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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07화 (107/365)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07화>

이 뇌물 실화냐?

***

방봉구는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그는 관헌의 한 사람이었다.

무지하고 무도한 오랑캐를 상대로, 감정이 앞서는 행동으로 체통을 잃을 순 없었다.

애써 화를 가라앉힌 봉구는 오랑캐를 바라보며 툭 내던지듯 말했다.

“그럼 나가거라.”

“나가라니요.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오랑캐 주제에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니 가라앉힌 화가 슬금슬금 치미는 기분이다.

“그러니 나가란 말이다. 중이 절을 떠나는 게지, 절이 중을 떠나는 걸 본 적 있단 말이냐.”

“허.”

“허어?”

“여태 현감께 바친 뇌물이 얼마나 되는줄 아십니까?”

“이, 이놈이!”

화들짝 놀란 봉구는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엿듣는 귀는, ‘선물’을 같이 받은 아전 밖에 없었다.

“뇌물이라니! 그건 네가 정성을 보인답시고 바친 선물이었다.”

“그게 어찌 선물입니까?”

“이놈이 끝까지 큰 일 날 소리를 하는구나. 사정이 딱해 눈 감아 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거늘, 이래서 섬오랑캐들은 교화가 안 되는 것이다!”

“소인이 비록 섬오랑캐라지만 상식적으로 현감이라면 이해 하실 수 있겠습니까? 소인이 이 내이포에 세견선을 끌고 온 게 벌써 3차례입니다. 거주한 기간만 따지면 벌써 2년이 훌쩍 넘습지요. 한데 매번 현감께 얼마나 많은 뇌물을 바쳤습니까?”

화가 나는 것도 잠시.

봉구는 순간적으로 주판알을 튕겨봤다.

모르긴 몰라도 놈에게 제법 많은 ‘선물’을 받긴 했다.

이놈에게 받은 선물만으로 서울에 별서(별장)를 마련하고, 노비를 2구나 사고 서책 7책(冊)을 사서 과거 준비 하는 아들에게 보내줬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 일은 그것과 별개다.

“그래. 네 말대로 뇌물이라 하자꾸나. 그래서, 뭐? 이제와서 토해내기라도 하라는 것이냐?”

“제가 어찌 현감께 그런 무례를 저지르겠습니까. 다만 저나 다른 사람들이 현감이나 다른 태수들께서 요구하는 뇌물을··· 아니, 선물을 안 바친 적이 있습니까? 하다못해 보름 전에는 현감의 생신이라 해서, 십시일반으로 그 비싼 계란이며, 수소 두 마리며, 암소 한 마리를 선물해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조선의 왕자가 행차해서 소요될 경비까지 저희더러 부담하라니요?”

“이놈! 말조심 하거라! 조선의 왕자라니! 대군마마가 네 벗이라도 된단 말이냐! 어디 감히 혀를 함부로 놀리느냐!”

버럭 소리치는 현감을 보니 다이스케는 정말로 억울했다.

여태 딸아이를 위해 많은 걸 참았다.

괄시?

오랑캐라 손가락질 하고 왜구놈이라 손가락질 하고··· 먼 이국 땅이니 이건 이해 할 수 있었다.

뇌물?

그래, 이해한다.

어딜 가든 관리들에게 기름칠을 하는 건 불변의 진리니까.

굳이 조선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구타?

이것도 이해 할 수 있었다.

내이포에선 심심찮게 폭행 사건이 일어나곤 했었다.

피해자는 대부분 일본인들이었고, 다이스케도 고작 3차례 조선을 찾았지만 올 때 마다 매번 구타를 당했었다.

때로는 군관들에게, 때로는 군사들에게, 때로는 아전들에게, 때로는 조선 백성들에게.

다른 곳은 몰라도 적어도 내이포에서 만큼은 일본인은 벌레만도 못 한 존재였고 화풀이 대상이었다.

