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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13화 (113/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13화>

    눈물이 차올라서

    ***

    뭄이 붕- 떠오르는 기분이 들고 육신은 끝없는 나락으로 곤두박질 친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깊고 깊은 나락으로, 심연 속으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심연 속.

    저 멀리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진 선비를 대하는 시간이 적으면 학문은 자연히 성글게 되는 것이고 임금의 학문이 조악하다면 치국이 어려우니······.”

    “지금 전하께서 하교하신 신문고에 관한 일은 신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빈청에 모여 논의를 거듭하고 있사오나······.”

    “부민고소금지는 선왕의 업적을 부정하는 일이니 어찌 행할 수 있겠사오며 지금 만약 부민고소금지를 찬동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진실로 군자의 탈을 쓴 소인이오니······.”

    귀를 멀게하는 아우성들.

    싫다.

    비명을 내지르고 발버둥을 쳐서라도 벗어나고 싶을 만큼 싫다.

    몸을 감싸안는 푸근함이 느껴지던 나락 속으로 떨어지던 육신이, 이 아우성들 덕에 다시 하늘로 솟구쳤다.

    그리고 대지에 내던져졌을 무렵.

    융은 눈을 떴다.

    꿈이었다.

    또 꿈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위가 고요하다. 창호지 너머로 달빛이 넘실거리는 걸 보니 아직 밤인 것 같았다.

    차라리 잠에 들었을 때가 낫다.

    굳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고, 굳이 움직이지 않아도 되고, 굳이 감정을 느끼지 않아도 되니까.

    부스럭거리며 몸을 움직인 융은 이불을 목끝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밖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우는 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앵앵거리는 것처럼 증폭돼서 들려온다.

    “후.”

    밖에서 울어대는 저 풀벌레들을 모조리 박멸하라 명하고 싶었지만 그럴 기운도 없다.

    한숨을 내쉰 그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껌뻑껌뻑.

    눈을 껌뻑이면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든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짓인가··· 아니, 차라리 이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있으면 안 되는데······.

    오만가지 잡념들이 불가의 심마처럼 괴롭힌다.

    잠을 자면 그 잡념들이 싹 달아나지만, 잠은 오지 않고 잠을 방해하는 풀벌레 소리만 요란하다.

    미칠듯한 우울감이 엄습했다.

    저 천장에 목을 매단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영원한 안식일지, 영원한 비극일지.

    자못 궁금하다.

    그러다 융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생의 끝을 궁금해하다니, 그게 임금 이전에 선비로서 할 생각이란 말인가?

    본인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기력한 느낌과 나른한 기분이 들긴 했어도 자결을 생각해보진 않았는데.

    확실히 내가 내가 아닌 느낌이었다.

    하루에도 열두번 씩 또 다른 내가 머릿속을 휘젓는 기분이다.

    꼭두새벽에는 본래의 내가.

    이른아침에는 어린시절의 내가.

    정오에는 노인이 된 먼 미래의 내가.

    오후에는 갓난아기의 내가.

    저녁에는 상상만 하던 모습의 내가······.

    그러면 안 되는데 싶다가도 축 쳐진다.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며 돌아눕던 그때였다.

    “전하. 신을 벌해주시옵소서.”

    환청은 분명 아니었다.

    침소 밖에서 나는 소리가 분명했다.

    “전하. 신을 벌해주시옵소서!”

    만사가 귀찮아졌어도 진성의 목소리를 기억 못 하는 건 아니다.

    진성의 목소리다.

    ‘진성이 왜?’

    진성의 목소리에 반가움을 느낀 것도 잠시.

    융은 의아했다.

    왜 진성이 벌을 청하고 있단 말인가?

    “상선. 상선.”

    그는 조용히 상선을 불렀다.

    “···”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부시럭거리는 인기척과 함께 오 상전(대전내관)이 대신 들어왔다.

    “왜, 오 내관이 오는가?”

    “아까 상선께서 바깥 일에 대해 아뢸 것이 있어 찾았사온데 뵙지 못 하셨사옵니까?”

    “곤하게 자고 있던 터라 보지 못 한 듯 하다.”

    당혹스런 몰골을 한 오 내관이 고개를 조아렸다.

    “지금 내가 환청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밖에 저 목소리는 분명 진성의 것인데 맞는가?”

    문밖을 흘긴 오 내관이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맞사옵니다.”

    “하면 왜 진성이 벌을 달라 청하고 있는 것이냐. 이 야심한 시간에 말이다.”

    “그것이······.”

    오 내관이 머뭇거리는 사이.

