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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17화 (117/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17화>

    너, 내 동료가 돼라

    ***

    “언제쯤 완공됩니까?”

    내이포에서 올라오자마자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 일들 때문에라도 눈코뜰새 없이 바쁘게 지낼 수 밖에 없었다.

    멀쩡하던 형님이 갑자기 앓아 눕질 않나··· 이 신하라는 놈들은 아픈 형님 두고 멀뚱멀뚱 눈치만 보고 있지 않나··· 이런저런 일들까지 처리하고 보니 내이포에서 올라온 지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도 공장 일에 신경을 쓰지 못 했다.

    뭐, 그것들도 모두 알다시피 이제 모두 마무리됐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사람에 대한 불신감 때문에 마음의 문을 닫았던 형님은, 서간이 효과가 있었는지 슬슬 예전의 모습을 찾고 있었고, 신하 놈들··· 아니, 그 죄인들도 모조리 쫓겨났으니 내가 할 건 딱히 없었다.

    굳이 있다면 놀고 먹는 거?

    오늘은 그 놀고 먹는 날 중에서도 마침 장곤 선생님과 수업이 없는 날이라 공사 중인 공장터에 좀 나와봤다.

    언제쯤 완공되냐는 내 물음에 비누 공장에 대한 공사를 맡긴 대목장은 코를 훌쩍거리면서 말했다.

    “못 해도 올 가을 안에는 완공이 될 겁니다요.”

    “생각보다 늦네.”

    “하지만 이보다 빠르게 짓는 건 어렵습니다요.”

    전문가가 그렇다는데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나?

    “알겠습니다. 계속 수고좀 해주세요.”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대목장이 물러가자 홀로 남은 나는 공사장을 한바퀴 돌아봤다.

    내가 내이포에 내려가 있는 동안, 이곳의 관리는 풍원위가 맡아줬지만 혹시라도 잘못된 게 있을지도 모르잖나.

    다행히 딱히 잘못된 건 없어 보였다.

    공사도 막힘없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고, 인부도 뭐 나한테 딸린 노비들 면천 시켜서 고용하면 되는 일이니 어려울 것도 없고··· 남은 게 있다면 재료를 구할 거래처를 뚫는 일만 남았다.

    ‘기름이 상당히 많이 필요한데 이건······.’

    고기의 쓰임이 많지 않은 시대였다.

    당연히 기름의 값도 비쌀 수 밖에 없다.

    원재료의 가격이 높으니 생산품 자체의 단가도 높게 잡을 수 밖에 없다.

    뭐, 그래서 비누로 사치를 장려(?) 하려고 했던 거지만 그것도 재료가 충분히 공수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기름값이 비싸도 공수만 되면 상관은 없겠지만 기름이 안 나오면 생산 라인이 멈춰버리는 셈이잖나.

    ‘이건 어쩔 수 없이 형님 도움 받아야겠네.’

    되도록 형님의 도움은 받고 싶지 않았다.

    여러모로 편의를 봐준 게 많아서 이 정도는 내가 하고 싶었거든.

    근데 비누의 재료가 되는 기름 구하는 일이 ‘이 정도’ 축에 끼는 게 아니란 걸 새삼 깨달았다.

    ‘말 나온 김에 한 번 가봐야겠다.’

    지금이라면 한참 정무를 보느라 바쁘실 테지만 곧 점심 시간이다.

    딱히 시간을 뺏는 건 아니란 말이다.

    어차피 밥은 먹어야 하는데 혼자 먹으니 같이 먹는 게 낫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금석리에서 발길을 돌려 곧장 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광화문.

    “뉘신데 얼쩡거리시오?”

    못 보던 수문군이다.

    다들 날 알아보고 알아서들 길을 비켰는데 길을 가로 막는 걸 보면 말이다.

    “신참인가? 나 몰라요?”

    “시, 신참? 그보다, 내가 댁을 어떻게 아오? 수상쩍게 얼쩡거리지 말고 썩 비켜나시오.”

    이거 내가 내 입으로 신분을 밝히는 것도 민망한데······.

