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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92화 (92/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92화>

    반대를 위한 반대가 사라진 편전

    ***

    강음현(江陰縣).

    평상시라면 관아에 사또가 좌기(출근)해서 업무를 봤을 테지만 세상이 어수선하다 보니, 사또가 아니라 역적이 좌기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사실 말이 좌기였지, 그저 빈 강음현을 꿰차고 눌러 앉은 것에 불과했다.

    “괜찮겠사옵니까?”

    북정군에 부관으로 종군한 이석번(李碩蕃)이었다.

    이석번이 대청에 가지런히 놓여진 함 세 개를 바라보며 물었다.

    “안 괜찮으면?”

    “하면 어찌 망설이시옵니까? 속히 조정에······.”

    “그만!”

    구수영은 등채를 마구잡이로 내려치며 신경질을 부렸다.

    가뜩이나 머릿속이 복잡한데, 부관의 채근에 복잡한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일단 일은 벌였다.

    성희안과 장정을 사로잡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밤중에, 강음현의 아전들이 관기로 접대한다고 유인하여 술이 오가는 와중에 미리 준비 시킨 이석번으로 하여금 치게 만들었다.

    성희안의 예하에 있던 박원종의 사촌 박이검(朴而儉)이 눈치채고 휘하의 군사를 일으켰지만, 이미 대세를 거스를 순 없었다.

    결국 구수영은 성희안과 장정의 부대를 모조리 종속 시킬 수 있었다.

    단, 문제는 막상 일을 벌이고 나니 덜컥 겁이 난다는 것이었다.

    사람을 보내 한양의 상황을 알아보게 했는데, 겁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이미 진성대군의 도움을 받아 입성한 폐군··· 아니, 전하는 하삼도에 군령과 병부를 내렸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지금.

    오늘 아침 충청도 관찰사가 휘하의 수령들을 모아 북상하고 있다는 보고를 접할 수 있었다.

    충청도가 가장 먼저 움직였지만 곧 전라도와 경상도도 움직여 북상을 할 터였다.

    이번 북정군의 병력은 북방의 정예군과 평안도, 황해도 등지와 경기 일대의 병력만을 차출한 것이니 병력을 온전히 보유하고 있는 하삼도의 병력이 북상한다면 절대 승리를 보장 할 수 없을 것이었다.

    이미 탈영병도 속출하고 있고 사기도 엉망진창이니 더더욱.

    그러니 만큼 하루라도 빨리 투항을 해야겠지만 문제는 어제 밤늦게 들려온 소식이다.

    수영은 입성한 임금이 가장 먼저 하삼도의 군대를 북상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칠 줄 알았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임금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역적들을 소탕 시킨 일이었다.

    발 빠른 군사를 시켜 알아본 바에 의하면 벌써 역적으로 분류된 옛 동지들은 능지처참과 거열형으로 소금에 절여졌다고 했다.

    그래, 거열형은 이해한다.

    하지만 능지처참이라니······.

    이미 김운열 같은 자에게 진짜 팽형까지 가한 임금이니 무리도 아니다만, 한 사람에게 가하는 팽형과 다수에 가하는 능지처참은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그 의미가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능지처참은 수영도 고사에서나 보던 형벌이었다.

    사람의 살 점을 산 채로 포를 뜨는 형벌.

    잔악하기로는 정평이 자자한 형벌을 한 사람도 아니고 수 명이 당했다고 하니 겁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장군. 시일을 지체해서 하삼도의 군사들이 북상하게 된다면 토포사(토벌군 사령관)가 임명될 것이옵니다.”

    “안다! 나도 알어! 누가 그걸 모른단 말이냐?”

    구수영이 망설이는 건, 본인의 생사 때문이 아니었다.

    이미 역적질에 가담했다.

    목숨을 담보로 한 일이었고 비록 실패했을지언정, 그래서 동지들을 배반했을지언정 죽어도 여한은 없다.

    하지만 가족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역적을 배출한 문중은?

    그가 망설이는 건 가족과 문중 때문이었다.

    그렇게 구수영이 강음현 관청에서 초조하게 입술을 뜯고 있던 그때.

    “장군! 장군!”

    화들짝 놀란 구수영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성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임진강 너머로 보내두었던 군관이었다.

    하지만 아직 안도하긴 일렀다.

    임진강 너머에서 도성의 상황을 정탐해야 할 군관이 왔다는 건, 일단 도성의 상황이 급변했다는 뜻일 테니까.

    “무슨 일이냐? 또 누가 죽은 것이냐?”

    수영은 지레짐작하고 물었다.

    이미 수십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능지처참과 거열형을 당했다.

    여기서 또 수십명이 넘는 사람들은 참형되었다.

    벌써 백여명 가까운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으니 한 둘 더 죽는다 한들 이상할 건 없지만, 일단 누가 죽었느냐에 따라 다르다.

    “아니, 그건 아니옵고······.”

    “하면? 하면 토포사가 제수된 것이더냐?”

    “아니옵니다.”

