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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94화 (94/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94화>

    항복해도 될까요

    ***

    “대군 마마와의 담소가 적잖이 즐거우셨나 보옵니다.”

    연신 생글거리는 융이 보기 좋아 보였는지, 상선 역시 입가에 미소를 한가득 머금고 말했다.

    “내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나 할까?”

    “깨달음 말이옵니까?”

    깨달음이란 표현에 상선은 순간 진성대군을 떠올렸다.

    보는 사람을 어처구니 없게 만들 정도로 모든 사람들에게 격의 없이 대하는 분이었다.

    물론 긍정적으로 표현해서 격의가 없다는 것이지,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선비로서 삼사일언(三思一言)이 전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 분에게 무슨 깨달음을 얻으셨을지 자못 궁금했다.

    “선비를 정의하는 말은 많지만 그 정의에만 선비의 의미를 묶어 둔다면 세조께서는 선비셨겠는가? 또 태종대왕은?”

    아리송한 말씀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하문하시옵소서.”

    “상선은 인생의 낙이 무언가?”

    “인생의 낙이라니 어인 말씀이시온지······.”

    “삶에 있어서 느끼는 가장 큰 행복 말일세.”

    “소신에게 어찌 낙이 있겠사옵니까? 신은 그저 전하의 치세를 겪는 모든 이들이 태평한 세월을 맞았으면 하옵고, 전하를 보필하는 것이 낙이라면 낙이옵니다.”

    “허어. 상선이 사계절 얼어 있는 설산도 아닐진대 어찌 사람으로서 낙이 없겠는가? 괜찮으니 말해보아라.”

    음.

    짧게 침음한 처선은 시선을 돌렸다.

    종묘가 보인다.

    그가 모신 임금들의 넋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전하께오서는 소싯적 신의 기행을 들으신 적 있으시옵니까?”

    “젊을 적 상선의 기행을 모른다면 어찌 서울 사람이라 할 수 있겠나? 알다마다.”

    처선은 젊은 시절부터 놀음에 빠져 지냈었다.

    어찌나 놀음을 좋아했으면 노산군을 제외한 여섯 임금을 모시면서 세종대왕께는 ‘저 내관의 얼굴이 또 불콰한 것이 술을 마신 것이냐?’ 핀잔을 자주 들었고, 문종 대왕 대에는 선온(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던 술)한 술을 조금 빼돌려 발각 된 적도 있었다.

    대왕께서 오죽 술이 먹고 싶었으면 그랬겠냐고 죄를 사해줘서 망정이지, 그대로 쫓겨나도 할 말이 없는 짓이었다.

    세조대왕께도 자주 꾸짖으셨는데 도무지 놀이와 술을 끊지 못 해, 참다 못 한 세조께서 곤장까지 때리셨고, 그래도 술을 끊지 못 하니 아예 그의 고향에 관노로 내치기까지 하셨었다.

    근데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술과 놀음이 수십년 지속되다 보니 뭐랄까.

    젊어서 불효한 자식이 나이 먹고 효도한다는 말처럼, 인생의 회의감 같은 게 느껴졌다.

    회의감과 함께 그 날부터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고, 술을 끊고 지내면서 지금의(?) 김처선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술을 끊었다고 곡기까지 끊지는 않는 것처럼, 인생의 낙이라고 한다면 역시 한 가지가 있긴 했다.

    “젊을 적에는 술과 놀이가 인생의 낙이었다면 이제는 신도 나이가 들어서인지 맛있는 음식을 찾는 것인 듯 하옵니다.”

    “미식 말이냐?”

    “예. 굳이 꼽자면 그러한 듯 하옵니다.”

    “음. 창피해 할 필요 없다. 무릇 사람들은 미식을 간과한다만 상선 같은 충직한 신하도 미식을 즐겨하니 인간의 낙에 있어 식도락이 어찌 빠질 수 있겠는가. 과연 진성의 소원이 만인의 소원이로다.”