그래도 끽소리 하나 못 한다.

끽소리라도 하는 날에는 곧바로 추방 될 테니까.

역시나, 이 부분도 이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건 참을 수가 없었다.

조선의 왕자가 행차하는데 소요되는 경비를 왜 우리더러 내라 한단 말인가?

불같은 성정의 현감에게 언제 한 번 이렇게 대들어봤나 싶지만, 조선에서 쫓겨나느니 이런 일까지 겪으면서 내이포에 있고 싶진 않았다.

“아무튼 저는 못 내겠습니다.”

“허! 못 내? 내 네 정성이 기특하고 네가 먼 이국 땅까지 물건을 파러오는 일이 가여워서 눈 감아 준 일이 한 둘이 아니거늘··· 감히 그 의리를 저버린단 말이렷다?”

“···”

“여봐라!”

“예, 사또.”

“저놈이 요새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사람을 모은 채로 왜관을 벗어나 왜구로 변장해 노략질을 한다는 정보가 있으니 필시 왜구의 잔당이 분명하렷다. 저놈을 당장 하옥하고, 저놈의 배는 다시는 노략질을 못 하도록 불살라버려라!”

“예!”

다이스케는 화들짝 놀랐다.

조선에 세차례 입국하면서 괄시와 폭행을 당한 일은 많았어도 왜구로 지목 당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만 다른 일본인들에게 몇몇 비슷한 경우가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었다.

한 명은 병신불구가 돼서 가진 재산을 모두 뺏긴 채 쫓겨났고, 또 한 명은 정말 왜구로 지목 당해 참수를 당했었다.

이 이야기를 해준 사람은 다이스케에게도 주의를 줬었다.

쓰시마 사람들은 그나마 도주의 비호가 있어서 조선의 관헌들도 함부로 하지 못 하지만, 도주의 낙인을 돈 주고 사서 들어온 사람들은 그런 비호도 받지 못 하니 알아서 처신하라고.

“혀, 현감 어찌 저더러 왜구라 하십니까?”

당황한 다이스케가 부복하고 말하자, 방봉구는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왜구라면 왜구인 것이다.”

우물쭈물거리는 사이.

군사들이 다이스케를 붙들었다.

***

“그게 무슨 말인가? 다이스케님이 하옥 되다니?”

“이번에 또 현감 놈이 뇌물을 요구하지 않았겠소.”

“그랬지.”

“다른 일은 참아도 조선 왕자가 행차하는 경비를 위해 돈을 바치라니 다이스케 님도 참을 수 없었던 것 같소. 관아로 달려갔는데 현감 놈이 하옥을 시켰다고 하더이다.”

“아니, 자네는 아니 말리고 뭘 했나?”

면박을 받은 준이치(順一)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라고 안 말렸겠소? 당연히 말렸는데······.”

“그랬는데?”

“당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라고, 이번엔 정말 결판을 내겠다고 달려가는 걸 어찌 막소?”

“뜯어 말렸어야지. 현감 놈이 어떤 놈인 걸 자네가 모르는 것도 아닌데!”

“말렸다니까 그러오?”

준이치의 말에 상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또 4년 전처럼 난리가 일어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군.”

준이치를 면박 준 상대, 미치마사(道雅)는 4년 전 일을 회상했다.

4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도주의 낙인을 받아 내왕한 오토모 가(家)의 가신이 분수 모르고 조선 태수들의 요구를 거부했었다. 그러자 조선 태수들은 의기투합해서, 오토모 가문의 가신을 왜구로 지목했다.

눈 가리고 아웅에 가까웠지만 적어도 내이포 일대에서 조선 태수들은 왕이다.

그들의 말을 거역해서는 살아 남을 수가 없었다.

역시, 왜구로 지목 당한 오토모 가문의 가신은 목숨은 구명했지만 병신불구가 돼서, 온재산을 모두 빼앗긴 채 추방당했다.

