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06화>
여유 있는 삶
***
나는 아마, 역마살이 끼어도 단단히 낀 게 분명했다.
생각해보면 이현호로 살던 시절에도 그랬다.
어느 한 곳에 진득하게 붙어 있질 못 하고 천방지축 떠돌아다녔다.
19살에는 수능이 끝났으니 뭔가 활동적인 걸 해보자면서, 친구들에게 미친놈 소리 들어가면서 까지 자전거로 서울-해남을 왕복했다.
20살이 되고 나서는 뭔가 나도 책임감을 가질 나이니 뜻깊은 일을 해보고 싶답시고 국토대장정을 덜컥 신청했다.
원룸도 한 곳에 진득하게 있질 못 하고 참 많이 옮겨 다녔다.
A원룸에서 6개월 살다가 B원룸으로 가고, B원룸에서 4개월 살다가 C고시원으로 가고··· 그러다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고··· 뭐, 금전적인 문제가 가장 컸지만 어쨌든 한 곳에 진득하게 붙어 있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 역마살 낀 팔자는 이현호가 아니라 이역으로 살면서도 마찬가지 인 듯 싶었다.
무슨 소리냐고?
비누 공장 일은 풍원위에게 잠시 맡겨 놓고 내이포에 내려 가고 있다는 소리다.
여기가······.
어제 낙동강을 넘었으니 이제 거의 다 왔겠다.
명색이 왕 동생에다가 공신인 너가 뭔 개바람이 들어서 산 넘고 물 건너서 내이포까지 내려가냐고?
미친 소리 같겠지만 여행을 좀 하고 싶었다.
북정군 부원수에 제수돼서 한반도 최북단인 압록강 물도 마셔보긴 했다만··· 그건 전쟁 하러 간 거지, 놀러 간 게 아니잖아?
이제 조금만 더 가면 피 튀기는 전장터라는 점 때문에에 극도로 긴장해서 지나치는 풍광도 제대로 눈에 못 담았었고.
게다가 전생에선 떠나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떠날 수 없었지만 이번 생에선 떠나고 싶다면 언제든 훌쩍 떠날 수 있는 재력과 외모를 겸비했다.
그런 의미에서 시 한 수가 떠오른다.
“가난이 죄. 지상에 신선이 있으니 부자가 신선일세. 인간에게 죄가 없으니 가난이 죄일세. 가난뱅이와 부자가 따로 있다고 말하지 말게나. 가난뱅이도 부자되고 부자도 가난해진다오··· 크으.”
김삿갓의 난빈(難貧)이다.
학창시절 난 김삿갓의 노골적이면서도 가시 돋힌 풍자를 특히 좋아했었다.
그리고 특히 난빈이라는 이 시에서,
-지상에 신선이 있으니 부자가 신선일세.
라는 말을 참 오래도록 곱씹었었다.
틀린 말이 아니잖아?
가난한 사람에겐 현세가 지옥일지 모르지만, 부족함 없는 사람들에겐 현세가 곧 천국이다.
그러니 신선이 아니면 뭔가?
어린 마음에도 저 구절이 참 인상적이었지.
좌우지간, 저 시를 통해 나도 새삼 신선(?)이 되었음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아무 걱정 없이 훌쩍 떠날 수 있다는 게 사실 아무나 못 하는 거니까.
아, 물론.
나 혼자 온 건 아니다.
“아주 인상적인 시이무니다.”
가쓰히로란 일본 사람이다.
내가 내이포로 내려가는 게 이분 덕이기도 하다.
우연찮게 입궐했다가 상경왜인에 대한 소문을 들을 수 있었다.
형님을 알현했다고 하고, 또 알아보니 내가 탈 배를 만들어줄 분이라지 뭔가?
그런데 곧 내려간다니··· 옳거니.
게다가 내이포, 그러니까 진해로 간단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못 가본 동네기도 하고, 바다도 좀 보고 싶었다.
형님께 말씀 드렸더니 잠시 고민하던 형님은 흔쾌히 허락을 해주셨다.
“언제부터 듣고 있었어요?”
