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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14화 (114/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14화>

    주상전하 납신다!

    ***

    “주상 전하 납시오-!”

    고요한 가운데 들려온 갑작스러운 가갈.

    멍석을 말고 읍소하던 우리는 모두 놀라서 토끼 눈을 한 채 서로만 바라봤다.

    새벽녘부터 해가 중천에 뜬 지금까지.

    아무리 읍소를 해도 침소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하다못해 내관을 보내 가타부타 말씀을 하실법도 하건만, 그런 일련의 조치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몇 시간 동안 반응(?)이 없던 침소에서 형님이 나오고 계시다니 모두들 목 빠져라 기다렸던 순간임에도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놀라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형님이 모습을 드러내셨다.

    익선관을 곱게 머리에 올리고, 용포의 옷매무새를 잘 다듬은 차림새였다.

    익선관과 곤룡포 모두 임금이 평상시에 입는 옷들이었지만 감회가 남달랐다.

    “전하!”

    가슴이 벅찬 감동을 느낀 것도 잠시.

    장곤 선생님의 스승이신 김굉필이 가장 먼저 고개를 조아렸다.

    “신들이 불민하여 전하의 근심을 미처 헤아리지 못 하였으니 죽어 마땅한 대죄를 저질렀사옵니다. 죽여주시옵소서!”

    “죽여주시옵소서.”

    김굉필의 선창에 나와 함께 읍소하던 모두가 죽여달라 외쳐댄다.

    여전히 말이 없던 형님은 그들을 쓰윽- 훑어보고는 뒤늦게 입을 열었다.

    “내가 경들을 죽이긴 왜 죽인단 말이냐. 대관절 아침 나절부터 이 무슨 소란들인지 모르겠다.”

    “···?”

    그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씀하시는 형님에,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부은 것 같은데······.’

    라면이 있을 턱이 없다.

    설사, 있었더라도 어젯밤부터 해가 중천에 뜬 지금까지 강녕전에 죽치고 있었다.

    수라가 들어갔다면 분명 봤을 것이다.

    눈에 안 띌 수가 없거든.

    한데 지금껏 수라가 들어간 적은 없었고, 수라가 안 들어갔으니 당연히 섭취한 음식물도 없으실 것이다.

    그런데도 얼굴이 탱탱 부어 있는 것 같다.

    ‘울었나?’

    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설마.

    우셨다면 분명 지금도 여운이 남아 계실 터였다. 그런데 겉보기로는 아무렇지도 않으시다.

    하신 말씀도 그렇잖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침 나절부터 이 무슨 소란들인지 모르겠다’라고.

    뭐, 좌우지간.

    “전하. 신을 벌해주십시오.”

    어느 새 고요해진 강녕전 뜰에서 던진 내 말에, 형님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그는 조금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내뱉곤, 오히려 되물었다.

    “너를 어찌 벌하란 말이냐?”

    “예?”

    “무릇 벌이라 함은 죄가 있는 사람에게 내리는 것이지,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사람에게 벌을 내린다면 그게 무고가 아니고 무엇이냐.”

    “하오나 신은 전하의 교지와 병부 없이 따로 군사를 일으켜서 조정 대신들을······.”

    “그건 내 명이지 않았더냐.”

    “···?”

    어리둥절함을 넘어 인지 자체가 안 됐다.

    나와 함께 지금껏 읍소를 하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지, 형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획! 내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 눈빛들이 마치, 너 어명없이 군사 일으켰다며?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억울··· 아니, 따지고 보면 억울할 것도 없지.

    어명 없이 군사를 일으킨 건 솔직히 관점에 따라서가 아니라 대놓고 역적질이다.

    내가 비록 왕족이라도, 형님과 우애가 좋다고 해도 보는 눈들이 있어서 최소한 연금형 정도는 받아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아니, 연금형이 뭔가.

    연금형 받으면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를 골백번 외쳐대야 할지도 모른다.