    “···”

    의문문을 띄우는 상선을 일별한 융은 진성의 답변을 곱씹었다.

    예전에 진성에게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방법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다.

    진성은 그때 사치를 장려하라고 했었는데, 당시에는 이해를 못 했지만 지금은 조금 이해가 되는 기분이었다.

    ‘참으로 우문에 현답인 쾌변이었도다.’

    ***

    각자 속한 부서(?)에서 한참 일과 씨름할 시간에 불려온 재상들은 벌렁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켰다.

    전과가 있기 때문인지 임금의 부름이 있을 때 마다, 심장이 쿵, 하고 나락 너머로 곤두박질 치는 기분이었다.

    “내 오전에는 공신을 대우하는 문제로 잠시 사색할 것이 있어 경들을 물렸는데 차일피일 할 문제가 아니라 생각되어 다시 경들을 불렀다.”

    “하명하시옵소서.”

    “그전에, 내 어제 희재의 복직에 대한 문제로 당상들 끼리 의논하여 품의하라 했는데 어찌 올라오는 글이 없는가?”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의견이 분분해, 미처 품의하지 못 했사옵니다.”

    “재상이란 작자들이 무슨 일을 이리 처리한단 말인가. 한심한지고.”

    “···”

    “의견이 분분하다는 건 어인 말인가?”

    그의 질문에 우참찬 김수동은 병조참지 이중현(李仲賢)을 흘겼다.

    “중현은 희재가 비록 공신의 자제라 하나 지은 죄가 매우 큰 데다 높은 벼슬에 복직 시키는 것은 후에 구설수가 나올 수 있다 하였고······.”

    수동의 시선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성준에게로 옮겨갔다.

    “성준은 희재를 복권하는 것은 전하께오서 바라는 일이니 뜻대로 행함이 옳겠으나, 희재의 죄목이 국법으로 금하는 붕당이었던데다 탄핵 받기 전에는 독서당(사가독서 하던 젊은 관리들이 머물던 곳)에서 연구와 독서에만 매진 하였으니 높은 벼슬을 주어 자만을 키우게 하기 보다는, 낮은 자리를 주어 스스로를 돌아보게 함이 옳겠다고 하였사옵니다. 또······.”

    “그만하면 됐다.”

    수동을 제지시킨 융은 성준과 중현을 바라보았다.

    “하면 두 사람이 생각하기에 어떤 자리가 제격인 것 같은가?”

    “홍문관에 이번 난리로 박사의 자리가 결원이니 옥당(홍문관의 별칭)의 관원으로 제수함이 옳은 줄로 사료되옵니다.”

    “영부사는?”

    “희재는 과거 붕당하여 조정을 혼란스럽게 했사옵고 또한 임금을 간사하게 속여 강상의 죄 또한 저질렀사옵니다. 전하께오서 희재를 사하신다고 하셨으니 마땅히 행함이 옳겠지만, 풍문에 안 좋은 말들이 많으니 다시 독서당에서 강서에 매진케 한 연후, 추후에 불러들이는 것이 온당한 듯 싶사옵니다.”

    “두 사람의 의견은 이렇다 치고 다른 사람들은?”

    “당시 의논에 참가했던 김감은 홍문관 교리 직에, 좌참찬 정미수는 승문원 저작에, 좌찬성 강귀손은 문소전 참봉 직을, 이조판서 이계동은 예문관 대교로, 이처럼 의견이 분분했사옵니다.”

    모두들 한직은 아니었다.

    홍문관이나 승문원이나 예문관.

    모두 청요직의 자리로 손꼽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왕 복직 시키는데 낮은 벼슬이란 게 마음에 걸렸다.

    임금의 위엄과 권위는 다른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때론 자비와 관용에서도 나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김감의 의견이 타당해보였다.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은 교리.

    “홍문관 교리로 제수한다면 능히 문한의 일을 맡아 볼 수 있을 것이니 교리에 제수토록 하겠다.”

    이럴 거면 도대체 의논은 왜 나누라고 한 거야?

