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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12화 (112/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12화>

    자죄를 청하다

    ***

    문이 열린다.

    열린 문 틈 너머로 영부사 성준이 보였다.

    상석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성준은 갑주를 착용한 날 금방 알아본 듯 했다.

    일차적으로 고요하던 눈이 파르르 떨렸고 다음으로 서리가 내려앉은 것 같은 하얀 수염이 푸들거렸다.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이냐!”

    호통은 성준의 것이 아니었다.

    사랑방에 있던 헌납 김극성의 호통이었다.

    방문을 열면 성준은 날 바로 바라볼 수가 있는 상석이었지만 말석에 있는 김극성이 가장 먼저 눈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무장한 위사들이었다.

    그는 창칼을 빼든채 사랑방을 에워싼 위사들에게 버럭 호통치고는 노기띤 얼굴을 한 채 마루로 뛰어나왔다.

    그가 마루로 뛰어 나오건 말건.

    나는 느긋하게 위사들을 가로 질렀다. 그러고는 대청 아래 섬돌로 다가갔다.

    마루에 있는 김극성이 위에서 날 내려다보는 형태였다.

    나는 김극성을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헌납께서도 여기 계셨습니까?”

    위사들을 잡아 먹을 듯 노려보던 김극성은, 갑주를 착용한 누군가가 바로 나라는 걸 깨달았는지 당혹감을 감추지 못 했다.

    “아니, 대감께서 어찌······.”

    김극성을 뒤로한 나는 마루를 올랐다. 그러고는 닫힌 반쪽문 마저 열어제꼈다. 닫혀 있던 반쪽 문이 열리니 문에 가려져있던 좌측의 인사들도 훤히 눈에 들어왔다.

    우참찬 윤효손··· 형조참판 정숙지··· 대사간 박삼길 등등.

    공교롭게도 모두 한 자리에 있었나 보다.

    일이 한결 수월해질 듯 해서 무겁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진다.

    “대감. 아니, 내이포에 계실 대감께서 어찌 여기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역력한 박삼길이었다.

    사실 박삼길 뿐만이 아니라 사랑방 안에 있는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무장까지 하고 있었으니 이들의 당혹스러움도 일견 이해는 간다.

    나는 박삼길의 말에 대답을 하기 보다 그저 가만히 그들의 면면을 살폈다.

    죄인이라고는 볼 수 없는 얼굴들이다.

    이웃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호남형의 김극성.

    이웃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촌부의 그것인 성준.

    이웃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배나온 아저씨 박삼길.

    죄인들의 인상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형님을 반폐인으로 만든 건 확실하다.

    “붕당(朋黨)은 국법으로 금하고 있을 텐데요.”

    나는 그들의 면면을 둘러보다 성준을 직시하며 말했다.

    붕당.

    역알못인 나도 한 번 쯤은 들어본 말이다.

    붕당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는 소리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직접 조선에 머물면서 알게 된 사실중 하나는 원칙적으로 붕당은 역적질에 준하는 죄라는 점이었다.

    당연히 내 입에서 붕당이란 말이 나오자마자 성준의 이맛살이 구겨진다.

    “붕당이라니요. 말씀이 과하십니다.”

    “행세 깨나 하시는 분들이 영부사의 저택에 모여 있는 것이 붕당이 아니면 친목 도모랍니까? 요즘은 친목 도모를 퇴청하자마자 옷도 안 갈아입고 하나 봅니다.”

    뒤늦게 박삼길과 김극성이 옷매무새를 매만졌지만, 그런다고 관복이 도포로 바뀌진 않는다.

    “···이 누추한 곳까진 어인 걸음을 하셨습니까?”

    나는 새삼스레 성준의 저택을 둘러봤다.

    “누추하긴요. 호화스럽진 않아도 어느 궁방(왕가의 저택) 못지 않은 걸요. 근데··· 붕당이 아니면 초경이 쳤는데 다들 예서 뭘 하는 겁니까?”

    “시국을 좀 논하고 있었습니다.”

    김극성이었다.

    “시국.”

    “예.”

    “시국이라 하시니 한 가지만 여쭤보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전하께서 신문고를 대체할 방안을 마련하라 여러분께 하교한 것 같은데 지금 어느 정도까지 진행이 됐습니까? 제가 내이포로 내려가기 전··· 그러니까, 한 달 전 쯤 하교를 하셨으니 못 해도 지금쯤 이라면 8할은 방안이 마련 됐겠지요?”

    “···”

    “시국을 논하고 있다지 않았습니까? 그걸 논하고 계셨던 게 아닙니까?”