“아까부터 듣고 있었으무니다. 혼또니 스고이한 시이무니다.”
라고 말한 가쓰히로가 엄지를 척! 올린다.
긁적긁적.
뻘줌하다.
“가쓰히로 씨 쓰시마 사람이랬죠?”
뻘줌할 땐 화제전환만 한 게 없다.
냉큼 가쓰히로의 고향을 언급하면서 화제를 전환하자, 순진한 가쓰히로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하잇.”
“쓰시마는 어떱니까? 조선하고 비교 했을 때.”
“음··· 척박하므니다. 조선은 생기가 있는데 쓰시마는 그런 게 없스무니다. 그래서 옛날에 우리 선조들이 노략질 한 거, 나는 혼또니 스미마셍하게 생각하므니다.”
뻘쭘한 마음에 화제 전환이나 하려고 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분위기가 무거워진다.
“어차피 과거의 일이니까요.”
“과거도 잊으면 안 되무니다.”
왠지 일본 사람한테 한 방 먹은 기분인데?
그래, 과거도 잊으면 안 되지.
맞는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자, 별충위 종사관 소기파(蘇起坡)가 다가왔다.
아, 이 분은 이 행렬의 호위를 위해 형님이 직접 붙여주셨다.
이분 말고도 호위에 참가한 병사들만 예순명이 넘는다.
사실, 호위란 게 어떻게 보면 타인이 봤을 때 위압적이다 보니 거추장스러울 수도 있는데, 하도 시대가 시대인지라 산적이 많아서 나도 거절 안 하고 받아들였다.
가쓰히로 씨와는 그래도 말이 제법 통해서 내려오는 길에 친분을 쌓았다면, 이분은 말수도 없고 제 할 일만 묵묵히 하는지라 여태 술 한 번 같이 못 먹어봤다.
“대감. 어제 낙동강을 넘을 때, 진해현감 방봉구(房捧九)가 아전을 보내서 접대코자 한다는 말을 전했는데 어쩌시겠사옵니까?”
“벌써 진해입니까?”
“예.”
“내이포도 코앞인데 굳이 접대 받을 필요 있을까요. 괜히 번거롭기만 하지··· 바로 가죠.”
말이 아니라 내가 서울을 출발한 게 한 달 전이다.
한 달 전인데 이제 진해에 도착했다.
아무리 자동차가 없고 비행기가 없는 시대라 할지라도 이건 조금 과하게 시간을 잡아 먹은 건데, 여기 진해까지 오면서 거친 수령들이 죄다 버선발로 튀어나와 접대를 한다고 늦었다.
처음에는 나도 사람인지라 어깨도 으쓱거리고 여행의 취지에 걸맞게 각 지역의 제철 특산물을 먹을 수 있어서 나름 만족했는데, 그게 세 번이 되고, 여섯 번이 되고, 아홉 번이 되고··· 10차례를 넘기다 보니 솔직한 심정으로 이젠 질렸다.
사실 먹는 것 자체만 접대받으면 문제 될 게 없겠지만 열에 다섯은 아첨꾼들이다. 나머지 셋은 난봉꾼들이라 하나같이 기생들끼고 놀자는 제안을 해댄다.
이제 나머지 둘이 그나마 정상인데··· 정상들은 또 정상들 대로 원칙주의자들이라 심심하다.
밤도 늦었고 갈 길이 멀다면 당연히 진해현감이 좋든 싫든 어제 도강한다고 고생한 수행원들의 피로를 위해서라도 접대를 받았겠다만, 내이포까지 엎드리면 코닿을 거리인데 뭐.
“알겠사옵니다. 하면 사람을 보내 그리 전하겠··· 음?”
미간을 좁히는 기파 씨에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헐레벌떡 누군가 뛰어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진해현감 같사옵니다.”
아무래도 들르겠다 안 들르겠다 감감무소식이니 직접 뛰쳐나온 것 같은데··· 제기랄.
또 하루 날려먹게 생겼다.
***
제기랄.
결국 진해현 관아에 왔다.
