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97화>
착각은 자유, 경기도는 오산
***
강녕전.
“이것들이 충심으로 가장해 직언을 올리는 것이 실로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 역적들을 처형한 것이 바로 어제의 일이었거늘 눈치만 살피면서 대세에 편승하려 하니 이것이 바로 위군자가 아니더냐?”
임금의 볼멘소리에 금부도사 안처직은 경직된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하명만 하시옵소서.”
“저번에 도사가 준 명단 있잖은가.”
“예.”
“거기서, 이름 있는 재상 몇 사람만 골라서 역적과 공조한 혐의라 하고 하옥하라.”
이미 묻혀두기로 한 사안을 다시 꺼낸다는 데 있어서 기함을 금치 못 했는지 안처직의 혀가 꼬였다.
“하, 하옥을 말씀이시옵니까?”
“그래.”
꿀꺽.
“신은 아둔하고 어리석은 바가 있어서 판단이 잘 서지 않사온데 과연 누굴 잡아들이고 누굴 공초함이 성상의 분부를 본의에 거스르지 않고 거행한 일이 되겠사옵니까?”
“음.”
잠시 고민하던 기색을 보이던 융은 사홍을 바라보았다.
“누가 좋겠는가?”
“의금부지사 노공필은 전하께서 성은을 베풀지 않았다면 능히 목숨을 잃었을 자이옵니다. 역적이 발호 했을 때, 기회를 틈타 역적과 내통했다는 소문이 특히 무성하니 그를 본으로 삼으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노공필이라.”
노공필 정도면 적당해보인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일은 없다.
저자에는 역적들이 거병 했을 때, 노공필이 가장 먼저 편전으로 나아갔다는 말이 무성했다.
사실이 아닐지라도 혐의 자체는 존재하는 것이니 예판의 말처럼 최소한 정배는 되었어야 할 위인이다.
‘침묵한 자들’에게 죄를 묻지 않게 되면서 운 좋게 비껴 간 것에 불과하다.
“경의 말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 하면 금부지사 노공필,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이점(李坫), 공조판서 이계남(李季男), 이조판서 이계동, 사간원 사간 유경(柳坰),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의손(李懿孫), 호조참의 이과(李顆), 형조참판 정숙지,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 유희저(柳希渚). 이 9인을 역적과 공조했다고 하고 하옥하라.”
“공조판서 이계남과 이계동은 형제인데, 형제가 함께 사로 잡혀 들어가면 말이 있을 듯 하온데 한 명은 제하는 것이 어떨는지요?”
“아. 과연 그렇겠구나. 하면 누굴 빼는 게 좋을꼬.”
“이계남은 평소 물욕이 많고 행실이 비루하며 평소에도 특별한 공로가 없사옵니다만, 아우인 이계동은 선왕 시절 공을 쌓은 일이 많고 문무를 겸비했다는 평이 많으니 이대로 고꾸라뜨리긴 아까운 인사이옵니다.”
“그럼 이계동이는 제하고 이계남이만 잡아들이라.”
살벌한 대화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두 사람에 눈치만 살피던 안처직이 말했다.
“공초는 어찌 하올지요?”
“노공필과 이계남은 고신을 가하고 나머지 인원은 심문만 하다가 하루 나절 뒤에 풀어주어라. 발등에 불이 떨어져봐야 제놈들을 벌하지 않고 함께 정사를 돌보고자 하는 내 갸륵한 마음이 얼마나 큰 성은인지 알 것이다.”
“봉명하겠사옵니다.”
금부도사 안처직이 물러갔다.
조심스레 침소를 빠져나가는 안처직을 일별한 사홍이 입을 열었다.
“저기··· 송구하오나 전하.”
“할 말이 있는가?”
“전하께서 이미 큰 뜻이 있으시니 행한 일이겠사옵니다만······.”
“편히 말하라.”
“방금 언급한 8인으로 제왕의 위엄을 떨치는 건 해가 될 일이 전혀 없으나 역적의 자손들에게 정말 그래도 될는지······.”
“음. 사실대로 말한다면 나도 반신반의한 일이다.”
“바, 반신반의 말이옵니까. 하면 어찌··· 사람이란 본시 간사하기 짝이 없어서, 지금은 목숨을 구명해줬다는 것에 필히 감읍해 할 테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임금의 은혜는 잊고 제 아비의 원한만 떠올릴 것이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한데 어찌 그런 명을······.”
“사람이 간사한 것도 맞지만, 어리석은 바가 더 크다. 그래서 하루에도 수천 가지의 일을 잊어버리곤 하지. 조금이라도 현명한 자들은 아비의 원한도 잊어 버릴 것이다. 아니, 살기 위해서라도 잊어야겠지.”
“···”
섬뜩함에 모골이 송연했다.
