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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05화 (105/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05화>

    여러분들은 면천입니다.

    ***

    쓰시마국(대마도) 출신인 가쓰히로(勝弘)는 하급 무사였다.

    집안은 대대로 쓰시마의 도주 가문인 소씨(宗氏)를 섬겼고, 가쓰히로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소씨 가문을 자연스레 섬기게 되었다.

    그런 그는 지금 조선에 머물고 있었다.

    조선에 온 지도 어언 5년이 지났다.

    쓰시마에서 조선 무역이란 곧 생사가 달린 일이었다.

    그가 나고 자란 쓰시마는 부끄럽지만 물산이라고 부를 만 한 게 전혀 없었다.

    땅은 척박했고 기껏 있는 땅도 섬사람들을 모두 먹여 살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싫든 좋든 쓰시마는 조선과의 무역에 매달려야 하는 입장이었고, 조선 무역은 이제는 하나의 전통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리고 5년 전.

    가쓰히로는 쓰시마 섬의 도주인 소 무라모리(宗材盛)의 명을 봉행하게 된 마사키(政樹)를 따라 조선에 들어왔다.

    그가 조선에 들어오기 전에 섬에서 하던 일은 섬의 선박을 제조하던 일이었다. 당연히 조선에 들어와서는 선박의 보수와 관리를 도맡아 하고 있었다.

    그런 그는 얼떨떨했다.

    “이자인가?”

    5년간 조선에서 살았다.

    조선국 관리들은 되도록 조선인과 접촉을 막았고, 이를 어기는 조선인과 일본인은 엄벌에 처하도록 했다.

    하지만 애당초 법이란 게 틈이 있기 마련이고, 사실상 잘 지켜지지도 않았다.

    사람 욕심이 한도 끝도 없다 보니 조정의 눈길을 피해 피해 밀무역을 하는 자들도 태반이었다.

    따라서, 조선에 들어온 지 불과 5년 밖에 안 됐지만 가쓰히로는 조선말이 제법 유창한 편이었다.

    그리고 그가 배운 조선 말이 틀리지 않았다면 방금 들은 ‘이자인가?’라는 말은 분명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말이었다.

    꿀꺽.

    가쓰히로는 마른 침을 꼴깍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눈앞에 다소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는 이는 조선의 임금이었다.

    아직도 실감이 안 났다.

    보름 전.

    가쓰히로는 마사키에게 ‘자네가 상경좀 해야겠네.’라는 말을 듣는다.

    까닭을 묻자 마사키 님은, ‘전함사 제검 김 공(公)이 부탁할 게 있다더군.’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전함사 제검 김 공.

    그러니까, 김즙은 그 처가가 쓰시마와 밀무역을 하고 있었다.

    거래를 튼 것도 김즙이고 여러 차례 도움을 주고 받았으니 초면은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내이포에만 머물고 있는 자신이 상경이라니······.

    뭔가 의아했지만 마사키 님의 말씀이니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고 그 길로 상경을 했다.

    그리고, 아주 얼떨결에 여기로 불려왔다.

    부탁할 게 있다던 전함사 제검 김즙에 의해서 말이다.

    짧게 지난 날을 회상한 가쓰히로는 새삼스럽게 조선의 임금을 흘겨봤다.

    입궐하기 전에 내관에게서 ‘절대 눈을 마주치지 마시오.’ 신신당부를 들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흐읍.’

    그러다 임금과 눈이 마주친 가쓰히로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아닌 게 아니라.

    중신들이 도열한 가운데 일월오봉도를 배경으로 자못 거만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조선 임금의 모습은 사왕(불교의 왕들을 이름)에 둘러싸인 염라대왕을 연상케 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스, 승홍(勝弘)이라 하옵니다.”

    “너희의 말로는 무엇이라 부르는고?”

    “가쓰히로라고 하옵니다.”

    “가쓰히로. 이름 한 번 고약하다. 그래, 고개를 들라.”

    가쓰히로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조선 임금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한 번 헛바람을 들이키며 고개를 떨궜다.

    “나는 너의 왕도 아니니 굳이 긴장할 필요 없다.”

    역시나, 입궐할 때 자신에게 신신당부한 내관이 떠올랐다.

    감사한 일이 생긴다면 내관은 분명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말하라고 했다.

    “서, 성은이··· 성은이 마, 망극하옵니다.”

    “조선말을 아주 잘 하는구나.”

    “아직 서툰 것이 많나이다······.”

    “내 내이포에 머물고 있는 너를 친히 상경시킨 까닭은 부탁이 있어서다.”

    가쓰히로는 반사적으로 안면이 있는 김즙을 흘겼다.

    김즙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하, 하교하시옵소서.”

    “네 그리 말하니 내 편히 말하겠다.”

    “네가 배좀 만들어줘야겠구나.”

    “배··· 배라 하오시면······.”

    “배 말이다. 바다에 띄우는 배.”

    인지부조화가 인 가쓰히로가 눈만 끔뻑거렸다.

    “그걸 어찌 소인에게······.”

    어안이 벙벙했다.

