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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93화 (93/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93화>

    우리의 소원은 통일 아니고 교역

    ***

    “너 그새 까먹었냐?”

    “그새 까먹은 게 아니라요··· 헤헤.”

    내가 가르킨 꾸짖을 초(誚)자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개똥이가 도저히 모르겠는지 어물쩡 넘어가려는 기색을 보인다.

    녀석의 속셈이 훤히 보여, 가볍게 머리를 콕 쥐어박았다.

    이 녀석 나 없는 동안 복습하고 예습 열심히 하라고 했더니 예습은커녕 복습도 안 하고 산으로 들으로 놀러만 다녔나 보다.

    “자, 따라하자. 꾸짖을 초.”

    “꾸짖을 초.”

    “이건 알지?”

    이번에는 섶 신(薪)자를 가르켰다.

    인상을 구겨가면서 까지 골똘히 생각하던 녀석이 이내 고개를 가로젓는다.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하구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뭐였죠?”

    “섶 신.”

    나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나도 녀석의 심정을 이해한다.

    원래 녀석의 나이엔 밖에서 뛰놀고 싶은 법이다.

    하지만!

    ‘공부해서 남주는 것도 아니고······.’

    공부해서 남주는 일은 없다.

    어떤 공부든 배워두면 쓸모는 있다. 하물며 한자는 더더욱.

    “아, 그런데요. 마마. 제 동무들이 그러는데요. 이번에 저희 마을 앞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갔다고 했거든요? 무슨 거열형이래나? 그 거열형이 뭐냐고 물었는데 이게 사지를 딱 묶어서 소가 끌고 가게 하는 거라고······.”

    개똥이의 전매특허 횡설수설이 또 나왔다.

    사실 가만 보면 이 녀석은 주의력 결핍 장애가 아니다.

    오히려 천재다.

    제 불리할 때만 꼭 횡설수설하거나 딴소리를 늘어 놓더라라니까?

    “넌 아직 어리니까 그런 거 봐서도 안 되고 들어서도 안 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이거나 마저 읽어, 인마.”

    “근데요. 이거 꼭 해야 되요?”

    “너 꿈이 뭐냐?”

    “저요? 예쁜 색시 만나서 장가가는 거요. 아, 밭도 몇 마지기도 있었으면 좋겠구요.”

    “꿈이 어째 누구랑 똑같네.”

    나는 옆에서 코 골면서 졸고 있는 덕산이를 흘겼다.

    그나저나 이 녀석도 얼른 전금이랑 진도 빼야(?) 할 텐데 늘어지게 낮잠이나 자고 있으니, 원.

    “농사라도 짓게?”

    “네!”

    호기롭게 Yes를 외치는 개똥이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1년이 지난 나도 아직 세상 물정에 어둡지만 어째 이 녀석은 나보다 더 어두운 것 같다.

    형님이 입궐하자마자 팔석 씨를 절충장군에 봉했다. 녹봉이라 쓰고 연금이라 읽는 재물도 따박따박 들어올 테니 농사 지을 필요가 전연 없다.

    취미로 텃밭 가꾸기라면 모를까.

    “자, 계속하자. 이건······.”

    나는 공부 하기 싫다는 개똥이를 어르고 달래가면서 진도를 나갔다.

    그렇게 정오쯤 됐을 무렵.

    꼬르륵-.

    “마마. 저 배고파요.”

    비록 알람 시계는 없지만 개똥이의 알람 시계는 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오늘은 뭐 먹어요?”

    예전에는 그나마 점심 때 되면 ‘집 가서 얼른 밥 먹고 올게요!’라고 눈치라도 보더니 이젠 그런 것도 없다.

    하여간 순수해.

    “뭐 먹고 싶은데?”

    “저는 아무거나요!”

    점심을 아무거나로 때울 순 없지.

    “삼겹살 어떠냐?”

    “쓰릅. 사, 삼겹살이라굽쇼!”

    코 골던 덕산이도 벌떡 일으키는 삼겹살.

    우스개 소리로 소고기 보다 돼지고기를 더 구하기 어려운 곳이지만 예전에 몇 번 해 먹은 적이 있다.

    불판에 자글자글 구워서 후루룩!

    마침 어제 돼지고기가 몇 근이 아니라 통째로 들어왔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요 며칠 높으신(?) 분들의 대우가 많이 달라진 기분이다.

