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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03화 (103/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03화>

    내가 가라 오키나와

    ***

    광화문.

    친국이 열렸다.

    문무 당상관들은 임금의 부름에 모두 불려나왔고, 죄인들은 두 말 할 나위 없이 광화문 뜰에 무릎 꿇려졌다.

    도열한 당상관들을 흘긴 융은 무릎 꿇려진 죄인들에게 냅다 주먹을 날렸다.

    여덟 명 모두에게 고루 주먹질을 하고 나니 주먹이 얼얼했다.

    “한심한 노릇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들 모두 친인척이 관직에 있었다.

    문철의 아비는 전 예문관 봉교로 있다가 지병 문제로 사직한 문세현(文洗現).

    우범하의 아비는 학정을 일삼다가 오죽 학정이 심했으면 참다 못 한 백성이 날린 화살을 맞고 파직 당한 전 광주판관(廣州判官) 우윤공(禹允功).

    황두명은 황희의 현손으로 이복형이 사간원 정언 황맹헌(黃孟獻).

    고태안의 아비는 함경북도 절도사 고형산(高荊山)······.

    이 여덟 중에 천계진과 석혁의 친인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관가에 몸담은 친인척들을 두고 있었다.

    “판윤(지금의 서울시장).”

    “···예, 전하.”

    한성부 판윤 반우형(潘佑亨)이 읍하자, 융은 노기띤 얼굴로 죄인들을 가리켰다.

    “저런 버러지 같은 것들이 백주대낮에 장안을 활보하는 동안 경은 도대체 뭘 했는가!”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전임 판윤 민효증이······.”

    “경이 판윤으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일인 건 내 잘 안다만,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것인가?”

    “···송구하옵니다.”

    “경들도 모두 똑같다.”

    “···”

    “백주대낮에 저런 버러지 같은 것들이 활보하면서 민생에 해를 끼쳤는데 어찌 잡아 들이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단 말이냐?”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지 다시금 벙어리가 된 중신들에 융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중신들이 무슨 죄가 있겠나.

    모두 본인이 부덕한 결과다.

    “저 버러지들은 모조리 참해라.”

    “저, 전하!”

    “살려주십시오, 전하.”

    “닥쳐라, 이놈들! 백주대낮에 도적질을 일삼고 아녀자를 겁간한 죄를 네놈들 스스로가 실토를 했거늘, 어찌 구차하게 살려달란 말이 네놈들 입에서 나올 수 있단 말이냐.”

    “···”

    “내 일찍이 창산군을 공신으로 예우하지 않은 자들은 모조리 역신으로 다스리겠다 공언하였으니, 비록 당한 것은 개똥이지만 아비의 심정으로 피를 토했을 테니 그 심정을 헤아려 본다면 도저히 살려둘 수가 없다. 저놈들은 역신이다. 모조리 참하고, 관직에 있는 친인척들은 모조리 삭탈하라.”

    “하오나 함경북도 절도사 고형산은 북방에서 여진을 막는 공로가 큰 자이옵니다. 가뜩이나 여진의 준동이 심한 이때에 형산을 파직한다면 북방에서 변란이 일어나도, 막을 장수가 없어질 것이옵니다.”

    좌찬성 강귀손이었다.

    딴에는 직언을 한답시고 했겠지만 시기가 적절치 못 했다.

    “공이 있으면 과를 사할 수 있는 것인가?”

    “···”

    “제 집안 단속도 못 하는 이가 무슨 오랑캐를 막는다 하느냐 이 말이다. 윤리가 곧지 못 한 이는 이처럼 서민의 위에서 군림만 할 뿐이니, 고형산이 험지에 있다고 한들 자식의 일을 몰랐겠는가? 다 알았음에도 방관한 것이다. 또한, 민택의 일이 있은지 불과 1년도 채 되지 않았음에도 이런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관리들이 태만하기 때문이다.”

    융은 이점이 안타까웠다.

    민택의 일화는 이미 장안 전체에 퍼져나갔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의 귀에는 이 여덟 파락호의 일화가 들어오지 않았다.

    정말로 관리들이 이 파락호들의 이야기를 듣지 못 했을까?

    아니다.

    파락호들의 마수는 힘없는 자들에게만 향한다.

