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102화 (102/365)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02화>

죽지만 않게 맞자

***

천석고황(泉石膏肓).

고질병이 되다시피 산수와 풍경을 사랑함.

문경지우(刎頸之友).

생사를 같이 하여 목이 떨어져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친한 사이.

그리고, 천석고황(天石高黃) 문경지우(文景池禹).

천계진, 석혁, 고태안, 황두명, 문철, 경송문, 지진석, 우범하.

이 여덟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장안 사람들은 이 여덟명이 나타나면 여덟 사람의 앞 성씨를 따서 천석고황과 문경지우가 나타났다고 수군거렸다.

그래서 붙여진 일종의 별명이 천석고황과 문경지우였다.

이들이 함께 어울려 다닌 세월은 퍽 오래되었다.

아마, 15년도 더 됐을지 몰랐다.

이들은 흔히 집에서 내놓은 자식 취급을 받았다.

아닌 게 아니라, 문경지우의 우(友)를 차지하는 우범하를 제외하고는 모두 서자(어미가 평민인 사람)거나 얼자(어미가 천민인 사람)였다.

세상물정 몰랐던 시절에는 모두들 출사와 입신을 목표로 학문에 뜻을 품기도 했었지만 서자와 얼자들에게 세상이란 녹록하지 않은 법이었다.

이들의 꿈은 이미 남들이 학문에 뜻을 둔다는 지학 시절에 좌절됐다.

아무리 총명하고 아무리 명석하고 아무리 문장을 잘 지어도 서얼들에게 출사란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일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이미 《경국대전》에는 서얼은 소과(생원과 진사 시험)도 치루지 못 하도록 못 박았고 제한적으로 입신을 할 수 있기는 했지만 이마저도 쉬운 일은 아니었고, 설령 출사를 한다 한들 출세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 있다 한들 대부분은 한직을 떠돌다가 온갖 멸시와 좌절만 겪을 테니 출사를 한들 뭣하겠는가?

그런 곡절로 천석고황과 문경지우는 이미 남들이 학문에 뜻을 두는 지학 시절에 학문에 대한 뜻은 버리고, 본인들 스스로 세상을 경시하는 것이라 자위하고는 함께 어울려 다니면서 놀음으로 허송세월만 했다.

물론 서얼의 신분인 사람들 대부분이 놀음으로 세월을 보내곤 하니, 이들이 단순히 놀음만 일삼았다면 장안에서 천석고황과 문경지우라 불리진 않았을 터였다.

스스로 모이면 “나는 출세에 대한 욕구는 이미 버린 지 오래네.” 자위하곤 했지만, 마음 한켠에는 출세에 대한 욕구가 없을 수 없었다.

그 욕구를 지금까지는 놀음으로 풀었지만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인 법이었다.

이들은 출세에 대한 욕구를 놀음과 패악으로 풀기 시작했다.

특히, 4년 전 홍길동의 무리가 토벌되면서 이들의 위세는 더욱 당당해졌다.

괜한 사람들에게 시비를 거는가 하면 법을 무시하고 노점하는 상인들에게 보호비를 명목으로 재물을 뜯기도 했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길가는 행인을 집단 구타하기도 했었다.

이런 일들이 누적되니 장안에는 자연스레 이들의 이름이 퍼져나갔고, 여덟 사람은 악명을 슬슬 즐기기까지 이르렀다.

여태 괄시만 받다 남들이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니 묘한 쾌감과 우월감이 들었다.

우월감에 도취되면 될수록.

사람들이 그들을 피해다니면 피해다닐수록.

이들의 패악은 점점 심해졌다.

심지어는, 남편을 일찍 여의고 절간에 출입하는 과부를 몰래 납치해서 겁탈한 적도 있었고, 본인들 집에 딸린 계집종들을 산기슭으로 슬쩍 유인해서 윤간도 저질렀으며, 삼각산에 놀러갔다가 산을 넘는 행인들에게 도적질도 했고, 기방을 출입하다 못 해 십시일반으로 아예 기방을 차려 기방에 묵는 과객들을 겁박해 재물을 뜯기도 했으며, 심심찮게 절간에 가서 주지육림을 즐기면서 중들을 희롱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패악이 극에 달할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여태 잡히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집안의 배경이 컸다.

