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18화>
대사헌으로 살어리랏다
***
내가 막 조선에 건너오기(?) 전에는 이런저런 신조어들이 참 많이 생겨났다.
95년생.
젊다면 젊은 나이였는데도 불구하고 요즘 어린 친구들이 만든 신조어는 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 이건 왜 줄인 건지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을 정도였다.
하지만 모든 신조어에 부정적인 건 또 아니었다.
대표적인 게, 어느 순간 떠오른 워라밸이란 신조어다.
내가 막 조선에 오기 전에는 취준생들 사이에 워라밸 열풍이 한참이었다.
처음에는 팅커벨 같은 요정인가 싶었지만 알고 보니 Work-life balance의 약자란다.
요즘 취준생들이 꿈꾸는 삶이라나.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한국이 오죽 경쟁 사회인가?
회사에 들어가서도 밑에서 치고 올라와, 위에서 찍어 눌러.
답답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일과 여가의 조화가 적절한 삶, 워라밸.
취준생들이 꿈꾸기 딱 좋은 신조어다.
그리고 특채 제의를 받은 나.
특채도 보통 특채가 아니다.
삼사의 장관이면··· 어후, 보통 명예가 아니지.
그 보통 명예가 아닌 삼사의 장관 자리를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뭘 어떻게 해?
당연히 정중하게 거절했지.
워라밸이고 나발이고, 그것도 다이아 수저가 된 이상 필요 없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난 일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
모두 알다시피 놀고 먹어도 하등 지장이 없거든.
굳이 비교하자면 재벌집 막내 아들 같은 포지션이랄까?
그런 내가 왜 일을 해?
내가 만약 일을 해야 할 때가 온다면, 그건 아마 먹고 살기 빠듯해서가 아니라 놀고 먹는 게 지루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진 놀고 먹는 게 전혀 지루하지 않다.
왜, 정우성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잘 생긴 게 어떤 기분이냐고 묻는 말에 늘 새롭고 짜릿하다고.
나도 그렇다.
놀고 먹는 건 늘 새롭고 짜릿하다.
그래서 거절했다.
정중하게, 아주 정중하게.
못 하겠다고, 나는 그럴 그릇이 못 된다고.
내 대답을 들은 형님은 한참 동안 말씀이 없으셨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 돌아온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지금처럼 말이다.
“숨이 막혔다.”
“예?”
“내가 보위에 오르고 가장 먼저 읽었던 상소가 무엇인줄 아느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승정원에 몸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알 턱이 없지.
“대행 대왕께서 매번 이르시길 ‘내가 불사를 믿지 않음은 그대들 모두가 아는 바이다.’ 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소신들의 귀에 분명하게 남아 있는데 어찌 수륙재를 여시려고 하십니까?”
수륙재란 불교식 제사라고 보면 된다.
더 쉽게 말하면, 물귀신들을 달래기 위한 법회랄까?
제사의 대상도 당연히 내 부왕인 성종이 아니라, 수장당한 영혼들이 대상이었을 것이다.
근데 수륙재가 어쨌다는 말씀이시지?
“지금 왕위를 이어받으셨으니 선왕의 뜻을 다름이 온당할진대 도리어 대행대왕이 믿지 않으시던 불사를 거행하여 불씨(부처를 얕잡아 이르던 말)에게 아첨하여 복을 구한다면, 하늘에 계신 대왕의 영(靈)이 옳다 하시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말했다.”
“···”
“선왕을 위하여 제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복을 위해 제사 지내는 것은 대왕께서도 폐지하지 않으셨고, 나의 치세에는 관두라는 전교도 없으셨다. 그러니 그들이 말하더구나. 신들은 실망을 금치 못 하겠습니다. 대왕께서 제를 지내신 건 선왕들의 뜻을 마지못 해 따른 것이며, 따로 전교가 없었던 것은 애초에 오늘날 전하께서 이 법회를 여실지 모르셨기 때문입니다. 금하소서.”
“아니, 무슨 그런 애들도 안 쓸 떼를······.”
“네 말대로 억지지. 보위에 오른 처음부터 난 선왕과는 달랐으니까,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으니까.”
갑자기 무거워진 분위기에 나는 고개를 떨궜다.
“그 이후 10년이다. 10년을 한결 같은 말들만 들었다. 그래서 숨이 막혔지. 곧 죽을 것처럼. 당장 내일이라도 턱, 하고 숨이 막힌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네가 조정에 나온 뒤로는 숨막힘이 사라졌다.”
“···”
피식.
“부끄럽지만 이번의 일만 봐도 그렇다. 그렇게 힘들었어도 자결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문득 천장을 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목을 매다는 느낌이 어떤 기분일까. 끝일까, 시작일까.”
나는 깜짝 놀랐다.
마음의 문을 닫은 건 알았지만 상태가 그 정도로 심각했었을 줄은 몰랐다.
자살까지 생각하고 계셨다니······.