    “그럼, 뜸 들이지 말고 말하라!”

    “김굉필이 복권 되었다고 하옵니다.”

    “뭐? 누가 복권 돼?”

    “김굉필 말이옵니다. 문하에 있던 이행, 최수성, 정붕, 김안국, 공서린, 이장곤 이 여섯 사람이 의를 떨쳤다고 해서 그 스승인 굉필의 죄를 사하고 복직시킨다는 어명이 떨어졌사옵니다.”

    여섯 사람이 별충위가 입성하기 전, 난리를 일으켰단 소리는 들었다.

    그리고 바로 얼마 전까지, 유배지에서 사사시키네 마네하던 김굉필을 복권시킨 것도 놀라운 소식이다.

    놀라운 소식이긴 한데.

    그게 전부다.

    김굉필이 복권된 건, 결국 여섯 공신을 대우하겠다는 뜻 밖엔 안 되고, 궁지에 몰린 현상황에는 큰 변동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고작 그 소식을 가져오려 백리길을 마다하고 달려온 것이냐?”

    “아니옵니다. 임희재 역시 복권시킨다는 어명이 떨어졌다 하옵니다.”

    벌떡!

    “누구? 누굴 복권 시켜?”

    “임희재 말이옵니다.”

    임사홍의 아들 임희재.

    견부호자란 말이 있다면 이를 나타내는 것이 바로 임희재였다.

    간신 임사홍과는 달리 선비로서 입지(立志)가 확고한 사람이었다.

    결정적으로, 그의 사위이기도 했다.

    수영이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오히려 김굉필을 복권시키겠다는 것 보다 더 놀라웠다.

    임희재가 간신 임사홍의 아들이긴 하지만 거의 내놓은 자식 취급 받았다.

    그래서 임금이 임희재를 벌하겠다고 했을 때, 아니 오히려 그전부터 임사홍이 희재를 벌하라고 했을 정도였다.

    제아무리 임사홍이 이번 반정 때 공을 세웠다 할지라도, 임희재는 별개의 위치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복권이라니······.

    “내, 내 딸은? 내 딸은 어찌 한다더냐?”

    무엇보다 이게 중요했다.

    보통 공신의 자식과 역신의 자식이 부부지간이라면, 역신의 자식과 이혼시키기 마련이니까.

    “아비의 죄는 논하지 않겠다 했답니다.”

    안도감에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수영은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수영을 보고 석번이 말했다.

    “장군의 죄도 사하겠다는 암시가 아니겠사옵니까?”

    “암시?”

    “예. 희재를 복권시킨다고 해도 그와 별개로 따님은 관비로 보냄이 통례인데, 그 죄를 논하진 않겠다 하니 장군의 죄는 사하겠다는 암시가 아닐는지······.”

    “혹 도성에서 이쪽 상황을 알고 있는 것인가?”

    “그건 아닐 것이옵니다.”

    “하면 어찌 그런 명을 내렸을꼬······.”

    그가 기억하고 있는 임금이라면, 희재를 복권시킬 땐 시키더라도 자신의 딸과는 강제로 이혼시켜야 한다.

    그게 수영이 기억하고 있는 임금의 모습이었다.

    “죽은 성 장군도 종친과 연을 맺고 있긴 하지만, 북정군의 삼장군들 중에서 왕실과 확고히 연을 맺은 분은 장군 밖엔 없지 않겠습니까? 자중지란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지······.”

    수영의 얼굴에 점점 화색이 감도는 그때.

    또 다른 군관이 달려들어왔다.

    “장군! 박 장군이 강음현 초입에 들었다고 하옵니다.”

    얼마 전, 전령을 보내온 박원종이었다.

    이쪽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으니 만큼 일단 그라도 생포하기 위해 강음현으로 오라고 했었는데 어리석게 진짜 온 모양이다.

    “사로 잡아야 한다. 정확히 지금 어디에 있느냐?”

    몸을 일으킨 수영은 환도를 빼들었다.

    정말로 임금이 그 죄를 사하겠다는 암시를 보낸 거라면, 그 암시에 응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 문중의 명줄을 구명할 길은 그것 외엔 없었다.

    ***

    편전.

    “···충청도 관찰사 안침(安琛)이 좌도 휘하의 수령들과 이제 막 천민천(지금의 청미천)을 도하하였다고 하옵고, 사안이 사안이니 만큼 우도의 수령들은 안침이 아니라, 발병을 받은 공주목사 김율(金硉)이 통솔하여 아산을 막 통과했다고 하옵니다.”

    김감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들은 융은 뻐근해진 목을 풀었다.

    “전라도와 경상도는?”

    “충청에 비해 준비가 늦어져서 이제 출군을 한 듯 하옵니다.”

    “늦군.”

    “선전무관을 보내 재촉을 하오리까?”

    “그럴 필요는 없겠다. 어차피 독안에 든 쥐들이다.”

    역적 무리를 너무 가볍게 보는 것 같은 임금이 걱정됐는지 사홍이 다소 무거운 표정과 함께 입을 열었다.

