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108화 (108/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08화>

    우리 임금이 달라졌어요

    ***

    내 눈앞에 있는 건 뇌물이다.

    내가 비록 철이 없어도 뇌물과 선물을 구분 못 하는 건 아니다.

    한양에서 돼지고기니 말린 명태니 곶감이니··· 하는 것들이 들어오는 건 선물이다.

    물론 관점에 따라 뇌물로 보여질 순 있겠지만 사실 16세기는 선물과 뇌물의 관점이 모호하다.

    21세기에선 충분히 뇌물죄로 작용할 액수의 품목들도 여기선 충분히 선물이라는 감투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16세기 관점에서 내가 한양에서 받은 것들은 모두 선물인 셈이다.

    하지만 이건 분명 뇌물이다.

    아니, 무슨··· 말을 잇질 못 하겠다.

    여러분들 혹시 은다발이라고 들어봤을까?

    나도 돈다발이라면 몰라도 은다발은 처음 봤다.

    지금 저 궤짝에 담긴 거.

    분명 은이다.

    궤짝도 아주 닫아 논 게 아니라 살짝, 마치 고승이 눈을 게슴츠레 반개한 것처럼 열어놔서 내용물이 훤히 들여다보이는데 은병(銀甁)이 찰랑거릴 만큼 한가득 담겨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함(函).

    역시 궤짝처럼 살짝 열려있는데, 왠 종이가 한가득 들어있다.

    궤짝에 은병이 한가득 담겨 있는 걸 보면··· 부동산 문서같다.

    아니면 노비 문서거나.

    내 짐작이 맞은 걸까?

    “보는 눈이 있으십니다. 확실히 은보다는 땅과 사람인 법이지요.”

    내가 함에 시선을 주고 있는 게, 탐이 나서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옆으로 다가온 방봉구 놈이 부연 설명을 곁들인다.

    “평안도와 강원도, 그리고 경기도, 또 미곡이 잘 나는 전라도 땅들을 소인이 직접 선별했사옵니다. 노비들은 5구인데 멀리 있으면 신공(외거노비가 주인에게 바치는 구실)을 받기도 까다로우니, 역시 직접 선별해서 경기도에 적을 둔 놈들로 추려봤습니다. 하하.”

    어이가 없어 피식거리자, 역시 내가 이 뇌물에 헤벌쭉한 줄 알았던 모양이다.

    실실거리던 방봉구 놈이 옆으로 슬쩍 다가와 귀엣말을 건넨다.

    “개중에 한 년은 미색이 아주 빼어납지요. 탐내는 수령들이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성상납(?)까지?

    스케일이 어마무시하다.

    내가 한양에서 출발해 여기 진해까지 내려오면서 한 달이 걸렸다는 건 말해줬을 거다.

    그만큼 여러 수령들에게 접대를 받았다.

    접대만 받았겠나?

    어쩔 수 없이 선물도 받았다.

    하지만 내가 그 사람들한테 선물을 받은 건, 상술한대로 이 시대 기준으로 뇌물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었다.

    단언컨대 어떤 수령도 노골적으로 은병을 갖다 바치고 부동산 문기를 갖다 바치고, 노비 문서를 갖다 바친 적은 없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라는 말은 했었어도 말이다.

    “이게 다 뭐냐고 물었을 텐데요.”

    “뭐긴요. 소인이 대감께 보이는 정성이옵고 선물입지요. 먼 길 행차하셨는데 어찌 빈 손으로 돌아가실 수 있겠습니까? 객을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것 역시 선비의 도리가 아닙니다.”

    “아니, 그러니까. 뇌물이란 거네?”

    자연스럽게 말을 놓자 저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형님의 총애를 받는 나한테 잘 보여서 목사에 관찰사에 참판에 판서에 정승까지 올라가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던지, 미친놈처럼 헤실거리던 봉구 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신다.

    “뇌물이 아니오라 선물이옵니다.”

    봉구 놈의 말을 가볍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나는 궤짝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있는 힘껏 궤짝을 발로 걷어찼다.

    물리적인 힘에, 궤짝에 담긴 은병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이게 뇌물이 아니라 선물이라고?”

    “···예, 대감.”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통이 참 크네.”

    “헤? 헤헤헤.”

    “칭찬하는 거 아닌데?”

    “···”

    “날 얼마나 호구로 봤으면 이런 걸 준비하셨대?”

    “그것이 아니오라······.”

    털썩!

    “소, 소인은 그저 대감께서 조금이나마 기뻐하셨으면 하는 마음에서··· 무, 무례였다면 용서해주시옵소서.”

    뇌물.

    그래. 좋지, 뇌물.

    내가 만약 빈한한 삶을 살고 있었다면 이 뇌물 먹었을지도 모른다.

    근데 내가 좀 부잔가?

    이런 거 받아도 간에 기별도 안 갈 만큼의 재력가다.

    굳이 받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근데 이런 걸 준비했다?

