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99화 (99/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99화>

    삼천포로 샌 임금 조카 개똥이

    ***

    덕산이에게 노비들의 처분에 관해 신신당부를 하다보니 공신회맹제에 살짝, 아주 살짝 지각을 하고 말았다.

    내가 형님과 허물이 없는 사이라고는 하지만 공적으로는 임금이다.

    직장 부하가 직장 상사 보다 늦게 출근하면, 그건 눈치와 쿠사리 조금 먹으면 그만이지만, 신하가 임금 보다 지각을 하는 경우는 석고대죄를 청해도 모자르다.

    물론 판례가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다.

    요새 자주 읽던 책에서 ‘임금을 기다리게 하는 신하는 의리를 지킴이 없으니 의리를 지키는 일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비롯됐다. 이는 신하의 도리가 아니다.’ 라는 구절이 있기 때문에 이게 큰 죄라는 걸 아는 것 뿐이다.

    꼭 군신 관계가 아니어도 약속 시간에 지각하는 건 결례가 맞기도 하고.

    그렇게 허둥지둥 회맹제 장소인 사정전에 들기 위해 문을 지나치는데······.

    “정충분의장의보국결책익운정난(精忠奮義壯毅保國決策翊運靖難) 공신 드시니 예를 갖추시오!”

    “깜짝아!”

    입구를 지키던 젊은 관리의 가갈에 간 떨어질 뻔 했다.

    끼이이익-.

    닫힌 문이 활짝 열렸다.

    사정전 뜰에는 이미 녹훈 된 공신들이 자리 하고 있었다.

    쏟아지는 시선에 머뭇거리다 사정전 뜰로 발을 옮기자, 모두들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한 사람도 머뭇거림 없이 내게 고개를 조아리는 걸 보면 아마 사전에 고지 받은 게 있는 것 같았다.

    이런 리셉션(?)은 또 처음이라 얼떨떨해 하며 관리가 안내하는 곳에 자리했다.

    다행히 풍원위의 옆이다.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사정전에 들었습니까?”

    희미한 미소를 머금던 숭재 씨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전하께서 특지를 내리셨습니다.”

    “특지요?”

    “앞으로 대군께서 입궐할 일이 있다면 꼭 저리 가갈하라고 했다더군요.”

    “이런 낯간지러운 건 안 해주셔도 되는데······.”

    “왕실의 권위를 세우는 일이기도 합니다. 지금 전하와 가까운 종친 중에 공신이 대감 말고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게 왕실의 권위를 세우는 일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아직 책을 많이 안 읽어서 그런지 잘 모르겠다만··· 숭재 씨가 뭐 없는 말 지어낼 리도 없고.

    “헉!”

    전하를 기다리는 게 따분해서 공신들의 면면을 찬찬히 살폈다.

    역시, 익숙한 사람들이 태반이었지만 잘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다 나는 깜짝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다.

    “창산군, 창산군.”

    그리고 조용히 팔석 씨를 불렀다.

    이번에 창산군이란 군호를 받게 되면서 나와 같은 반열에 서게 된 팔석 씨는 뒷줄의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기 때문인지 내 목소리를 못 듣는 것 같았다.

    “지금 창산군이 궁궐 예법에 어두워서 개를 데려온 것 같은데요? 저러다 큰 일 나는 거 아닙니까?”

    팔석 씨가 걱정돼서 풍원위에게 묻자, 풍원위가 피식거린다.

    “공신입니다.”

    “저 개가요?”

    “예. 호종공신 삼등에 녹훈 될 황구라는 분이지요.”

    “부, 분?”

    나는 새삼스레 팔석 씨 옆에 선(?) 공신 황구님을 바라보았다.

    그래, 어딘가 낯이 익다.

    예전에 금석리에 갔을 때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개한테도 녹훈 할 수 있는 건가?’

    뭐, 있으니까 하는 거겠지만······.

    “저분은 누굽니까?”

    뒤늦게 다른 사람을 가리켰다.

    장곤 선생님과 함께 있는 분이었는데 못 보던 분이었다.