    라는 눈빛의 중신들을 일별한 융이 말했다.

    “최근 유구국에서 사신이 입조한 것이 언제던가?”

    “유구국은 어찌 하문하시옵니까?”

    “국사에 필요하니 하문한 것이지, 얼토당토 않은 말이나 하려고 하문 했겠는가? 그래서, 사신이 입조한 것이 언제인가?”

    “신유년(1501년)에 입조한 것이 마지막이었사옵니다.”

    “음. 4년이나 되었단 말이냐.”

    “그러하옵니다.”

    “유구국과 통교하였으면 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갑작스런 질문에 중신들은 넋이 나간 채 어버버거렸다.

    “토, 통교 말이옵니까? 하오나 지금도 사신을 통해 교린을 하고 있사온데······.”

    성준의 반박 아닌 반박에 융은 인상을 찌푸렸다.

    “4~5년에 한 번 사신을 주고 받는 것이 통교라면, 영부사는 평소 이웃과 4~5년에 한 번 얼굴을 보고 어디가서는 이웃과 친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건 아니오나··· 너무 갑작스러운지라······.”

    “갑작스러울 것도 없다. 그래서 말인데, 사신을 보내 교린의 정을 더욱 깊게 만드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오나 유구국의 물길을 아는 자를 구하기 어려운데다 사신을 보낸다는 것은 미리 통함이 있어야 가능한데 갑작스럽게 유구국에 입조시킨다면 당국에서도 혼란스러울 것이옵나이다.”

    “내 듣기로 탐라에는 유구국에 표류한 자들이 여럿 있다고 들었다. 구하기 어렵진 않을 것이다. 사신으론 누가 좋겠는가?”

    “그, 그것이······.”

    이건 당혹스러워도 도무지 형용 할 수 없는 당혹스러움이었다.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는 임금(?)이다.

    갑자기 사신을 보내겠다니······.

    더군다나 유구국이란다.

    황도로 가는 길도 때론 목숨을 내놓아야 할진대, 하물며 유구국은 물길에 밝지 않은데다 자칫 풍랑이라도 만난다면 사신길이 아니라 황천길이 될 가능성이 컸다.

    당장 추쇄경차관들이 제주로 부임하길 꺼리는 가장 큰 이유가 그것 때문이기도 했다.

    제주로 가는 물길만 해도 표류하거나 풍랑을 만나 영영 생사를 알지 못 할 때가 많은데 유구국이야 오죽할까.

    요즘 같은 때의 지엄한 어명이라면 받드는 척이 아니라 응당 받들어야겠지만, 만약 사신으로 뽑힌다면 출발하기 전에 집에 따로 유서 정도는 써놓을 각오를 해야할 터였다.

    “내키지 않은 것인가?”

    “그것이 아니오라 다만······.”

    당혹스러움을 넘어 황망하기 까지 한 중신들을 구제해준 것은 문차비였다.

    “전하. 돈의문 수문장 한치온(韓熾穩)이 급히 아뢸 말씀이 있다고 하옵니다.”

    말끝을 흐리던 성준을 마뜩찮은 표정으로 흘긴 융은 문차비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문을 향해 말했다.

    “어디, 돈의문에 역적이라도 출몰했다더냐? 재상들과 정사를 논하고 있으니 차후에 다시 찾으라 전하라.”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역적이 출몰한 것이 맞다고 하옵니다.”

    벌떡!

    “냉큼 들라하라!”

    ***

    돈의문.

    “차, 참말이었다니······.”

    “수문장이 거짓을 고할 까닭도 없잖소?”

    “기를 보면 박원종이는 아닌 듯 하고··· 누구 같소이까?”

    “잘 안 보이오만 어디··· 구수영의 기 같기도 하고······.”

    역적이 출몰했다는 한치온의 보고에 융은 정사까지 내팽개친 채 중신들과 함께 돈의문을 찾았다.