우범하는 아버지가 전 광주판관으로 있었고, 친인들도 현직에 있는 이들이 많았다.

우범하 뿐만 아니라 나머지 일곱 사람들도 비록 신분은 서얼일지라도 아비나 다른 이복 형제들이 관직에 있는 경우가 많았으니 이를 무마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피해자들도 당연히 쉬쉬 할 수 밖에 없었고, 이들의 패악이 대부분 아녀자들에게 국한된 만큼 정조를 지키지 못 한 아녀자들은 열에 여섯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굳이 본인이 당한 욕을 남에게 말하지 않아 탄로 나는 일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들은 지능적으로 행동했다.

예전 홍길동의 무리가 분수 모르고 설쳐대다가 모조리 토벌된 걸 눈으로 봤기 때문에, 이들은 정국이 불안하다 싶으면 바짝 엎드려 자중했고, 조금 풀린다 싶으면 다시 패악을 일삼았다.

물론 위험한 일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실제로 강도한 혐의로 포청에 끌려간 일도 많았는데 집안의 도움으로 모두 무마 시킬 수 있었다.

법은 존재했지만 잡히지 않고, 잡혀 들어가도 집안의 도움으로 무마시키거나 재물로 무마시킬 수 있었으니 이들의 악행은 날이 갈수록 더해갔다.

여덟 사람 모두 거리낄 건 없었고 세상 그 누구도 본인들을 어떻게 할 순 없을 거라는 자만과 우월감에 휩싸이게 됐다.

지금처럼.

“나부터 함세.”

“아니, 왜 자네부턴가. 나부터 좀 하세.”

천계진과 황두명이 티격태격하자, 이들을 지켜보던 계집종은 그저 바들바들 떨면서 손을 비벼댔다.

“사, 살려주세요······.”

“누가 널 죽이기라도 한다더냐? 재수없게··· 아, 두명이. 아무튼 나부터 함세? 응? 내가 나중에 춘화 하나 선물함세.”

“춘화?”

“그래. 왜국에서 건너온 건데, 이놈들이 춘화는 또 기가 막히잖은가. 아주 노골적이라네.”

“크흠. 약조했네.”

천계진의 말에 황두명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는 계집종을 일으켜세우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방에 있는 다락이었다.

다락 안에는 이 계집종의 주인인 지진석이 책을 얼굴에 덮어쓰고는 쿨쿨 졸고 있었다.

“이봐, 진석이. 진석이.”

“응? 나 불렀나?”

“이년 몇 살 먹었댔지?”

“쓰읍-. 글쎄, 열댓살 먹었나. 기억이 안 나는군. 그건 왜?”

“처녀인가 해서.”

“그럼 처녀지.”

“그, 그래? 이거, 호박이 넝쿨째 들어온 격이로구만.”

“보아하니 자네 차례 같은데 조심히 다루게. 눈치를 보면 우리집 대감(아버지를 달리 이르는 말)도 벼르고 있던 것 같으니 말일세.”

“자네 아버님이?”

끄덕.

“원, 환갑이 다 됐는데도 아랫도리는 팔팔한가 보이. 또, 알다시피 우리집 대감이 어린 계집이라면 사족을 못 써. 이년도 잘 키워서 베개처럼 쓰려고 데려왔었을 걸세.”

“하하. 그럼 자넨 아버지와 구멍동서가 되겠군?”

“구멍동서 뿐인가. 종년 하나가 낳은 아이도 내 아이인지 대감 아이인지 모르겠는데.”

“하하하하. 아무튼 맛 좀 보고 옴세.”

“살살하게, 살살.”

“여부가 있겠나.”