단지 여기서 끝이 났다면 다른 사람의 불행에 동정만 했겠지만 문제는 내이포의 다른 일본인들에게도 그 마수가 뻗쳤다는 점이었다.

조선 태수들은 이참에 오랑캐들의 버릇을 단단히 고치겠다면서 일본인이 티끌만한 잘못을 저질러도 곤장을 때리거나 혹은 군사를 사주해 폭행을 일삼았다.

가뜩이나 일본인에 대한 조선인의 인식은 박한데, 거주 일인들을 보호해야 할 태수들이 앞장서서 일본인들을 핍박하니, 조선 백성들 역시 보란 듯 내이포 일본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인에 대한 이유 없는 분노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고, 길 가다 맞아 죽은 사람, 시비가 붙어 맞아 죽은 사람, 이름 모를 사람에게 칼 맞아 죽은 사람··· 당장 피해자만 8명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태수들은 핍박을 멈추지 않았다.

잔칫날이 있으면 일본인을 불러 춤을 추게 하고, 바닥을 기게 하고, 정(情)으로 포장해 ‘선물’을 강제했다.

그 와중에 일본인들 사이에 악명을 떨친 인물은 단연 진해현감 방봉구였다.

그는 상관들에게 재미난 걸 보여주겠다면서 아직 어린 일본인 둘을 붙잡고선 노끈을 이용해 머리카락을 천장에 묵었다.

그러고는 천장에 매달려 발버둥 치는 두 사람을 향해 활을 겨눴다.

본인의 활솜씨로 노끈을 쏴서 천장에 매달린 일본인을 떨어뜨리겠다는 발상이었다.

방봉구의 활솜씨는 말과는 다르게 형편 없었다.

천장에 매달린 한 명은 화살이 귀에 꽃히는 불상사가 있었고, 또 한 명은 화살이 볼가를 스치고 지나가 몹쓸 흉터가 남는 불상사를 겪었다.

인명 피해는 없다고 할 수 있었지만 당시 내이포 왜인들은 재미를 위해, 사람에게 활을 겨눈 방봉구의 악행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몸을 사려야만 했다.

다행히 내이포에 기거하는 왜인들이 십시일반해서 거액의 ‘선물’을 태수들에게 안긴 뒤로, 일은 그럭저럭 무마가 됐지만 이후에도 자잘한 사건, 사고는 끊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이번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면?

4년 전의 일이 재발 되는 것이었다.

“마사키님께 아뢰는 것이 어떻소?”

준이치가 말한 마사키는 대마도주의 가신으로, 조선인들은 그를 내이포 왜인들의 거추(巨酋)라고 부르곤 했었다.

실제로 내이포 왜인들은 송사 문제나 다툼이 있으면 마사키를 찾아가곤 했다

내이포 왜관의 수령이 마사키인 셈이었다.

“며칠 전에 도주께 아뢸 문제가 있다면서 쓰시마로 돌아가셨네.”

“아니, 하필 지금··· 현감 놈의 성정을 생각하면 다이스케님이 살아 돌아오시는 건 언감생심이고, 병신불구가 돼서 나오는 것만 해도 천행이라 할 거요. 아시잖소?”

“알지. 하지만 마사키님도 없는데 어쩐단 말인가?”

“이왕 이렇게 된 거 무력으로라도 빼오는 건 어떻소?”

“큰 일 날 소리!”

“하면 다이스케님은 죽던 말던 놔둔단 말이오? 여기 내이포에서 다이스케님 돈 안 빌려간 사람이 누가 있소?”

미치마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이 그랬다.

“다이스케님을 위해서 칼 들고 일어나자고 하면 모두 수긍할 거요.”

“하지만 그 이후에는?”

“이, 이후에?”

“토벌이 시작 될 텐데 이후에는 그 뒷감당을 어찌 하냔 말일세.”

