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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16화 (116/365)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16화>

제 발로 경연에 나가는 임금

***

텅텅 빈 편전은 휑뎅그렁한 느낌마저 자아냈다.

각각의 자리에 도열해 있는 대신(大臣)과 중신(重臣)들은 고작 스물도 안 돼 보였다.

삼정승이란 말이 무색하게도 자리한 정승은 좌의정 허침 밖에 없었고, 육조판서라는 말은 농이라도 되는지 예조판서 임사홍과 이조판서 이계동, 마지막으로 임금에게 태사라 불리는 영예를 입고 있는 형조판서 김굉필 밖에 없었다.

그나마 판서들은 셋이라도 있으니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언로의 꽃이라는 삼사의 장관들은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편전이 황량하구나.”

그의 독백처럼 편전은 황량하다 못 해, 여기가 조정인지 역병이 창궐한 전염터인지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였다.

다만 어찌 된 영문인진 몰라도 어좌에 자리한 융의 표정은 어느 때 보다 밝았다.

“지금 정승과 재상들의 자리가 공석이니 하루 속히 인사를 단행하여 공백이 없도록 함이 옳은 줄로 아뢰옵나이다.”

김굉필의 말에 융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태사··· 아니지. 형판이 천거할 인물이 있다면 말해보라.”

갑작스런 천거.

당황할 만도 하건만 굉필은 짐작이라도 했다는 듯, 속내에 있는 인사들을 꺼냈다.

“전하께서 갑자기 하명하시니 신이 어떤 인사를 거론해야 할지 모르겠사오나 굳이 사람을 꼽으라 하오시면 소신의 동문인 최부(崔溥)가 지금 단천에 정배돼 있사온데 그는 어떠시옵니까?”

“최부라.”

최부.

무오년에 굉필을 포함한 김종직의 다른 문인들과 함께 유형을 받은 이였다.

“최부라면 경이 말한대로 형판의 동문이다. 사적인 감정 때문에 부름하고자 하는 것인가?”

“신 또한 사람인지라 사적인 감정이 아주 없다고 한다면 전하를 기만하는 것이 될 것이옵나이다.”

끄덕.

“한데?”

“그러나 어찌 사적인 감정가지고 조정에 사람을 불러들일 수 있겠사옵니까. 모름지기 사람이란 여러 일을 겪은 후라야 사고의 폭이 넓어지는 법인데,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최부는 큰 일을 여럿 겪은데다 대국의 풍속과 기후에 해박하니 훗날 큰 소용이 있을 것이옵니다.”

최부는 소싯적 대국에 표류한 일이 있었다.

그의 일화를 들은 부왕은 그에게 표류한 사실을 기록할 것을 명했고, 《표해록》을 찬술해 부왕께 바쳤다.

비록 그 자신이 최부를 유배 보냈지만, 최부의 표해록은 제법 감명 깊게 본 일이 있었다.

“경의 말대로 훗날 큰 소용이 있겠으나 아직은 시기상조인 듯 하니 좀 더 생각을 해봄이 좋겠다.”

굉필은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고 내 별시(나라에서 특별히 시행하던 과거시험)를 행하고자 하는데······.”

“별시 말이옵니까?”

허침의 반문이었다.

“경도 알겠다만 내 한 달 전 쯤에도 두 정승에게도 하문한 일이 있었다.”

“기억하옵니다.”

“두 사람이 반대하는 통에 이루지 못 했다만, 위군자가 쓸려갔으니 이제 거리낄 것이 무에 있단 말이냐. 내 별시를 행하여 경사를 함께 누리고자 하니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마침 말관의 자리도 이번 일로 공석이 여럿이니 별시를 열어 인재를 등용하는 것도 큰 무리는 없을 듯 하옵니다.”

“다만 내 위사들에게는 혜택을 좀 주고 싶은데.”

“혜택 말이옵니까?”

“그래. 위사들이 공신에 녹훈되긴 했다만 그 수가 기천이 넘다보니, 특공(特功)을 세우지 못 한 위사는 그저 이름만 공신록에 올라간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경들도 생각해보라. 역적들이 발호했을 적에 그들이 진성대군을 따라 남하하지 않았다면 내 어찌 왕위를 다시 찾았겠으며, 이번에 진성대군이 내 명을 따라 간적들을 다스렸을 때 어찌 그들을 쓸어버렸겠는가.”

드러내지 못 하는 진실도 있다.

실제로 조정 대신들을 간적으로 지목하고 금부에 하옥한 건 진성대군이었다.

그걸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걸 부정하는 순간.

그래서 진성대군이 독자적으로 군사를 일으킨 것이 되는 순간.

진성대군은 처벌을 피할 길이 없다.

임금은 그것만은 막고 싶어했고, 편전에 자리한 사람들 모두 그 심정을 모르지 않았다.

그들은 알면서도 모른 척, 모르면서도 아는 척.

