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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04화 (104/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04화>

    네가 가라 오키나와

    ***

    패초를 받고 입궐했지만 어좌에 착석한 임금은 도통 입을 열지 않았다.

    임금이 입을 연 것은 장장 반시진이 흘렀을 무렵이었다.

    “나는 임금이다.”

    반시진만에 뗀 운이라고 하기엔 뜬금없는 소리였다.

    나는 임금이라니··· 그걸 모르는 사람은 적어도 이 자리엔 없었다.

    “···”

    “내가 임금인가 아닌가?”

    누굴 특정한 질문은 아니었다.

    당연히 대답도 들려올리 만무했다.

    여전히 고요한 편전에 임금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고 어좌에서 일어나 형조참판 정숙지에게 다가갔다.

    정숙지가 읍을 하며 고개를 조아리자, 융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참판이 가도록 하라.”

    “무얼 말씀이시온지······.”

    “유구국.”

    정숙지의 인상이 단숨에 구겨졌다.

    “마음에 안 드는가?”

    “아, 아니옵니다. 다만 전하께서 새로운 의리로서 우의를 다지고자 하시는데 신이 갔다가 실수라도 할까 저어 되는 마음에······.”

    “저어가 된다.”

    “그러하옵니다.”

    “저어가 되면 안 되지. 한데······.”

    “하문하소서.”

    “혹 바닷길이 위험하기 때문에 저어 되는 것은 아닌고?”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신이 어찌 한낱 생사가 걱정되어 바닷길을 마다하겠나이까.”

    “그래. 참판 같은 자가 한낱 생사가 걱정돼서 바닷길을 마다할 리가 없지.”

    고개를 주억거린 임금이 다시금 어좌로 나아갔다.

    편전에는 다시금 적막이 감돌았다.

    길면서도 불편한 침묵이었다.

    “아까 진성이 찾아왔다. 내 사행길로 갈 만한 이를 물색하고 있다고 하니 주저없이 본인이 가겠다고 하더군.”

    “···”

    “정말로 가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뭐랄까··· 잔치를 앞두고 들뜬 아이 같았지.”

    “···”

    “내 경들에게 하나만 더 묻겠다.”

    “···하문하시옵소서.”

    “경들은 말이다. 이 나랏일을 하기가 싫은 것인가?”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영부사 성준이었다.

    성준을 직시한 융은 진지한 표정은 거두고 장난이었다는 듯 피식거렸다.

    “영부사. 뭘 그리 긴장을 하고 그러시오. 내 가볍게 물어본 것이외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나는 임금이오. 임금이라 경들의 형편을 헤아리기가 어렵소. 그래서, 경들의 형편을 헤아릴 겸 가볍게 물어본 것이니 너무 개의치 마시오. 아, 그래. 말이 나온 김에 영부사는 어떠시오? 나랏일이 하기가 싫소?”

    “군신이 함께 정사를 돌보는 일은 선비의 이상이옵니다.”

    한 사람의 선비로서 싫을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선비의 이상이다.”

    “그러하옵니다.”

    “그럼 영부사께서는 어찌 참판이 사행길을 원하지 않아 하는 것 같소?”

    성준이 정숙지를 흘겼다. 그러자 정숙지가 변명이라도 하듯 입을 열었다.

    “전하. 신이 말씀 아뢨다시피 신은 전하의 왕업에 누가 될까 저어 되는 마음에······.”

    임금의 거수에 정숙지가 입을 다물었다.

    “참판에게 물은 것이 아니다.”

    “···”

    “답해보시오, 영부사. 내 볼 때 참판은 사행길을 원치 않아 하는 것 같은데 어찌 그런 것 같소?”

    “참판 역시 한 사람의 선비로서 어찌 군신이 함께 정치를 도모하는 이상을 꿈꾸지 않겠습니까. 다만 참판이 말한대로 전하의 왕업에 해가 될까 저어 하는 마음에, 보다 나은 인사로 인선함이 옳겠다 사료되어 그런 것이 아닌가 하옵니다.”