“아니, 그건··· 그, 그래도 조선 임금이 총명하다고 하니 우리 말을 듣고 죄를 사해주지 않겠소?”

“퍽이나. 왜구들의 소행이라고 안 하면 다행인 일이지. 4년 전에 가쓰히로 님이 어떤 욕을 당했는진 자네도 알잖나.”

마찬가지로 4년 전 난리가 있을 때였다.

마사키를 따라 들어온 가쓰히로는 왠지 모르지만 조선에 애정과 죄의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내이포 일대와 진해현 일대에 기근이 들어 조선 백성이 아사하는 일이 생기면, 앞장서서 구휼미를 풀곤 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4년 전 난리가 일어나자,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가쓰히로도 욕을 당했었다.

나름 조선 백성들을 위해서 구휼미를 베푼 가쓰히로도 그런 욕을 당했는데 무기를 들고 일어난 왜인들에게 조선이 온정을 베푼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죽도록 놔두잔 소리요?”

미치마사는 한참을 고민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그때.

미치마사의 뇌리에 한 인물이 번뜩 스치고 지나갔다.

“자네, 조선 왕자에 대해 좀 아나?”

***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낮 술이라도 걸친 사람처럼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올라 들어오는 방봉구에 나는 숟가락을 내려 놓으며 물었다.

내 물음에 방봉구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별 일 아닙니다. 그저 이 진해현이 내이포와 인접해 있다 보니 가끔 왜인들이 소란을 일으키곤 합니다. 그러고 보니 대감 옆에 있는 그 왜인도 내이포 왜인이지요? 낯이 익습니다.”

방봉구가 가리키는 왜인은 가쓰히로 씨였다.

“예.”

“어쩐지. 왜놈들은 언제나 뒷통수를 치곤 합지요. 그러니 교화라는 말이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마는··· 소인이 진해현에 머물면서 오랑캐들을 지켜본 바, 이 왜놈들은 교화가 전혀 안 되는 종자들입니다. 충언으로 말씀드리자면, 대감께오서도 그 왜인을 너무 가까이하진 마시옵소서.”

사람 면전에 두고 아주 노골적이다.

가쓰히로 씨를 흘기니, 역시나 표정이 굳어있다.

“사람마다 다른 거죠.”

“아. 식사는 입에 맞으셨는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빈 상을 바라봤다.

남김없이 모두 해치웠다.

“네. 덕분에 잘 먹었습니다.”

“하면 술상을 내어오라 하겠습니다. 여봐······.”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식사만 하고 일어나겠다고 했으니 소화 되는대로 일어나겠습니다.”

“예? 하지만 어찌······.”

“내이포도 코앞인 걸요. 서울을 떠난지가 벌써 한 달입니다. 노상에서 이슬 맞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하루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어서요.”

“아··· 아쉽기 그지 없습니다. 모처럼 대감을 뫼시게 됐는데, 허어.”

정말로 아쉽다는 표정이다.

그런 걸 보면 의외로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언제 한양 오실 일 있으면 말씀하세요. 그땐 제가 대접할 테니 말입니다.”

“아··· 하하하. 말씀만으로도 감사한 일입니다.”

“아뇨. 정말입니다. 오늘 이렇게 거한 밥상을 받았는데 저도 대접해야죠.”

“이거,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 잠시만 계십시오.”

어차피 밥 먹은지 얼마 안 돼서 소화도 시켜야 했다.

고개를 끄덕거린 채 기둥에 기대 불뚝 솟아오른 배를 두들거리고 있자, 방봉구가 돌아왔다.

다만 혼자는 아니었다.

고을에 딸린 사령(심부름꾼)들인지 관노들인지 모를 장정들이 낑낑거리며 함과 궤짝을, 과장 조금 보태 트럭째 갖고 오고 있었다.

사람 잘못봤나?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한참 동안 말문을 열지 못 하다가, 방봉구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다가오자 입을 열었다.

“이게 다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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