조용히 읍(揖)을 했다.

그들에 고마운 마음이 든 것도 잠시.

융은 말을 이어나갔다.

“그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라의 형편이 어려우니 다시금 공신으로 책봉하여 후대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한 공신으로 책봉한다 한들 특별한 은전을 내리지 못 한다면 필시 세인들이 비웃을 것이다. 그래서 별시에 위사들이 응시하고자 한다면 자그마한 혜택이라도 주고자 하는데··· 형평성에 어긋남이 있겠는가?”

“전례를 상고해봐도 공신의 자손을 후대하는 법은 숱하게 있었사옵고, 공신이 중시(重試)나 문과에 응시하였을 때, 특별히 채용하는 예가 많사오니 형평성에 어긋나진 않을 듯 하옵니다.”

“형평성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이번 별시에 위사들에게는 본래의 점수에 가산을 하여 채점토록 해야겠다.”

“전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아, 이판.”

이계동이 고개를 조아렸다.

“사진으로 내쳐진 자들은 알아봤는가?”

“사람을 보내 알아봄에, 사진으로 내쳐지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죽은 자가 다섯이고 나머지는 모두 성은에 감읍하고 있다 하옵니다.”

“변장(변방의 장수)들에게 특별히 사진의 방비를 게을리 하지 말라 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좌상.”

“예, 전하.”

“부민고소금지는 어찌 되었소?”

“신들이 어젯밤에 빈청에 모여 급히 사안을 논해봤사온데······.”

“논했는데?”

“부민이 수령을 고소하는 일을 폐지하면서 일어날 장단점이 또렷하였사옵니다.”

“어떤 것이었소이까?”

“폐지하여 발생할 단점으로는 여러 사람들이 우려한대로 무고와 수령의 권위 문제가 있었사옵고, 장점으로는 탐리를 제때 적발 할 수 있다는 점과 수령들이 조세를 착복할 일이 줄어 재정이 소폭 늘어날 것이라는 것이 있었사옵니다. 이 장단점을 헤아려 의논한 것인데 장단점이 극명하니 전국적으로 포고하는 것은 이른 듯 하옵고, 다만 기호지방(경기도)에 시행하여 효험이 있는지 확인을 한 연후 단계적으로 호서와 영남으로 확대시킴이 타당하다는 결론이 도출되었사옵니다.”

“음. 결론이 그리 도출되었다니 아쉽긴 하지만 도리가 없겠소. 또, 헤아려본다면 경의 말대로 전국적으로 시행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수 있으니 경기도에서 시범적으로 시행을 해보고, 단계적으로 시행함이 좋겠소이다. 이 일은 경기도 관찰사 안윤덕이를 불러 의논해 봅시다.”

“예.”

미루고 미뤘던 사안들이 하루 사이에 뚝딱 매듭 지어졌다.

속이 후련했다.

‘이렇게 쉬운 것을 이 어찌 미뤘단 말인가.’

다만 속이 후련한 한 편, 삭직 당한(?) 간적들이 한심하고도 원망스러웠다.

이 쉬운 일을 여태 한 달이 넘도록 미뤘단 말인가?

그저 임금이 두려워서, 임금의 눈치를 봐야해서?

한심하기 짝이 없다.

한심해도 너무 한심해서 혀를 차는 일마저 낭비같다.

“아, 태학생들은?”

“태학생 말이옵니까?”

“조정 대신 태반이 쓸려나갔는데 그들이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는 것이 말이 안 되지 않소.”

“이제 하루가 지났을 뿐인지라 아직은 별다른 움직임은 없는 듯 하옵니다.”

“음. 알았소. 오늘 조회는 이만 파하겠소이다. 모두 물러들 가보시오.”

모두들 편전을 빠져나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융은 피식 웃었다.

정사가 재밌긴 또 오랜만이다.

뭐랄까, 아직 가시적인 현상은 없지만 앞으로 바뀔 모습이 눈에 보인달까?

그점이 즐겁다.

허침이 말한대로 부민고소 금지의 단점이 부각 될 수도 있었고, 당장 오늘이라도 태학생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날 수도 있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겁다.

하루 사이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가 있나 본인도 의심이 될 지경이지만, 사실인 걸 어쩌겠나.

“상선 밖에 있는가.”

“불러 계시옵니까, 전하.”

“어제 그것좀 가져와보라.”

“벌써 몇 번이고 보셨사옵니다.”

“질리지 않으니 가져와보라.”

“예, 전하.”

잠시 후.

상선이 다른 내관들과 함께 한 무더기의 두루마리들을 들고 나타났다.

탁자 위에 두루마리들을 펼친 융은 개중에 하나를 골라 집었다.