    날 얼마나 호구로 봤으면 그랬을까 싶다.

    “이봐요, 현감.”

    “예, 대감······.”

    “다른 사람들이 보기 전에 이거 다 치워요. 얼른.”

    “···?”

    “치우라고!”

    버럭 호통치자 화들짝 놀란 봉구 놈이 벌떡 일어나 관노들에게 눈짓한다.

    관노들은 주눅든 모습으로 내 눈치만 살피면서 궤짝과 함을 갖고 나갔다.

    “···대감. 송구하옵니다··· 저는 대감께서 조금이라도 기뻐하셨으면 하는 바람에······.”

    장황하게 변명을 늘어놓는 봉구 놈에 나는 손을 휘휘 저었다.

    “됐고. 이번 한 번은 눈 감아주는데, 다음에 또 이딴 짓 하면 그땐 현감이 죽던 내가 죽던 둘 중 하납니다. 알았어요?”

    “배, 백골이 난망할 만한 은혜이옵니다!”

    머리에 쓰고 있는 갓이 삐뚤어진 지도 모른 채 넙쭉 조아리는 봉구 놈을 일별한 나는 불쾌한 표정을 한껏 드러내며 관아를 빠져나갔다.

    “대감마님··· 화가 잔뜩 나신 것 같은데 어찌 그냥 보내셔요?”

    덕산이었다.

    “뱁새가 황새 뜻을 어떻게 알리.”

    “···예?”

    “됐다. 얼른 채비해라. 내이포나 가자.”

    “예!”

    내가 저 봉구 놈의 뇌물 사건을 공론화 시키지 않고 눈 감아주려는 건 형님 때문이다.

    지금 형님 성격에 저런 놈을 살려둘까?

    눈깔이 돌아버릴지도 모른다.

    저런 싹수가 노란 한 놈만 형님 손에 얻어 걸려서 뒈지면 상관이 없겠다만, 그럴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한다.

    안 그래도 사형수가 여럿 나와서 형님의 심리에 악영향을 끼치진 않았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는데 저놈을 시작으로 피를 계속 보게 되면 내 노심초사가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비약일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사건이든 사소한 일에서 빚어지곤 하니, 최대한 형님이 노할 일은 안 만드는 게 좋다.

    저 봉구 놈의 죄는 그래서 눈 감아준 거다.

    어쩔 수 없이.

    ‘그래도 저런 놈은 콩밥좀 먹긴 해야 하는데.’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면서 관아를 빠져나온 그때였다.

    “진성대군 되시무니까?”

    ***

    「···하니 이런 일에 진해현감 방봉구만 연루됐다고 볼 순 없습니다. 조사가 시급 한 듯 합니다.」

    “나라 꼴이 말이 아니로구나.”

    뇌까린 독백과 함께 융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도대체 왜 대신들은 내게 이런 일은 알려주지 않는 것이냐?”

    힐난일까, 자책일까.

    사홍은 선뜻 뭐라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무례인 걸 알면서도 그랬다.

    “그래도 다행인 일은 대군께오서 일을 사전에 알아차렸다는 점이옵니다. 대군께서 일을 지나쳤다면 사건이 크게 비화됐을 것이니 당사자에게는 비화(悲話)가 됐을 것이옵니다.”

    위로 아닌 위로에 실소가 터져나왔다.

    “이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는 세태가 애석하도다.”

    자연스레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건 탐오한 수령의 학정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그래서 진성이 그냥 지나쳤더라면 외교 문제로 비화 될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왜관을 설치한 목적이 뭔가?

    폭력적인 오랑캐들을 어루고 달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어루고 달래긴 커녕 겁박을 하고 법을 마음내키는 대로 주무르면서 폭압했으니 국격이 우습게 됐다.

    “후.”

    골이 아프다.

    골이 아파서 도대체 어떻게 이 일을 처리 해야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나라를 다스려야 할지 가늠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와서는 그냥 모두 다 손에서 내려놓고 그저 놀음으로 세월을 낚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 밖에 상선 있는가?”

    “예, 전하.”

    “진해현에서 사달이 크게 났으니 승정원에 명해서 재상들에게 패초를 보내도록 하라.”

    “예.”

    “어쩌시겠사옵니까?”

    상선이 명을 수행하기 위해 빠져나가고, 사홍이 조심스레 물었다.

    말이 없던 융은 축 쳐진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동문서답을 내놓았다.

    “이 익선관 경이 쓸 텐가?”

    화들짝 놀란 사홍이 부복했다.

    “어,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나는 모르겠다. 백성을 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고 치국이 무엇인지도 모르겠으며, 또한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조정을 일신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마땅히 대군이 보낸 장계에 나온 진해현감 방봉구를 파직하고 그 죄를 물어······.”

    “그걸 말함이 아니다.”

    “···?”

    “파직하면?”

    “예?”