“그렇게 놀란 표정 짓지 않아도 된다. 잠깐이었으니까.”
“그래도······.”
“네 뜻이 완강해보이니 삼고초려는 하지 않으마.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물어보자꾸나.”
“···예.”
“네 정말 학식이 모자르고, 성품이 군자가 되지 못 하기 때문에 출사를 못 하겠다는 것이냐?”
나는 대답하지 못 했다.
내가 본 조정은 학식 따위는 필요가 없어보였다.
성품?
위군자들이 널리고 널렸는데 나 정도면 공자 선생도 울고 갈 성품이지.
이것들은 말했다시피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기 위한 말장난들에 불과했다.
그런 거짓말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 같아 대답을 하지 못 했다.
“괜찮다. 네가 정히 못 하겠다면 못 하는 것이지. 강요할 생각은 전혀 없다.”
제의를 거절했던 내 대답에 대한 대답을 하는 형님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동시에 궁금해졌다.
“형님은 왜 제가 출사를 했으면 하는 것입니까? 이제는 숨막힘도 사라지셨다고 하셨는데 말입니다.”
거창한 대답을 원한 건 아니었다.
정말로 궁금했기 때문에 한 질문이었다.
굳이 나일 필요는 없잖아?
막말로, 이 조선 팔도에 나보다 나은 사람은 새고 샜을 테니까.
“너는 있는 그대로를 보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요?”
“다른 위군자들처럼 이것저것 재질 않는단 말이다. 그게 위정자로선 본이 못 될 수도 있겠지만 백성에겐 본이 될 수 있는 관리의 모습이니, 그런 사람이 하나 쯤은 조정에도 있어야 백성들의 숨통이 트이지 않겠느냐?”
백성들의 숨통?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다.
모르겠는데, 대략 무슨 의미로 하신 말씀이신진 알 것도 같다.
그리고 그 의미를 토대로 짐작해본다면, 나에게 삼사의 장관직을 제안한 건 형님으로서도 큰 용기를 냈다는 점이었다.
이 선택을 후회할진 몰라도 나는 형님의 용기를 꺾을 수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 대답은.
“그럼 하겠습니다.”
“뭐?”
“하겠단 말씀입니다. 대사헌이든 대사간이든.”
“참말이냐?”
“딱히 못 할 것도 없잖아요.”
“아니, 그렇긴 하다만 방금 전까진······.”
“대신 조건이 몇 개 있습니다.”
“조건?”
고개를 갸웃거리는 형님에 나는 방금 막 떠오른 조건들을 털어놓았다.
***
“···도승지 김감을 홍문관 대제학(정2품)에, 무령군 유자광을 의정부 좌찬성(종1품)에, 경기 관찰사 안윤덕을 의정부 좌참찬(정2품)에, 형조판서 김굉필을 사간원 대사간(정3품)에, 금부도사 안처직을 사헌부 장령(정4품)에, 평안 관찰사 채수를 우의정(정1품)에, 예조판서 임사홍을 좌의정(정1품)에, 좌의정 허침을 영의정(정1품)으로 삼고, 다시 홍문관 부응교 이행을 홍문관 전한(종3품)에, 홍문관 교리 정붕을 사간원 사간(종3품)에, 학생 김안국을 승정원 주서(정7품)에, 왕자사부 이장곤을 이조좌랑(정6품)에 제수하고 진성대군 이역을 사헌부 대사헌(종2품)에 제수코자 하는데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특히 이조의 뜻이 궁금하다.”
청천벽력에 가까운 인사의 단행이었다.
통상 인사를 이처럼 파격적으로 단행하는 경우는 드문 경우에 해당했다.
언급된 이들 모두가 공신록에 녹훈된 자들이라지만, 그래서 초수(벼슬의 3등급을 뛰어넘어 제수함)를 하는 거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리 한꺼번에 인사가 단행된 일은 없었다.
물론 당상관과 이조의 뜻을 물었으니 특지제수(임금이 직권으로 임명함)는 아니다.
애당초 당상관들을 특지제수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지만 지금 임금이 가진 권력을 생각한다면 특지제수에 가까운 인사 단행임은 분명했다.
그건 이조판서 이계동의 낯빛에서도 증명이 됐다.
융의 질문에도 그는 감히 아니 된다는 말을 거론하지 못 하고 있었다.
이조판서 이계동 뿐만 아니라 모든 대신들이 그랬다.
“지금 여러 자리가 공석으로 있는데 빈 자리들 모두 하나같이 큰 일을 도맡아하는 자리들이니, 한시라도 자리를 비워 둘 수 없음은 아주 온당하다 할 수 있겠사옵니다.”
“이조에선 이견이 없는 것인가?”
“그러하옵니다. 하오나······.”
“말하라.”
“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진성대군의 이름도 분명 들은 것 같사온데 맞사옵니까?”
모두들 융을 빤히 쳐다봤다.
특지제수고 나발이고, 그래서 충격적인 인사 단행이고 나발이고.
