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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91화 (91/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91화>

    홍건의사들의 스승 김굉필을 복권하라

    ***

    -전하··· 재차 아뢰옵나이다. 어리석고 우매한 신들은 이제 전하께서 수모를 이겨내고 환궁하신 일에 지극히 황송한 마음을 견디지 못 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신들이 불민하여 사직의 기강을 어지럽힌 도적들을 바로 잡지 못 하였으니 지금 앞다투어 머리 조아리며 대죄를 청하옵······.

    융은 문밖을 흘긴 채 피식거렸다.

    오늘 아침께부터 들려오던 영의정의 목소리다.

    아침에는 괄괄하고 맑아서 듣는 맛은 있었는데 석고대죄한 지 정오쯤 지나니 맑던 목소리는 온데간데 없고 가뭄에 쩍쩍 갈라지는 것이 영 매가리가 없다.

    “참으로 기가 찬다.”

    그는 석고대죄하는 신하들을 조소했다.

    그가 환궁할 때 석고대죄를 청했다면 그 진심이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아니.

    금부도사 안처직에게 ‘발본색원’에 대한 명을 내리고 곧바로 입궐해서 석고대죄를 청했다면 그 진심이 조금이나마 느껴졌을 것이다.

    그런데 안처직에게 ‘발본색원’에 대한 명을 내리고 간밤에는 두 발 뻗고 잘 자다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이 틀 때 우르르- 몰려와서 석고대죄랍시고 떠들고 있으니, 우습지도 않은 일이다.

    “저들도 경황이 없었을 것이옵니다.”

    “하루 아침에 두 명의 임금을 뫼시게 됐으니 경황이 없겠지. 경처럼 한 사람의 임금만 모셨다면 당혹스러울 것이 무에 있겠나?”

    문밖을 흘기며 탐탁지 않다는 듯 혀를 찬 융은 손에 쥔 명부를 쥐었다.

    “무언지 아는가?”

    “추안(추국에 대한 문건)이옵니까?”

    끄덕.

    “어떻게 보면 저들에 대한 살생부이기도 하지.”

    “안처직이 간밤에 수고가 많았겠사옵니다.”

    “안 그래도 눈그늘(다크서클)이 사람 잡겠더군. 조만간 영전이라도 시켜야겠어.”

    “처직에게는 더할나위 없는 광영일 것이옵니다.”

    “그래야지. 한데··· 어찌 안 묻는 것인가?”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한 사홍의 태도에 피식거린 융은 손에 쥔 추안을 흔들었다.

    “내 어찌 살생부를 손에 쥐고서도 저들을 바로 잡아들이라 하지 않고 뜸을 들이는지 말일세.”

    “전하께서 다 복안이 있으시니 굳이 행하지 않은 것일 텐데 신이 어찌 왈가왈부 할 수 있겠사옵니까?”

    “사실 오늘 꼭두새벽부터 진성이와 독대를 좀 했네.”

    “그러셨사옵니까? 안 그래도 대군께 감사 인사를 전해야 하는데 영 뵐 기회가 없사옵니다.”

    “그건 차차 하도록 하고. 자네도 알겠지마는 진성이의 성품은 여리네. 장난기 많은 소년 같기도 하고 때론 새침한 소녀 같기도 하지.”

    “걱정 되시옵니까?”

    “이런 난세에 종친으로 살아가기엔 독하질 못 하니 어찌 걱정이 안 되겠나. 때론 독기도 품을 줄 알아야 살아갈 수 있음인데······.”

    “그게 대군의 천성 아니겠사옵니까?”

    “맞네. 그게 대군의 천성이지. 나는 갖지 못 한 여린 마음과 따뜻한 마음씨.”

    “당치도 않으시옵니다. 전하께오서 자비를 베풀지 않으셨다면 저치들 모두······.”

    “내가 저들에게 자비를 베푼 것이 아닐세.”

    “예?”

    “음. 감화되었다고 해두지.”

    “하오나······.”

    “지금 저들을 벌한다 한들 무슨 득이 있겠는가? 내 속은 후련해지겠지마는 편전이 텅텅 비게 될 텐데 국사는 어찌 보겠나?”

    사홍은 얼이 나간 기분이었다.

    이건 평소 알던 임금이 아니었다.

