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115화 (115/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15화>

    정해진 대답 들려주기

    ***

    사람의 감정은 때론 복잡하다.

    단적인 예로, 학자들은 아직까지도 사랑에 대한 정의를 정확하게 내리지 못 했다.

    고대의 철학자 플라톤이 사랑의 의미를 여러 갈래로 세분화했고, 이후 세대의 학자들 역시 사랑의 의미를 여러 갈래로 구분지었지만, 모두들 정확한 정의는 아니었다.

    사람의 감정이란 게 그렇다.

    일례로 푹푹 찌는 한여름에 한 달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와 보호자들이 있다.

    환자가 살아날 가능성은 0.7% 미만.

    남은 시간은 28일.

    이들은 못 지킬 약속인 걸 알면서도 슬픔을 꾹꾹 눌러참고 ‘겨울에 온천에 가자’, ‘스키장에 가자’, ‘동짓날 팥죽 먹자’ 등등의 작은 약속들을 한다.

    못 지킬 걸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또 다른 예로 부모상을 당한 자식이 있다.

    여태 못 한 효도와 불효한 일 때문에 괴롭지만 타인을 만날 땐 내색하지 않는다.

    억지로 웃고, 농담도 한다.

    하지만 우연히, 아주 우연히 부모님이 좋아하던 키워드가 문득 떠올라 왈칵 눈물을 쏟곤 한다.

    이처럼 사람의 감정이란 건 때론 직설적이지 못 하고, 또 때로는 직설적이다.

    형님도 그랬다.

    방금 근정전에선 무섭게 백관들을 호령하면서 수십명이 넘는 장차관들을 일제히 해고 시켜버렸던 형님이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형님은 근정전에서 장차관들을 삭직하라는 말과 함께 근정전이 술렁이자, 그 술렁이는 분위기를 가라앉히지도 않은 채 허둥지둥 근정전을 벗어났다.

    감정이 복받쳤기 때문일 수도 있겠고 후환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서일수도 있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감정적으로 아직 완전한 상태는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런 형님을 따라가서 ‘괜찮습니까?’ 묻는다 해도 위로가 될 것 같진 않았다.

    마찬가지로, ‘저놈들은 모두 개새끼들이었습니다. 개가 짖는다고 따라서 짖을 필요는 없습니다.’ 함께 욕한다 해도 위안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고통은 상대적이다.

    사람의 심적인 부담감 역시 상대적일 수 밖에 없었다.

    같은 의미에서 형님의 정확한 상태도 모르는 내가 위로와 위안을 한다고 해서 진정어린 위로와 위안이 되는 건 아니었다.

    나는 당사자가 아니니까.

    그렇다고 묵묵히 지켜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방금은 욱하는 마음에, 참았던 분노가 한꺼번에 토해져서 비교적 씩씩한 모습을 보여줬을진 몰라도, 그게 찰나에 불과하다면 또 다시 마음의 문이 닫혀버릴 테니까.

    고민하던 나는 한 가지 수를 떠올렸다.

    답정너라는 신조어가 있다.

    답은 정해졌고 넌 대답만 하면 돼!

    청자에겐 부정적인 의미인 신조어였지만 이 답을 절실히 원하는 화자에겐 간절 할 수도 있었다.

    그런고로.

    나는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답을 절실히 원하는 화자에게 정해진 답을 들려주고 싶었다.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서 그 답을 들려주고 싶었다.

    광화문에서, 퇴궐하는 관리들을 붙잡고 이 미친짓을 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광화문.

    “서, 서간(편지) 말입니까?”

    가장 먼저 내 눈에 띈 건 역시 장곤 선생님이었다.

    스승인 김굉필과 다른 동문 분들과 퇴궐하던 장곤 선생님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역력했다.

    “네, 서간.”

    “하오나 갑자기 서간이라고 하오시면······.”

    “상소를 말씀하시는 것 같네.”

    서간이라는 단어를 계속해서 되뇌는 장곤 선생님에, 선생님의 동문인 공서린이 말했다.

    왠지 모르지만 어딘가 모자라다는(?) 평이 있는 내가 서간과 상소도 구분 못 하는 줄 아셨던 모양이다.

    약간 욱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잠시.

    지금은 화급을 다투는 때다.

    “아뇨, 상소가 아니라 서간, 서간.”

    “한데 갑자기 서간이라니 어인 말씀이시온지······.”

    그 똑똑한 장곤 선생님도 쉽게 이해가 안 되시는지 연신 되묻는다.

    임금에게 올리는 글월이란 게 상소와 상언 외엔 전무하다시피 하니,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으시긴 하겠지.

    “지금 전하께서 심적으로 많이 힘드신 것 같습니다.”

