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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11화 (111/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11화>

    역적 성준은 오라를 받아라!

    ***

    “어, 대감. 유람을 가셨다더니 어쩐 일이시옵니까?”

    야근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구름재에는 억수 씨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날 보고 반갑게 인사하는 억수 씨였다.

    “위사들 좀 소집해주시겠습니까?”

    뜬금없는 내 말에 억수 씨는 어리둥절한 모습이다.

    말까지 더듬거린다.

    “위, 위사들을요?”

    “예.”

    “이 밤중에 갑자기 위사들은 어찌······.”

    “전원 무장해서 부탁좀 드리겠습니다.”

    무장을 달리 말하면 전투 태세다.

    이걸 십년 넘도록 칼밥만 먹고 산 억수 씨가 모를 리 없었다.

    무장이란 단어에 억수 씨가 침을 꼴깍거렸다.

    “송구하오나 어인 일인지 여쭈어도 되겠사옵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대답하기 싫어서 안 한 게 아니라 타이밍을 놓쳤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생각을 좀 정리하고 있었거든.

    “위사들을 소집하시는 거라면 혹 병부는 갖고 계신지요?”

    밤중에 위사를 소집한다+소집한 위사들을 전원 무장시킨다.

    =쿠데타.

    이건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하지만,

    밤중에 위사를 소집한다+소집한 위사들을 전원 무장시킨다+병부가 있다.

    =어명.

    한끗 차이지만 의미는 달라진다.

    그래서 물었던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병부 같은 건 없다.

    “없습니다.”

    없다는 내 말에 억수 씨는 화들짝 놀란다.

    “하면 어찌 위사들을······.”

    “역적들을 잡으려고 합니다.”

    “역적이요?”

    당황한 것도 잠시.

    억수 씨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란이라면 한 달도 더 전에 다스려졌으니까.

    그런데 병부도 없는 내가 갑자기 역적들을 잡으려 한다?

    머릿속이 복잡한 지 억수 씨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저기, 대감······.”

    “말씀하세요.”

    “이런 밤중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 그걸 떠나서 병부 없이 군사를 소집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계시옵니까?”

    “압니다.”

    “혹 호랑이 때문이옵니까?”

    호환마마란 말이 있다.

    그만큼 호랑이가 사람에게 끼치는 피해가 막대하단 말이었다.

    그래서, 군사가 함부로 도성을 횡행하면 역적으로 간주되지만 호랑이를 잡는다면 말이 달라진다.

    그건 합법적인 군사 활동이 되거든.

    억수 씨 딴에는 실낱 같은 희망을 품고 물었던 것 같지만 역시 호랑이도 아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쥐새끼?

    “아닙니다.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송구하오나 지금 대감을 추포 할 수도 있사옵니다.”

    “압니다.”

    “그런데 어찌 이러시옵니까?”

    “제 선택을 바로 잡으려구요.”

    “서, 선택이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절대 위사들로 경복궁은 안 넘습니다.”

    경복궁은 넘지 않는다는 내 말에 잠시 고민하던 기색을 보이던 억수 씨가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겠사옵니다.”

    ***

    초경(저녁7~9시)이 치자 영부사 성준의 저택으로 일단의 무리가 우르르 몰려들었다.

    퇴청하자마자 성준의 저택을 찾은 것인지 환복하지 못 한 사람들도 상당수였다.

    사랑방의 상석엔 영부사 성준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밑으로는 9명의 사람들이, 마치 어미 새가 쥐어주는 먹이를 기다리는 새끼 새처럼 시름이 가득인 채로 성준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그 면면만 보자면 모두 실세라 해도 과언이 아닌 자들이었다.

    “전하께선 아직도 두문불출하고 계신가?”

    성준이 운을 떼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들려왔다.

    “예. 장 내관에게 들으니 오늘 역시 마찬가지였답니다.”

    “허어.”

    도처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성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러 임금을 섬겼다.

    세조대왕의 치세를 누리던 초창기에 소과에 급제했고 바로 2년 뒤에 식년 문과에 급제했으니 출사한 세월만 따지자면 5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나라의 녹을 먹으며 산 셈이다.

    50년.

    절대 적지 않은 세월이다.

    하물며 50년 가깝도록 나라의 녹을 먹고 살았으니 그 기간 만큼 여러 임금을 섬길 수 있었다.

    하지만 단언컨대.

    단언컨대 지금 같은 임금은 없었다.

    역대 임금들을 일반화 할 순 없었지만 금상처럼 감성적인 임금은 없었다.

    당장 선대왕만 해도 여염집 선비들이나 샌님들 조차 성군이라 칭송했었고, 신하의 의견에 귀 기울일 줄 알았다.