    그가 알고 있던 임금은 비록 암군과 폭군은 아닐지라도 성군이라 불리기엔 약간의 부족함이 있는 분이었다.

    매사에 감정적이었고 즉흥적이었으며 때론 다혈질적인 성격까지 갖추었으니 후일을 도모해야 할 일이 많은 정치판에선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런 임금이 감정을 조절하고, 분노를 억누른다.

    처음 뵙는 모습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낯설었다.

    “하오면 송구하오나 어쩌실 생각이시온지······.”

    -전하··· 불민한 신들이 다시 한 번 대죄를 청하옵나이다. 부디 신들의 황망하고 두려운 마음을 헤아려 주시옵고 또한······.

    여전히 쫑알거리는 유순에 문 밖을 흘긴 융은 귀를 후벼팠다.

    “나도 자비란 걸 좀 베풀어볼까 하네. 겸사겸사, 힘도 좀 길러보고.”

    ***

    편전.

    “전하의 하해와 같은 성은에 신들은 도무지··· 크흑.”

    유순의 추태에 융은 손을 내저었다.

    “나라의 대적(大賊)이 아직 흉모를 꾸미고 있을지 몰라서 일을 잠시 미룬 것이다. 경들과 상의할 것도 있고.”

    “하명하시옵소서, 전하!”

    “그, 김굉필이가 어디에 정배돼 있던가?”

    잠시나마 ‘발본색원’의 명을 비껴가게 된 유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굉필.

    무오년의 일(무오사화)에 희생된 건 김일손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그의 인척.

    그의 문인.

    모조리 연루가 됐다.

    거기서 연루된 사람중 하나가 바로 김굉필이었다.

    그리고 바로 작년.

    이극균과 윤필상 같은 대신들이 연달아 처벌 될 때, 과거에 죄 지은 김굉필 역시 다시금 화두에 올라서 그를 이극균과 함께 사사하겠네 마네 했던 것이 바로 임금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김굉필이라니?

    덜컥 겁부터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임금의 변덕은 육진의 미개한 백성들도 알 정도였다.

    그 변덕으로 일단 목숨줄을 구명한 건 천만다행한 일이지만 김굉필이란 이름이 임금의 입에서 흘러 나온 이상 어떤 변덕을 부릴지 몰랐다.

    최악의 경우에는 사화까지 일어날지도 몰랐다.

    그리고 역모에 사화까지 겹친다면 이건 파탄 정도가 아니었다.

    꿀꺽.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나, 난적은 어찌 하문하시옵니까?”

    유순이 간을 떠보기 위해 김굉필을 ‘난적’이라 표현하자 융은 미간을 좁혔다.

    “영상은 말을 삼갈 필요가 있겠다. 난적이라니?”

    “예?”

    당연한 소리지만 임금에겐 반문해선 안 된다.

    특히 요즘처럼 임금의 권위가 하늘을 찌를 때는 더더욱.

    이제 막 문과에 급제하는 영예를 입은 신래(신입)들이야 고도의 긴장감으로 이런 실수를 할 수 있겠지만, 수십 년 넘게 편전의 설전을 겪었던 유순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실수나 다름이 없었다.

    그만큼 유순이 갖는 당혹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김굉필을 사사시키고 그의 조상들은 죽은 간신 정창손, 심회, 한명회, 한치형 등을 참시할 때처럼 참시해야겠냐고 논하기까지 했었던 임금이니 말이다.

    “말이 나온 김에 전교하겠다.”

    “···”

    “앞으로 김굉필을 난적이라 표현한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삭직에 처할 것이니 그리 알라.”

    “···?”

    중신들의 데구르르- 눈알 굴러가는 소리가 문밖의 차비들에게 들릴 정도였다.

    “내 기억에 의하면 지난 홍치 13년(1500년)에 순천으로 이배시켰던 것 같은데 아직도 순천에 있던가?”

    “그, 그러하옵니다.”

    “건강은 어떠하다던가?”

    “그건 신들도 잘······.”

    “음. 유배지란 곳이 끼니를 거르는 일이 많고 여러모로 고단하다 보니 건강을 해치기 쉬울 것이다. 건강을 잃기 전에 속히 복권시킴이 마땅하겠다. 굉필을 복권시키고 또한 마땅한 관직을 제수하여 위로하고자 하는데 어떤 자리가 제격이겠는가?”