    장곤 선생님과 다른 동문 분들도 고개를 주억거리신다.

    “그럴만도 하시지요.”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상태가 더 악화 될 것 같아서··· 뭐랄까요······.”

    쉽게 표현하면 응원 편지다.

    하지만 이 말을 이 사람들이 알아 듣게 설명할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시간이 급하니 되는대로 내지를 수 밖에 없었다.

    “그, 탄핵소는 있지만 칭찬소? 라고 해야 될까요.”

    “칭찬소요?”

    “예. 임금을 비난하는 탄핵소나 상소 같은 건 있지만, 칭찬하는 건 따로 없잖아요.”

    있긴 하지만 대부분 상소를 쓸 때, 첫머리를 장식하는 수식어에 불과하다.

    가뭄에 콩 나듯 임금의 선정을 반기는 상소도 올라오곤 하지만, 말했듯 가뭄에 콩나듯 올라온다.

    가뭄에 콩나듯 올라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큰 의미가 없다.

    “그렇···지요? 한데 그건 어찌?”

    “전하께서 듣고 싶어하시는 말은 어쩌면 칭찬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서 지금 힘들어하시는 전하께 저희가 그 칭찬소인지 하는 걸 올려서 원하는 대답을 들려드리자는 말씀이십니까?”

    “바로 그거죠. 선생님이나 다른 분들도 살면서 듣고 싶었던 말이 한 번 쯤은 있으셨을 거 아니예요. 임금이라고 다를까요?”

    “효과가 있을지요?”

    “효과가 있다, 없다 장담은 못 하지만 가만히 있는 것 보다는 듣고 싶은 말이라도 들려 드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하오나 권력자에게 듣고 싶어하는 말을 들려주는 걸 세상에선 간신이라고 말하곤 하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권력자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들려주는 건 간신이다.

    하지만 임사홍이 간신인가?

    간신이란 평은 있었지만 나는 그를 간신이라고 보진 않았다.

    마찬가지로.

    “맞는 말씀입니다. 권력자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들려주는 건 간신이죠. 하지만 권력자가 아니라 인간 이융이 듣고 싶은 말을 들려주는 것도 간신이겠습니까?”

    임금의 이름은 함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오죽하면 피휘(避諱)까지 할까.

    그런 내 입에서 임금의 이름이 나오자 장곤 선생님과 다른 동문 분들이 일제히 부복했다.

    “어, 어찌 성명을······.”

    “성명이라고 생각하니까 성명인 겁니다. 권력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래서 권력자에게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게 아니라 친구에게, 형에게, 동생에게 듣고 싶은 말을 해주자는 겁니다.”

    “저, 전하가 어찌 벗일 수가 있사옵고 형일수······.”

    답답한 소리를 하시는 공서린에, 나와 이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김굉필이 나섰다.

    “대감의 말이 틀린 것이 하나 없다.”

    “스, 스승님.”

    “형이상(形而上)의 관점에서 보면 하늘과 땅도 결국 하나의 사물이니라. 어찌하여 근본은 버리고 말단만 좇아, 그 근본을 천 갈래 만 갈래로 나누고 쪼갤 수가 있겠느냐? 결국 천하의 사물에 이치가 있다 한들 나눔이 있으니 대감께서 하신 말씀이 이와 같은 것이다.”

    초조한 내 마음과 달리 김굉필의 현답(?)을 들으니 반사적으로 해석을 하게 된다.

    천하의 사물에 이치가 있다.

    ‘이건 절대적인 걸 말하는 거겠고.’

    천하의 사물에 이치가 있지만 나눔이 있다.

    ‘이건 그 절대적이란 것도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건가?’

    아, 머리 아프다.

    이런 건 질색인데.

    “근본을 보아라. 지금 너는 말단만 좇고 있는 것이니 대감이 말하는 근본이 무엇이겠느냐.”

    “스승님과 동문들 앞에서 민망한 일이옵니다.”

    이건 뭐, 도사들이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써주겠단 건데 말겠다는 건데!

    라는 생각과 함께 김굉필이 말한다.

    “소인들이 어찌하면 되겠사옵니까?”

    써주겠단 거군.

    “어찌하라는 건 아니구요. 그냥 있는 그대로, 딱 있는 그대로 전하께서 잘 하신 점 여기다 써주시겠습니까? 여러분들 말고 동참하실 분들이 더 있으면 좋구요.”

    “아무···거나 말입니까?”

    “뭐가 됐든 좋습니다. 아무거나요.”

    김굉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이 응원 편지(?)를 특정 계층에게만 받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스승님. 뭘 써야 하겠사옵니까?”

    “있는 그대로라 하셨으니 어려울 게 있겠느냐.”

    “종두도감의 일은 칭송할 만한 일이었으니 그걸 적음도 좋겠습니다.”