    “하오나 그 수가 자그마치 1만이 넘사옵니다. 지금 평안도와 황해도의 수령들이 대부분 별충위를 따라 입성하면서 한양에 머물고 있으니 만에 하나라도 역적들이 평안도와 황해도를 꿰차게 된다면 놈들을 사로 잡는 일이 길어질지도 모르옵니다.”

    “별 움직임은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긴 하옵니다만 만에 하나라도······.”

    “역적 무리를 토벌하는 것은 무조건 수행되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리 조급해 하지 않아도 된다. 역적들의 처자가 모두 금부에 갇혀 있는데 놈들이 어찌 함부로 날뛰겠는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미 역적질에 가담한 성희안, 장정, 구수영 외에 지휘관급 요인들의 처자들은 모조리 하옥시킨 상태였다.

    그걸로도 모잘라 역적들의 연고지에 사람을 보내, 그 집안 사람들까지 모조리 잡아 들이라 명한 상태였다.

    역적들이 실성했다고 한들 가족과 문중을 담보로 무리수를 두진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경들에게 내 과제를 내준 것이 있는 걸로 기억하는데. 어찌 운을 떼는 자가 없구나.”

    융의 시선이 ‘침묵한 중신’들을 대표하는 유순에게 머물렀다.

    어제의 처형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늦은 오후부터 시작해, 능지처참형을 선고 받은 죄인들이 수 명이 넘었으니 당연한 결과물이었다.

    유순정은 산 채로 1231회 포가 뜨이면서 처참하게 죽었고, 이 모두를 ‘침묵한 중신’들에게 참관케한 융은 일종의 숙제를 내줬었다.

    거창한 건 아니고, 시문(詩文)중 하나를 택일해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신은 오늘 아침 입궐하면서 김 도령(도승지)에게 직접 전달했나이다.”

    “신 또한 오늘 아침 승정원 아전을 통해 전달했사옵니다.”

    책거리와 함께 의기양양해서 부모께 자랑하는 아이도 아니고, 여기저기서 제출했다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영상은 아직인가?”

    “아, 아니옵니다. 신도 승정원에 전달했사옵니다.”

    “그래?”

    “예, 전하.”

    “그럼 어제 죄인들의 처형을 본 감상이 어떠했는가?”

    “가, 감상 말이옵니까?”

    유순과 중신들의 표정이 질려갔다.

    어제 비명을 질러대던 죄인들의 모습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그래, 감상.”

    “토, 통쾌했사옵니다. 실로 역적들이 비명을 내지르는 모습에, 이··· 몸이 부르르 떨리고······.”

    “두렵기 때문에 몸이 떨린 건 아니겠지?”

    “그,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지은 죄가 없다면 어제 죄인들의 처형을 보고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 영상 또한 지은 죄가 없으니 두려워할 필요 없다.”

    “마, 망극하옵니다.”

    “음. 성희안의 일은 하삼도의 군사들이 올라오는 대로 토포사를 임명하면 되겠고··· 슬슬 공신을 책봉했으면 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천만 윤당하옵고 이치에 맞는 일이니 속히 행하시옵소서.”

    “내가 생각하건대 공신이 적어 굳이 도감을 설치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호종공신은 그 수가 두 손으로 꼽을 정도고, 정난공신(定難功臣)의 수는 많긴 하지만 등급을 나눠 세분화한다면 능히 편전에서도 논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가?”

    “전하의 뜻대로 하소서.”

    “그럼 경들이 생각하기에 호종공신 일등에는 누가 되어야겠는가?”

    “마, 마땅히 김처선(상선)과 팔석이 되어야 하옵니다.”

    “그 두 사람을 호종공신 일등에 책봉하고 추가로, 팔석의 아내 덕금과 날 호종하는 데에 팔석과 공을 세웠던 금석리 백성 김가이(金可移), 그리고 보부상으로 서대문까지 길안내를 했던 갓복(㖙卜)을 이등공신에 책봉하면 좋겠는데.”

    “천만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아, 한 사람 더.”

    “하명하시옵소서.”

    순간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른 건지 피식거린 융이 말했다.

    “팔석의 아들 개똥이 역시 원종공신(정공신 보다는 작은 공을 세운 이들)이 아니라 이등공신으로 책봉해야겠다. 한 집안에서 공신이 세 명이나 나왔으니 팔석은 병마절도사의 예에 의하여 녹을 주도록 하라.”

    “정난공신들은 어찌 하오리까?”

    호종공신들은 그 수가 두 손으로 꼽을 정도라 뚝딱 말하면 그만이었지만, 정난공신은 그 수만 자그마치 천명이 넘어갔다.

    당장 위사들만 해도 900명이었으니 말이다.

    “정난공신의 일은 차제에 논하겠다. 일단 모두 물러들 가라.”

    때아닌 축객령에 어리둥절해 하며 중신들이 물러가자, 융은 상선을 바라봤다.

    “내 진성의 집엘 좀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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