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90화>
태명은 이신배로 정했다.
***
스물 네 살에 애 아버지라니······.
‘아, 스물 다섯이네.’
진성대군으로 살았던 지난 1년의 기간까지 합한다면 정확히 25.4살 정도는 되겠다.
그래도 이른 감이 있다.
내가 전생에서 이현호로 25살까지는(?) 안 살아봐서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요새 남성의 평균 결혼 연령이 33.2살이라는 것이다.
네가 어떻게 아냐고?
내 주특기가 웹서핑이었다. 웹서핑을 하다 보면 요새 말로 TMI(Too Much information)를 접하기 마련이다.
통계에선 평균 결혼 연령이 33.2살이라고 했었다. 대한민국 남성의 평균 결혼 연령이 33.2살이니 아빠가 되는 나이는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는다.
그런데 애 아빠란다.
그 날 한 번.
그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번이었다.
술김이라고 하면 여울 씨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정말 술김에 딱 한 번(?) 있었던 일이었다.
그런데 덜컥 애가 들어선다고?
‘이 정도면 거의 신궁인데.’
아,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니지.
기분이 뭐랄까. 싱숭생숭하다.
여울 씨에게는 고맙다고 말하고 허둥지둥 내 방으로 돌아왔지만, 자고로 난 아이라면 질색팔색을 했다.
물론 이번엔 내 아이니 경우가 다르지만, 아이라면 질색을 했던 내가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결정적으로.
‘아빠 될 준비 같은 건 전혀 안 됐는데······.’
스물 다섯.
이전 세대의 어른들은 그 나이면 장가 가고도 남을 나이네 어쩌네 말씀하신다.
그래, 맞는 말씀이시다.
이건 16세기에 살고 있는 내가 보장한다.
여긴 빠르면 서른 살에 할아버지가 되기도 하거든.
근데 그건 여기 기준이고, 21세기에서 스물 다섯이면 완전 애다, 애.
이것 역시 21세기에서 스물 네 살까지 살아본 내가 보장한다.
뭐든 상대적이겠지만 스물 다섯이래봤자, 이제 갓 군대 갔다온 복학생이다.
복학이 꼬이면 이제 3학년이고 칼같이 계산해서 칼같이 복학해도 이제 4학년인 수준이다.
금수저가 아닌 이상, 슬슬 취업 걱정에 온갖 스터디란 스터디는 다 들어가고, 자격증 공부와 도서관에서 밤샘 공부를 해도 모자를 때인 것이다.
슬슬 좌절도 맛 보는 시기고 가끔은 인턴 교육도 나가서 사회의 쓴맛을 느껴보는 나이기도 하다.
겉만 어른이지, 아직 세상 물정도 제대로 모르는 나이가 바로 스물 다섯이랄까.
그런 세상 물정도 모르는 나이에 애아빠가 된단다.
계획적(?)으로 벌인 일이라면 싱숭생숭할 것도 없겠지만 일발백중(?)으로 일어난 일이니 영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뱃속에 있는 애가 싫다는 게 아니라··· 뭐랄까.
어, 그래.
왜 그런 책도 있잖나.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야》라는 책.
아빠가 처음이라서 당혹스러운 것이다. 좋은 애 아빠가 될 자신도 없고, 또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겠······.
‘잠깐만.’
문득 든 생각인데 좋은 아빠의 기준이 뭘까?
아들, 딸과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아빠?
아들, 딸의 부탁은 뭐든 들어주는 자식 바보?
아들, 딸에게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아빠?
‘뭐가 됐든 금수저잖아.’
그래.
여기서 난 21세기로 치면 금수저가 아니라 다이아 수저다.
앞으로 태어날 아이는 다이아 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는 셈이다.
금전적으론 부족함 없이 키울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난 남는 게 시간이다.
아마, 21세기에서는 적당히 취직하고 적당히 장가가고 적당한 신혼집 구해서 애를 낳았어도, 일에 치여서 여가 시간이라는 걸 활용할 틈이 없었을 것이다.
막말로 요새 평생 직장이 어딨어?
직장에 들어가서도 자기계발하면서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는 시댄데.
그런 환경에서 애랑 놀아줄 시간은, 현실적으로 부족하다.
근데 여기선?
진짜 남는 게 시간이다.
내가 오죽 할 게 없었으면 전생에서 진절머리가 다 났던 공부에 맛을 들렸을까?
뭐, 거기 공부랑 여기 공부는 기본적으로 좀 많이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21세기에서 미디어가 만든 ‘좋은 남편’, ‘좋은 아빠’의 기준이 되기도 하는 워라밸(wokr-life balance)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wokr는 뺄까.’
그래, 양심적으로 work는 빼자.
솔직히 여기선 하는 일도 없이 빈둥거리니까.
좌우지간.
시간이 남아 돌기 때문에 현실적인 벽에 부딪혀, 가족과 벽이 생기는 일은 최소한 여기선 없다.
‘이렇게 보면 굳이 싱숭생숭할 것도 없는데?’
내가 싱숭생숭했던 건 좋은 아빠가 될 준비가 안 돼서였지, 딱히 아이를 마다한 건 아니다.