    참형을 연금형으로 감형해준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어명이었다면 감형이고 나발이고 연금형이고 지랄이고 모두 없던 일이 된다.

    “아니, 그게···그랬···었을까요?”

    어리둥절함에 밑도끝도 없는 대답을 하자 형님의 입꼬리가 씩 올라간다.

    “그랬다. 설령 안 그랬대도 그랬다.”

    사적인 자리에서나 형님이지 지금은 신하들이 보는 공적인 자리다.

    나는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경들은 들어라.”

    “하교하시옵소서.”

    “경들 또한 진성과 자죄를 청하고 있다만, 진성에게 죄가 없는 것처럼 경들에게도 진실로 죄가 없다. 모두 과인이 부덕한 소치다. 일어들 나라.”

    형님의 말에 모두가 미적거렸다. 그 모습에 형님이 피식거렸다.

    “어명이니라. 모두 일어들 나라.”

    또 한 번의 다그침에, 모두들 못 이긴 척 일어났다.

    장시간 엎드려있거나 무릎 꿇고 있었기 때문인지 순간적으로 휘청거리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보통 이 정도 앉아 있으면 다리가 저리기 마련인데, 아예 감각이 없다.

    그냥 힘이 안 들어간달까.

    내가 휘청거리는 모습에 상선 대감이 후다닥 달려와 부축을 해줬다.

    “내 편전에 거둥··· 아니지. 도승지 있는가.”

    도승지 김감은 한 세시진 전 쯤.

    소식을 듣고 풍원위 임숭재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불쑥 손 하나가 올라온다.

    “예. 소신 김감. 여기 있사옵니다.”

    “백관들을 모두 부르라. 내 근정전에서 하교할 것이 있다.”

    “그리하겠나이다.”

    앞장서는 형님을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자, 형님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모두들 안 따르고 뭘 하는가?”

    ***

    근정전.

    백관들이 근정전에 모이는 건 조회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뿐이다.

    그런 근정전에 조회나 특별한 행사가 없는데도 백관들이 꽉 들어찼다.

    모두의 얼굴에는 근심이 한가득이었다.

    도살장에 끌려온 소 같다고 하면 적절한 비유가 되려나?

    ‘잘못한 게 없으면 저러지도 않을 건데, 켕기는 게 있으니까 저러지들.’

    물론 나는 그들을 조소했다.

    “한데 대감.”

    나와 같은 반열에 있는 임숭재다.

    “예?”

    “어젯밤에 하옥한 죄인들은 어찌 방면하라 하셨을까요?”

    임숭재의 말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근정전으로 행차하시던 형님은 금부도사 안처직에게 명해, 간밤에 내가 하옥시킨 죄인들을 모두 방면하고 근정전으로 모이게 했다.

    임금의 말에서 방면이란 말이 떨어졌으니 죄인의 신분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런진 몰라도 뒷통수가······.

    ‘힉.’

    슬쩍 고개를 돌리자 수십쌍이 넘는 눈들이 날 향하고 있다.

    모두 내가 간밤에 잡아들인 사람들이다.

    “그건 저도 잘··· 따로 생각하신 게 있으시니 그랬겠죠?”

    “그렇긴 하겠습니다만 괜히 대감께서 곤욕을 치루는 건 아닐는지······.”

    이미 내 뒷통수는 곤욕을 치루고 있다.

    너무 따갑다.

    “모두 모였는가?”

    “그러하옵니다.”

    형님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근정전 뜰에 모인 기백의 관리들을 하나, 하나 눈에 담으시는 모습이었다.

    “내 갑자기 신병이 도져 식음까지 전폐하고 폐인처럼 지낸 시간이 보름이 지났으나, 마침 깨우치는 바가 있어 이리 자리를 마련하라 했다.”

    “전하께오서 드디어 정전에 거둥하심은 실로 열성조의 보우가 지극한 까닭이니 조선의 홍복이옵니다.”