    “저자가 김굉필입니다.”

    “아, 그 말로만 듣던?”

    “말로만 듣긴요. 저자 때문에 부자 간에 정이 뚝 떨어졌는데요.”

    김굉필의 스승인 김종직과 풍원이의 친형 되는 임희재가 동문인 건 들었다.

    하지만 부자 간의 정이란 건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김굉필을 탐탁지 않아 하는 기색을 보아하면 굳이 캐묻기도 뭐하고······.

    ‘딱 선비같네.’

    욕이 아니다.

    선비의 표본이 있다면 딱 저런 상이 아닐까 싶었다.

    바람에 한없이 너풀거리는 수염은 뭔가 신비한 분위기마저 자아내고 있었다.

    내 스승님이 장곤 선생님이고, 장곤 선생님의 스승님이 김굉필이라 하니 형식적으로라도 인사를 드려야 되나 싶었지만 상선의 힘찬 가갈에 관둘 수 밖에 없었다.

    “주상 전하 납시오!”

    모든 문무백관과 공신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형님을 반겼다.

    거둥한 형님은 어좌에 착석하곤 김굉필을 바라보았다.

    음··· 눈길은 그다지 따뜻한 건 아닌 것도 같고······.

    뭔가 기싸움 같기도 하고?

    “참으로 오랜만이 아닌가?”

    “신이 죄를 지었음에도 사해주심이 실로 하늘 같은 성은이옵니다. 신이 정배가 풀리고 상경해 도착한 것이 바로 오늘 정오의 일이니 곧바로 궐로 달려가 인사를 드리려 했건만 전하께서 옥체가 미령하시니 회맹제에서 받겠다 하시어 이리 불경을 저지르게 되었사옵니다.”

    “인사를 지금 받고 나중에 받고가 무슨 대수겠는가? 하지만 경의 뜻이 정히 그러하다면 내 태사가 아니라 군신에게 인사를 받아보겠다.”

    김굉필이 앞으로 나아갔다.

    왠지 모르지만 모두들 숨을 죽였다.

    분위기에 압도돼 나도 덩달아서 숨을 죽였다.

    뭐랄까, 괜히 숨소리 크게 냈다간 이목이 집중 될 것 같은 느낌이랄까?

    앞으로 나간 김굉필이 조심스레 절을 올렸다.

    김굉필이 절을 올렸는데도 형님은 아무런 반응이 없으셨다.

    오체투지한 채 엎드려 있는 김굉필이 안쓰러워질 즈음.

    별안간 김굉필이 몸을 일으키더니 다시 한 번 절을 올렸다.

    그 행동에 사정전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절을 두 번 올렸다.

    나도 예전에 장곤 선생님께 한 실수이기도 하다.

    “저, 저··· 아니, 지금 뭣하는 짓이오!”

    버럭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우의정 박숭질이었다.

    호통은 박숭질에게서 나왔지만, 김굉필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곱지만은 않았다.

    심지어 김굉필의 제자였던 장곤 선생님과, 선생님의 다른 동문들의 표정도 굳어 있었다.

    얼굴에 웃음기가 있는 건 형님 뿐이었다.

    “태사가 보기에 과인은 죽은 사람인가?”

    “아니옵니다.”

    “하면 어찌 절을 두 번 올리는가?”

    “처음 한 절은 성은을 입고 정배가 풀려 전하를 배알하는 신하로서 올리는 절이었사옵고, 두 번째 절은 전하께서 신을 탐탁지 않아하시니 이만 사직하고 야인으로 돌아가겠다는 하직 인사였사옵니다.”

    사정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형님의 표정도 굳어있······.

    어라?

    “푸하하하!”

    정말로 웃긴 건지 형님은 배꼽까지 잡아가며 웃어대셨다.

    “경의 말이 과연 이치에 맞는 말이로다. 행동부터 비범하니 이 어찌 태사가 아니냐! 재상이 아니라 정승의 감이니, 내 경의 정치를 기대하겠노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김굉필이 아무 일 없이 단석 아래로 내려가자 도처에서 안도의 한숨 소리가 새어나왔다.

