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09화>
우리 형님 이렇게 만든 새끼 누구냐
***
“헉! 헉!”
입에서 단내가 다 났다.
조금만 더 뜀박질을 하면 고꾸러 쓰러질 것 같음에도 이 뜀박질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재밌다.
미치도록 재밌고 살아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진성이 가르쳐 준 축구의 묘미는 내가 찬 공이 골망을 흔드는 것이었다.
지쳐 쓰러질 것 같음에도 으차 몸을 일으킨 융은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그가 골대를 향해 달려들자 상대수비수가 막기 위해 마주 달려왔다.
수비수를 가볍게 제친 그가 손을 번쩍 들고 소리쳤다.
“박 위사! 여기다!”
변두리에서 공을 몰고 나가던 박 위사는 패스할 공간을 찾더니, 이내 융의 외침과 함께 공을 걷어올렸다.
몇 차례 합을 맞춘 적이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재능이 있기 때문인지.
박 위사가 쏘아올린 공은, 진성이 ‘패스’라는 단어는 알려줬어도 ‘가슴 트레핑’이란 말은 알려주지 않아 그 용어를 알 리가 없을 융의 가슴팍에 정확히 안착했다.
공이 융에게 전달되자 상대 수비수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지체한다면 포위 되고 말 터였다.
가볍게 튄 공을 안쪽 발로 낚아챈 융은 그대로 공을 걷어찼다.
발에 감긴 공의 촉감이 좋다.
이건 들어간다, 무조건 들어간다.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견은 빗나가지 않았다.
융이 쏜 공이 골망을 뒤흔들었다.
골망에 공이 들어간 걸 본 융은 그제야 비로소 바닥에 철푸덕 드러누웠다.
“헉! 헉!”
들숨 날숨을 반복할 때 마다 역시나 단내가 났고, 심장은 터질 것 같았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전하.”
“아, 상선. 봤느냐? 내 공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걷어차서 골을 넣었느니라. 하하하.”
골대를 흘긴 상선이 고개를 조아렸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병조판서 이게동이 알현을 청했사옵니다.”
미소가 한가득이던 융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급한 일이 아니면 축구 놀음 중에는 되도록 정사에 대해서는 아뢰지 말라 하지 않았느냐.”
“송구하오나 긴박한 듯 하여······.”
한숨을 내쉰 융이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킨 그에게 대기하고 있던 궁녀가 수건을 건네주었다.
수건으로 대강 몸을 닦은 융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얼마나 긴박하기에 임금의 놀이를 방해한단 말이냐.”
“사진에 관한 일이라 하옵니다.”
“사진?”
“예.”
잠시 고민하던 기색을 보이던 융은 수건을 궁녀에게 도로 건넸다.
“필시 병판이 사진의 전가사변된 죄인들 때문에 알현을 청한 것 같은데, 사진은 원래 척박한 땅이다. 죽을 목숨들을 사진으로 내치면서 살려준 것이니, 혹 구휼을 위해 알현을 청한 것이라면 물러가라 전하라.”
“하오나······.”
“오랑캐가 준동한 일도 아닌데 뭘 그리 걱정을 한단 말이냐. 정히 걱정되면 병판의 선에서 처리하라 이르라.”
할 말이 남았는지 입을 오물거리는 상선을 일별한 융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가 몸을 일으켜 경기장으로 향하자, 경기는 다시 시작됐다.
“박 위사! 이번에는 내가 패스를 해볼 터이니 잘 보고 있거라!”
“성은이 망극할 것이옵니다, 전하!”
“하하! 당연히 망극해야지! 시작하라!”
***
왜 나쁜 놈들은 오래 사는 걸까?
또, 왜 나쁜 놈들은 잘 사는 걸까?
어쩌면 선조들의 지혜가 이 대목에서도 나타나는 것인지도 몰랐다.
현실에서는 신상필벌이 엄격히 적용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은 인과응보를 현실에서 본 적이 있나?
미디어 매체에서 나온 것 말고 ‘현실’에서 말이다.
난 거의 없는 것 같다.
아마 우리 선조님들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나쁜 놈들이 오래 살고, 나쁜 놈들만 잘 사는 걸 받아들이기가 힘드니 아마, 나쁜 놈들은 욕을 하도 많이 먹어서 오래 산다고 풍자한 게 아닌가 싶다.
그게 아니라면 가뜩이나 팍팍한 삶이 더 팍팍하게 느껴질 테니까.
진작 내이포로 떠났어야 할 내가 아직까지 진해현에 머물고 있는 게 바로 그 때문이기도 했다.