왕자가 본인 고을에 내려왔으니 접대한답시고 마중 나온 사람을 박대 할 수도 없어서 따라온 건데··· 시간을 더 지체하고 싶진 않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현감의 마음만 받고 딱 밥만 먹고 일어나겠습니다.”
“예예. 물론입지요.”
표정을 보면 밥만 먹고 보낼 것 같진 않다.
후······.
“여봐라. 아직 멀었더냐. 대감께서 시장하시겠다, 이놈들아!”
“지금 나갑니다요.”
잠시 후.
상이 들어왔다.
흔히 상다리 휘어진다는 표현이 있는데, 정말 상다리가 휘어질 것 같다.
“아니, 뭘 이렇게 많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산해진미가 한가득이었다.
생선 구이, 소라찜, 꿩고기 구이, 고깃국, 녹두 지짐, 동아적, 연근조림, 게장, 게간랍(게딱지 구이), 만두, 전골, 붕어찜, 낙지탕탕이, 각종 나물, 오리알 난탕(수란), 메밀묵, 닭조림, 불고기, 삶은 문어, 닭갈납(닭살을 다져 지진 요리)······.
내가 당장 알아 볼 수 있는 음식들이 이 정도고, 뭔지 모르겠는 음식들도 십수개가 더 남아있다.
잔칫날에도 이렇게는 못 먹는다.
“많다니요. 하하. 대감을 뫼시게 된 걸 생각한다면 이보다 더한 걸 차려야 하는데 아무래도 해안가인지라 여러모로 부족한 게 많습니다.”
오히려 바닷가와 접한 고을이라 가짓수가 더 많은 것 같다.
게 요리나, 낙지 요리나 생선 구이도 내륙에선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은 아니다.
“이렇게 까지 차리실 필요는 없었는데······.”
“아닙니다. 대감께서 흡족히 드신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아, 마침 재주가 뛰어난 해어화(기생의 별칭)가 관아에 있사온데 미색도 미색이지만, 가락이 특히 탁월합니다. 대감께서 괜찮으시다면 자리에 불러도 되겠사옵니까?”
나는 손사래를 쳤다.
조선은 일부일처제 사회다.
일부일처제 사회인 대한민국과 다른 게 있다면 처가 한 명이어야 한다는 거지, 첩은 또 둬도 된다.
여기에 더해서, 지방관들은 지방에 내려가면 애인을 따로 두기까지 했으니 기생 부른다고 찔릴 건 전혀 없다.
막말로 꽃밭에서 뛰노는 건 실한 고추 달린 남자라면 누구나 누리고 싶은 호사잖은가.
근데 양심이 찔린다.
여울 씨가 회임을 안 했다면··· 음, 나도 남자인지라 은근슬쩍 그럴까요?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복중에 아기가 있는데 계집질(?)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았다.
“아뇨. 괜찮습니다.”
“아쉽군요.”
나도 아쉽긴 하다.
“대감. 소인은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소기파 씨다.
“왜요, 같이 드시지 않고?”
내 말에 방봉구를 흘긴 소기파 씨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소인은 속이 더부룩해서··· 현감께서 성의를 보인 것이니 대감께선 마저 즐기십시오. 그럼.”
“그래도 같이 드시지 않구요. 진수성찬이 따로 없는데··· 여기까지 온다고 수고도 많으셨구요.”
“생각해주시는 건 감읍한 일입니다만,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한 소기파 씨가 장내를 빠져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흘기던 방봉구가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혹 예까지 오면서 늘 저랬습니까?”
생각해보니 그랬다.
소기파 씨는 늘 접대를 받을 때면 속이 더부룩 하다느니 하면서 자리를 피했었다.
뇌물이라도 받을까봐 미리 차단하는 건가?
“꼿꼿함은 태풍을 이기지 못 하는 법이거늘··· 한심한지고.”
“예?”
“아. 하하! 아닙니다. 드시지요.”
“그럼, 잘 먹긴 하겠습니다만 아까 말한대로 밥만 먹고 일어나겠습니다.”
“예, 그러십시오.”
뭐부터 먹을까.
행복한 고민을 하면서 수저를 들던 그때였다.
아전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방봉구에게 귀엣말을 건넸다.