    “그럼 진성은 나의 왕업에 누가 되든 말든 사행길을 자처한 게로군?”

    자충수였다.

    긍정하자면 대군의 충심을 의심한 셈이 되고, 부정하자면 대군을 모욕한 셈이 된다.

    “···”

    “경들 역시 신래(신입) 시절이 이었을 것이외다. 또 군주를 도와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만들겠다는 선비로서의 초심도 있었겠지. 그런데 지금 보면 말이오. 그 초심이 보이질 않아.”

    “···”

    “죄 탐욕에 눈이 멀어 있고, 죄 본인의 안위만 생각하고, 죄 가문의 영화만 생각하고··· 그래서 백성을 수탈하는 불가의 마귀 같소.”

    “전하··· 통촉하여주시옵소서.”

    “통촉? 통촉은 어찌하면 되는 것인가? 입 쳐닫고, 그대들이 본 것만 보고, 그대들이 말한 것만 입에 담고, 그대들이 들은 것만 듣고 있으란 소린가?”

    “저, 전하······.”

    “내 일전에도 빈청에 처선의 일을 논하라 했고 그전에는 공신의 일을 논하라 했다. 둘다 차일피일 하는 통에 결국 내 알아서 처결했다. 그래. 그 두 일은 잘못 입을 놀렸다간 일신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그렇다 치지. 그런데 내 사행길에 정사로 갈 인선을 논하라 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말이 없느냐 말이다!”

    “그것이 전하께서 하문하신······.”

    “그래서 가라고 하면 이래서 안 된다! 저래서 안 된다! 나는 못 가니 저 사람을 보내라! 그리고, 내 신문고가 있으나 마나하니 이를 혁파할 방안을 논하라 한 지가 언젠가? 보름이다. 논하고 있긴 한 겐가?”

    “···”

    “차라리 모두 사직하라. 그래, 이 편전이 텅텅 비든 말든 나라는 잘 돌아 갈 테니 사직하라. 어차피 하는 일도 없이 빈둥거리는데 경들이 있건 없건 무슨 상관인가?”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쾅!

    “고정? 영부사 같으면 고정하겠는가!”

    “···”

    “지방을 돌아보아라. 경들이 탄핵한 지방관들의 일을 상기해보란 말이다. 김 아무개는 비루하니 파직하소서. 박 아무개는 탐오하니 파직하소서. 이 아무개는 주색을 밝혀 고을의 형편을 헤아리지 않으니 파직하소서··· 과연 윗물이 더러운데 아랫물이 맑겠는가? 본인과 가문에 이득이 되는 일은 앞장서서 하려 하고, 본인과 가문에 해가 되는 일은 마다 하려 하니 윗물을 보고 올라온 아랫물이 맑겠냐 이 말이다!”

    “···”

    씩씩거리던 임금에 중신들을 고개만 조아렸다.

    할 수 있는 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내 유구국에는 진성을 보내겠다.”

    “저, 전하. 어찌 대군을 보내시려 하시옵니까. 만약 험한 바닷길에 변고라도 생긴다면······.”

    “간다는 사람은 없고 인선을 맡겨도 일처리가 늦으니 어쩔 수 있나. 자처하는 사람이라도 보내 속히 일을 매듭 지어야지. 내 진성을 보내겠다. 진성을 보내되······.”

    “···”

    “천에 하나라도··· 만에 하나라도, 진성에게 변고가 생긴다면 그대들 모두 무사치 못 할 것이다.”

    꿀꺽.

    “진성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예판은 속히 사행을 채비하라.”

    “분부 받드옵니다.”

    ***

    “진짜요?”

    풍원위의 말에 화들짝 놀란 내가 되물었다.

    “예.”

    “앗싸!”

    이제 조금은 조선말이 익숙해지려고 하는데 이렇게 텐션이 업 되면 나도 모르게 입에 벤 말들이 툭툭 튀어나오곤 한다.

    지금도 개꿀띠를 외치려다 앗싸로 순화했다.

    그만큼 기쁘다.

