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96화>
연산군이 아니라 중종이라 불러다오.
***
“강녕전.”
“경솔했다.”
형님의 질책에 뜨끔했다.
“죄송합니다.”
“미리 신호라도 줬으면 당황하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다.”
신호?
무슨 신호를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네 그리 극단적으로라도 말하지 않았다면 재상들의 반응을 얻지 못 했을 테니 비록 행동이 과격했을지라도 만족할 성과는 얻었으니 되었다. 내 편전에 네가 있으니 천군만마를 얻은 든든함이 든다.”
“그럼 제 말대로 4진은 개척하는 겁니까?”
차를 후륵- 들이키던 형님이 도대체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는 듯 눈을 치켜 떴다.
“정사에 관심 없는 재상들의 면전에 일침을 가하고자 한 말이 아니었더냐?”
“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아니, 잠깐.”
당황하셨는지 형님은 손까지 내저어보이며 찻잔을 내려 놓으셨다.
“그럼 어디까지가 네 주견이란 말이냐?”
“뭐를 말씀이십니까?”
“하면 네 참말로 4진을 개척하자는 차원에서 말한 것이란 말이냐?”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말로 그런 바람에서 말씀 드린 것이었다.
“그럼요.”
“허. 나는 네가 정사에 팽개치고 내 눈치만 보는 재상들에게 일침을 가하기 위해 전가사변을 언급한 줄로만 알았다.”
전가사변? 일침?
“일침을 가할 거면 면전에서 일 똑바로들 하시라고 말씀 드리지, 왜 입 아프게 돌려까겠어요.”
“도, 돌려?”
“우회적으로 비판하겠냐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면 방금 편전에서 말한 것이 상황을 타개 하기 위한 방책이 아니라 정말 네 주견이란 말이렷다?”
나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거, 손 발이 좀 안 맞았던 모양이다.
형님은 내가 상황극을 하신 줄 아는 것 같다.
물론, 입 꾹 다물고 있는 장차관들이 한심해서 이래도 과연 입 다물고 있을까 오기가 발동한 건 맞다.
하지만 4진을 개척하자는 건 오기와는 좀 다르다.
내가 아무리 철딱서니가 없다고 해도 나라의 정책을 개인적인 오기 때문에 왈가왈부 할 순 없잖은가.
그 정도 철은 들었다.
사실, 역적의 자손들에게 줄 벌을 전가사변으로 대체하자는 발상은 얼마 전, 역적들이 줄줄이 능지처참 당하거나 거열형 당할 때 생각하게 됐다.
정확히 말하면 당시 역적들의 처형을 지켜보던 형님의 발언 때문에.
나는 당시 처형을 참관하지 않아서 형님이 정확히 어떤 말을 하셨는지는 몰랐지만 간만에 생긴 ‘구경거리’를 보러간 덕산이에게 우연히 들을 수 있었다.
덕산이에 의하면 처형을 성루에서 참관하시던 형님은, ‘모든 역적들의 처와 딸년들은 공신들에게 노리개로 보낼 것이요, 딸년 중에 출가한 년이 있다면 이혼시켜서라도 노리개로 보낼 것이며, 아들 놈들은 모두 참할 것이니 이 어찌 성은이 아니냐.’ 라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대개 역적의 자손들이라면 이런 처벌을 받곤 하는데다 이 말을 들은 군중들도 통쾌해했다고 하니 시대적으로는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 발언이지만 덕산이가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나라님께는 불경한 소린데 광기가 느껴져서 지켜보던 쇤네가 다 오금이 저렸습죠.
여담으로, 내가 요즘 《자치통감》과 《한서(漢書)》, 《십팔사략》, 《춘추》등의 역사서를 장곤 선생님에 의해 많이 읽게 됐다.
그러면서 느낀 게, 역사란 게 참 우스울 때가 많고 어처구니 없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결과는 거창한데 과정은 사소하고, 과정은 거창한데 결과는 허무하고, 그렇달까.