    외지에서 5년이면 제법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5년 동안 가쓰히로는 조선인의 일본인에 대한 멸시를 몸소 체험했었다.

    그런데 선박 제조를 일본인인 본인에게 맡긴다?

    선뜻 이해 할 수 없는 게 사실이었다.

    “제검에게 들어보니 네 조상이 소싯적에 왜구로 노략질을 했었다지?”

    “···”

    “그걸 탓 하려는 것이 아니다. 네 조상은 노략질을 일삼았고 네 아비는 배 만드는 일에 재주가 있어, 너 또한 그 일을 물려 받았다 하니 바닷일에는 너처럼 익숙한 이가 또 없을 것이 아니더냐?”

    “하오나 소인은 배 만드는 일은 손에서 놓은지 오래라······.”

    섬에서는 줄곧 하던 일이 선박 제조와 감독이었다.

    하지만 조선에서 무역을 책임지면서, 그리고 세견선에 대한 관리를 도맡으면서 자연스레 선박 제조는 손에서 놓게 되었다.

    “사람이 손에 익힌 재주는 어디가지 않는 법이다. 네가 이 설계도에 나온 배를 만든다면 큰 상을 내릴 것이다.”

    융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상선이 설계도를 가쓰히로의 손에 쥐어주었다.

    설계도를 보고 잠시 고민하던 가쓰히로가 말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어찌 이런 배를 만드는 것인지 여쭈어도 되겠사옵니까?”

    “조운선(지방의 세금을 운반할 때 쓰던 세곡선)으로 사용코자 함이다.”

    조선 임금의 말에 가쓰히로는 내심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금 설계도를 들여다봤다.

    배의 크기로 보나 형태로 보나 세곡선으론 안 보였다.

    가쓰히로의 아리송한 표정 때문일까.

    “너도 이미 조선에 기거한 지 5년이 됐다니 알겠다마는 하삼도에서 올라오는 세곡선은 모두 서해를 돌아온다. 하지만 서해의 지형이 험하고 물은 얕으니 침몰되는 일이 매우 잦다. 작년에만 해도 4척이 침몰했지.”

    들어서 알고 있는 일이다.

    조운선을 보내는 수령이 의도적으로 배를 침몰 시키고, 거짓 보고를 올리곤 조운선의 곡식을 꿀꺽 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지만,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조운선 침몰은 왕왕 있는 일이었다.

    “조운선을 이리 크게 만드시려는 까닭이 무엇인지······.”

    “세곡을 많이 실어 나르기 위함이다.”

    “서해는 물이 얕고 암초가 많아 큰 배보단 작은 배가 용이할 터인데······.”

    “어디, 하삼도의 조운선으로만 소용이 있겠느냐. 제주에서 쓰기도 적합하니 내 이르는 것이다.”

    가쓰히로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긴가민가하지만, 조선 임금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까닭도 없었다.

    “만들기 어렵진 않겠으나 조운선으로 쓸 배를 만드는 거라면 조선에도 기술자가 많을 텐데 어찌 소인에게 이런 중차대한 일을 맡기시옵니까?”

    “너희의 의리를 알아보기 위함이다.”

    뜬금없는 소리에 가쓰히로는 눈을 끔뻑거렸다.

    “우리가 너희에게 주는 면역과 면세가 얼마나 되더냐. 왜관에 머무는 자들도 약조와는 다르게, 너희들 섬으로 돌아가지 않고 굴혈을 판 채로 계속 머물고 있다지.”

    “···”

    “지금까진 묵인만 했다만 이번에 큰 난리를 겪으면서, 또 북쪽의 오랑캐들을 상대하고자 군을 일으키면서 남쪽의 일들도 경계치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번 일로 너희의 의리와 신의를 확인코자 함이니 네 어찌 내 청을 거절하랴.”

    “송구하오나 그 문제는 소인의 소관이 아니옵니다······.”

    “안다.”

    “제 상관이신 마사키님께도 여쭤야하고, 또 저희 섬의 도주께도 알려야 하는 일이옵고······.”

    “세견선(무역을 허락받은 무역선)의 수를 10척 늘려주마. 어떠하냐?”

    꿀꺽.

    “1, 10척이나 말이옵니까?”

    “그래.”

    가쓰히로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하오면 제 상관이신 마사키님께 서신을 보내 일의 형편을 따져보고, 곧바로 착수할 수 있도록 하겠사옵니다.”

    “그리하라.”

    ***

    “음. 여기냐?”

    “예.”

    “괜찮아 보이네. 왕래하기도 편하겠고··· 길도 제법 널찍한데?”

    아, 여긴 두뭇개라는 곳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두모포(豆毛浦)라고도 하는데 처음 듣는 이름인 걸 보면 딱히 후대에까지 전해지는 지명은 아닌 것 같다.

    다만 어딘지 추정은 할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서있는 곳을 기점으로 서북쪽에 목멱산(남산)이 보이고, 반대편인 동쪽 방면에 있는 산이 매봉산(응봉산)이라고 하니··· 그리고 바로 남쪽에는 한강물이 철철 흐르고 있는 걸 보니, 아마 옥수동~금호동 부근쯤이 아닌가 싶다.