    “···”

    “한데 군사는 어찌······.”

    동문서답을 내놓은 건 대사간 박삼길이었다.

    나는 뜰을 겹겹이 에워싼 위사들을 흘기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역적들 좀 잡으러 왔지요.”

    꿀꺽.

    “여, 역적 말이십니까.”

    “예.”

    좌중의 사람들이 서로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눈치만 살핀다.

    그들을 못 마땅한 듯 흘긴 성준이 말했다.

    “어명입니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아니, 어명도 아닌데 어찌 함부로 군사를 이끌고··· 대감 말씀대로 초경이 친 지 한참이 지났습니다!”

    나는 버럭 소리치는 성준을 직시했다.

    내가 듣기로 그는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조정에 몸담은 노신이라고 들었다.

    그가 50년 넘도록 조정에 몸 담고 쌓은 업적을 부정하진 않겠다.

    진성대군이 아니라 인간대 인간으로서 어떤 일을 50년간 지속 했다는 점에서 그의 행적은 존경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행적을 존경한다고 해서 처신까지 존경한다는 건 아니다.

    지금 보이는 그의 처신 때문에라도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전하께서 칩거 중이라지요.”

    “···”

    “그게 벌써 보름이 넘었답디다. 내가 왜 그런가 하고 지난 행적을 좀 살펴봤는데··· 이, 뭐랄까요. 마음의 병? 그래, 마음의 병이 좀 생기신 듯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역적들을 처단하실 적에 제가 말린 일이 좀 있습니다. 알고 계실진 모르겠지만······.”

    “···”

    “피를 많이 보면 또 다른 피를 낳을 수 있고, 피 맛을 알게되면 또 피 맛을 보려 할 테니 중죄를 저지른 자들은 벌하되 죄가 비교적 가벼운 자들은 관용을 베풀라··· 하면서 말렸습니다. 역적의 자손들이 사진으로 내쳐진 것도 그런 까닭 때문이구요.”

    “···”

    “전하께선 제 말대로 역적들에게 자비와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한데요.”

    순간 울컥해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울컥한 마음을 가라앉힌 나는 말을 이어나갔다.

    “한데 왜 아무도 전하의 상태를 걱정하진 않는 겁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인들도 지금 전하께서 두문불출 하고 계시다 하시어 그것을 걱정······.”

    “경연을 열어라! 직언에 귀 기울여라! 성현의 말씀을 깨우쳐라! 백성을 인(仁)으로 다스려라! 사냥을 줄이고 민생을 돌봐라! 백날 외쳐대던 당신들 모두 왜 지금은 입 닥치고 있느냔 말이다!”

    “···”

    “두문불출? 전하께서 경연을 폐하면 경연을 여시옵소서 외쳐대던 작자들이 당신들이잖아! 두문불출 하시면 경연 때처럼 몰려가서 정사를 돌보소서! 외쳐야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왜, 경연은 당신들 맘대로 임금을 주무를 수 있는 수단이고, 정사는 아니라서 그렇게는 못 하는 건가?”

    “대감.”

    “박삼길이.”

    “대, 대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대간의 장관이잖아. 최소한, 전하께서 두문불출하는 게 뭐 때문인지 알아보거나··· 그 과정에서 전하께서 심적 부담을 느낀 거라면 석고대죄라도 청해서 충심을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왜, 그랬다간 모가지 달아날까봐 두려웠나 보지?”

    “마, 말씀을 가려하십시오, 대감. 대사간께서는······.”

    “차라리 솔직하게들 말합시다. 전하께서 바로 얼마 전까지 칼춤 춘 게 두려웠다고. 그래서 함부로 설쳤다간 모가지가 달아날까봐 그저 입 닥치고 있었다고.”

    “···”

    “역적이 다른 게 역적이야? 당신들 같이 하라는 일은 안 하고 권세만 탐하는 게 역적질이야. 이 역적 새끼들.”

    씩씩거린 나는 위사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이 역적 새끼들 한놈도 빠짐없이 다 잡아들여!”

    ***

    성준의 저택이 모인 열다섯 사람을 포함해 도합 마흔명을 금부에 하옥시켰다.

    갑작스런 위사들의 등장에 당황해하던 금부의 관리들은 금부도사 안처직 씨를 통해 설득(?)하고, 죄인들을 가둬둘 수 있었다.

    스마트폰도 없고 SNS도 없는 세상에서, 뭔 소식이 그리 빠른지 자정이 넘지도 않은 시간인데도 도성 내에는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것 같았다.