    “그렇겠구나.”

    사제들의 대화를 뒤로한 채 나는 곧장 저잣거리로 향했다.

    ***

    강녕전.

    “며칠인가?”

    근정전에서 돌아온 임금은 여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축 쳐진 채로 앉아있었을 뿐이었다.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 임금이 불안했지만 일개 내시인 상선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임금의 부름이 있을 때까지 묵묵히 그 곁을 지켰다.

    그렇게 두시진.

    임금이 드디어 운을 뗐다.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맥락 없는 말에 처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며칠이라니···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내 자폐를 한 지 말이다.”

    “달포 정도 되었사옵니다.”

    “달포라. 길었구나.”

    “아뢰옵기 송구한 말씀이오나 이제 전하께서 신병을 떨치고 일어나셨으니 참으로 조선의 홍복이라 아니 할 수가 없사옵니다.”

    상선의 말에 융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내가 잘 한 일인지 모르겠다.”

    “···”

    “상선.”

    “하문하시옵소서, 전하.”

    “내가 잘 한 것이냐?”

    내시부의 일원이면 임금의 보필이 우선이다. 하지만 중립을 지킬 줄도 알아야 한다.

    그게 숙명이다.

    중립을 지키지 못 하는 내시들은 금방 궐에서 쫓겨나거나 비참한 최후를 겪는다.

    그걸 수십년 궐밥을 먹은 상선이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간절히, 그리고 절실한 얼굴의 임금에 상선은 감히 이번에도 중립을 지킬 순 없었다.

    “잘 하셨사옵니다, 전하.”

    임금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안도의 한숨일지 탄식일지 처선으로선 알 수 없었다.

    “앞으로가 걱정이다. 유생들이 읍소를 할 테고 내 답이 없으면 이제 권당(시위를 위해 하는 휴학)을 하겠지. 도처에선 탄핵소가 빗발칠 것이다.”

    처선은 임금의 독백으로 대강이나마 짐작 할 수 없었다.

    임금이 비난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무어라 말하고 싶었지만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날 비난하겠지. 날 비난하고 날 헐뜯겠지. 사람 둘 이상 모였다하면 임금이 폭군이라 수군거릴 것이다. 정승과 재상을 삭직한 임금이 여태 누가 있었단 말이냐.”

    “···자책하지 마시옵소서. 전하께서 그것이 최선이었다면 최선인 것이옵니다. 어찌 후회를 하시옵니까.”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넨 처선은 융을 흘겼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임금의 눈가에 흐르는 건 분명 옥루였다.

    그는 잠자코 숨 죽인 채 임금의 흐느낌을 들었다.

    그저 듣기만 했다.

    그때였다.

    문이 살짝 열리더니 문차비가 손짓으로 상선을 불렀다.

    융의 눈치를 살피던 처선이 종종걸음으로 문차비에게 다가갔다.

    “어인 일이냐?”

    “밖에 진성대군께서 드셨사옵니다.”

    “대군께서?”

    “예.”

    처선은 임금을 흘긴 채 말했다.

    임금이 그 누구보다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진성대군임은 알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지금 전하께서 누굴 알현 하실 수 없을 듯 하니 날이 밝거든 찾으시라 아뢰거라.”

    “하오나 상언(백성이 올리던 글)을 들고 오셨다 하여······.”

    “대군이 직접 말이냐?”

    “예.”

    상소와 상언은 승정원에서 처리하곤 한다.

    그걸 아무런 권한이 없는 대군이 갖고 왔음이 의아했지만, 오히려 아무런 권한이 없는 대군이 가져온 상언이 전하께는 또 다른 위로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으로 뫼시거라.”

    “전하께서 윤허하셨는지······.”

    “전하께 아뢰면 다음에 찾으라 전할 것이 분명하다. 속히 뫼셔라.”

    “예.”

    잠시 후.

    “전하. 저 왔사옵니다.”

    “진성이냐?”

    “예.”

    “내일 찾아오면 안 되겠느냐. 내 할 게 좀 있느니라.”

    “하오면 여기 놓고 가겠습니다.”

    상선은 대군이 건네는 두루마리들을 낑낑거리며 침소로 옮겼다.

    “무엇이라더냐?”

    “그건 신도 잘 모르겠사오나 상언이라 하옵니다.”

    “거기다 놓고 상선도 이만 퇴궐하라.”

    “···예.”

    머잖아 상선도 물러갔다.

    침소에는 그 혼자만 남게 되었다.

    융은 한동안 창밖을 응시했다.

    그러다 문득 상선이 올려놓고 간 상언이 눈에 띄었다.

    조심스레 손을 내뻗은 융은 무작위로 상언 하나를 집어 들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