    소위 벼슬아치라 불리는 이들에겐 마수가 닿을 리 없고, 그들은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으니 그저 함구로 일관한 것이다.

    괜히 다른 집안 사람과 척지고 싶지 않아서.

    “특히, 이번 사건을 통해 보자면 삼사가 제 기능을 하지 못 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그 책임을 물어 대사간 최인(崔潾)을 파직하고, 대사헌 홍자아(洪自阿)도 파직하며, 대제학 손주(孫澍) 역시 파직한다. 또, 도성에 저런 파락호들이 횡행함에도 막지 못 한 포도장(지금의 경찰청장) 채윤혜(蔡允惠)는 그 죄가 극명하니 삭탈하라.”

    삼사 장관들이 연달아 파직됐다.

    가끔 물의를 일으켜서 한 두 명이 동시에 파직 되는 경우는 있어도, 한꺼번에 파직 된 일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전하.”

    “말하라.”

    “삼사의 장관들이 동시에 경질된다면 언관이 간하는 일을 어려워 할 수 있사옵니다. 부디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이미 언관이 간언을 하지 않으니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니냐?”

    “하오나 삼사 장관들이 큰 죄를 지으지 않았는데도 이처럼 파직한다면 관리들이 두려워하면서 더욱 몸을 사릴 테니 나라의 기강이 어찌 바로 설 수 있겠사옵니까?”

    “한심하다. 그럼 지금 경들은 나랏일을 몸을 사리면서 했던 것인가?”

    “그것이 아니오라······.”

    융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랏일을 몸을 사리면서 하니 저런 버러지 같은 것들이 백주대낮에 횡행하는 것이 아니냐!”

    “···”

    “내 이미 전교했으니 저놈들은 두시진 뒤에 모두 참하고, 그 머리는 저자에 효수하되, 감히 공신에게 손찌검한 황두명은 능지로 다스리라. 또, 진성대군 이역이 장안의 파락호들을 잡아들이는 대로 그들 모두 죄질에 따라 참하거나 유형에 처하고, 지금 공신 개똥이가 저 버러지들의 패악질로 앓고 있다 하니 어의를 보내 진찰케 하라.”

    “···분부대로 거행하겠사옵니다.”

    “그리고 지금 백성들이 고충이 있어도 고충을 말하지 못 하는 까닭은 관리들의 잘못도 있지만 제도의 문제도 있다. 신문고가 유명무실하니, 내 지금 신문고에서 북소리를 들은지가 언젠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이를 혁신할 방안을 빈청에서 논하고 고하라.”

    분노가 극에 달해 삼사의 장관들마저 연달아 파직시켜버린 임금 앞에서 중신들이 할 수 있는 말은 제한적이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로부터 보름에 걸쳐 파락호 토벌(?)이 이뤄졌다.

    천석고황 문경지우는 잡혀온 당일 참형에 처해졌고, 역신으로 분류가 됐기 때문에 재산은 모두 적몰됐다.

    그 가족들은 죄가 역모죄에까진 이르지 않았지만, 이를 방관한 혐의와 집안의 가세를 빌려 이들이 위세를 떨친 일이 입증돼서 관직에 있는 자들은 파직을 당했고, 그 자손들에겐 금고형(죽을 때 까지 관직에 진출을 못 하게 막음)이 떨어졌다.

    입신양명과 출세로 학문을 갈고 닦는 선비가 태반인 시대의 기조를 보면, 사형 선고나 다름이 없었다.

    이 여덟 사람을 제외하고도 패악질을 일삼은 56인은 죄질에 따라 스무명이 참해졌고 나머지 서른 여섯 명은 장형과 유형으로 다스려졌다.

    중신들은 연좌가 될까, 집안 자제들이 일에 연루될까 노심초사하는 나날들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백성들에겐 쾌재의 연속이었다.

    ***

    〈토포사로 활약하면서 느낀 점을 서술하시오〉

    라는 시제가 주어진다면 나는 아마 답안에,

    〈통쾌한 건 잠깐이고 별 느낌 없었다〉

    라고 적을지 몰랐다.

    반대로,

    〈공신 칭호를 또 받은 느낀 점을 서술하시오〉

    라는 시제가 주어진다면 역시나 똑같은 답안을 적을지 몰랐다.