    “모두 들을지어다.”

    “···”

    “이제 큰 악을 무찌르고 난리를 평정했기에 그 공훈을 기리는 뜻에서 맹세하니 이는 신명이 보증하는 바일 것이다. 난리를 만나 국세가 불행하였는데, 역신들의 기세가 참으로 우레 같았으니 혹자는 ‘저들의 기세가 하늘의 해도 쏘아 떨어뜨릴 수 있을 것이다’ 수군거렸다. 이 기세를 꺾은 것은 실로 열성조의 보우와 훌륭한 공신들의 덕분이니 의(義)를 바로 세움이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군왕을 배반하는 역신을 징계하지 않으면 더러운 개들이 연달아 짖어대게 만드는 법이라, 내 손수 역신을 징벌했다만 역신 무리에 가담하려 한 자들이 아직도 조정에 남아 눈알만 돌리고 있으니 조종조 이래로 조정이 이처럼 혼탁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공신이 있으니 혼탁이 금방 걷히고, 나라가 천세의 태평을 맞게 될 것임을 누가 의심이나 하겠느냐? 내 이를 감히 참람하게 복의군이라 칭한 역적들이 창궐했던 동대문의 베터바위에 단서(바위나 돌에 쓴 글씨)를 새겨 분명히 기록하고자 함이니 종묘사직의 영화를 함께 할 것을 온천하의 산하를 두고 맹세하는 바이며, 앞으로 그대들의 자손에게도 두고, 두고 영화를 누리게 할 것이다. 이에 다시금 맹세를 확인하는 바이니 천세에 이르도록 군신 상하의 은혜와 의리가 변함이 없을 것이며, 만약 이 맹세를 어긴다면 하늘과 땅의 신령들이 용서치 않으리라.”

    형님의 장연설이 끝나자,

    “천세! 천세! 천천세!”

    수백이 넘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천천세는 장관이 따로 없었다.

    ***

    팔석은 관복 소매를 펄럭거렸다.

    임금님께서 친히 하사하신 관복이었다.

    한낱 소작농으로 살던 시절이 바로 엊그제였으니, 잔칫날에 마을 사람들은 농군이 군호까지 받는 출세를 누렸다며, 청산군이 아니라 농사군으로 불러야 한다는 우스개 소리와 함께 축하를 해줬지만 팔석은 그럴수록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다.

    “사람은 늘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하는겨.”

    죽기 직전까지 아주 신신 당부를 하셨었다.

    당신의 아버지, 그러니까 팔석의 할아버지가 과거 공부를 한답시고 그나마 있는 집안의 재산을 모두 탕진 했기 때문인지 팔석의 아버지는 특히나 분수에 연연하셨었다.

    아버지의 말씀을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기 때문인지 나이가 들면서 자연히 깨달은 것인지 팔석은 관복이 분수에 맞지 않는 옷이라 그런지 영 불편한 느낌이었다.

    마치 돼지한테 색동옷을 입혀 놓은 느낌인데, 거기에 소매 길이도 길고 펄럭거리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아, 평생 요즘 같은 호사만 누렸으면 좋겠다. 여보. 팔도에 나 같은 계집이 또 있을까요?”

    불편한 관복을 펄럭거리며 한숨을 내쉬던 팔석은 아내 덕금의 말에 그건 또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는 듯 고개를 돌렸다.

    “이 여편네가 회맹제에서 좋은 술만 골라 잡수더만 취기가 올랐나. 뭔 헛소리여?”

    “아니. 군부인이잖아, 군부인. 옆집 청산댁이랑 강골댁에서 남편 하나는 잘 뒀다고 어찌나 부러워하던지··· 나 같이 남편 잘 만난 계집은 또 없을 거야?”

    실실거리면서 행복에 겨워 하는 아내에 팔석은 피식거렸다.

    “아니, 왜? 언제는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박복한 팔자로 태어났냐고 신세한탄을 아주··· 부모님 돌아가실 때 그렇게 한탄 했으면 효부 소리 들었을 걸?”