    “간적들이 전하를 교묘하게 기만하고, 역적들이 전하를 교묘하게 능멸하였음에도 전하의 처지를 헤아리지 못 한 신을 벌해주시옵소서.”

    이번에도 진성의 목소리였다.

    “어찌 된 영문이냐니까.”

    “그것이, 대군께서 군사를 일으키셨사옵니다······.”

    무기력한 나날만 보내던 융이었다.

    어떤 소식도, 어떤 소리도, 어떤 소문도 그 무기력함을 밀어내진 못 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융은 화들짝 놀랐다.

    “진성이 군사를 일으켜?”

    대군이 군사를 일으키는 건 단 하나다.

    역모.

    이 사실을 궁궐밥만 수십년 넘게 먹은 오 내관이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융이 오해할까 손까지 휘저어가며 말했다.

    “전하께오서 오해하시는 그런 건 아니옵고 다만······.”

    “다만?”

    “대군께서 간밤에 위사들을 병부 없이 동원하였사옵니다.”

    “별충위의 위사들 말이렷다?”

    “그러하옵니다.”

    융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물론 진성이 역모를 일으켰다는 생각은 꿈에도 들지 않았다.

    다만 의아할 뿐이었다.

    “어째서 말이냐?”

    “그게··· 망극한 일이오나······.”

    “어허.”

    “망극한 일이오나 동원한 위사들로 하여금 조정 대신들을 모조리 잡아 들이고 하옥 시켰다고 하옵니다.”

    인지부조화가 일어났다.

    동원한 위사들로 궁궐 담장을 넘은 것이 아니라 대신들의 저택 담장을 넘었단 말인가?

    이번에도 의아함은 남아 있었다.

    “어째서?”

    “지금 전하께서 신병을 앓고 칩거를 하는 원인이 조정 대신들의 나태함 때문인데 그 잘못을 청하기는커녕, 시시덕거리면서 불충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 명분이었사옵니다.”

    충격 때문일까, 아니면 요 며칠 사이 발생한 무기력함 때문일까.

    말 할 기운이 없었다.

    융은 손짓으로 오 내관을 쫓았다.

    오 내관이 고개를 조아린 채 물러나자, 융은 그제야 문밖을 흘겼다.

    진성의 갈라진 음성이 또 들려온다.

    왠지 모르지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왜인지는 그 자신도 몰랐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그가 두문불출하면서 침소에서만 죽치고 있던 동안에, 그 누구도 그의 안부를 물은 사람이 없었다.

    진성이 빼고는.

    “···전하. 지금 신은 참람하게도 어명 없이 군사들을 동원해, 또한 어명 없이 조정 대신들을 구금하였으니 이는 역모라 해도 과언이 아닐 대죄이옵니다. 함부로 군사를 일으킨 죄까지 벌였는데, 하물며 전하의 상태를 신하 된 도리로 헤아리지 못 한 불충을 저질렀으니 신을 벌하시옵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으시옵소서.”

    “···”

    “···그러나 신이 변명을 한다면 지금 조정의 대신이란 작자들 중에 8할은 버러지와 다름이 없는 존재들이옵니다. 어느 신하들이 임금이 병석에 앓아 누웠는데 문안하지 않는단 말이옵니까? 이뿐이라면 신이 어찌 거사를 일으킬 마음을 품었겠사옵니까.”

    “···”

    “이들은 본인들의 이익을 대의로 포장하고, 본인들의 추악함을 의리로 포장하며, 본인들의 부덕을 선비의 도리로 포장하고 있사옵고, 또한 본인들이 공무를 중단한 일을 종사를 위한 일이라 포장하고 있사옵니다. 신이 학식이 비루해서 딱히 고사에 저들을 빗댈 수는 없겠습니다만, 저들이 말하는 대의와 의리와 도리가 나라를 위한 일이 아님은 분명히 알고 있사옵니다.”

    “···”

    “신은 지금 한 달 전 일을 후회하옵니다. 전하께서 그들을 벌하겠단 말을 하실 때, 그저 조용히 있었다면 오늘의 일도 없었을 텐데 남을 헤아리는 마음은 있을지언정 가족은 헤아리는 마음은 부족했기에 결국 이런 사달이 난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신이 지금 목을 내놓고 간하건대 신의 목을 치시고, 저들의 목 또한 함께 치시옵소서. 그래서 다시 편전에 나오시옵소서. 백성들의 여망이 오직 전하께 달렸음이니 어찌 왕업을 도중에 중단 할 수 있겠사옵니까?”