    맞다.

    또 공신 칭호를 받았다.

    저번에 받은 게 정난공신이라는 칭호라면 이번에 받은 칭호는 좌치공신(佐治功臣)이라는 이름의 칭호였다.

    이름 그대로 임금의 정치를 잘 보좌한 공신이라는 뜻인데··· 글쎄, 형님의 정치를 잘 보좌했는지는 모르겠다.

    말이 토포사였지 실제 위세는 도적이 아니라 조폭들 때려 잡는 일이었잖나.

    뭐, 공신 칭호를 마다 할 순 없어서 받긴 했지만 원래 공신이란 게 이렇게 남발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 내가 특이 케이스인가 싶기도 하고··· 뭔가, 애매하다.

    그래서 그런지 앞서 말한대로 별 느낌도 없다.

    “대감마님. 이건 어디다 둘깝쇼?”

    대청마루에서 토포사로서 지난 날의 회상하고 있노라니 덕산이와 다른 행랑 식구들이 지게를 메고선 낑낑거리며 다가온다.

    “이번엔 뭔데?”

    “이건 명태랑 말린 오징어굽쇼. 이건 돼지고기고 이건 과일이라는데 안 열어봐서 잘 모르겠굽쇼. 또 이건······.”

    긁적긁적.

    공신 칭호를 두 번 씩이나 받아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대우다.

    사실 정난공신의 칭호를 받고 나서도 물건들이 집에 끊이지 않고 들어오긴 했지만, 두 번 씩이나 받고 나서는 내가 그저 그런 대군이 아니란 소문이 지방에 까지 퍼져나간 건지, 온갖 물건들이 집에 들어오곤 한다.

    하도 많이 들어와서 돌려보내고 싶지만, 지방에서 올려 보낸 것들은 돌려 보낼 수가 없었다.

    “상등품인 것들은 잘 골라서 궐에 진상하고 나머지는 너네들이랑 이웃집에도 좀 나눠줘.”

    처음에는 이 비싼 음식거리를 행랑 식구들끼리 나눠 먹어라는 말에 기겁을 했던 덕산이었지만 이제는 별 감흥도 없는지 냉큼 고개를 끄덕거린다.

    “감사합니다요.”

    지게를 메고 돌아가는 덕산이에 나는 궁시렁거렸다.

    “저런 건 대체 왜 보내.”

    아닌 게 아니라 보내지 말래도 막 보낸다.

    핑계거리도 많다.

    오늘은 날이 좋아서.

    오늘은 날이 우중충해서.

    오늘은 대감 생각이 나서.

    오늘은 제사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은 덕을 베풀고 싶기 때문에.

    “이러다가 뇌물죄로 잡혀 들어가는 거 아닌가 몰라.”

    사실 그래서 더 받기 찝찝했는데 말했다시피 서울에서 들어오는 물건들은 그런대로 돌려보내도, 지방에서 올라오는 것들은 돌려 보낼 수가 없다.

    그래서 최대한 상등품의 먹거리는 궐에 보내도록 조치하고, 나머지는 나눠먹는 편법이라면 편법을 쓰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먹을 복 터진 건 내가 아니라 행랑 식구들이다.

    “흠. 이제 뭐할까.”

    대청마루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볕이 좋긴 하지만 할 게 없다.

    배부른 소리 아니냐고?

    그래, 배부른 소리 맞다. 근데 진짜 할 게 없다.

    어제는 창녕대군과 녹초가 되도록 놀아줬고, 또 그제는 형님이 위사들과 축구를 하고 싶으시다길래 함께 벌판에 나가서 축구를 했고, 엊그제는 형님이 울적하다길래 경회루서 술을 마셨고, 글피 전에는 마지막 파락호를 다 때려잡고 나서 토포사 직책을 반납한답시고 궐에 들어가서 그나마 할 일 이란 게 있었는데, 오늘은 할 게 없다.

    왜, 사람들이 아무리 죄인 이라지만 사람 죽는 모습에 열광하는지 조금은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그만큼 놀거리도 부족했고 마땅히 할 것도 없었다.

    “음······.”

    한참을 누워서 두둥실 떠다니는 구름을 바라보면서 오늘은 뭐할지를 고민했지만 역시 떠오르는 게 없다.