    난처함에 어떡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아이쿠, 대감 아니시옵니까.”

    광화문 수문장이시다.

    “입궐하시려는 것이옵니까?”

    “네. 근데 이분은 신참인가 봅니다.”

    “아, 예. 오늘 막 광화문에 입번하여··· 혹 무슨 실수라도 하였사옵니까?”

    날 바라보는 따스한(?) 눈길과는 다르게 예의 수문군을 흘기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20년이 넘도록 을의 처지를 살았던 내가 또 저 눈빛은 잘 알지.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간 수문군이 곤욕을 치룰 것 같아서 손을 내저었다.

    “실수는요. 전하께선 궐에 계시지요?”

    “예. 들어가시지요.”

    수문장이 눈치를 주자, 길을 가로막고 있던 수문군이 어물쩡 비켜난다.

    크게 혼나진 않아야 할 텐데 말이다.

    “네놈은 어찌 명색이 수문군이란 놈이 대군마마도 알아보지 못 한단 말이냐?”

    “예? 대, 대군 마마 말이옵니까?”

    “저분이 진성대군이시다.”

    “히끅. 그 ‘진성 대군’말이옵니까?”

    “그럼 진성대군이 저분 한 분 뿐이지, 또 누가 있단 말이냐?”

    “의관을 갖추지 않아 몰라 뵀사옵니다. 송구하옵니다.”

    “잘 봐두거라. 한 번은 실수지만 두 번은 고의니라.”

    “예······.”

    뒤에서 조근조근 들려오는 말에 씁쓸했다.

    혼나지 않았으면 했는데 결국 혼났다.

    이거, 형님께서 나는 허례허식 같은 거 안 차려도 된다고 해서 여느 날처럼 편하게 입고 입궐한 건데, 나중에는 의관 정제하고 입궐해야 할 것 같다.

    괜히 남한테 민폐를 끼치는 기분이다.

    씁쓸한 마음과 함께 광화문을 가로지르자, 소식을 들었는지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내관들이다.

    “전하를 뵈러 오셨사옵니까?”

    “예. 전하께선 어디 계십니까?”

    “지금 경연 중이신지라······.”

    나는 내관의 입에서 경연이란 말이 나오자 화들짝 놀랐다.

    경연?

    형님이 수업을 받고 있다고?

    내 반응을 미루어 짐작했는지, 예의 내관이 말을 덧붙였다.

    “어쩐 일인지 오늘 경연에 납시었사옵니다. 이제 막 시작하여 기약이 없으니 강녕전에서 기다리고 계심이 어떻겠사옵니까?”

    알았다고 답하려던 나는 문득 제왕의 수업이란 게 궁금해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경연이란 게 도대체 어떻게 해먹는 수업이길래 형님이 그렇게 학을 뗐었나 궁금해졌달까?

    뭐, 이번엔 자발적으로 하시는 것 같으니 딱히 스트레스를 받을 일은 없겠지만 일단 어떤 방식으로 돌아가는지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았다.

    “그것도 괜찮긴 한데, 경연에 참관좀 해도 될까요?”

    “차, 참관 말이옵니까?”

    “네, 참관. 방해 안 하고 지켜만 보게요.”

    ***

    ‘방해 안 하고 지켜만 본다니까 그걸 또 형님한테······.’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먼발치에서 수업이 어떻게 돌아가나 지켜보려던 당초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알았다고 답했던 내관은, 했던 말과는 다르게 그걸 또 상선 대감한테 곧이곧대로 일러바쳤다.

    당연히 내가 왔다는 말을 들은 상선 대감은 형님에게 아뢨고, 내가 왔다는 소리에 형님은 날 경연장에 부르셨다.

    그 결과.

    “···하므로 광무제는 밝은 임금이었지만 도참(일종의 예언서)에 현혹되었고 태산에 봉선(고대에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 지내던 일)하였으니 이것이 곧 그의 단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옵니다.”