사실, 이들이 가장 놀란 건 이번 인사 조치에 진성대군의 이름이 거론됐다는 점이었다.
지금 임금의 권력은 비대하다.
아니, 비대하다는 말로는 표현 조차 할 수가 없다.
역신을 다스린 게 바로 엊그제의 일이고 간신을 다스린 게 바로 어제의 일이다.
조정에 남아있는 대신과 중신들도 십중육칠할이 임금의 수족이라 불릴 수 있는 사람들이거나, 이번 일련의 사태들 때문에 임금에게 호의를 가진 사람들이니, 안 그래도 비대한 권력은 한층 더 비대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친을 출사 시키겠다는 건 전례를 깨겠다는 말에 지나지 않았다.
이 의미는, 이계동의 질문을 받은 융이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매우 대수로운 일이었다.
“잘 들었다. 맞다.”
편전이 술렁였다.
종친이 공을 세운 것.
임금의 총애를 받는 것.
이것들과 출사를 한다는 점은 역시 별개 일 수 밖에 없었다.
술렁거리는 편전을 잠재운 것은 융이었다.
“경들의 우려를 모르지 않는다. 잘 안다.”
“···”
“하지만 이계동이 말한 것처럼 지금 조정의 여러 자리가 공석이다. 모두들 한시라도 비워둘 수 없는 자리들이지. 그런 자리에 진성대군을 제수하겠다는 어지를 받들지 못 하겠다 한들 내 무슨 변명의 여지가 있으랴?”
“···”
“하지만 1년이다.”
“1년이라 하오심은 어떤 말씀이시온지요?”
“진성이 출사하는 기간을 1년으로 제한하겠다는 말이다.”
편전이 또 한 번 술렁이자, 융은 어좌를 가볍게 내려치며 주위를 환기시켰다.
“그런데도 전례 때문에 아니 된다면 어쩔 수 없겠으나 나는 꼭 진성이 사헌부의 장관으로 조정에 나왔으면 한다.”
“저, 전하께오서 간절하시다면 신들로선 도리가 없겠사오나······.”
미적지근한 반응이 보일 즈음.
이번 인사 조치에서 좌의정으로 내정(?) 된 임사홍이 한 발 자국 앞으로 나왔다.
“왕자대군들을 출사치 못 하게 하는 것은 인척의 비리와 전횡이 우려 되기 때문인 것이지, 티끌 먼지 잡을 것이 없다면 어찌 불가한 일이 되겠사옵니까? 하물며 진성대군은 역신과 난신들을 다스린 일 뿐 아니라, 모든 대소신료들이 머뭇거릴 때에도 자진하여 여진과의 전쟁에 참전하였으니 만세에 귀감이 될 왕자대군이니, 여타의 왕자대군이나 왕자군과 비교하기가 민망할 정도이옵니다. 종친을 출사하지 못 하게 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이라야 비로소 가능한 일일진대, 진성대군은 공적이 또렷하고 모두가 망설일 때에도 스스로 본이 되길 자처하였으니 실로 ‘종친은 출사치 못 한다’는 말에는 해당이 안 된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옵니다. 규례와 전례에 얽매이지 말고 전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대신들 앞에, 사홍이 지지를 표하자 이곳저곳에서 찬동의 뜻을 표했다.
그렇게 진성대군의 출사가 점점 가닥 잡혀지자, 융은 또 다른 사안을 꺼냈다.
“그리고 내 빈청에 문의 할 것이 있는데.”
“하교하시옵소서.”
“문의라기 보단, 경들이 의논을 좀 하였으면 한다. 지금 우리나라의 공첩(공문서)들은 지방의 아전들이 돌려 쓰는 공첩도 이두로 작성하는데, 설령 이두라 할지라도 근본은 중국말이다. 달리 말하면 지방에서 쓰는 공첩 조차 중국말로 쓰임한다는 소리지.”
뜬금없는 소리였다.
공문서를 당연히 한자, 그러니까 문자로 작성하지 그럼 뭘로 작성한단 말인가?
대신들이 고개를 갸웃거릴 즈음.
이번 인사 조치와는 다른 의미에서 청천벽력인 소리가 융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앞으로 공첩을 작성할 때, 언문으로 작성케 함이 아주 효율적인 듯 하니 경들이 가부를 좀 논했으면 한다.”
“고, 공첩을 언문으로 말이옵니까? 갑자기 그게 어인 말씀이시온지······.”
융의 편을 들어준 사홍 조차 어리둥절한 지, 얼이 나간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융은 뭔가 떠오르는지 피식거리며 중얼거렸다.
“누가 그러더군. 한자끈이 짧은 사람들은 문서를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고, 쓰는 것은 더욱 어렵다고.”
“하, 한자끈이 무슨 말씀이시온지······.”
사홍의 물음에 피식거린 융이 말했다.
“그런 게 있다. 좌우지간, 경들은 이 사안도 한 번 빈청에서 논해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