「신 김굉필은 아뢰건대 사람이 칭찬에 인색함은 도리가 아니고, 또한 근본을 보지 않고 말단만 좇음이 온당치 않다는 대군의 말씀에 깊이 사색하매 글월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지금 심병이 큰 탓에 정신이 해이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큰 용단으로······.」

「신 임숭재 아룁니다. 진성대군께서 갑자기 찾아오셔서 격식이 없이 전하께 서간을 써달라는 말에 무례임을 알면서도 붓을 듭니다. 지금 조정에 간적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전하께서 그 간적들을 내치셨으니 비록 후환이 두려우시겠지만, 어찌 후환만 있겠습니까? 간적들을 내침으로 인해 조정이 평안과 평온을 얻었으니 이는 곧 백성이 평안과 평온을 얻은 것입니다. 슬퍼하는 마음과 복잡한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하겠사오나······.」

「전 개똥인데요. 이거 삼촌한테 전달할 서간이라고 해서 머리 쥐어짜내고 쓰는 거 거든요. 그런데 공부가 힘들어요. 힘든데, 다른 사람들이 하는 소리 들었는데 전하 옆에 나쁜 사람들이 많아서 전하가 힘들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내가 공부를 하는 건데 왜 하는거냐면요. 나는 장수 되고 싶은데 우리 엄마는 내가 문관이 됐으면 좋겠대요. 그래서 내가 문관은 되기 싫다고 했는데 삼촌 이야기 들으니까, 내가 편전에서 전하 도와주려고 문관되려고 공부하는 거예요. 더 쓰고 싶은데 밖에서 거먹이가 놀자고 불러서 그만 쓸 거예요. 」

「진성입니다. 저의 서간부터 읽었을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서간부터 읽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막상 받고 보니 백통이 넘는지라 읽으신다고 고생도 하셨을 것 같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하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 조금은 다른 입장이라, 사족들은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저는 여태껏 형님이 하신 선택 중에 틀린 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어떤 것도요. 다른 사람들이 전하를 어떻게 평하든 그 말들은 귀에 담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귀를 꽉 막고 앞만 보라는 게 아닙니다. 안 좋은 말들과 눈들은 굳이 마음에 담을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 거 신경 쓰면 상처 받는 건, 결국 형님 뿐이니까요. 형님은 선정을 베풀고 계십니다. 그걸 의심하지 마십시오. 이미 저와 다른 사람들은 형님을 성군이라고 생각합니다. 파이팅!」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생전 이런 격식 없이 경박한 서간은 받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진심이 와닿는다.

격식이 없기 때문에.

“그나저나······.”

융은 파이팅이란 단어를 들여다봤다.

기억이 날 듯 말 듯 하다.

어디선가 들은 것도 같고··· 아니면 어디선가 본 것도 같고.

“상선.”

“예.”

“상선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는가?”

“파이팅?”

“나는 좀체 모르겠구나.”

“소신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사옵니다. 대군마마의 서간이옵니까?”

끄덕.

“대군마마께선 종종 해괴한 표현들을 하곤 하시니, 그런 표현들의 일종이 아닐지요?”

“하지만 내 분명 어디선가 들은 말 같다.”

“그러시옵니까.”

어디선가 들었는데도, 봤는데도 불구하고 선뜻 기억이 나지 않는 건 학문이 모자라기 때문이라고 밖에 해석 할 수가 없었다.

융은 고개를 돌렸다.

마침 볕이 좋다.

“오늘은 주강(낮에 하는 강의)을 열어야겠으니 경연관들에게 전하라.”

상선은 화들짝 놀랐다.

벌써 경연을 폐하신 지 반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마지막 경연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경연을 폐하면서 전하께서 하셨던 말씀은 기억난다.

“경연은 신하가 군주를 길들이기 위한 수단이니 나는 그 뜻에 부합하지 않겠다.”

그러고는 줄곧 경연을 폐하셨었다.

대간들이 누차 경연에 나오시라 간언해도 말이다.

한데 갑자기 경연이라니······.

그렇다면 경연(經筵)은 아닐 게 분명했다.

“경사를 맞아 경연(慶宴)을 베푸시려는 것이옵니까?”

“주강을 열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당연히 강론을 하는 경연(經筵)이지.”

말잇못 상태에 빠진 상선을 두고 융이 피식거렸다.

“왜, 과인이 경연에 나아가겠다니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인가?”

“그, 그것이 아니오라······.”

“성현의 말씀에 그 어떤 배움도 필요 없는 것은 없다고 하였다. 하물며 나는 학문이 비루하기 짝이 없으니, 지금 이 파이팅이란 표현도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 것이 아니겠느냐. 게다가, 조금이나마 앎이 넓어져야 치국이 용이할 것이 아닌가.”

“하, 하오면 속히 경연청에 이르겠사옵니다.”

“그리 하라.”

상선이 물러가고 융은 서간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생각해보면 희한한 일이다.

경연을 반겨서 자발적으로 한 적은 없었으니까.

‘그보다, 경연관들은 파이팅이란 말을 알지 모르겠구나.’

알아야 할 텐데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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