    “이처럼 임금이 뜻을 성실히 못 하고 마음을 바르게 피지 못 한다면 광무제처럼 편견에 쉽게 현혹되곤 하옵니다.”

    “편견에 쉽게 현혹이 된다.”

    “그러하옵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편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이는 사람이 완벽하지 못 하기 때문인데, 하물며 임금인 나는 여러 일과 사람을 접하다 보니 쉽사리 편견을 갖게 되는 일이 많은데 이를 막을 방법은 무엇이 있겠는가?”

    “···”

    “내 그대들을 잡아먹기라도 한단 말이냐. 정말 궁금해서 한 소리니 말해보아라.”

    “신들이 아뢴 것처럼 광무제가 도참에 현혹된 건 마음이 정심하지 못 했기 때문이옵니다. 그리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요소에는 학문만 한 게 없사오니 지금 비록 전하께서 조금은 불편하고, 힘든 일이 있더라도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고 가까이 하신다면 필시 편견을 떨칠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

    보다시피 어려운 말들만 오가는 경연장에 참석하게 됐다.

    근데 광무제가 도참에 현혹된 건 마음 때문이 아니라, 도참 사상 덕분에 천하를 통일 했기 때문 아닌가?

    한마디로 학습이 됐단 소리다.

    적어도 난 장곤 선생님께 그렇게 배웠다.

    혹자들은 광무제가 도참에 현혹돼서 정사를 그르쳤다고 하지만 결국 ‘그대가 천하를 통일할 것이다’라는 도참, 즉 예언에 용기와 자신감을 얻어, 그걸 예언을 토대로 천하를 통일했으니 광무제로서는 도참에 심취할 수 밖에 없었을 거라고.

    장곤 선생님은 이렇게 부연 설명을 다셨었다.

    ‘그래도 공부한 보람이 있네. 이런 것도 알아듣고.’

    새삼 내가 기특해진다.

    옛날엔 사람들이 이런 말 하고 있으면 이게 뭔 개똥 같은 소린가 싶었겠는데, 이제는 광무제가 어떤 사람인지, 또 이 사람이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이 상황을 어떤 고사로 비유하고 있는지, 해석은 못 해도 그 맥락 정도는 파악 할 수 있게 됐으니까.

    뭐, 장곤 선생님 덕분이다.

    정말 열성적으로 가르쳐주셨지.

    스승의 은혜가 새삼 거룩하다.

    “음. 진성이 너의 뜻은 어떠하더냐?”

    “저 말입니까?”

    “그래.”

    “학문을 열심히 닦으면 그만큼 아는 게 많아지고, 아는 게 많아지면 그만큼 보이는 것도 많아지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과연 그러하겠구나.”

    잠깐의 질의응답을 끝으로 수업은 재개됐다.

    나한텐 지루하기 짝이 없는 수업이었다.

    볕이 좋아서인지, 수업이 지루해서인지 꾸벅꾸벅 졸던 즈음.

    수업이 끝났다.

    원래의 목적이 형님 찬스를 쓰기 위함이었으니 점심은 가볍게 들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기름?”

    “예. 비누를 만드는 데 생각보다 많은 기름이 들어갑니다. 한데 기름을 구할 곳이 형님도 알다시피 마땅치 않으니 혹시 형님께서 혜안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음. 너도 알다시피 도성에서 조차 고기를 도축하는 일이 많지 않다.”

    “알고 있습니다.”

    “올해는 어찌 되는지 모르겠다만, 작년에는 육판서들이, 도성에서 암암리에 소를 마흔 마리 씩이나 도축하니 이대로 가다간 농사 지을 소가 없을 것이라면서 세종대왕 때처럼 금살도감(우마를 함부로 도살하는 걸 막던 임시적인 관아)을 두어서라도 막아야 한다는 건의를 받았었다. 한데 나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느냐.”

    “그럼 안 되는데······.”

    “돼지에게서 나온 기름으로는 아니 되는 것이냐?”

    “아뇨. 돼지에서 나온 기름이 재료예요.”

    “우마가 아니라?”

    “예.”

    “하면 굳이 나한테 이를 필요가 무에 있느냐.”