당장 20년만 지나도 하나의 역사가 될 이번 역모만 해도 그렇다.
과정은 거창했는데 결과는 허무하기 짝이 없었잖나?
박원종은 결국 도망가서 동지한테 배반 당해 목이 잘렸다.
구수영?
내가 회군하고 일이 틀어지자마자 수령도 없는 강음현에 틀어박혀서 벌벌 떨다가 가족만은 살려주겠다는 형님의 약조 한 마디만 믿고 투항을 했다.
아, 얼마 전 능지처참 된 유순정.
이 유순정도 변수 축에도 못 끼던 내가 회군하면서 대세가 기울자 결국 능지처참이라는 극형을 선고 받게됐다.
때론 사소한 과정이 거창한 결과를 낳는 역사나, 거창한 과정이 허무한 결과를 낳는 역사나 따지고 보면 결국 당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역사란 큰 물줄기도 사소한 일로 틀어지곤 하는데 그 역사를 만드는 사람이 안 틀어지고 배겨?
덕산이의 말에 난 식겁했다.
이건 뭐 이젠 거의 편집증에 가까워진 것 같다만, 사람이 한 번 도둑질하기가 쉽지 두 번이 어렵겠나?
그 사람들 모조리 죽여버린답시고 손에 한 번 피를 묻히면, 두 번 피를 묻힐 수도 있겠다는··· 뭐랄까.
그래, 망상이라고 치자.
망상을 하게 됐다.
그 날로 역적의 자손들을 피 안 묻히고 처리(?) 할 방편을 고심했다.
그리고 우연히 책에서 세종대왕의 업적중 하나였던 4군이 오래 전, 폐사군이 되었다는 구절을 보게 됐다.
그래, 이거다!
솔직히 꿩 먹고 알 먹고잖아?
영토도 늘려, 벌도 줘, 형님 손에 피도 안 묻혀.
얼마나 좋아, 그래?
“네. 정말로 제 주견이었습니다.”
“허. 네 엉뚱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리 엉뚱할 줄은 몰랐다. 역적의 자손들을 북방으로 내치자니······.”
형님의 표정을 보니 뭔가 회의적이신 것 같다.
결정권자인 형님이 회의적이면 안 된지.
설득 해야겠다.
“형님. 생각해보세요. 어차피 역적의 자손들, 태반이 관비나 관노로 내쳐질 팔잡니다. 장성한 남자들은 모조리 목이 베일 거구요. 맞죠?”
끄덕.
“이 수가 못 해도 수백은 넘어갈 거고 많다면 천단위가 넘어갈지도 모릅니다. 이건 절대 적은 수가 아니구요.”
특히 이 모두가 사회기득권층의 일원이란 점에서는 더더욱.
내가 얼핏 들었는데 풍원위는 이 사람들의 재산을 적몰한 것으로만, 도깨비 방망이질을 한 것처럼 나라의 몇 년치 예산이 뚝딱 하고 나올 것이라고 했다.
과장이 좀 섞였겠지만 인구학적인 측면이나 재정적인 측면에서 적지 않은 건 사실이다.
“이 사람들이 관비로 내쳐지고 관노로 내쳐지면 지방 관아 입장에서는 군입만 느는 격일 겁니다.”
“노비를 마다하는 고을은 없지 않더냐?”
뜨끔.
“아니, 그렇긴 한데요.”
“게다가 나는 관노들은 몰라도 관비(여자종)들은 공신들에게 하사할 참이었다.”
“그··· 한 가지 예를 들어볼게요.”
“그래.”
“천명의 인구라면 몇 개 면을 합친, 어떻게 보면 작은 고을하고 맞먹는 인구인데 이 사람들을 공신한테 나눠줘, 관노나 관비로 내쳐, 뿔뿔이 흩어지게 하면 손해 아니겠습니까?”
“손해? 공신을 우대하는 것이 어찌 손해가 된단 말이냐?”
“형님. 설마, 저한테도 주실 생각이셨습니까?”