황두명이 희희낙락해 하며 옆 방으로 건너가자 황두명과 먼저 하네 마네로 입씨름했던 천계진이 물었다.

“저 아이, 정말 처녀인가?”

피식.

“박복한 종년 팔자에 처녀일 리가 있나. 내 이미 깔고 누워봤었네.”

“하하하. 짓궂구만.”

“그나저나 오늘 장사도 허탕이겠구만.”

이들의 맏형 격인 우범하의 독백이었다.

이 홍청방(洪淸房)을 차린 인물이기도 했다.

“요 며칠 역난이다 뭐다해서 시국이 좀 서슬퍼랬소. 슬슬 안정될 기미가 보이니, 조금만 기다리면 다시 손이 찾을 거요. 걱정 마오.”

“정 안되면 도적질이나 하지 뭐.”

“물색해둔 곳 있소?”

“몇 군데 있지.”

이들이 범죄 모의(?)에 가까운 잡담을 나누고 있던 그때였다.

우당탕탕!

“모조리 끌어내라!”

***

“천석고황 문경지우?”

허!

절로 헛바람이 터져나왔다.

중2병 가득한 작명 센스도 아니고, 그 좋은 사자성어를 왜 저기다 갖다 붙여?

“얼마나 남았습니까?”

조선판 조폭들이라는 파락호들의 작명 센스에 피식거리기도 잠시.

나는 새삼 분노가 치밀었다.

아니, 이런 덜떨어진 것들한테 개똥이가 맞고 다녔다는 거 아니야?

“저깁니다.”

안처직이 가리킨 곳에 포렴(일종의 간판) 하나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홍청방?”

“예.”

여기가 놈들의 아지트였다.

이것들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개똥이와 함께 있었던 돌석이란 아이에게, 개똥을 폭행한 자들이 누군지 들을 수 있었고, 알고보니 장안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는 파락호들이었다.

그리고 아지트로 기방을 사용하고 있다길래 냉큼 위사들과 나장들을 불러모았다. 다른 파락호들을 소탕하는 것도 소탕하는 것이지만, 일단은 이 주범들이 우선이다.

홍청방이라는 기방 앞에 서서 고갯짓을 하자, 나장 하나가 문을 열어제꼈다.

비교적 화려한 조경 너머로 여러 개의 방들이 눈에 들어왔다.

몇몇 섬돌에 신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걸 보니 백주대낮부터 기생들 끼고 술 퍼마시는 작자들이 한 둘은 아닌 것 같았다.

“어, 어디서 나오셨습니까요?”

갑작스런 등장에 사환(종업원)이 우르르 몰려왔다.

물론 서슬 퍼런 위사들의 기세 때문인지 주눅 든 모습이 완연했다.

“이 홍청방의 주인 우 가(家) 놈은 어디에 있더냐?”

“그건 어찌 하문하십니까요?”

“이놈이··· 관에서 나왔다. 속히 고하지 못 하겠느냐!”

“저, 저 방에 계십니다요.”

“어떻게 하올까요?”

“글쎄요. 어떻게 할까.”

그렇게 말한 나는 우 가 놈이 있다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단 모조리 끌어내라 할까요?”

“예! 모조리 끌어내라!”

“아니, 아니다.”

“잠깐!”

기세등등하게 달려나가려던 위사들을 제지시킨 안처직이 날 돌아봤다.

처분을 묻는 듯 했다.

끌어내기만 할 순 없을 것 같았다.

다들 알다시피 나는 참 신사적인 사람이다. 근데 폭력적인 사람한테도 신사적일 필요는 없다.

그런 사람들은 신사적으로 굴면 굴수록 양아치 근성을 보여주거든.

“몽둥이 찜질부터 가죠.”

“예!”

안처직이 눈짓하자 위사들이 모두 몽둥이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일제히 방으로 뛰어들었다.

머잖아 퍽퍽 피육터지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피육터지는 소리와 비명 소리를 BGM 삼아 느긋하게 방 마루를 올랐다.