    생각해보면 수영이가 금호동 푸르지오1차에 살았었는데.

    “근데 크기가 얼마쯤 되냐?”

    “잘은 모르겠습니다요. 옥토로 쳤을 때, 한 10결(3~4만평)쯤 되는 것 같긴 한데······.”

    “음.”

    나는 다시 한 번 내 땅을 살폈다.

    아, 이 땅은 무슨 땅이냐고?

    요 몇 달 사이 돈을 좀 두둑하게 받지 않았나.

    아니, 두둑이 뭐야.

    평생을 써도 못 쓸 정도의 돈을 받았다.

    사실 내가 아직 이쪽 세계의(?) 경제 개념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추정치로는 내 재산이 현대 가치로 몇 조 쯤은 되는 것 같다.

    아무래도 상대적으로다가 부가 특정 계층에 쏠려 있다 보니, 작은 돈도 더 커보이는 효과가 있거든.

    좌우지간.

    말한 것처럼 이 땅도 이번에 역적들에게 적몰한 땅 중에 하사 받은 재물중 하나다.

    모두 알다시피 내가 비누공장을 하나 차리려고 했다.

    물론 돈 벌려는 건 아니고, 예전에 형님께 말씀드린대로 사치를 장려하는 차원에서 공장을 세우는 거다.

    사람은 누구나 남들과 달라보이길 원한다.

    그래서 여자들이 명품백을 빚을 내서라도 사려는 거고, 남자들 역시 과한 빚을 지면서라도 수입차에 투자를 하려는 거다.

    사람 본성은 여기나 거기나 똑같다.

    비누를, 종두법과 잔병을 예방 할 수 있는 기물이라고 소개한 다음에 비싼 가격을 매겨 판다.

    당연히 비싼 가격이니 아무나 못 살 테고.

    물론 꼭 이게 아니어도 이제 곧 유구국에 간다.

    유구국 왕에게 진상할 물건이 있어야 하는데, 조선의 특산물이래봤자 다 거기서 거기다.

    좀 더 강인한 인상을 남기고 싶은 마음에, 비누 사업을 서두르고 있었다.

    안 그래도 전쟁이다 뭐다해서 늦어진 감도 있고.

    “여기에 비누 공방인가 세우신다고 하셨죠?”

    “공장이라니까, 자꾸 공방이라고 하냐?”

    “예, 아무튼 공장 말입니다요. 사람은 어찌 쓰실 생각이십니까요?”

    “너네들한테 시킬까봐?”

    뜨끔한 표정이다.

    “아뇨, 그건 아닌데······.”

    “아니긴 뭘. 얼굴에 다 써있구만.”

    “···”

    “집안에 남는 게 노비들인데 당연히 너희들 써야지.”

    사치를 장려 시킨다면서, 내수 경제 활성화를 위한 초석이 비누 공장이라면서 땡전 한 푼 안 드는 노비들로 공장을 가동시키는 건 모순 아니냐고?

    당연히 모순이다.

    모순인데······.

    이래도 모순일까?

    ***

    털썩!

    “대, 대감마님··· 쇠, 쇤네가, 아니 쇤네들이 무슨 잘못이라두······.”

    “예. 쇤네들이 혹시라도 대감마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더라면 이게 다 쇤네들이 무식하고 배운 것이 없어서 그런 것이니 너그럽게 용서해주셨으면 합니다요······.”

    “지금 갑자기 면천을 시켜주신다고 하면 쇤네들은 갈 곳이 없습니다요, 대감마님······.”

    4월 말이다.

    그런데도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엊그제 비가 와서 그런가?

    코를 훌쩍거린 나는 부복한 노비들을 바라보았다.

    서른 넷 가을이. 마흔 둘 덕복이. 서른 하나 업칠이. 스물 셋 정금이. 스물 아홉 덕녀······.

    도합 34명의 노비들이다.

    “대, 대감마님··· 갑자기 어찌 면천을······.”

    당황스럽기는 부복한 식구들과 마찬가지인지, 덕산이 얼굴에는 의문문이 한가득이었다.

    덕산이는 면천에서 제외시켰다지만, 다른 식구들과 오만정이 들 만큼 함께 살았으니 이들의 면천이 남일 같진 않게 느껴졌으리라.

    이 시대엔 따로 밥 빌어먹을 수단이 없는 노비는 면천 되는 순간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거든.

    그러니까, 한마디로 내가 이들더러 면천 시켜준다는 건 나가 죽으란 소리나 진배 없다.

    근데 내가 누군가?

    인성 하나로는 부처님도 울고 갈 성인군자 아닌가.

    당연히 나가 죽으라는 의미로 면천을 시켜주겠단 게 아니었다.

    “여러분도 들어서 알고 계시겠지만 제가 조만간에 공방 하나를 차릴 겁니다.”

    “···”

    “여러분들은 면천시키되 거기서 일하게 할 생각이구요. 물론 따로 월봉 개념으로 돈도 지급 할 겁니다.”

    “···?”

    그건 또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는 반응들이다.

    나는 좀 더 알아듣기 쉽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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