“그럼. 네가 일등공신인데 너에게 안 주면 누구에게 준단 말이냐? 한 60구 정도 하사할 참이었다.”
당연한 걸 묻냐는 형님의 태도다.
안 된다. 절대 안 돼!
물론, 그 사람들 공신들한테 하사 되는 거랑 북방으로 내쳐지는 거랑 살아 있는 건 매한가지다.
하지만 피해자라면 피해자인 공신들한테 하사되면 눈칫밥 정도로 끝날까?
학대란 학대는 다 당할걸?
내가 뭐, 여린 심성을 갖고 있다거나 선해서 그 사람들 구제해주자는 게 아니다.
그 사람들은 진짜로 죄가 없잖아?
가족인 게 죄인데 학대까지 받으면 아마 설움에 미쳐 돌아가실 걸?
누차 말하지만 내가 선해서 그 사람들 북방으로 내치자는 게 아니라, 굳이 따지면 인간애적인 차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테르는 말했다.
사람은 할 말이 없으면 욕을 한다고.
나도 같다.
할 말이 궁색해졌으니 이제 남은 건······.
‘사람은 누구나 공명심이 있지.’
공명심 없는 사람은 없다.
하다못해 아까 풍원위도 그랬잖나.
여기 있는 위군자들 전부 직언을 후세에 이름을 남길 도구로 쓰고 있다고.
그런 공명심이 형님이라고 없을까.
“아니, 형님!”
“어이쿠! 왜 소리는 지르고 그러느냐. 사람 간 떨어지겠다, 이놈아.”
“제가요. 예? 어디, 그 역적 자손들 생각해서 이러겠습니까? 다··· 예? 그, 뭐냐. 거국적인··· 그런, 거국적인 차원으로다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세종대왕이 얼마나 성군이십니까? 근데 그런 성군도 이룩하지 못 한 폐사군 개척. 예? 이걸 딱 형님이 이제 개척하는 겁니다. 이러면, 후손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조선에는 성군이 딱 둘 있었다. 세종대왕하고 중종(中宗).”
“중종?”
요새 책을 많이 읽다 보니 시법(諡法)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중종이란 시호는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낸 공적이 있는 왕에게 붙는 시호다.
원래는 이 몸이 받을(?) 시호였지만 역사가 바뀌었으니 누가 받으면 어때.
“예. 여진족들 몰아내서 세종대왕 업적 이어 받고 폐사군 개척해, 역적들도 몰아내, 이만하면 제가 예언가는 아니지만 중종이란 시호가 딱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보면 후손들이 이제 조선에 성군이 딱 둘 있다고 말할 때 형님하고 세종대왕만 언급 되는 거죠.”
“흐음.”
“형님. 누차 말씀 드리지만 이게 다 형님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역적의 자손들을 공신들한테 나눠주는 거요? 물론 공신을 우대하는 방법이긴 하죠. 근데 실질적으로 노비 나눠줄 만한 공신이 몇 이나 됩니까?”
당장 내가 떠오르는 사람은 나랑 예조판서(임사홍), 도승지(김감), 풍원위(임숭재), 억수 씨, 경기관찰사(안윤덕) 정도다.
그 외 공을 세운 사람들은 노비를 받는다 해도 한 두 명 정도 밖에 받지 못할 거다.
“얼마 안 되긴 하지.”
“예. 얼마 안 되죠. 그 사람들한테 천명에 가까운 역적 자손들을 하사하실 건 아니잖아요. 모조리 북방으로 내치시면 영토도 늘고요, 구수영하고 한 약조도 지키는 거구요, 후손들한테 성군으로도 불리구요, 이게 바로 일석삼조 아니겠습니까?”
“네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구나. 공신을 우대하는 방법이 노비를 하사하는 것만 있는 건 아니니 말이다.”
“그럼요.”
“중종이라······.”
내가 언급한 시호를 읊는 형님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충 먹힌 것 같다.
‘내가 되도 않는 말 씨부리면서 본인들 살려준 거 역적 자손들은 알아야 할 텐데, 참.’