    “···”

    “저들은 간악하기 짝이 없는 자들이옵니다. 생각해보시옵소서. 저의 부왕이신 성종대왕을 성군이라 추앙하옵니다. 신은 부왕을 당연히 성군이라 생각하지만, 부왕이 성군인 까닭이 저들이 말한대로 신하들의 의견을 귀 기울이고, 군신이 조화를 이뤘기 때문이라고는 생각지 않사옵니다. 하오나 저들의 말을 들어보시옵소서. 십중팔구는 부왕이 성군인 이유가 저희들 말에 귀 기울여 군신 간에 조화를 이뤘기 때문이라 말하옵니다. 하면 태종대왕은 폭군이고 세종대왕은 암군이란 말이옵니까?”

    “···”

    “저들이 말하는 성군은, 본인들의 이익을 대의로 포장하는 것처럼 본인들 말을 잘 따르고, 본인들의 의사를 존중하고, 본인들에게 최대한의 이익을 안겨주는 사람이 성군이옵니다. 그런 성군이 대관절 무슨 필요가 있사옵니까? 진정한 성군은 백성에게 성군이고, 후세에게 성군이라 불려야 성군이지, 당대의 위정자들에게 성군이라 불린다면 그게 호구가 아니고 무엇이냔 말이옵니다. 저들의 말이, 행동이 전하께 상심과 좌절을 안겼다는 것은 신은 잘 알고 있사옵니다.”

    눈물이 쏟아졌다.

    융도 잘 알고 있었다. 대신들의 행동에 대한 원인은 본인에게 있음을 말이다.

    그래서 끝까지 기다렸었다.

    내 행동으로 말미암아 저들이 겁을 먹었으니, 더 이상 칼을 빼들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기다린 것이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하지만 돌아온 건, 진성이 말한 상심과 좌절이었다. 그리고 그로인한 자폐(自閉)였다.

    “하오나 어찌 저들을 신경쓰시옵니까? 저들은 티끌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버러지 같은 존재이옵니다. 농부가 밭을 갈다 돌이 나오면 치워버리지, 돌을 신경 쓰고 돌을 어찌 처분할지 고민하는 걸 보셨사옵니까? 밭을 갈다 나온 돌처럼 치워버리시옵소서. 또 돌이 나온다면 치워버리고, 다시 돌이 나온다면 다시 치워버리고, 그래서 예전처럼 백성에게 희망이 될 수 있는 군주가 되시옵소서.”

    백성에게 희망이 될 수 있는 군주.

    융은 이 말을 읊조렸다.

    “전하께서 하신 말들을 신은 기억하옵니다. ‘나는 딱히 성군이 되고자 하는 마음은 없다. 그러나 성군의 치세를 맞은 백성이라야 모두들 잘 먹고, 잘 살고 평안하다 하니 그것이 내가 성군이 되고자 함이다.’ 이 말을 들은 신은 의아했사옵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백성들에게 성군이옵니다. 종두도감의 일을 보시옵소서. 열성조의 어느 군주가 두창을 다스렸겠사옵니까? 혹 다스린다 한들 어느 군주가 백성에게 베풀었겠사옵니까?”

    “···”

    “전하께서는 그 어려운 두창을 다스리셨사옵니다. 백성의 가장 큰 고통중 하나인 질병을 해결하셨으니 어찌 성군이 아니겠사옵니까.”

    성군.

    융은 이 단어가 낯설고도 익숙했다.

    편전에서 대신들은 늘 선왕을 성군이라 언급했다.

    성군이라 언급하면서, 그러니 너도 선왕 같은 성군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진성처럼 너는 이미 성군이라 말한 자는 없었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이 말을 듣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비록 행실은 성군이 못 되더라도, 성군을 갈망하는 군주를 위로하는 말.

    그래서 정말로 성군이 되고자 노력 할 수 있는 열의를 느끼게 하는 말.

    “크흑.”

    융은 혹시나 문차비들이 들을까 이불을 덮어쓴 채 꺼이꺼이 숨죽여 울었다.

    울고 또 울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도무지 울음이 멈추질 않았다.

    울음이 그칠라 치면 또 진성의 목소리가 들려와 눈물이 터져나왔다.

    융은 그렇게 동이 틀 동안 숨 죽여 울었다. 그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은 채 홀로 숨 죽여 울기만 했다.

    동이 트고도 진성과, 그와 함께 모인 신하들은 읍소를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진정하고 나가야 했다. 언제까지 저 충신들을 세워둘 순 없었다.

    애써 마음을 진정시킨 융은 오 내관에게 용포를 가져오라 명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며칠 만에 익선관도 썼다.

    만반의 준비가 갖춰지자, 융은 문을 나서기 전에 두어차례 심호흡으로 숨을 고른 채 발을 내딛었다.

    “주상 전하 납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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