물론 경제적인 형편과 충분한 여가 시간이, 좋은 아빠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순 없겠지만 이 정도면 일단 최소한 나쁜 아빠는 안 되지 않을까?
아들이든 딸이든 잘 놀아줄 자신도 있고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싱숭생숭했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안심도 된다.
그리고 안심이 되니 뭔가 기분이 오묘했다.
‘애 아빠라······.’
슬그머니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나 조증은 아니겠지?
***
딸일까 아들일까 설레서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
물론 딸이든 아들이든 잘 놀아줄 자신이 있었지만 딸이면 무슨 놀이하고 놀아주고, 아들이면 무슨 놀이하면서 놀아줄까라는 생각과, 아들이면 태명을 뭘로 짓고 딸이면 태명을 뭘로 지을까란 생각에 잠을 설쳤다.
결국 쪽잠을 잔 나는 방방거리는 마음을 주체 할 수 없어서, 또 근질거리는 입을 참을 수가 없어 일어나자마자 입궐을 했다.
그 날 형님이 날 안방에 던져놓지 않았다면 일발백중(?) 될 일도 없었을 테니 오작교 역할을 한 형님께 가장 먼저 이 소식을 전해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으스스한데요?”
“아직 역모에 관한 일이 수습되지 않았다 보니 어수선합니다.”
날 안내하는 내관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그런 감이 없잖아 있다.
어제 얼핏 들어보니 친국도 열렸다니까, 뭐······.
“어제 친국은 어떻게 됐습니까?”
친국을 연다는 말은 어제 이미 들었고, 당상관 이상의 모든 관리는 친국에 참가하라는 령도 떨어졌었다.
어지간한 종친들도 건강상 탈이 있는 게 아니면 모조리 참석을 할 정도였지만 나는 참가하지 못 했다.
형님이 나에게, ‘너는 굳이 올 필요가 없다.’라고 하셨는데 내 생각에는 일종의 배려 같았다.
사실 무조건 참석하라고 해도 갈 생각은 없었지만.
좌우지간, 어제 있었다는 친국의 여파가 아니라면 궐안 분위기가 설명이 안 된다.
궐의 분위기는 내관이 잘 알 테니 막간을 이용해서 던진 질문이었다.
“사실대로 고했다가 전하께 꾸지람을 듣는 건 아닌지 모르겠사옵니다.”
“어차피 곧 소문도 파다하게 퍼질 텐데요.”
아닌 게 아니라 지금이 묘시(오전5~7시)다. 어슴푸레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으니, 완전히 해가 뜬다면 굳이 내관에게 듣지 않아도 어제 있었던 친국에 관한 소문이 일파만파 퍼져나갈 것이다.
“그러긴 하겠군요.”
“그래서 어땠는데요?”
“재상들 모두 벌벌 떨면서 퇴궐했습지요.”
“처벌 받은 사람들은요?”
“백여명이 조금 못 되지만 전하께서 금부에 역적 무리에 침묵한 자들 역시 발본색원하라 명하셨을 테니, 비록 지금은 백여명이래도 곧 수백이 아니 되겠습니까?”
나는 가볍게 침음했다.
사실 역모를 수습한다는 건, 역적을 처벌한다는 말과 동의어다.
예견은 한 일이지만 막상 때가 닥치니 마음이 무겁다.
그러는 사이 강녕전에 도착했다.
“전하, 진성대군이 알현을 청하옵니다.”
“들라하라.”
드르륵-
문차비가 문을 열어주자 미음을 들고 있는 형님이 보인다.
“식사 하고 계셨습니까?”
“가볍게 미음 좀 들고 있었느니라. 그나저나, 어제는 그리 황망하게 가더니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어인 일이실꼬?”
나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거렸다.
어제 황망하게 간 건 사실이다. 대강 궐을 수습한 것 같아서 허둥지둥 집으로 가버렸거든.
“앉거라.”
형님이 권한 자리에 앉자, 형님이 아침은 먹었냐고 여쭤보신다.
나도 가볍게 먹고 왔기에 사양을 하고 우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팔석 씨에 관한 화두도 있었고 역적들에 대한 화두도 있었으며, 박원종에 관한 화두도 있었고, 가볍게나마 어제 친국에 관한 화두도 있었다.
그러다 자연스레 자식이라는 화두로 넘어갔다.
“형님은 처음 자식 안았을 때 기분이 어떠셨습니까?”
“자식? 음···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만 기뻤지.”
“얼마나요?”
“얼마나? 그 크기를 어찌 가늠이나 할 수 있겠더냐. 어좌를 내려놓고 촌부로 살아도 좋을 만큼 기뻤었다. 한데 갑자기 그건 어찌 묻느냐?”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순간 고민 됐지만 내가 무슨 여자한테 프로포즈 하는 것도 아니고, 분위기 잡을 까닭도 없다고 판단됐다.
“곧 아빠가 될 것 같아서요.”
“뭐라? 부부인이 회임을 했단 말이냐?”
끄덕.
“허. 경사로다. 경사야!”