    “그리 기쁘십니까?”

    “기쁘죠. 첫 해외여행을 대사 자격으로 가게 됐는데.”

    “허. 사행길이 뭔지는 아시지요?”

    “지금 저 무시하십니까?”

    “아뇨, 무시가 아니라······.”

    “적당히 둘러보고, 적당히 친분 쌓고, 최대한 국익을 우선하는 게 사행길 아닙니까. 사람을 뭘로 보고······.”

    “···”

    풍원위의 반응을 보니 아닌가?

    “바닷길이 얼마나 험한지는 아시지요?”

    “알죠. 위험한 것도 알구요.”

    “예. 위험합니다. 당장 제주만 해도 열에 서넷은 풍랑을 만나 고초를 겪지요. 개중에는 목숨을 잃는 자들도 있구요. 그런데도 사행길을 자처하신 겁니까?”

    “아니, 풍원위. 내가 황천길 떠납니까? 걱정 해주는 건 고마운데 우리 와이··· 아니, 안사람 보다 더 걱정하십니다?”

    “걱정이 되지요. 유구국이라니··· 허, 참. 전하께서도 그렇습니다. 물길이 밝지도 않아서 자칫하면 위험 할 수도 있는 길에 대감을 보내는 용단을 내리시다니······.”

    “지금 전하 뒷담화 하시는 건 아니죠?”

    “아니, 그게 아니라··· 큼큼.”

    그만큼 풍원위가 날 걱정하고 있다는 건 느껴졌다.

    내가 풍원위를 가깝게 생각하고 의지하는 사람으로 느끼는 것처럼, 풍원위도 날 그렇게 생각한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아마, 풍원위는 한껏 들뜬 날 보고 철없는 아이 보는 느낌일지도 모른다.

    형님의 관점에서도 날 철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고, 가까운 두 사람도 그렇게 느끼는데 날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예 실성했거나 어디가 좀 모자라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뭐,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기도 한데······.

    간다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

    말했다시피 하기 싫다는 사람 억지로 등떠밀면 하려는 것도 안 하는 법이다.

    더군다나 이건 매우. 몹시. 엄청.

    중요한 일이다.

    난 평생을 고추맛도 못 느껴보고 죽고 싶진 않거든.

    그리고 고추맛을 느끼기 위한 첫 관문이 바로 유구국이다.

    유구국을 기점으로 고추를 수입해 올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내가 미쳤다고 그 먼바닷길을 장치 하나 없이 가겠나?

    생각해둔 게 있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조선 강국이었지······.’

    물론 내가 여기 오기 전까지 중국에 살짝 역전 당하는 기미가 보일랑 말랑 하긴 했지만 명색이 조선업 강자 대한국민인(?)으로 평저선을 타고 갈 생각은 전혀 없다.

    내가 역알못이라도 평저선이 연안용이라는 것 쯤은 안다.

    이건 사실 따지고 보면 역사와 관계 없는 공학적인 상식이니까.

    맹선 타고 갈 생각은 당연히 없다.

    자, 그러면 뭐부터 해야 하냐.

    “풍원위.”

    “예.”

    “일단 입궐부터 하죠.”

    입궐한 나는 형님께 첨저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물론 맹선으로도 방법이 아주 없진 않았다.

    가끔 트럭들도 눈길을 달릴 땐 굳이 짐을 적재해 하중에 힘을 가하곤 하니까.

    같은 맥락에서 맹선도 하부에 짐을 선적해서 무게 중심을 잡는다면 불가능해 보이진 않았다.

    오키나와가 먼 거리에 있다곤 해도 북미까지 가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자동차도 애프터 마켓이 아무리 발달했어도 결국은 제조사에서 만든 순정이 최고인 것처럼 먼 바다를 건너려면 개조한 평저선 보다는 아예 목적이 다른 첨저선을 타는 게 좋아보였다.

    무엇보다 안전 제일이기도 하니까.

    다행히 형님은 다른 윗대가리들이라면 으레 있는 안전불감증은 없으신지 금방 내 말을 들어주셨다.