    하지만 금상은 달랐다.

    매사 감성적이었고 변덕이 심했다.

    이 장단에 맞추면 갑자기 저 장단을 부르고, 저 장단에 맞추면 다시 이 장단을 부르는데, 또 거기서 갑자기 버럭 신경질을 낸다.

    50년 넘도록 나라의 녹을 먹으며 산 성준 본인 조차 금상의 변덕과 감성이 두려운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 할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매도 먼저 맞는 게 더 나은 것처럼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능지처참이니 거열이니··· 역적들을 죄 죽임했던 금상은 두문불출 하고 계셨다.

    대소신료들로서는 두려울 수 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저렇게 웅크리고 계셨다가 또 칼을 들지 모르니까.

    그래서 그 칼이 언제 본인들을 향할지 모르니까.

    오늘 긴히 여러 사람들을 그의 집으로 부른 것은 이 때문이었다.

    대책을 논하기 위해서.

    “이러다가 정말 또 피바람이 부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참찬 윤효손의 말을 받은 건 형조참판 정숙지였다.

    기개가 곧다고 알려진 인물이었지만 그 역시 두려운 건 마찬가지인지 얼굴이 그늘이 져있었다.

    “미관말직을 지내는 자들도 그걸 걱정하는 듯 합니다. 갑자기 피바람이 불면 본인만 죽어나가는 게 아니니까요.”

    “허··· 이거, 두렵다고 사직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강귀손의 말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선비란 강직해야 한다.

    불의에 맞서는 건 물론이지만, 임금의 진노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임금의 진노가 두렵다고 모두 다 내려놓고 도망간다면 그게 무슨 선비겠는가.

    “아.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말입니다.”

    사간원 헌납 김극성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김극성에게로 모아졌다.

    “뭘 말이오?”

    “이장곤이 말입니다. 이장곤이도 슬슬 단속을 해야하지 않나 싶어서······.”

    “무슨 소리요. 전하께서 가장 총애하는 신하가 이장곤이외다. 단속이라니··· 크흠.”

    김극성의 말에 부르르 몸을 떤 박삼길이 김극성을 힐책했다.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했다.

    모두들 ‘시국’을 위해 모인 것이지만 혹시 의리를 저버리는 이들이 쪼르르 임금에게 달려가 이 말을 아뢸지도 몰랐다.

    임금을 욕보이는 말은 되도록 삼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장곤이 요즘 설치는 꼴이 금상을 더 자극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박삼길의 힐책에도 김극성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더 이상은 박삼길도 제지하지 않았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장령(김준손)과 사간(최해)께서 다른 언관들이 일심해서 연명소를 올리니 곧바로 이장곤이 상소를 올려서 일을 그르칠 뻔 하지 않았겠습니까?”

    다시 한 번 탄식이 새어나왔다.

    최근에 김준손을 필두로 12명의 사간원과 사헌부 관리들이 상소를 올린 적이 있었다.

    언관들 딴에는 임금이 경연을 폐한 지 오래됐으니 경연을 열고 하루, 하루 성현의 말씀을 깨우치면 깨닫는 바가 생길지도 모르고, 또 언제까지 경연을 폐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합당한 상소였다.

    그런데 이장곤이 곧바로 반박 상소를 올리면서 열두명을 졸지에 간신으로 매도했다.

    임금의 입맛에 맞는 말만 하는 자가 간신이지, 직언을 한 열두명이 어찌 간신이란 말인가.

    김극성의 말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긴 하지.”

    “그뿐입니까? 전하께서 신문고를 대체할 방안을 마련하라 빈청에 문의했지, 선비들에게 구언(임금이 바른 말을 구하던 일)한 것도 아닌데 왜 이장곤이가 나서서 부채질을 하냐 이 말입니다.”

    모두들 몸을 사리고 있는 판국에 이장곤은 금상의 총애를 등에 업었다는 자만 때문인지 상소를 남발(?) 하고 있었다.

    앞선 반박 상소가 경연을 재개하라는 열두명 언관들의 충언을 간언(間言)으로 매도했다면 이번에는 조정에 열의 없는 자들이 태반이라 전하께서 하교한 일이 여태 이뤄지지 않았다며 빈청의 당상관들을 무능력자로 매도해버렸다.

    못 해서 안 하는 게 아니다.

    조정의 공무란 우선과 차선이 존재한다.

    우선적으로 해결할 일과 나중에 해결할 일이 존재한단 말이다.

    그리고 지금은 신문고를 대체할 방안을 마련하기 보다 하루 속히 조정을 안정시키는 것이 우선된 일이었다.

    그런 선인들을 졸지에 무능력자로 매도했으니 요즘 들어 부쩍 이장곤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많아졌다.