현실에서 인과응보를 직접 보고 싶어서.
무슨 인과응보냐고?
방봉구 놈 말이다.
이놈, 알고 보니 더 대단한 새끼였다.
조족지혈은 아마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싶다.
다이스케라는 일본인을 죄 없이 하옥 시킨 건 새발의 피였다.
금부에서 조사한 방봉구 놈의 악행은 실로 놀라웠다.
사람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나라에 바친 세금으로 장난질 친 건 예삿일에 끼지도 못 했다.
착복을 했다.
심지어 구휼미를!
아사하는 백성들이 없게 중앙에서 보내준 구휼미를 착복했단 말이다.
당장 입에 넣을 쌀 한 톨이 없어서 굶어 죽는 사람들 보다, 제 배때지에 기름칠 하는게 더 중요했던 것이다.
또, 수령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송사.
포청천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포청천이 아니라 황희 정승이 따로 없었다.
물론 황희 정승의 일화는 아주 교훈적인(?) 일이라 할 수 있지만, 이놈을 황희 정승이 따로 없다고 한 건 제놈 주머니에 돈 꽃아넣어 주는 사람 말마다 “옳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판사가 돈 받고 사건을 판결한 일에 가까운 것이다.
어디까지나 원칙이란 단서가 붙지만, 원칙적으로 수령은 함부로 장형을 집행하면 안 된다. 근데 이놈은 장형도 제 마음 내키는 대로 집행했다.
그것도 제 기분따라서.
똑같은 사건이어도 제 기분이 안 좋으면 장형.
기분이 좋으면 무죄방면.
그마저도 좌기(출근)조차 안 하는 날이 태반이었다.
내가 조선에 와서 느낀 문화 충격은 의외로 사또들이 빡세다는 점이었다.
TV로 본 사또 만큼 놀고 먹는 직업이 또 없었는데, 직접 와서 본(?) 사또들은 TV에 나온 대로 놀 시간이 없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사또들 경우에 말이다.
한데 이 봉구 새끼는, 다른 정상적인 사또들이 1년 365일 중에 360일을 주구장창 일만 할 동안, 거즘 절반은 노느라 바빴다.
바다에 배 띄우기.
틈 날 때 마다 잔치 벌이기.
절간에서 주지육림 벌이기.
제 할 일 다 끝내고 놀면 말이나 안 하지, 말했다시피 노느라 바빠서 일은 다 아전들이 하고 있었다.
차라리 고양이 한테 생선을 맡기지, 아전들한테 맡겼으니 고을 일이 제대로 돌아가겠나?
아주 개판이다.
이런고로.
나는 이 새끼의 인과응보를 꼭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
내가 지금 목이 빠져라 대문 너머를 기웃거리고 있는 것도, 이 새끼의 인과응보를 집행할 금부도사 안처직 씨가 바로 그 너머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문초가 끝났는지 금부도사 안처직이 동헌(수령이 집무를 보던 곳)에서 나오고 있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쪼르르 달려간 내가 묻자 금부도사 안처직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니, 여태 계셨습니까?”
“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처직 씨는 혀를 내둘렀다.
“아주 악랄하기가 짝이 없는 자입니다. 대감이 말씀하신 건 차라리 약과였습니다.”
도대체 어땠길래 혀까지 내두르는 걸까.
“악취미가 있더군요.”
“무슨 악취미 말입니까?”
말하기 영 껄끄러운지 머뭇거리던 처직 씨는 ‘이거, 원. 남사스러워서······.’ 라는 단서를 붙이곤 말했다.
“비역질을 했더군요.”
“비역질?”
의문은 금방 풀렸다.
“크흠. 남색 말입니다. 이놈이 조정에서 있었던 숙청이나 역난으로 지레 겁을 먹었는지 묻지도 않은 사실을 알아서 토설했는데, 글쎄 남색을 벌였다지 뭡니까. 그것도······.”
“그것도?”
“어린 노비들을 대상으로요.”
“허.”
“저놈이 말한 게 사실인진 모르겠지만 정황상 목숨을 끊은 아이도 있는 것 같으니, 좀 더 조사해봐야 할 듯 합니다.”
“목숨을 끊었다면 자살한 피해자도 있단 말씀입니까?”
“예. 이 관노들이 문초를 해도 이 부분에 대해선 도통 입을 열려고 하지 않으니 날이 저무는 대로 죄인을 고신해서 정상(情狀)을 헤아려봐야 할 듯 합니다.”
내가 조선에 온 지도 어언 18개월쯤.