    나와 함께 읍소했던 좌의정 허침이다.

    “그런가.”

    “예.”

    허침을 흘긴 형님이 영부사 성준을 바라봤다.

    “영부사.”

    “하교하시옵소서.”

    “간밤에 곤욕을 치렀다 들었느니라. 노구의 몸으로 고초를 겪었을 테니 내 미안한 마음이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정말로 어명이었사옵니까?”

    성준의 대답이 아니었다.

    헌납 김극성의 것이었다.

    아무래도 혈기왕성한 나이에, 창졸간에 역적(?)의 신분으로 끌려갔다가 다시 어명으로 풀려나니 죽었던 기세가 다시 살아나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형님이 강녕전에서 ‘그건 내 명이었다’라고 말씀하시긴 했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황상 그럴 리가 없다.

    애써 잡아들인 사람들을 도로 방면했다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잖은가.

    “대소신료들과 문무백관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큰 죄인줄 아오나, 전하께서 신을 헌납에 제수하셨사옵고 언관의 소임이 직언이니 말을 아니 할 수 없겠사옵니다. 참말로 어명이 있었던 것이옵니까?”

    “으음.”

    형님은 얕게 침음만 했다.

    획!

    그런 형님의 모습에 김극성이 고개를 돌려 날 직시했다.

    마치 잡아 먹을 것처럼.

    “신들이 돌아가는 정황을 보면 결단코 어명이 있을 수가 없었사온데 어명이라 하시오니 이를 믿지 않을 도리는 없겠사오나 혹 어명이 아니라 진성대군의 독단이었다면 이를 벌하지 않을 수가 없사옵니다. 대군의 신분으로 군사를 일으킨 것은 가히 가벼운 일이 아닐뿐더러, 어명 없이 조정 대신들을 잡아 들이는 것은 임금을 기만하는 행동이옵니다. 만약 어명이 없었던 것이라면 속히 진성대군을 벌주시옵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으소서.”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신 또한 헌납의 말이 온당하다 사료되옵니다. 어찌 진성대군이, 대군의 신분으로 군사를 일으킬 수 있었겠사옵니까? 이는 전하의 총애를 바탕으로 스스로 자만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옵니다.”

    얼씨구.

    박삼길이 어제는 아무 말도 못 하더니 입이 살았다.

    “정녕 그리 생각하는가?”

    “송구하오나 신들은 그리 생각하옵니다. 이는 어명이 아니오라 진성대군의 독단이었사옵니다.”

    “음··· 경의 말을 듣고 보니 내 시상이 떠오른다. 지필묵좀 가져오라.”

    뜬금없이 시?

    대신들이 어이없어 하건 말건, 상선 대감이 지필묵을 가져오자 형님은 앉은 자리에서 일필휘지로 글을 써내려갔다.

    “헌납은 앞으로 나오라.”

    김극성이 어리둥절해하며 앞으로 나오자, 형님은 ‘내 앞까지 오라.’말했다. 김극성이 망극해하면서 어좌 바로 앞에 가서 무릎 꿇자, 형님은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글을 건넸다.

    “큰 소리로 낭독하라.”

    “예?”

    “헌납이 목소리가 청아하고 또한 크니 백관들이 모두 들을 수 있게 읽으라.”

    “아, 예······.”

    김극성이 곧 종이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생각 없이 글을 읽어내려갔다.

    “구시화······.”

    그러다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퍼뜩 들어 형님을 바라보았다.

    형님은 아무 표정 변화 없이,

    “읽으라.”

    꿀꺽.

    “하, 하오나······.”

    “읽으라.”

    형님과 김극성의 반응에 모두가 고개를 빼곰이 내밀고 형님이 막 써갈긴 시를 궁금해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구, 구시······.”

    “읽으라 하지 않느냐!”

    구시화지문(口是禍之門)

    입은 곧 재앙의 문이요.