    억수 씨는 소문이 이렇다 저렇다 확실하게 답을 해주지는 않았지만, 똥을 꼭 먹어봐야 똥인지 아는 건 아닌 것처럼 소문이 부정적이란 건 확실해보였다.

    간밤에 위사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 중심에 진성대군이 있다. 진성대군이 어명도 없이 조정 대신들을 잡아 들였다. 그들의 죄명이 역적질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자극적인 소식에 열광한다.

    특히, 할 게 없는 이 시대에는 이만한 가십거리가 없다.

    순둥이(?) 이미지가 있는 내가 이런 일을 벌였으니 아마 이 시대에도 기자가 있었다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서 온갖 기사들을 쏟아 냈을지도 모른다.

    《진성대군! 논란의 중심에 서다!》

    《진성대군! 역적질에 가담?》

    《진성대군! 오라를 받아라!》

    자극적인 타이틀들만 왕창 뽑아서 말이다.

    뭐, 어쨌든 상관없다.

    소문이 부정적이건 긍정적이건.

    내가 조정 대신들을 어명도 없이 잡아들인 건 사실이니까.

    소문이 퍼져나가건 말건 나는 내 할 일을 해야했다.

    막 금부도사 안처직에게 죄인들의 신병을 인도한 나는 곧바로 입궐을 했다.

    입궐할 땐 당연히 무기 휴대가 금지다.

    당연히 죄인들을 잡아들일 때 착용했던 갑주나 환도는 해제한 채 입궐했다.

    광화문의 수문군들 역시 소문을 벌써 접했는지 갈팡질팡이었다.

    만약 내가 또 다른 역적질(?)을 하는 거라면 궐이 이전처럼 속수무책으로 함락되고 말 테니, 강경하게 대응을 해야할지 날 통과시켜야 할지··· 쉬이 판단이 안 서는 것이리라.

    이 부분은 의외로 쉽게 해결이 됐다.

    금부의 관리들을 금부도사 안처직을 통해 설득한 것처럼, 광화문의 수문군들은 또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금부가 설득 된 건 총신 안처직 때문이지만 광화문 수문장과는 인맥이 전혀 없는데 뭘로 설득하나··· 설득이 될까, 최악의 수엔 무력으로 넘어야 하나.

    오만가지 생각을 하던 중.

    소식을 들은 대비전에서, 생물학적 어머니가 직접 행차하신 것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유람을 떠났다가 이제 돌아와서 부모께 문안 올리려는 것인데 어찌 문을 걸어 잠그고만 있는 거냐며 수문군들을 다그쳤다.

    평소 온화하던 어머니의 호통에 수문군들은 갈팡질팡하다가, 마침내 상선 대감까지 합류(?)를 하자 마지못한 척 성문을 열었다.

    어머니께 감사 인사를 전한 나는 상선 대감과 함께 강녕전으로 향했다.

    들어보니 이 사달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게 됐는데도··· 그래서 수문군들만 해도 역모가 발생한 게 아니냐며 수군거리고 있었는데도.

    형님은 그저 주무시고 계시단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강녕전.

    사위는 고요했다.

    풀벌레 우는 소리만 이따금 들려올 뿐이었다.

    불빛 하나 없어, 빛이라고는 커다란 보름달에서 새어나오는 달빛이 전부였다.

    새벽이라 그런 건지 달빛이 서럽게 보여서 그런 건지.

    나는 왠지 처량한 느낌이 들었다.

    평소에는 크게만 보이던, 그래서 날 잡아먹을 듯 압도하던 강녕전 조차도 쓸쓸해보이기만 했다.

    그도 그랬겠지.

    쓸쓸한 강녕전처럼 쓸쓸하게 나랏일을 돌봤을 것이다.

    의지 할 곳 하나 없이.

    내가 문과생이었어도 그렇게 감성적인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건만, 고독하게 호롱 하나 밝혀둔 채 밤늦게까지 상소문을 읽었을 그의 모습이 떠올라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전하. 신을 벌해주시옵소서.”

    “···”

    “전하. 신을 벌해주시옵소서!”

    여전히 주무시는 건지 대답은 없었다.

    “간적들이 전하를 교묘하게 기만하고, 역적들이 전하를 교묘하게 능멸하였음에도 전하의 처지를 헤아리지 못 한 신을 벌해주시옵소서.”

    “···”

    대답은 없었다.

    나는 계속, 끊임없이 벌해달라 외쳐댔다.

    자죄를 청하는 건 해가 뜰 동안 계속 됐다.

    처음에는 나 혼자 시작했던 자죄였지만, 어느 순간.

    정확히는 동이 틀 무렵에는 수십명이 넘는 사람들이 나와 함께 자죄를 청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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