형님은 나보다 더 기쁜지 한참을 웃어 제끼셨다.
아무리 형제지간이라도 일단 본인의 일이 아닌데도 남의 일에 이렇게 기뻐해주는 사람이 있을 수 있나 싶어 고마운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저기, 형님. 그래서 말인데요.”
“하하. 태명은 정했더냐?”
“태명요? 태명은 아직 상의는 안 해봤는데 저는 이신배로 고민 중이예요.”
“아들이면 얼추 어울리는 태명이다만···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구나. 그래 어떤 의미인 것이냐?”
사실 무슨 거창한 의미는 없다.
전생의 성 씨도 이 씨였지만 지금의 성 씨도 이 씨다.
그런 의미에서 내 성을 따서 이(李), 그리고 여울 씨의 성을 따서 신(愼), 그리고 베이비의 베.
한마디로 이역과 신여울의 아기.
그런데 여기는 베이비란 말이 있을 턱이 없으니 끼워 맞추기로 모실 배(陪)자를 써서 이신배··· 라고 어젯밤에 정했었다.
“이 씨와 신 씨의 아기란 의미에서 이신배라··· 나쁘지 않구나.”
“저기, 형님. 그래서 말인데요.”
“응?”
“오늘 역적들 중에 몇 명은 부대시(때를 기다리지 않고 벌함)로 벌하신다면서요?”
순간 함박 미소 가득하던 형님의 인상이 굳는다.
“누구에게 들었더냐?”
“뭐, 오면서 들으니까 다들 그 소리 뿐이더라구요.”
“그래. 숨겨서 무얼 하겠는고. 네 말이 맞다. 이번에 죄가 극악한 죄인 유순정을 필두로 신윤무, 장일신, 김종계, 윤귀수 등에게는 부대시로 능지를 명했다.”
능지라면 능지처참 같고.
“그리고 박운동, 홍경주, 민효증, 송질, 박한필, 신계종 민자방, 이활, 최한홍, 윤형로, 마찬가지로 이 놈들에겐 거열을 명했지.”
거열형은 사지를 찢어 발긴다는 처형이다.
책에서 봤었다.
어떻게 보면 인권을 무시할 법한 처벌이지만, 누차 말했다시피 시대에 맞는 가치관은 따로 있다. 그리고 이 잔인한 처벌도 시대에 맞는 처벌들이다.
내가 왈가왈부할 게 못 된다.
다만 내가 굳이 이 말을 꺼낸 건, 능지처참형과 거열형을 선고(?) 받은 사람들 때문이 아니다.
이 사람들은 21세기 기준에선 몰라도, 지금은 천인공노의 대상이니까.
문제는······.
“그럼 그 처자식들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아직 고민 해보진 않았다만 전례에 따른다면 처와 출가한 딸년들은 이혼시켜서 관비로 보내거나, 장성한 아들놈들은 그 목을 베어야겠지.”
“음······.”
“왜, 내키지 않는 것이냐?”
“아뇨, 내키지 않다기 보다는··· 뭔가 좀 그래서······.”
위에 언급한 사람들이 천인공노할 대상이고, 이 시대 기준에서는 연좌제가 당연시 되다 보니 저런 처벌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한 번, 두 번 피를 묻히다 보면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폭군이 되지 않을까 하는, 뭐랄까.
걱정이라면 걱정이고 기우에 그칠 일이라면 기우에 그칠 생각이 든달까.
“엉뚱하구나.”
“그 사람들은 살려주실 순 없겠죠?”
“네 여린 마음과 따뜻한 마음은 알겠지만 내 그들을 연좌시키지 않는다 할지라도 중신들이 마다할 것이다.”
“그럼요, 형님.”
“응?”
“아까 오면서 들어보니까, 역적들한테 침묵한 사람들도 발본색원하라고 명하셨다던데요.”
“그랬지.”
“그 사람들은 어떻게 벌하시려구요?”
“죄질에 따라 유배를 보내거나 참하겠지.”
“음.”
“왜, 이것도 내키지 않은 것이냐?”
“아뇨. 내키지 않다기 보다는··· 형님도 알다시피 그런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닐 거잖아요?”
“적어도 수백은 될 테지.”
“그럼 별충위와도 알게 모르게 인척 관계에 있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오히려 별충위가 형님께 반감만 갖진 않을까 싶어서요.”
“별충위가?”
“네. 형님 입장에서는 침묵한 사람들한테 화도 나고, 또 당장이라도 벌하고 싶겠지만 침묵한 사람들을 모두 벌줘야 한다면 팔도에 남아 있을 사람이 어딨겠어요. 그리고 역적 수괴 박원종이 도망갔는데 이렇게 벌을 주면 혹시라도 박원종 편에 붙는 사람들이 생기진 않을까 싶기도 하구요.”
형님이 잠시 고민하는 빛을 보이신다.
이럴땐 약간의 감정호소지.
“그리고 곧 형님 조카도 나오는데 괜히 피 보는 것도 께름칙하구요. 조금만 수위를 낮추시면 사람들이 다 망극해 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든달까요.”
감정호소에도 불구하고 형님은 고민하는 빛을 보이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