말했다시피 사람은 누구나 공명심이 있다.
***
“구수영은 앞전의 죄인들과 마찬가지로 부대시로 하여금 거열로 다스리겠다. 죄인은 이의 있더냐?”
편전.
하루에 두 번 씩이나 패초를 받은 재상들이지만 불만을 토로하는 자는 없었다.
다만 놀라움이 더 컸다.
첫째로 금부에 하옥돼있던 구수영을 죄인의 신분으로 편전에 불러들인 점.
두 번째로······.
“이의가 어찌 있을 수 있겠사옵니까. 신은 그저 성은에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다만 앞전에 약조하신 말씀은 어찌 되는 것이온지······.”
죄인이 감히 편전에서 세치 혀를 나불거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일국의 왕이 약조를 하였는데 어찌 의심을 한단 말이냐. 네 너의 자손들에게는 그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다. 다만 출가외인인 자녀가 아닌 경우에는 북방으로 내칠 것이니 그리 알라.”
역적의 자손에게 죄를 연좌하지 않겠다 공언한 점.
예견 된 일이었지만 중신들로서는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오나 어찌 역적의 자손을··· 역률로 다스리지 않는다면 후세에 말이 나올까 두렵사옵니다.”
“한시진 전에는 모두들 입을 꾹 다물고 있더니 어찌 이제와 역률을 논하는가? 하면 영상은 내 임금된 몸으로 말을 번복해야 하겠다는 것이냐?”
“그, 그것은 아니오나······.”
“하면?”
유순은 구수영을 흘깃거렸다.
“죄인은 감히 전하께 투항을 빌미로 가족의 안위를 논하였으니 설령 전하께오서 약조를 하셨다 한들, 이미 이것으로 왕을 기만한 것인데 굳이 지킬 필요가 있나 하는······.”
“어쨌든 내 가족들은 살려주겠다 말한 것은 사실이 아니더냐. 게다가, 비록 구수영이가 죄인이긴 하나 박원종처럼 군사를 부려 금군을 해한 적이 없고, 또한 박원종 휘하에 있던 역적들처럼 임금을 구원하러 온 근왕병(별충위)에 칼을 빼들고 근왕병들을 살상한 적도 없으니 역모를 흉책한 것은 대죄이나, 그 죄를 뉘우치고 박원종과 역적 거두의 목을 모조리 베어왔으니 공과 과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하오나 북방으로 내쳐진 구수영의 자손들이 만약 아비의 일에 원한을 품고 먼 훗날 역심을 품게 된다면 또 다른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는 일이옵나이다.”
“영상이 충심으로 간하는 것이겠지만, 박원종과 그 졸개들에게는 종묘와 사직에 대한 충정을 보이지 않았던 영상이 충심으로 간하니 내 우습다.”
“···”
“경들은 들어라. 이른대로 구수영은 역신으로 내일 저자 한복판에서 거열하겠다. 또한. 내 아까 진성이 한 말을 곱씹어 보았는데 말이다.”
중신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진성이 한 말이란 구수영의 자손들 뿐만이 아니라 역적의 모든 자손들을 북방으로 내치자는 말이었다.
다만 주장이 주장인지라, 조회는 흐지부지 끝이 났고 진성의 주장도 흐지부지 됐었다.
“일리가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이, 일리라 하오시면······.”
“폐사군에 진을 설치해 역적의 자손들이 들어가 살게 하는 것 말이다.”
“하오나······.”
“능지처참을 당한 역적의 자손들은, 그 죄를 사해줄 수 없겠으니 모두 노비로 삼겠다만 능지처참 이하의 죄를 받은 죄인의 자손들은 아비의 죄를 묻지 않고 폐사군에 전가사변 하도록 하겠다.”
“전하 이는······.”
“이의가 있었다면 아까 내 역적들의 처분에 대해 하문했을 때 말했을 테니 이의가 없는 것으로 알고 시행하겠다.”
최소 500년 앞선 날치기 법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