    이 돼지고기도 이름은 까먹었는데 무슨 판서 되시는 분이 보내주신 거다.

    아, 오해하면 안 된다.

    절대적으로다가 뇌물은 아니니까.

    뇌물이란 건 어떤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에게 댓가를 바라고 ‘바치는’ 게 뇌물이지, 고맙다고 선물한 건 뇌물이 아니다.

    그건 정이다.

    어? 한국인의 정.

    “좋아요.”

    “그럼 만장일치로 삼겹살로. 덕산아. 삼겹살 먹게 불좀······.”

    덕산이에게 불좀 준비 해두라고 말하려는데 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방문을 열자 시원한 봄바람과 함께 마당에 서있는 누군가가 눈에 들어왔다.

    “그 삼겹살이라는 것. 나도 한 번 얻어먹어 보자꾸나.”

    형님이었다.

    “아니, 전하께서 여긴 어쩐 일로다가··· 한참 바쁘실 텐데요.”

    “하하. 바쁘더라도 아우와 밥 한 끼 하고 싶어 걸음했다.”

    “어, 삼촌!”

    삼촌이란 말에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개똥이를 바라봤다.

    녀석이 해맑게 손까지 흔들어대고 있다.

    아니, 손을 흔들어 대는 정도가 아니라 후다닥 방에서 튀어나가 형님을 반긴다.

    이래도 되나?

    ***

    “잘 얻어 먹었다. 내 돌아가는 대로 숙수들에게도 앞으로는 이 삼겹살이라는 것을 수라에 올리도록 해야겠다. 맛이 일품이구나.”

    입가에 기름기가 한가득인 형님의 삼겹살 극찬에 나는 괜히 머쓱해졌다.

    사실 삼겹살이 요리랄 것도 아니니까.

    “그래, 개똥이에게 공부도 가르친다지?”

    밥을 두 공기나 뚝딱 해치우고, 새끼 오리처럼 형님을 삼촌, 삼촌 거리면서 졸졸 따라다니던 개똥이.

    지금도 대청에 엎드려서 책을 읽는 둥 마는 둥, 이쪽을 곁눈질 하는 개똥이를 형님이 푸근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네. 아무래도 배워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그 기간이 퍽 오래 된 듯 한데 진도는?”

    “아직 천자문입니다.”

    “음. 개똥이도 이제 무반의 자제가 되었으니 공부를 게을리 해서는 아니 될 게다.”

    “그렇긴 한데, 저 녀석은 꿈이 농사꾼이래요.”

    “뭐? 농사꾼?”

    “땅 몇 마지기 정도 갖고 예쁜 색시에게 장가 들면 소원이 없겠다나요.”

    “하하. 과연 개똥이 다운 꿈이로구나.”

    “뭐, 저 나이 때는 꿈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니까 시간 좀 지나면 바뀌겠죠. 아, 맞다.”

    “응?”

    “박원종은 어떻게 됐어요?”

    “아무래도 성희안에게 간 듯 싶다. 임진강을 넘은 것 까지는 확인이 되는데 이후에는 자취를 감췄다고 하니 말이다.”

    “그 개자식 서대문에서 요절 냈어야 하는 건데······.”

    나는 입맛을 다셨다.

    사실 지금 상황이 나름 장기전으로 돌입한 것도 박원종을 사로 잡지 못 해서다.

    역적 수괴중 하나인 박원종만 사로 잡았어도 상황이 좀 나아졌을 텐데 말이다.

    “아쉬운 것이냐?”

    “아쉽죠. 그 자식 때문에 애먼 사람들만 죽거나 다쳤으니까요.”

    “애먼 사람들?”

    “뭐, 서대문 밖에 살던 백성들이라거나··· 본의 아니게 우리가 피해준 논밭 주인들이라거나, 군사들이라거나······.”

    서대문의 백성들은 직접적인 피해를 입진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피해를 입었었다.

    또 우리가 남하하면서 어쩔 수 없이 논밭을 밞고 올 때도 있었는데 평안도에서만 네 마을이, 황해도에서는 여섯 마을이, 그리고 경기도에서만 두 마을의 논밭을 밞고 지나왔다.