내가 마루에 오르자 위사들의 몽둥이 찜찔이 잠시 멈췄다.

“계속들 하세요.”

“예!”

퍽! 퍽!

“왜, 왜 이러시오!”

“우리가 누군줄 알고 지금!”

쓰윽-.

거수하자 몽둥이 찜질이 멈췄다.

“누군줄 알고? 그러는 네놈은 우리가 누군줄 알고?”

“어디서 나온 것이오?”

오, 이놈이 천석고황 문경지우의 맏형 격이라는 우범하인가?

의외로 침착하다.

그래서 더 마음에 안 들어.

“어디서 나온거면? 포청에서 나왔다, 어쩔래?”

내 말의 모순을 금방 파악한 위사들은 우스운지 낄낄거렸지만······.

“포청? 허! 내가, 어? 우리 당숙께서 포청에 종사관으로 계시거늘 감히! 네놈 직책이 어떻게 되길래 상관의 가족이 있는 곳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덮친단 말이냐!”

우범하의 기세등등함에 맞기만 하던 다른 이들도 점점 기세가 사는지, 움츠린 몸을 일으켰다.

“포청? 내가 지금 포졸들한테 쳐맞고 있었던 거요? 허, 이런 낭패가 있나.”

“내가 박 부장한테 시켜준 오입질이 몇 번인데 지금······ 허, 참.”

개중에는 이런 놈도 있었다.

찰싹!

찰진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이름 모를 파락호4가 위사의 따귀를 걷어 올리고 있었다.

하도 어이가 없었던지 창졸간에 따귀를 맞은 위사는 실소를 내뱉었고,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파락호 4는 다시 위사의 따귀를 걷어올렸다.

찰싹!

방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우리로선 어이가 없어서, 죄인에게 위사가 얻어터져서 나온 침묵이었지만, 이 파락호 새끼들은 아무래도 우리가 쫄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가자. 당장 포청으로 가! 내 당장 네놈들을 요절을······.”

“자, 여기서 질문. 어젯밤에 길가다가 웬 꼬마 아이 때린 사람 거수.”

“···?”

스르릉-.

칼을 빼들고 날을 살폈다.

날이 바짝 서있다.

“아이가 들고 있던 소학책 뺏어간 놈 거수.”

“···”

“없어?”

“나다, 이놈아! 어쩔테냐?”

“이놈?”

“그래. 어린 나이에 포도군관(捕盜軍官)을 하니 눈에 뵈는 게 없나 본데······.”

나는 빼든 칼을 놈에게 겨눴다.

이러고 싶진 않은데 사람을 폭력적으로 만든다, 이놈들의 주둥아리가.

“어째 조폭 새끼들은 500년 후나 500년 전이나 똑같냐. 레파토리가 아주 지겨워. 포도군관?”

“···”

“네놈 눈엔 내가 포도군관으로 보이냐? 아직 상황 파악 안 되지?”

“대감, 여기좀 와보십시오.”

금부도사의 부름에 파락호 4를 일별하고 소리의 근원지로 걸음을 옮겼다.

방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다락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자 아이 하나가 흐느끼고 있었고, 파락호5가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상황이 대충 그려졌다.

조금만 손 봐주고 금부로 압송시키려고 했는데, 안 될 것 같다.

“금부도사.”

“예.”

“이놈들 저항이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예? 어, 어떤 저항 말씀이시옵니까?”

“저기 보십쇼. 우리 위사가 이 파락호 새끼들한테 따귀를 맞지 않았습니까. 이게, 이거··· 명색이 별충위의 위사가 따귀를 맞았는데 이대로 돌아가면 위신이 안 선단 말입니다.”

“하면 어찌······.”

웃옷을 벗은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자 아이에게 씌워주고는 금부도사와 함께 방을 나왔다.

“이놈들 죽지만 않으면 됩니다, 죽지만 않으면.”

이라는 말을 남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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