    설시참신도(舌是斬身刀)

    혀는 곧 몸을 베는 칼이다.

    김극성의 시 낭독이 끝나자 근정전엔 침묵이 내려앉았다.

    물론.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 없었다.

    글자(文)를 보고 해독 하는 건 가능하지만, 아직 학식이 부족해서 말(言)로 듣는 걸 해석하는 건 아직까진 어렵거든.

    “너의 혀가 이 시처럼 곧 몸을 베는 칼이 될 듯 한데 어떠한가?”

    형님이 감상을 묻자, 김극성은 마른 침만 꼴깍거렸다.

    김극성의 모습을 보면 시가 감동적인 건 아닌 것 같다만, 역시 잘 모르겠다.

    “···”

    “네놈이 감히 어명을 의심한단 말이냐? 내 어명을 내렸다지 않았더냐. 진성에게, 진성으로 하여금 너희들 모두를 잡아들이라 어명을 내렸다고, 분명 내 어명이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털썩.

    “소, 송구하옵니다. 신은······.”

    “정황상 어명은 없었으니 독단으로 일을 벌인 진성을 벌주라? 그래, 어떤 벌을 주면 되겠는고? 명색이 대군의 신분이니 참할 순 없겠다. 그를 연금에 처하면 되겠는가? 그리하면 되겠구만. 다만 네놈이 감히 종친을 능멸했으니 그 죄를 묻지 않을 수도 없겠다. 아니 그런가?”

    “···”

    “내 간밤의 일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여 너희를 풀어준 것 같으냐? 내 너희를 어여삐 여겨 풀어준 것 같냔 말이다.”

    김극성은 말없이 고개만 조아리고 있었다.

    내가 김극성이었어도 입을 꾹 다물 수 밖에 없었을 것 같다.

    어쨌건, 연신 씩씩거리던 형님이 이번엔 영의정 유순을 바라봤다.

    “영상.”

    “예, 전하······.”

    “신문고는 어찌 대체하기로 했소?”

    “그게······.”

    “영부사.”

    “예, 전하······.”

    “어찌 대체하기로 했소이까?”

    “···”

    “우상.”

    “···예, 전하.”

    “부민고소금지의 가부를 물으라 했는데 이는 어찌 됐소?”

    “···”

    모두들 제대로 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형님은 예상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형님은 주저앉듯이 철푸덕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분노를 가라앉히시는 듯 심호흡을 몇차례 하시고는 백관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내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되는 것이냐. 너희들은 그놈의 성군, 성군 말로만 외쳐대더니 내 성군이 되고자 너희에게 일을 맡겨도 도무지 일을 하려는 기색이 없으니 어느 장단에 맞추면 되느냔 말이다.”

    거리가 조금 있어서 잘못 보이는 걸까?

    왠지 형님의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것 같······.

    ‘은데 설마.’

    잘못 봤겠지.

    “영의정 유순, 우의정 박숭질, 대사간 박삼길, 좌찬성 강귀손······.”

    형님의 입에서 조선에선 난다 긴다 하는 이름들이 하나, 둘 튀어나왔다.

    형님이 호명(?)한 사람들을 세어 보진 않았지만 자그마치 마흔명은 넘는 것 같았다.

    개중에는 내가 간밤에 잡아들인 사람도 있었고, 아닌 사람도 있었다.

    의아했다.

    왜 저들을 호명하나.

    의문은 머잖아 풀렸다.

    “그리고 영부사 성준, 내 지금 호명한 마흔 두명은 명색이 대신과 중신, 또한 정승과 재상으로 불리면서 책임감이란 전혀 찾아 볼 수 없고, 오로지 성현의 말씀만 부르짖지만 결국 지금에 이르러서 돌아본다면 성현의 말씀을 마음으로 본받긴 커녕 모방만 하고 있다. 이런 위군자들은 하루 속히 조정에서 내침이 온당하니 모두 삭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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