귀엣말을 들은 방봉구는 화들짝 놀라 ‘그게 참말이냐?’ 되물었다.
“오랑캐 놈들이 무도해도 정도가 있거늘······.”
“무슨 일이라도 터졌습니까?”
“아, 아닙니다. 마저 드십시오. 송구하오나 저는 잠깐······.”
이 시대의 수령들은 사법권과 군사권까지 갖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군수나 시장들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더 바쁠 수 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신경 쓸 일이 더 많으니까.
나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다녀오십쇼.”
장내를 빠져나가는 방봉구를 흘긴 나는 마저 수저를 들었다.
***
다이스케(大介)는 두 귀를 의심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의 질문에 상대는 연신 머뭇거렸다.
“말해보게. 무슨 말인가, 대체?”
“이번에는 금으로 준비하라더군. 망할 놈들.”
다이스케는 실소를 흘렸다.
“금?”
“그래. 조선의 왕자가 행차한다던데 아무래도 그 일 때문이 아닌가 싶네.”
“왕자가 행차하는 것과 금을 바치라는 것이 무슨 연관이 있는 건가.”
상대는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뇌물 아니겠나, 뇌물.”
“아니, 그 무슨··· 그걸 왜 우리더러 내라는 겐가?”
“만만한 게 우리 일본인들이잖나.”
다이스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스오국(지금의 야마구치현 부근) 출신이었다.
스오국 출신인 그가 이 머나먼 이국 땅에 들어와 있는 건 돈 때문이었다.
그는 상인이었다.
수완이 제법 있었던 탓인지 나름 본국에서는 아쉽지 않게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던 그가 조선의 왜관에 관심을 보인 건, 우습게도 조선의 그림 때문이었다.
길을 가다 욕을 당한 딸아이는, 그 이후로 말문을 닫아버렸다.
그 해맑던 아이가 미소도 잃었고, 활동적인 성격도 바뀌어 집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우연히 접한 조선의 그림을 보여주었을 때, 딸아이가 4년만에 관심을 보이는 걸 아비로서 볼 수가 있었다.
이후로 족족 조선의 화가가 그린 그림을 구해 딸아이에게 전해주었는데, 아무래도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때마침 동료에게서 대마도주가 세견선의 낙인을 팔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고, 거금을 들여 그 도주의 허락을 받아 조선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목적이 조선의 화가가 그린 그림일지라도 그림을 구하는 비용과, 생계를 위해서라도 교역을 하지 않을 순 없었으니 상행위는 필수였다.
문제가 있다면 법적으로, 도주의 허락을 받고 조선에 들어온 세견선들은 20일 동안만 체류가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조치였다.
어떤 상인이 20일 안에 가져온 물건을 다 팔 수가 있겠나?
때문에 왜관과 그 주변에는 체류 기간을 넘긴 일본인들로 넘쳐 났는데, 대부분은 조선의 수령이나 만호에게 뇌물을 써서 남는 경우였다.
다이스케도 마찬가지였다.
물건을 파는 건 둘째치고 20일 만에 조선의 그림을 구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100일에 한 번 씩 인근 고을의 수령들에게 뇌물을 바쳐서 체류 기간을 연장하거나 묵인을 받곤 했었는데 본인의 기억이 맞다면 달포 전 쯤, 이미 뇌물을 바쳤었다.
“달포 전에 받은 건 그새 잊어버렸다던가?”
“말했잖은가. 만만한 게 우리 일본인들이라고. 못 바치겠으면 조선 땅에서 나가라는 심보니 울며겨자 먹기로라도 바칠 수 밖에.”
“난 못 내네.”
상대가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아니, 어쩌려고? 자네, 아직 딸아이한테 선물로 줄 그림도 다 못 구했다고 하지 않았나.”
“따질 걸세.”
“따, 따져?”
“벌써 몇 번 째인가. 사람이 양심이 있다면 적당히 요구를 해야지, 이번엔 뭐? 왕자가 행차하니 뇌물을 바쳐라? 허.”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다이스케는 손에 침을 퉤 뱉고는 휘적휘적 어딘가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