    아직 이렇다 할 작물을 심은 건 아니라서, 큰 피해는 아니지만 논이나 밭을 다시 갈아야 하니 피해라면 피해를 입은 셈이었다.

    결정적으로, 군사들의 피해는 제법 컸다.

    중상자만 서른이 넘었고 경상자는 수백을 헤아렸다.

    전사자는 정확히 열다섯 명.

    사람들은 도성에 머물고 있던 반란군의 주력을 밖으로 유인해 치룬 전투치고는, 그리고 대첩(大捷)치고는 적은 사상자를 냈다고 위로 아닌 위로를 했었지만 전사자 열다섯 명은 단순한 장부상의 숫자가 아니었다.

    개개인 모두 한 집안의 가장이고 아들이고 아버지다.

    내가 박원종에게 적개심을 드러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박원종과 다른 개새끼들이 삽질만 안 했어도 한 집안의 가장으로, 아들로, 아버지로 살아 있었을 테니까.

    “음. 네 말이 맞다. 애먼 사람들만 죽어갔지.”

    “아, 우상대감 소식은요?”

    절레절레.

    “들어온 게 없다.”

    살아 계셔야 할 텐데.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괜히 마음이 착잡해져서 고개를 떨구고 있자 형님이 날 부른다.

    “진성아.”

    “예.”

    “네 말대로 애먼 사람들이 죽은 일은 안타까운 일이다. 우상의 생사도 확인된 바 없으니 이 또한 가슴 아픈 일이지. 하지만 난 임금이다. 역신에 관한 일도 일이지만, 공신에 대한 일도 매듭 짓지 않을 수 없다. 이건 임금의 위엄과도 연관된 일이니라.”

    “···”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난리를 평정한 공은 여러 사람에게 있다만, 무엇보다 네 공을 기리지 않을 수가 없다.”

    “제 공이요?”

    “그래. 통상 공신에겐 땅과 노비를 사급(하사)하여 예우하곤 한다만 너라면 따로 받고 싶은 것이 있을 것 같아 이리 걸음한 것이었다. 네 혹시 받고 싶은 것이 있더냐? 원이 있다면 편히 말해보거라.”

    긁적긁적.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지금도 충분히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고.

    “왜, 없는 것이냐?”

    “네,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뭐든 말해보거라. 혹시 벼슬을 하고 싶다면 내 벼슬도 시켜 줄 수 있다. 공신인데 법례가 대수겠더냐.”

    벼슬?

    나쁘진 않은데 구미는 안 당긴다.

    ‘뭐든 들어주실 것 같긴 한데······.’

    내가 알기로 대군이나 군의 위치에 있으면 벼슬길은 못 나간다.

    형님이 법례 운운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일 것이다.

    막힌 벼슬길(?)도 뚫어주겠다고 하니 확실히 뭐든 들어주실 생각으로 행차하신 것 같았다.

    그렇다면 하나 있긴 하다.

    “사실대로 말씀드려도 될까요?”

    “얼마든지. 편히 말하거라.”

    “사실 땅이나 노비는 지금도 충분합니다. 여기서 더 욕심 부리는 건 이치상 안 맞는 것 같구요. 벼슬도 저 생각해주시는 건 고마운데 별로 안 내킵니다.”

    “벼, 벼슬이 안 내킨다?”

    “네.”

    “허. 희한하구나. 남들은 어찌 해서라도 하고 싶은 것이 벼슬이거늘······.”

    “그래서 말인데요.”

    “그래.”

    “뜬금없다고 웃으시면 안 됩니다?”

    “내가 그리 실없는 사람도 아니고 어찌 웃겠느냐?”

    크흠.

    사실 내 소원은 소박하다.

    그게 뭐냐면······.

    ***

    풉.

    “푸하하하!”

    내 이럴 줄 알았다.

    “안 웃는다고 하셨잖습니까.”

    눈을 게슴츠레 치켜 뜨고 말하자, 형님은 오히려 그 모습이 더 우스운지 배꼽까지 잡아대신다.

    후.

    그렇게 웃을 일도 아닌데.

    “크하하. 웃긴 건 어찌 한단 말이냐. 벼슬도··· 푸하하, 땅과 벼슬도 마다하더니 소원이··· 하하하!”

    “저한텐 벼슬보다 중요합니다.”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웃어대던 형님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면서 묻는다.