어쩌면 임금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 이상의 수를 내다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진성의 말도 일리가 있지 않더냐. 역적들이 발호하면서 북정군이 오랑캐를 정토하지 못 했다. 이 소식은 조만간 오랑캐들에게도 알려질 터. 이제 놈들의 기고만장함이 하늘을 찌르겠지.”
“어쩌실 생각이시옵니까?”
“이미 한 번 군사를 일으켜 민생을 고단하게 했는데 놈들이 기고만장한다고 해서 또 군사를 일으킨다면 그 부담이 백성에게 옮겨갈 것이 아니냐. 그리되면 정벌을 안 하니만 못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진성의 말처럼 백성을 이주시켜 폐사군에 들어가 살게 한다면 일시적으로나마 오랑캐 놈들의 기세를 꺾을 순 있겠지.”
“희생이 많을 것이옵니다.”
말을 하고 나서도 사홍은 아차 싶었다.
폐사군으로 이주 당하는 백성들은 모두 역적의 굴레가 있는 자들 아닌가.
“송구하옵니다. 신이 실언을······.”
“괜찮다. 사실 경의 말 때문에 진성의 말을 가납한 것이기도 하니까.”
“예?”
“폐사군은 예로부터 오랑캐들의 저항이 만만찮은 곳이잖는가. 그런 곳에 서인(서인)으로 들어가 목숨을 구명한다 한들 역적의 자손이니 신량역천(신분은 양인이되 천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으로 살게 될 것이고 틈틈이 오랑캐들의 약탈도 방비해야 할 것이니 관점에 따라 달리 본다면 죽느니만 못 한 삶이 아니냐.”
“···”
“아, 그나저나 희재와 화해는 했더냐? 내 본의 아니게 부자의 정을 끊었다가 다시 연결 시켜 놓았으니 경에겐 미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니라.”
금세 온화한 표정으로 가정사를 묻는 임금에 사홍은 마른 침을 꼴깍거렸다.
가늠이 안 갔다.
지금의 임금이 원래의 임금인지, 지금껏 발톱을 숨기고 있던 것에 불과했는지.
***
빈청.
고관대작들이 모여 회의하는 회의실은, 고상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천박한 인상만 가득 풍겼다.
모두들 헐레벌떡한 모습들이 이제 막 빈청으로 뛰어들어온 것 같았다.
“이, 이게 사실입니까?”
가장 늦게 빈청에 입실한 이계동이었다.
“사실이오.”
“어찌······.”
“영상대감. 지금 정확히 누가 잡혀들어간 것이옵니까?”
“지금 확인된 바로는, 금부지사(노공필)와 우윤(이점), 공판(이계남), 사간(유경), 동부승지(이의손), 호조참의(이과), 형조참판(정숙지), 봉상시첨정(유희저), 이 여덟 사람이 끌려간 것 같소.”
“아니,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정도가 있지, 어찌······.”
“그게 문제요. 아무래도 어제 일 때문에 전하께서 노하신 게 아닌가 싶소.”
“어제의 일 말입니까?”
“모두들 꿀먹은 벙어리들처럼 계시지들 않았소.”
“아니, 그건 영상께서도······.”
“어제의 일 때문이 확실합니까?”
“짐작일 뿐이오. 변덕이 원체 심하신 분 아니외까.”
“혹 원종공신(작은 공을 세운 사람들을 녹훈하는 일) 때문이 아닐지······.”
“원종공신? 그게 무슨 말이오? 정공신 녹훈도 아직 되지 않았는데.”
“왜, 어젯밤에 형조참판 정숙지가 상소를 올리지 않았더랍니까.”
“알아듣기 쉽게 설명을 해보시오.”
금시초문인지 유순이 집의 김준손을 다그쳤다.
“정숙지가 정공신의 일을 속히 논한 다음 원종공신의 일 또한 매듭 짓는 것이 좋겠다고 상소를 올린 것 같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일언반구 말도 없이 말이오?”
“예.”
“어찌 그런 경솔한 행동을··· 허어.”
“그게 화근이 된 것 아니겠습니까?”
“그건 아닐 겁니다.”
이번엔 우승지 성세순이었다.
자리한 영부사 성준의 족친이기도 했다.
“어인 말씀이신가? 그건 아닐 거라니?”
“정숙지가 불민하게 원종공신의 일을 논했는데 그게 역린을 건드린 거라면, 전하께서 어찌 간밤에 패초를 보내시지 않으셨겠습니까? 부쩍 사소한 일로도 패초 보내는 일이 잦으신데요.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하면 남은 건 어제의 일 때문이란 건데··· 모두들 기탄없이 말들 해보오. 여덟 사람이 방면 된다면 다행이지만, 이대로 연좌된다면 파국이 아니겠소이까.”
“아직 전하의 의중을 모르니 석고대죄를 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석고대죄?”
“어제의 일도 불충은 불충이지 않았겠습니까. 전하의 하문에도 모두들 입 하나 까딱하지 않았구요.”