    전함사(선박과 조운을 맡던 관서)에 첨저선 설계를 맡기고 팔도에 조선술을 가진 사람들을 수소문 한 것이었다.

    ***

    편전.

    “못 한다?”

    진성의 부탁을 호기롭게 받아들이고 전함사에 첨저선의 설계를 맡겼지만 시작부터 난항이었다.

    전함사 제검(전함사의 최고 실무자)이 설계도를 보더니 손사래를 친 것이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그렇사옵니다.”

    “배를 만드는 것은 똑같은데 어찌 안 된다는 것이냐?”

    “말씀대로 만드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옵니다. 하오나 배라는 것은··· 아니, 지금 전하께서 하교하신 것은 먼 바다를 나가기 위함이온데 배를 만들더라도 시범적으로 띄워봐야 하옵니다.”

    “그렇겠지.”

    “한데 전함사에 속한 자들은 조운선이라면 냉큼 만들어도 이처럼 구조부터가 다른 함선은 손이 익지 않아 시행착오가 없을 수가 없사온데 전하께서 최대한 빨리 만들라 명하신 터라··· 모두들 할 수가 없겠다고······.”

    “진성이 잘못되면 내가 중신들에게 그 책임을 묻겠다고 한 것 때문이더냐?”

    “사실··· 말은 손에 익지 않는다 하지만, 송구하옵게도 그런 듯 하옵니다.”

    “이런 어리석은 자들이 있나.”

    성을 냈지만 사실 그들을 탓할 것도 아니었다.

    제검이 말한대로 손에 익지도 않은 일을 시킨 건 본인이니까.

    게다가 6개월 안에 만들라고 말한 것도 본인이었으니까.

    마음 같아선 모두 전함사에서 내치고 관노로 삼고 싶었지만 그렇게 화풀이를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을까 싶었다.

    “시간을 더 준다면?”

    “송구하오나··· 그만두는 자들이 속출할 듯 싶사옵니다.”

    결국은 기술이 부족하다는 게 아니었다.

    보신이 우선이란 뜻이었다.

    “네가 지금 임금을 기만하려는 것이냐?”

    털썩.

    “처,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신은 그저······.”

    벌벌 떨고 있는 제검을 보니 윽박 질러서 될 일이 아닐 것 같았다.

    하기사.

    요 몇 달 사이에 능지처참 된 이들이 한 둘이던가.

    피바람 부는 나날들이었으니 본인들이 만든 배를 임금이 총애하는 대군이 타고 가다가 잘못된다면, 그 후폭풍이 두렵긴 할 터였다.

    그렇다고 임금 체면에, 배를 만들지 못 해서 사직하겠다는 자들을 도리어 벌 주겠다고 하는 것도 민망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하면 어쩐다.”

    “저기······.”

    “말해보아라.”

    “송구하오나 이 배는 조선 사람 보다는 왜인들 중에 기술자가 더 많사옵니다.”

    “그런데?”

    입을 떼기 두려운지 제검은 입만 오물거렸다.

    “괜찮다. 편히 말해보아라.”

    “신이 마침 왜관에 있는 자중에 적합한 자들을 알고 있사옵니다.”

    왜인에게 일을 맡기겠단 소리였다.

    도처에서 비난이 날아들 수 밖에 없는 발언이기도 했다.

    “아니, 무슨 왜인에게 그런 중차대한 일을 맡기겠다고 하시는가.”

    “그렇소. 전하. 전함사에서 태만하여 임금을 기만하는 것이니 벌을 주소서. 어찌 어명을 받들지 않을 수 있단 말이옵니까?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옵나이다.”

    찌릿.

    “그대들은 신문고를 대체할 방안이나 가져오라. 지금 누가 누구더러 어명을 받들지 않는다고 한단 말이냐.”

    “···”

    “그래. 그 왜인이 어떤 자인가?”

    “그러니까······.”

    제검이 본인이 알고 있는 왜인에 대해 설명을 하면 할수록.

    융은 왠지 그 왜인이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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