. 경들이 법을 어찌 고칠지 의논해보고 다시 품의(글로 아룀)하라.”

    “예.”

    그 이후에도 수만가지 사안들이 화두로 올라왔다.

    그리고 얼추 마지막 사안까지 정리가 됐을 무렵.

    “모두 수고들 했소. 지금 비록 역신이 발호한 일과 난신의 일 때문에 밀린 정사가 많지만 경들이 더욱 힘써 정사를 도모해야만 하는 시기이니, 모두들 파이팅 하시오.”

    “···?”

    “파, 파이팅 말이옵니까?”

    어리둥절한 표정의 대신들에 융은 실소를 내뱉었다.

    “아니, 파이팅을 모른단 말이오?”

    “그, 그게 무슨 말이온지······.”

    대사성 김전(金詮)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융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경을 꾸중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역의 경전에 파이팅이란 말이 분명히 나와있는데, 지금 이 말을 모르는 걸 보니 경이 경전에 구분을 두고 공부를 하는 듯 하다. 부디 두루 공부하여 학문에 힘쓰도록 하라.”

    “소, 송구하옵니다.”

    “그럼 모두들 파이팅하시오.”

    진한 여운을 남긴 융은 자리에서 일어나 편전을 빠져나갔다.

    ***

    “야, 덕산아.”

    “예?”

    “나 괜한 짓 한 걸까?”

    “갑자기 말입니까요?”

    “아무래도 괜한 짓 한 것 같다. 엄청 떨린다.”

    “이제와서 그리 말씀하시면 어떡하십니까요.”

    “그러게, 이제와서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데······.”

    가슴이 계속 콩닥거린다.

    오늘은 드디어 첫 출근 날이었다.

    비록 정장을 쫙 빼입고 하는 출근은 아니었지만, 관복을 쫙 빼입고 하는 첫 출근의 감회는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별 생각이 없었다.

    별 생각이 없으니 긴장되는 마음 자체가 있을 턱이 있나.

    잠도 푹 잤었다.

    근데 막상 첫 출근 당일이 되고,

    “잘 다녀오셔요.”

    “잘 다녀오십시오, 대감마님.”

    여울 씨와 다른 행랑 식구들의 배웅도 받고 보니, 이제 드디어 시작이란 생각 때문인지 가슴이 진정이 안 됐다.

    이건, 아는 친구 하나도 없는 반에 배정돼서 새학기 첫 날 등교하는 기분과는 좀 색다르다.

    뭐랄까··· 어쨌든 표현이 안 된다.

    “쇤네는 언제 뫼시러 오면 되겠습니까요?”

    도살장에 끌려오는 소처럼 오만가지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 새 사헌부에 도착했다.

    “안 가면 안 되냐?”

    “에이, 어찌 그러십니까요. 남들이 보면 욕합니다요.”

    “아니, 여기 행랑에 있다가 나 퇴근 할 때 같이 가면 될 것 같은데······.”

    농담으로 들리는 모양이다. 덕산이는 헤실거리기만 한다.

    “그럼 퇴청 때 쯤에 뫼시러 오겠습니다요.”

    들어가기 싫다. 아니, 떨려서 들어가질 못 하겠다.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다리에, 핑곗거리라도 만들기 위해 멀어져 가는 덕산이를 불렀다.

    “더, 덕산아!”

    “네?”

    “너 요새 전금이랑 어떻게 돼가냐?”

    “저, 전금이랑 말입니까요?”

    “그래, 임마. 내가 요새 너네 둘 애정 상태를 확인을 못 했네. 어떻게, 내가 조언 해줄 거 좀 있냐? 있지?”

    “대감마님 덕분에 요샌 괜찮습니다요. 지금도 사실 전금이 빨래하러 갈 시간이라 얼른 돌아가봐야 됩니다요. 헤헤.”

    괜한 걸 물었다.

    그래, 출근하기 싫다고 연애 사업하는 덕산이를 끌어들일 순 없지.

    “그래, 얼른 가봐라······.”

    “네!”

    하염없이 멀어져 가는 덕산이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마침내 시야에서 덕산이가 사라지자 나는 천근만근처럼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입구를 지키던 병사들은 날 보고는 곧장 고개를 조아렸다.

    “대사헌이시옵니까?”

    “그렇습··· 아니, 그렇네.”

    “들어가시지요. 다른 분들께서 기다리고 계실 것이옵니다.”

    병사들의 말에 떨리는 마음이 더 커졌다.

    도통 진정이 안 돼서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래, 이게 뭐 어렵다고.’

    그리고 마음의 준비가 끝나자, 문을 열고 사헌부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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