    “그래, 벼슬보다 중요하니 벼슬을 마다하고 말했겠지. 교역?”

    “네. 저는 다른 건 다 만족하면서 살 수 있는데 교역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진지한(?) 내 모습에 다시 한 번 형님은 배꼽을 잡고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아··· 내 이리 웃은 것이 얼마만인지 기억도 안 나는구나. 한데 갑자기 교역은 어인 말이냐? 지금도 만족하고 산다던 네가 재화를 벌기 위함은 아닐 테고······.”

    “형님. 이게, 또 사람이 무슨 낙으로 살겠습니까?”

    “그래, 여러 낙이 있지.”

    “형님 말씀대로 사람마다 여러 낙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 모으는 낙으로 살 테고, 어떤 사람은 벼슬길에 오르는 낙으로 살 테고, 또 어떤 사람들은 계집질하는 낙으로 살 테죠.”

    “하면 네 낙은?”

    맛집 탐방을 여기 말로 하면 뭐더라.

    아!

    “식도락입니다.”

    “식도락?”

    사실, 먹는 것 만큼 중요한 건 없다.

    21세기에서 직장 상사에 조인트 까여도,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부하 직원에 꾹 참고 직장을 계속다니는 것도 따지고 보면 먹고 살기 위해서 아닌가?

    그리고 나는 하도 못 먹고(?) 살아서 그런지, 취직하면 꼭 주말마다 맛집 탐방을 하겠노라 막연하게 스스로 다짐하곤 했었다.

    뭐, 그 꿈은 진성대군이 돼버려서 이루지 못 했지만.

    아, 물론 여기 음식들이 맛이 없다는 건 아니다.

    맛?

    충분히 있다.

    내가 생전에 못 먹어 본 음식들이 수두룩빽빽이고 21세기 대한민국이었다면 수십만원은 줬어야 할 음식들을 매 끼니마다 먹을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게 빠졌다.

    내 비록 역알못이다만 콜럼버스가 왜 신대륙을 찾아 떠났는지 정도는 안다.

    향신료 때문 아니던가.

    그래, 향신료!

    여긴 맛을 내는 조미료가 없어도 너무 없다.

    콜라나 피자까진 이해한다.

    하지만 조미료가 부족하다는 건, 도의적으로다가 문제 아닌가?

    ‘심지어는 고추도 없고.’

    이현호로 살 때는 물리게 먹어댔던 김장 김치도, 여기선 한없이 그리웠다.

    한국인의 밥상에 빼놓지 않고 올라와야 할 김치가, 여기선 소금에 절인 게 전부거든.

    김장김치가 없으니 밥도둑이 따로 없는 김치찌개도 못 먹는다.

    그것 뿐인가?

    매운 맛을 내는 산초란 게 있긴 하지만, 중국과 교역량이 적으니 들어오는 것도 한정됐고 결정적으로 매운 향이 너무 강해서 고추의 칼칼한 맛은 전혀 느낄 수가 없다.

    자고로 찌개나 국 요리에는 송송 썰어 넣은 고추가 들어가야 하는데 말했다시피 고추가 없으니 멀건 국물이 대부분이다.

    들깨가루나 산초 같은 일부 조미료로 맛을 낸다지만, 내가 느끼고 싶은 건 혀를 알싸하게 만드는 고추의 매운 맛이다.

    그래.

    인간적으로 16세기니까 콜라나 피자는 참을 수 있다 치자.

    하지만 고추나 후추 정도는 교역만 하면 구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겸사겸사 설탕도 구하면 좋고 말이다.

    아, 고구마도 구하면 좋겠다.

    작년 겨울에 동치미를 먹는데 고구마 생각이 간절했었다.

    모두 알다시피 고구마 없는 동치미는 앙꼬 없는 진빵이고, 춘장 없는 자장면이니까.

    벼슬이나 땅까지 마다하고 기껏 말한 게 교역이라니 우스울지 몰라도, 말했다시피 미식은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낙이고, 요소다.

    여러분들, 당장 고추가 없으면 생활 할 수 있나?

    설탕이 없으면?

    그런 의미에서.

    “형님, 어떻게 안 될까요?”

    “한데 식도락과 교역이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이냐?”

    나는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 형님께 기다렸다는 듯 교역-식도락의 상관 관계에 대해 열변을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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