    “···?”

    “네가 돈사를 지으면 되는 문제 아니냐.”

    “돈사요?”

    “그래.”

    생각해보니 그렇네.

    이렇게 되면 굳이 거래처를 뚫을 필요가 없다.

    그 거래처를 내가 운영하면 되는 문제니까.

    조금 귀찮아지긴 하겠지만.

    게다가 돈사를 운영하는 건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첫째로 돼지 기름을 곧바로 공수 할 수 있다는 점.

    둘째로 살코기는 내다 팔 수 있다는 점.

    두 번째도 일종의 사치 장려 정책의 일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선 돼지의 소비가 21세기 한국처럼 많지가 않다.

    소나 말은 그나마 농사나 교통 수단이 되기라도 하지, 돼지는 그런 게 전혀 없이 먹이값만 들어가고 막상 노동에 투입 할 수도 없어서 키우는 사람이 드물다.

    시장에 나온 돼지 고기도 십중팔구는 멧돼지 고기일 정도.

    그때 잘 사육한 돼지 고기를 갖다 팔면, 흑자는 못 내도 적자는 안 내는 동시에 사치를 조금이라도 장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돼지 기름을 얻는 건 당연한 거고.

    “그럼 이 문제는 해결이 된 것이냐?”

    나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네. 간단하게 해결 됐네요. 하하.”

    “싱겁긴.”

    “왜 그 생각을 못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새 이래저래 신경 쓸 게 많아서 그런지, 머리가 굳었나봐요. 하하.”

    “네가 신경 쓸 게 많았던 것은 모두 내가 부덕했던 까닭이다. 미안하구나.”

    “아뇨, 미안하실 필요까진······.”

    “그보다, 내 너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묻고 싶은 거요? 예, 말씀하십쇼.”

    “지금 간적들을 내친 이후 여러 자리가 공석이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람을 잘랐으니 당연히 자리가 빈다.

    “그렇죠?”

    “다른 자리는 몰라도 삼사의 장관 자리는 조금이라도 비워둘 수가 없는데 적임이 없으니 걱정이었다. 한데······.”

    “···?”

    “방금 경연에서 졸던데 어디까지 들었더냐?”

    공석 이야기를 하시다가 갑자기 경연이라니.

    “광무제랑 도참 얘기까지 듣다가 졸았습니다.”

    “그 이후는 듣지 못 했겠구나.”

    “예.”

    “그 다음에는 종친의 출사 문제에 대해 논했다.”

    “그러셨습니까?”

    나는 대수롭지 않게 되물었다.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종친의 출사가 아니라 돈사를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운영할······.

    잠깐.

    ‘갑자기?’

    이거 왠지 삘이 오는데.

    “뭐, 경연관들이야 늘 전례만 언급하니 난처하다고들 말했다만 내 생각은 다르다.”

    “무슨 생각 말씀이신지······.”

    “안평대군은 막후에서 문종대왕과 정사를 함께 도모했다. 하물며 네가 안평대군보다 모자란 것이 어디 있겠느냐. 솔선수범해서 여진족을 토벌하는 길에 자진했고, 역적을 소탕하는 일 또한 네가 앞장서서 했으며, 이번에 간적들을 내친 일도 네가 가장 앞에 서서 행한 일이다. 공적이 또렷하고, 너의 업적이 적지 않은데 전례가 다 무슨 소용이겠느냔 말이다.”

    돈사 문제로 재빨리 굴러가던 내 머리가 다시금 굳어졌다.

    “전례란 말은 결국 선대에서 행하지 않거나 폐지했던 일이니 따르지 말라는 겁박에 불과하다. 하지만 상황이란 것이 수십년 전과 오늘 날이 어찌 같을 수 있단 말이냐. 당장 어제와 오늘이 다른 법인데 말이다.”

    “···”

    “그래서 말인데······.”

    말인데?

    “네가 출사를 하여 함께 정사를 도모하지 않겠느냐? 너라면 삼사의 장관 자리가 적임인 것 같아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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