    다만, 이리 떠들어 댈 줄 알았으면 차라리 혼자 올 걸 그랬다.

    중신들이 떠들어 대는 통에 귀가 아파서가 아니라 아직 역적에 관한 일이 매듭 지어지지도 않았는데 정국이 혼란스러워진다면, 역신들만 신나는 일이 아니던가.

    “정녕 이 서신을 저 역적 놈들이 보낸 것이 맞더냐?”

    융은 손에 꾹 쥔 서신을 펄럭거렸다.

    “예.”

    “한데 어찌 기별만 보내고 움직임은 없단 말이냐.”

    “아무래도 수상쩍으니 환궁하시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걱정스럽다는 사홍의 어조에 융은 손을 내저었다.

    “거리가 십리는 훨씬 넘어 보이는데 무슨 위해를 끼치겠느냐.”

    “그래도 혹시 모르니 위사들을 소집하겠사옵니다.”

    “그리하라.”

    사홍을 일별한 융은 다시 한 번 서신을 펼쳐보았다.

    -···하므로 신(臣) 구수영은 전하께 지은 죄를 청하고자 하니 신이 앞으로 나옴에 있어 목을 베시고자 한다면 능히 거열을 당하겠사옵고, 거열을 하시고자 한다면 능히 능지로 신의 죄를 달게 받겠사옵니다. 다만 한 가지 청이 있다면······.

    본인이 어리석었네, 성은을 감히 져버렸으니 혀 깨물고 뒈져도 할 말이 없네, 다만 전하의 허락이 없으니 죽는 것도 쉽지가 않네 등등.

    수식어 아닌 수식어가 한가득인 앞부분을 제한다면 요지는 간단했다.

    죄를 목숨으로라도 달게 받겠다는 것.

    다만 단서는 존재했다.

    가족들만은 살려달라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역적이 무슨 기별을 보낸 것이옵니까?”

    “자진하여 죄를 받겠다는군. 한데 실성한 것이 아니라면 죄를 청하겠다는 말을 함부로 하진 않을 텐데··· 상선의 생각은 어떤가?”

    “내부에 변고가 있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변고?”

    “전하께서 희재를 살려두신 까닭이 무엇이옵니까. 구수영으로 하여금 자중지란을 일으키기 위함이 아니었사옵니까?”

    맞다.

    분명 그랬었다.

    희재를 복권 시킨 건 사실 사홍의 의리에 보답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과거 희재는 임금의 권위에 발칙하게 대들었던 적이 있었다.

    임금의 치세를 평가하고, 임금의 행적을 비판했으니 아무리 선대왕의 어짊을 기억하는 간관들의 간이 배밖으로 나왔다 해도, 그 정도가 훨씬 지나치는 것이었다.

    그런 자를 단순히 의리에 보답하고자 복권시키는 건 무리수에 가까운 일이었다.

    다만 희재는 여러모로 쓸모가 있었다.

    무엇보다, 역신으로 변절한 구수영의 사위였다.

    희재의 아내이자 수영의 여식을 살려둔 것은 그런 맥락에서였다.

    내가 이 정도 성의는 보여줬으니 너도 대세에 변화가 느껴진다면 행동으로 보여줘라 같은?

    문제는.

    “그게 먹혔단 말이냐?”

    어안이 벙벙했다.

    역신으로 변절한 구수영이 제 딸을 살려줬다는 일화를 듣고 다시 변절하는, 일종의 자중지란을 염두에 둔 건 사실이지만 사실 그게 먹힐 거라고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서로에게 불신을 심게 할 생각이 더 컸다.

    다른 역신들의 가족은 모두 처형시켰지만, 똑같은 역신인 구수영의 가족들만 살아있다.

    또 다른 역신들은 무슨 생각을 품겠는가?

    분명 그런 생각만 했던 것인데 먹혔다니······.

    어안이 벙벙했지만, 벙벙한(?) 어안을 가다듬을 새는 없었다.

    저 멀리 인마 한 기가 돈의문 방면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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