    아무래도 입궐을 해야 할 것 같다.

    저번에 말씀드린 건 어떻게 되가나 겸사겸사 여쭤도 보고.

    아, 뭘 말하냐고?

    내 소원말이다.

    외국이랑 교역해서 후추랑 설탕이랑 고춧가루 같은 거 듬뿍 먹고 싶다던 그 소원.

    금방 채비를 하고 입궐을 했다.

    이젠 굳이 불편하게 관복을 안 입어도 된다.

    형님이, 나는 입궐할 때 허례허식 같은 거 안 차려도 되고, 불편하면 말타고 입궐해도 된다는 특지를 내려주셨거든.

    물론 두 다리가 말짱하니 굳이 말 타고 들어갈 생각은 없다.

    그렇게 도착한 경복궁.

    내관의 안내를 받아서 강녕전으로 향했다.

    “전하. 진성대군 드셨사옵니다.”

    “들라하라.”

    안으로 들어가자 서안을 바라보면서 뭔가에 골몰하고 있는 형님이 보인다.

    “왔더냐?”

    “예.”

    “박 내관한테 듣자니 심심해서 입궐했다지?”

    “예, 심심하기도 하고 여쭤볼 것도 있어서요. 한데 지금 보고 계신건 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 이거? 명단이다.”

    라고 말하면서 형님이 슬쩍 명단을 내게 건네신다.

    살펴보니 고관대작들의 이름이 들어가있다.

    좌찬성 강귀손.

    우참찬 윤효손(尹孝孫).

    형조참판 정숙지.

    호조참의 이과.

    좌참찬 정미수.

    등등.

    그 명단을 보면 스무명 좀 넘는 사람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고심이다.”

    “무슨 고심 말입니까?”

    “네 예전에 네 낙이 식도락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그러러면 외국과 교역을 통해 물산을 풍족하게 해야 한다고도 했었고.”

    마침 이걸 고심하고 있으셨던 모양이다.

    “그랬죠.”

    “내 빈청에 유구국에 보낼 정사를 의망(추천)하게 했는데 도통 소식이 없더구나. 이놈들이 아예 일 할 의지가 없는 것인지, 이역만리로 가기 싫어 꺼리는 것인지, 소식이 없길래 직접 사람을 고르고 있었다.”

    “음.”

    “넌 누가 좋아 보이더냐?”

    사실 명단에 적힌 사람들 모두 안면은 있지만 사실상 ‘사람’을 안다고 자부 할 순 없었다.

    내가 형님처럼 그들과 부대끼는 것도 아니고 오며가며 인사만 하는 사이니 말이다.

    그런데 정사란 자리는 21세기로 치면 대사관의 대사 정도로 볼 수 있는 걸로 안다.

    부적격한 사람을 보낼 순 없다는 말이니 내가 왈가왈부 할 순 없어 보인다.

    없어 보이는데······.

    ‘이거 자천도 되나.’

    왠지 끌린다.

    난 해외여행을 한 번도 안 가봤다.

    그런데 유구국!

    오키나와다.

    오키나와라면 빼어난 경관의 관광지인데··· 또, 살면서 꼭 한 번 쯤은 가보고 싶었던 곳이기도 한데······.

    물론 위험한 건 안다.

    21세기처럼 비행길로 날아가서 뚝딱 관광하고 돌아올 게 아니라 배를 타고 가야 한다.

    이 시대에 뱃길이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딱히 갈 만한 사람도 없어보이고, 뭐든 첫인상이 중요한 법인데 교역의··· 아니, 먹거리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이 가서 외교 관계를 망쳐 놓으면?

    그럼 내 고춧가루, 후추, 동치미에 고구마도 없어지는 게 된다.

    가뜩이나 할 일이 없어서 빈둥거리는 삶에, 식도락 마저 못 누리면 정신병 올지도 모른다.

    “뭔가 할 말이 있어보이는 구나. 괜찮으니 편히 말해보거라.”

    “송구합니다만, 전하.”

    “그래.”

    “제가 가도 될까요?”

    최대한 조심스럽게 묻는다곤 했지만 인지부조화가 일었는지 형님이 눈만 끔뻑거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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