    “방봉구에게 그 죄를 묻고 파직하면? 학정을 일삼는 수령들이 단번에 자취를 감추기라도 한단 말이냐. 사람 욕심이 끝이 없다지만 어찌 이리도 어리석은 자들이 많단 말이냐. 도대체 서경(임금이 관원을 임명하면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당사자를 심사해 여부를 가리던 일)은 어찌 된 것이냐? 어찌 된 것이기에 방봉구 같은 놈이 현감이 되냐 이 말이다.”

    “···”

    사홍에게 화풀이 할 일은 아니었다.

    “경에게 괜히 분풀이를 했으니 민망하기 짝이 없다.”

    “아니옵니다, 전하.”

    잠시 후.

    상선이 재상들이 모두 편전에 들었다고 알려왔다.

    융은 힘없이 일어나 편전으로 향했다.

    ***

    “···진해현감 방봉구를 파직하고 일벌백계하여 다시는······.”

    “지금 진해현에서 일어난 일에 경악을 금치 못 하겠으니 어찌 왜인이라고 하여 처자가 없겠사옵니까? 지금 진해현에서 벌어진 일은 인간의 도리를 해친 일이니······.”

    편전.

    진해현에 대한 가부를 묻자 중신들은 모두들 한 목소리로 방봉구를 벌하라 외쳐댔다.

    “방봉구를 벌하라.”

    “진해현감 방봉구는 평소에도 비루하고 탐오하다는 평이 있던 자이옵니다. 진해현감의 탐욕이 화를 부른 것이니 어찌 다른 수령들의 실정에 비할 바겠사옵니까? 당장 파직하여 나라의 기강을 바로세우시옵고······.”

    형조참판 정숙지의 발언이었다.

    그의 말이 틀렸다고는 볼 수 없었다. 다른 재상들의 말도 틀림이 있는 건 아니었다.

    방봉구는 벌함이 맞다.

    벌함이 맞긴 한데······.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대첵을 논하는 것이 우선 아니던가?”

    이번 사건은 진해현에서 일본인을 대상으로 일어났지만 지금도 팔도 어디에서는 조선인을 대상으로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참판.”

    “하문하시옵소서, 전하.”

    “경은 진해현감 방봉구가 평소에도 비루하고 탐오하다는 평이 있던 자라 하였는데 맞는가?”

    “그러하옵니다.”

    “한데 평소에도 비루하고 탐오하다는 평이 있던 자가 어찌 대간의 탄핵은 비껴 간 것인가? 경이 이런 말을 할 정도면 이미 작은 소문이나마 있었다는 것일 텐데 대간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냐는 말이다.”

    이전처럼 역정을 내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저 조용히 읊조리는 모습에 가까웠다.

    “···”

    꿀먹은 벙어리가 된 재상들에 나직이 한숨을 내쉰 융이 뜬금없이 물었다.

    “방봉구는 평소 학업이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가?”

    “갑자기 어인 말씀이시온지······.”

    “학문을 어디까지 성취했냐는 말이다.”

    “티끌만도 못 한 재주를 갖고 있으니 학문이란 게 있었겠사옵니까. 아마, 간신히 사서와 삼경을 떼는 수준이었을 것이옵니다.”

    “최소한 사서와 삼경은 외울 줄 안단 소리겠군.”

    “예.”

    “그런데 어찌 방봉구는 사서와 삼경에 나오는 성현의 말씀들을 실천은 안 하는 것인가? 도대체 왜 백성들이 성토하는 관리들은 사서는커녕 논어에 나오는 말씀도 따르지 않는 것인가?”

    “그건 일부에 불과하옵니다. 선비의 이상은 곧······.”

    “일부?”

    “예.”

    “일부에 불과하다.”

    “···”

    “말이란 것이 참으로 우습지 않더냐. 다수가 벌인 일도 일부라 주장한다면 할 말이 없어지니 이 얼마나 쉬운 말이고 얼마나 무책임한 소리냐.”

    “···”

    평소 같았다면 역정을 냈겠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융은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됐다. 이번 일은 경들이 금부와 논해서 처결하라.”

    중신들의 얼굴에 의문문이 떠올랐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불 같던 임금이 오늘은 왠일인지 힘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방심(?) 할 순 없었다.

    “아, 하옵고 전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일전에 전하께서 하명하신 신문고에 대한 일은 지금 신들이 주야로 논의하고 있사온데 도무지 마땅한 방책이 없어 미처 전하께 아뢰지 못 하고 있사오니 부디······.”

    늘 일처리를 똑바로 못 한다, 신문고를 대체할 방안은 언제 가져오는 것이냐 편전에 나왔다 하면 닦달하던 임금에 영의정 유순이 선수를 쳤다.

    역시나 평소 같았다면 ‘일처리좀 똑바로 하라!’ 일갈할 임금이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것도 됐다. 경들이 알아서 하겠지.”

    “···”

    “모두 물러들 가라.”

    “아, 예······.”

    중신들이 물러가자 융은 상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만사가 귀찮구나. 오늘은 내 축구를 좀 해야겠으니 위사들을 불러오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