    “만약 그 말을 듣고 전하께서 빈청 당상관들에게 한 줌 의심이라도 품었다면 어찌 되었겠습니까?”

    언성이 올라가는 김극성에 성준은 슬쩍 손을 들었다.

    “이쯤하세. 자리에 없는 사람 욕해서 뭘 하겠는가. 이장곤에 대한 문제는 차제에 논하도록 하고, 오늘 모인 건 전하의 두문불출 때문이니, 그점만 논하세.”

    “송구합니다. 격앙되다보니 저도 모르게······.”

    분위기를 환기시킨 성준이 다시금 시국을 논하려던 그때였다.

    “역적 성준은 당장 오라를 받아라!”

    아닌 밤중에 홍두깨비 같은 음성에 사랑방에 모인 모두는 화들짝 놀라며 성준을 바라보았다.

    성준 역시 놀란 건 마찬가지인지 가타부타 말을 못 하고 있었다.

    사랑방에 모인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할 무렵.

    방문에 덧댄 창호지 너머로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

    전원 무장한 채로 구름재에 모인 위사들을 보니 이 선택이 잘못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순간, 아주 순간 들었지만 말그대로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이미 진성대군으로 살아보고자 결심했고, 앞으로 살아갈 날이 못 해도 수십년은 될 것이었다.

    그 수십년 세월도 이방인으로 살게 될까?

    아니다.

    지금도 서서히 이현호의 기억이 지워지고 있다.

    내가 OT때 뭘 했는지 기억도 안 나고, 친한 친구들 이름은 기억 나지만 알바하면서 만나, 간간이 안부만 묻던 형, 누나들 일부의 이름은 기억도 안 난다.

    불과 2년도 채 안 됐는데 말이다.

    그리고 여지없이 이방인으로 살아 갈 수 밖에 없었던 날 아무런 편견 없이 대해주고 받아 준 건 ‘폭군 연산’이었다.

    나는 그에게 혈육의 감정을 느꼈고 우정을 느꼈다.

    때로는 형이었고 때로는 친구였다.

    처음에는 그를 여러모로 보듬어줘야 할 관심 병사라 생각했지만, 점점 내 생각이 잘못됐음을 느꼈다.

    그는 백성들이 두 발 편히 뻗고 자도 되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했다.

    때론 감성적이고 또 때로는 과격하고, 누가 보면 폭력적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단순히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누렸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

    그런 정치인이 참 민주주의가 실현됐다는 대한민국에도 있을까?

    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꿈을 먼 발치에서나마 응원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허무하고 처참했다.

    그가 관용을 베풀었던 ‘대상’들은 관용을 당연시했다.

    그가 자비를 베풀었던 ‘죄인’들은 좀 더 큰 자비를 바랐다.

    사람 욕심 끝이 없다지만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물론, 지금 내 선택은 오만에서 빚어진 선택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의 선택이 아니라면 성군이 되고자 했던 연산은 정말로 ‘폭군 연산’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만큼은 막고 싶었다.

    가장 가까이에서 그의 염원과 바람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그 길을 가로 막는 사람들은 현대적인 관점의 인권이란 범주 안에 놓고 판단해선 안 된다.

    그저 장애물에 불과하다.

    길 가다가 장애물이 있으면 보통 사람은 피해서 간다.

    하지만 피해가지도 못 할 장애물이라면 치우는 게 상식이다.

    이번 일도 똑같다.

    길을 가다가 만난 장애물을 연산은 내 말을 따라 피해서 갔다.

    내 말 때문에 연산의 목적지는 점점 멀어졌고, 그때 내 조언이 잘못됐음을 증명하고 길을 막는 장애물을 치우는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장애물을 치우면서 묻힐 피?

    상관없다.

    ‘폭군 연산’이 묻혔어야 할 피를 내 조언으로 묻히지 않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도리어 폐인이 됐으니 다시 그 피를 내가 묻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도 인권의 개념을 알고 있는 내가 이러는 건 너무하지 않냐고?

    누차 말하지만 나는 인권이란 가해자에겐 없어도 된다는 주의다.

    죽은 피해자에게 가해자의 인권 타령을 한다면 무슨 소용인가?

    “대감. 도착했사옵니다.”

    잠시 감상에 젖어 있노라니 벌써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여깁니까?”

    “예.”

    나는 새삼스럽게 영부사 성준의 저택을 눈에 담았다.

    “서두르셔야 하옵니다. 별충위가 움직였다는 소식이 이미 파다하게 퍼졌을 것이옵니다.”

    고개를 끄덕거린 나는 저택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역적 성준은 당장 오라를 받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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