적응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저런 놈은 살려두면 안 되는데, 죽이고 나중에 전하께 보고하면 안 됩니까?”
물론 이 정도로 죽이는 건 너무한 처사가 아니냐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안다.
하지만 남의 아픔에 인색한 사람은 본인도 그 아픔을 겪어봐야 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이 왜 나왔는데?
무엇보다, 강간은 조선에선 참형이다.
동성이 동성을 강간한 건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지만.
“글쎄요. 소인의 생각도 같사오나 어찌 제가 함부로 형벌을 집행 할 수 있겠사옵니까. 놈의 말하는 바를 들어보면 여죄가 더 있는 듯 하니 여죄를 추궁해보고, 서계(보고서)를 올려 조정에서 논의토록 한 다음에 처벌의 수위를 정해야 할 듯 하옵니다.”
아쉽지만 이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안처직의 말처럼 이 조선도 법과 절차란 게 있는 세상이었으니까.
***
원래는 내이포에서 한 사나흘 머물다가 한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비록 진해현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긴 했지만, 내가 거기 계속 머문다고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오히려 조사에 방해만 될 것 같아서 처직 씨가 방봉구의 여죄를 추궁하겠다는 말과 함께 내이포로 이동했다.
그리고 말했다시피 이 내이포에서 한 사나흘 머물며, 앞으로 내가 탈 배를 만들어 줄 가쓰히로 씨와 친분도 쌓고, 겸사겸사 조선판 차이나 타운(?)을 둘러볼 참이었다.
나 같은 역알못들은, 조선하면 흥선대원군의 쇄국 부터 떠오른다.
쇄국의 나라인 조선에 외국인 거주지가 있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16세기 일본인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 궁금하기도 해서 사나흘 시간을 두며 관광 아닌 관광을 할 생각이었다.
그런 계획에 차질이 생긴 건 상선 영감··· 아, 군호를 받았으니 이제 대감이겠다.
상선 대감이 편지를 보내오면서 부터였다.
편지는 간략했다.
전하께서 정사는 손에서 놓고 오직 축구와 놀음으로 나날을 보내고 계신다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간략한 편지 안에서, 이런 짧은 단서만 가지고 하는 추측은 억측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지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혹시 내가 없는 동안 심경에 변화가 생긴 건 아닌가?
그래서 정사는 팽개치고 놀기만 하는 거 아닌가?
걱정이 돼서 내이포에 계속 머물 수가 없었다.
가쓰히로 씨에게 양해를 구한 나는 곧바로 짐을 싸서 상경을 했다.
그리고 사흘 밤낮을 달린 끝에 도착한 한양.
한 달 만의 귀경(?)을 곱씹을 새도 없이 나는 입궐부터 했다.
내가 입궐했다는 소식이 내시부에도 전해진 건지, 강녕전각 밖에는 상선이 서성이고 있었다.
“이번에 유람을 크게 기대하고 가셨는데 송구스럽게 됐사옵니다.”
“아뇨. 달포 동안 볼 거 다 봤는데요, 뭘. 형님은요?”
“그게, 주무시고 계십니다.”
“예?”
아닌 게 아니라 해가 중천에 뜬 지 오래다.
“새벽에 기침하셔서 미음을 조금 드시더니 그 이후로 쭉 주무시고 계시옵니다.”
말했다시피 형님은 인싸였다.
인싸의 특징이 뭔가?
활달하고 활발하다는 점이었다.
나같은 집돌이들은 이해 못 할 만큼 하루를 보람차게 보내는 게 인싸들의 주된 특징중 하나였다.
그리고 형님이 그랬다.
놀더라도, 하루를 허투루 보내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하루종일 잠만 잔다?
“혹시 그 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심경에 변화가 생길만한 일들이요.”
잠시 지난 날들을 곱씹던 상선 대감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뇨. 그럴 일은 없으셨사옵니다.”
“근데 왜······.”
“요새는 통 기운도 없으시고 편전에 거둥하시는 일도 그 빈도가 확연히 주셨습니다. 다만 심마(고통과 번뇌를 낳는 불교의 사마중 하나) 때문은 아닐는지······.”
“좀 깨워주시겠습니까?”
임금을 깨운다.
평소의 상선이라면 아무리 내 부탁이라도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했겠지만, 그는 별 말 없이 침소로 들어갔다.
그만큼 형님의 상태가, 상선이 보기에도 좋지 않다는 뜻이리라.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일다경쯤 지난 뒤에 상선이 침소를 빠져나왔다.
“드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