“하지만 그걸론 부족하지 않겠소?”
“석고대죄도 석고대죄지만은, 전하께서 만족할 만한 사안을 미리 주달드림이 좋을 듯 한데······.”
“아!”
성세순이었다.
“계책이라도 있소?”
“금군을 늘리시라 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금군은 곧 왕권과 직결된다.
그래서 역대 신하들이 금군을 감소하라 한 적은 있어도 늘리라 한 적은 많지가 않다.
때문인지 모두들 뜨뜻미지근한 반응들이었다.
“지금도 전하만 보면 모두들 벌벌 떠는데 금군을 늘리기 까지 하면 팔도에 직언이란 직언은 참말로 사라지고 말 거요.”
“하지만 그것 말고 달리 방책이 없지 않겠습니까?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전하께서 지금 진노를 참고 있는 것 아닙니까. 막말로, 우리가 역적과 내통하진 않았지만, 역적을 굉필의 제자들처럼 적극적으로 막지 않은 건 사실인데 전하께서 성은을 베풀어주셔서 연좌되지 않은 것 아닙니까.”
“흐음.”
“여덟 사람이 잡혀간 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오늘은 여덟 사람일지 모르지만 내일은 여든 명이 될 줄 누가 알겠습니까. 그리되면, 모레는 팔백이 될지도 모릅니다.”
“음. 본인은 우승지의 말이 일리가 있는 듯 한데 여러분은 어떠시오?”
“뾰족한 수가 없으니 이 일을 주달드리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하면 결론이 도출된 걸로 알고, 채비를 마치자마자 나와 우상(박숭질)이 알현을 청하겠소이다.”
***
“허. 금군?”
“그러하옵니다. 장사들 중에서 무재와 용력이 있는 자들을 추가로 뽑아 금군에 소속시키고······.”
쾅!
임금의 행동에 유순과 박숭질은 깜짝 놀랐다.
“당상들이 빈청에 모여 하는 짓이란 게 금군을 논하는 것 뿐인가?”
“신들은 그저 전하께서 역란으로 놀라셨을까 걱정되어 금군의 정원을 늘리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 했사옵······.”
“어제는 임금의 눈치나 살피면서 정사는 팽개치는 가관의 꼴들을 보여주더니 이제는 아첨할 것이 없어서 정승들이 임금에게 아첨을 한단 말이냐?”
억울할 뿐이었다.
금군을 늘리겠다는 말에 호통을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오나······.”
“내 보니 영상도 총기가 다 한 듯 싶다. 조만간 사직하고 후학을 키움이 어떻겠는가?”
“예?”
“임금의 의중은 나몰라라하고 임금의 눈치만 살피는 꼴이 정승의 풍모가 전혀 안 보이지 않는가 말이다.”
“소, 송구하옵니다.”
“지금은 금군을 논할 것이 아니라 공신 책봉을 논해야 도리에 합당한 일 아니던가?”
“고, 공신 책봉 말이옵니까?”
“내 수차례 공신에 관한 일은 빈청에서 논하게 했다. 오늘 영상과 우상이 알현을 청한다길래, 그 일에 관해 논한 줄 알았는데, 금군?”
어이가 없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조금이라도 눈치는 덜 보고, 일처리를 재깍재깍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자신이 재상들을 너무 부정적인 의미로 과대평가 했던 것 같다.
평소에 임금 알기를 얼마나 어린 아이 보듯 했으면, 금군이란 떡 하나 쥐어줄 생각을 했을까?
기가 찰 노릇이다.
“도대체 공신에 관한 일은 언제 아뢸 건가 말이다!”
꿀꺽.
“고, 공신에 관한 일은 거의 마무리 되어가옵니다. 심려치 마시옵소······.”
쾅!
“난리가 평정된 지 벌써 며칠이 흘렀는가 말이다. 그제는 역적 구수영이 갑자기 서대문에 모습을 드러내고 대죄를 청한답시고 흐지부지 됐다 치지만, 어제와 오늘도 봉명(임금의 명을 받듦)하긴 커녕 빈청에서 노닥거리면서 금군을 논하고 있었단 말이냐? 명색이 재상이란 작자들이?”
“그, 그것이······.”
“언제는 군왕과 신하들이 함께 정사를 도모하는 것이 태평한 치세를 이룩 할 수 있는 길이라 하더니, 내 정사를 함께 도모하고자 해도 따르질 않는구나. 됐다. 공신 책봉은 내 알아서 할 터이니 경들은 모두 물러가라. 밖에 도승지 있는가!”
“찾아 계시옵니까, 전하.”
“의정들이 내 뜻대로 하라니, 내 편전에 거둥해 공신을 책봉할 것이다. 재상들을 모두 소집시키라.”
“알겠사옵니다.”
김감이 물러가자 융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여염집에서 키우는 개를 공신으로 책봉한다 해도 이견은 없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