    편전에는 다시금 중신들의 눈알 굴러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시오?’

    ‘홍두깨도 분수가 있지, 이건 아닌 밤중에 홍두깨 아니오?’

    ‘김굉필이라니? 대감은 언질 받은 거라도 좀 있소?’

    굴러가는 눈알들은 저희들끼리 의견을 주고 받았다.

    아닌 게 아니라.

    임금의 하해와 같은 은혜 덕에 ‘발본색원’에 대한 명이 잠시 미뤄지긴 했지만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금부도사 안처직과 나장들이 편전에 들어 ‘송구하오나 전하께서 말씀하신 혐의를 가진 재상 아무개와 아무개를 끌고가 추국하겠사옵니다.’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이중 태반은 금부로 끌려간다.

    그런 살떨리는 시국에 김굉필의 복권이라니······.

    선뜻 입이 안 떨어지는 것도 당연했다.

    “어찌 말들이 없는가?”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복권이라 함은 어떤 공로를 세우거나 학문적인 성취가 있을 때라야 비로소 가능한 일일 텐데 신들이 알기로 굉필은······.”

    쯧쯧.

    임금의 혀차는 소리에 유순은 움찔 몸을 떨었다.

    “충신을 여럿 낳은 국사(國士)가 아니냐. 이리 아둔해서야 정승의 감투를 어찌 쓰겠는고?”

    “구, 국사··· 말이옵니까?”

    “경들은 홍건의사(紅巾義士)들의 일화를 듣지 못 하였는가?”

    “드, 듣긴 했사옵니다.”

    그런데도 짚히는 게 전혀 없다니 한심할 정도다.

    “홍건의사들 중에 요인이었던 부응교 이행, 최수성, 교리 정붕, 박사 김안국, 공서린, 왕자사부 이장곤. 이 여섯 사람이 바로 김굉필의 문인 아니더냐?”

    아······.

    유순을 비롯한 중신들은 감탄 비슷한 탄성을 터뜨렸다.

    “난적들이 활개를 치는 와중에도 의를 떨쳐 선비의 씩씩한 기상과 절개를 이 6인이 보여주었는데, 내 그 스승을 어찌 유배지에 두랴? 한 스승 밑에서 육충(六忠)이 난 것은 고금의 역사에도 드문 일이 아닌가?”

    데구르르-.

    중신들의 눈알이 다시금 굴러다녔다.

    그리고.

    “전하의 말씀대로 한 스승 밑에서 육충이 난 것은 고금에도 없는 일이옵나이다. 전하께서 뜻한 바가 있다면 마땅히 굉필을 복권하고 어울리는 자리를 주어 위무하소서.”

    눈빛 교환과 함께 결론이 도출되자 우의정 박숭질(朴崇質)이 말했다.

    “굉필이 비록 간신 이극균이 생전에 천거한 몸이긴 했다만 정배 되기 전에 사헌부 감찰과 형조의 좌랑으로 요직을 맡아 일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한 바 있으니 그 예를 잇지 않을 수 없겠다. 마침 대역죄인 송질이 대죄를 저질러 그 자리가 공석이 됐으니 형조의 장관으로 삼음이 어떠한가?”

    밭 갈던 무지렁이도 절충장군이 되는 시대가 됐는데 귀양 간 죄인이 판서가 못 되겠는가.

    “전하의 뜻대로 하소서.”

    “아, 그리고.”

    “···”

    융은 사홍을 흘겼다.

    “김굉필과 함께 정배 되었던 임희재(임사홍의 아들) 역시 복권시켜야겠다.”

    “하, 하오나 희재는 역적 구수영의 처와······.”

    “그리 따지면 과인부터 남간(의금부 남쪽에 있던 감옥)에 들어가야겠다.”

    “드, 듣기 망측하옵니다.”

    “망측할 말을 안 하게 하면 될 것 아닌가?”

    “···”

    “희재는 복권시킬 것이니 당상들이 의논하여 마땅한 관직을 생각해서 품의(글로 아룀)하라.”

    ***

    그날 오후.

    동대문 교외.

    평상시엔 한적할 동대문 교외는 수만 인파로 복닥거렸다.