    “이이는··· 내, 내가 언제 그랬다구요.”

    “괜히 군부인입네 우리 남편이 공신입네 어디가서 거드럭거리지 말어. 사람은 천성은 안 바뀐다고 했어, 자네나 나나 배운 게 뭐가 있나? 괜히 거드럭거리며 나라님 욕 되게 하는 거니까, 절대 하지 말어. 알겠는가?”

    “내가 언제 거들먹거리면서 다녔다구··· 아니, 청산댁이 하도 힘들다길래 쌀 몇 되 퍼준 것도 거들먹거린 거요?”

    “그랬어? 그건 잘 했네.”

    “그나저나 우리 개똥이는 이제 어찌 키워야 되려나. 장군님? 판서?”

    제 어미 손을 꼭 잡고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엿장수에게 시선을 돌리고 있는 이 개똥이 놈은 아마, 제놈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지도 모를 것이 분명했다.

    이런 놈이 장군? 판서?

    내 자식이지만 군관 감도 안 된다는 건 팔석 본인이 더 잘 알았다.

    “사람은 늘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하는겨. 분수에 안 맞게 설치는 사람들 죄 횡액맞는 거 몰라? 장군이나 판서나 그런 거 안 해도 이제 자자손손 잘 먹고 살 텐데, 뭐.”

    “아이고, 그놈의 분수 타령··· 아버님도 그러더니 부자가 똑같애 아주. 오늘 나라님 하시는 말씀 못 들었어요? 우리 개똥이 딱 꼬집어서 조카님 거리면서 나중에 꼭 급제해서 편전에서 보자고 하셨잖아요.”

    긁적긁적.

    “그건 그런데··· 그냥 하시는 말씀이지, 뭔 사람이 진지하게 받아들여.”

    “아무튼 이 녀석이 효자야, 효자. 아버님이 우리 개똥이 낳을 때, 웬 관모 쓴 동자가 무슨 밧줄 하나 잡고 하늘로 올라가는 태몽 꿨다고 하셨잖아요? 아버님 태몽이 딱 맞잖아요.”

    “효자는 효자지.”

    휘적휘적 앞장서 걷던 개똥이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자, 마침 떠오른 게 있는지 개똥이가 아!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돌린다.

    “아부지!”

    “응?”

    “나 대군마마 집에 다녀와야겠어요.”

    “대군마마? 대군마마 집은 왜?”

    “나 아까 책 두고 왔어, 책.”

    “우리 개똥이 판서 되려나 보네. 책 타령도 다 하구.”

    “아니, 이 사람이, 자꾸. 분수에 맞게 살아야 된다니까, 분수에. 한데 무슨 책?”

    인중에 조막만한 검지를 갖다대고 고민하던 개똥이 말했다.

    “음, 그 책 이름이 소학이었는데. 아, 아부지 소학이 뭐냐면 마마가 설명해주셨는데 어린 아이가 배워야 할 필수교과서라고 하셨거든요? 근데 또 말씀하셨는데 솔직히 이런 거 아무 짝에도 쓸모없고 나처럼 인성만 훌륭하면······.”

    “···다녀와라.”

    횡설수설하던 개똥이 냉큼 고개를 끄덕거리며 폴짝폴짝 뛰어갔다.

    그런 개똥의 뒷모습을 한숨과 함께 바라보던 팔석이 말했다.

    “저 녀석이 판서가 돼?”

    “···아니, 이름난 분들도 어렸을 땐 좀 모자라 보였는데 나이 드니까 천재가 됐다 하는, 그런 말도 많잖아요······.”

    “설화지, 설화. 판서는 고사하고 소과 급제라도 하면 내가 자네 시집 보내줄게.”

    “그렇게만 되면 개똥이가 진짜 효자 될 텐데. 재가(재혼) 할 땐 힘 팔팔한 총각으로 하나 물어야겠다~”

    “팔팔한 총각? 내가 뭐 어때서! 오늘 밤에 보여줘? 어!? 안 되겠네, 얼른 가자구. 내가 아주 힘이란 게 뭔지 보여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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