    거열 당하는 죄인을 보기도 하늘의 별 따기인데, 거열 당하는 죄인이 십수명이 넘는데다 심지어 고사에나 등장하는 능지형의 죄인이 수 명이었다.

    거기에, 임금이 직접 참관 한다고 하니 이런 구경 거리는 백수(99세의 노인)까지 산다 해도 보지 못할 진풍경이었다.

    때문에 대역죄인들을 능지에 처한다는 말이 갑작스럽게 포고됐음에도 처형장(?)인 동대문 교외는 장안과 성저십리, 그리고 경기도에서 모인 백성들로 복닥거리고 있었다.

    “형을 집행하라.”

    동대문 성루에 마련된 어좌에 착석한 융이 집행을 명령했다.

    그러자 거열형을 선고 받은 죄인들이 우르르 끌려나왔다.

    백성들은 이미 피투성이가 된 죄인들에 욕설과 손에 잡히는 건 뭐든 던져댔다.

    “전하! 사, 살려주시옵소서. 제발 살려주시옵소서!”

    박운동이었다.

    그의 한 마디에 이곳저곳에서 살려달란 소리가 터져나왔다.

    “죽을 줄 알고 역모에 가담한 것이 아니냐? 가증스럽도다. 박운동부터 형을 집행하라!”

    나장들은 박운동의 사지와 목을 흡사 쟁기처럼 소와 연결 된 나무 틀에 고정시켰다.

    준비가 되자 금부도사 안처직이 성루를 올려다봤다.

    끄덕.

    “시작하라!”

    목, 왼쪽 팔, 오른쪽 팔, 왼쪽 다리, 오른 쪽 다리.

    각각 다섯 방향에 나누어 선 나장들이 소를 끌고 나갔다.

    “으아악!”

    찌이이익!

    박운동의 비명과 함께 살점 짖이겨지는 소리가 동대문 일대에 울려퍼졌다.

    머잖아 그의 사지가 너덜너덜해졌다. 목은 반 쯤 찢어진 채 젖혀졌고, 핏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힘이 계속되자 곧 왼쪽 팔부터 찢겨져 나갔다.

    곧 박운동의 사지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형은 계속해서 집행됐다.

    홍경주, 민효증, 송질, 박한필, 신계종, 민자방, 이활, 최한홍, 윤형로··· 차례, 차례 거열형이 집행되었다.

    동대문 일대가 피가 내를 이루었다.

    진풍경을 구경 나온 일부 담이 약한 백성들은 토악질까지 해댈 정도였다.

    하지만 여기서 끝은 아니었다.

    거열형을 선고 받은 죄인들에 대한 거열이 끝나자, 이어서 능지형을 선고 받은 죄인들이 끌려 나왔다.

    고정된 나무 막대에 그들을 묶은 나장들이 물러나자, 이들의 살점을, 하나 하나 도려낼 백정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 능지형을 집행할 백정들에게 전한다. 지금 비록 능지형을 집행하려 해도, 이를 할 수 있는 이가 없으니 임시적으로 너희에게 이 일을 맡겼으니, 너희가 비록 사람의 가죽과 살점을 도려내는 일에는 익숙지 않더라도 죄인들에게 최소 500회의 포를 뜨는 자에겐 마땅히 백미 50석을 하사할 것이요, 1000회의 포를 뜨는 자에겐 100석을 하사할 것이다. 유념하고 헤아려서 죄인들을 최대한 고통스럽게 하라.”

    “예!”

    “그전에, 죄인 유순정은 할 말이 없느냐?”

    “전하. 차라리 목을 쳐주시옵소서.”

    “그럴 순 없지. 그래도 네 처자는 걱정마라. 너처럼 죄 지은 모든 역적들의 처와 딸년들은 공신들에게 노리개로 보낼 것이요, 딸년 중에 출가한 년이 있다면 이혼시켜서라도 노리개로 보낼 것이다. 아들 놈들은 장성했다면 모두 참할 것이니 이 어찌 성은이 아니냐? 형을 집행하라!”

    곧 개국 이래 최초로 능지처참이 시작되었다.

    유순정을 비롯한 죄인들은 장장 두시진 동안 산 채로 포가 떠졌고, 숨이 끊긴 사람들의 시신은 곧 거열형 당한 시체들과 함께 소금에 절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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