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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89화 (89/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89화>

    선비란 무엇인가

    ***

    “그······.”

    “저기······.”

    영화에서 보면 가끔 감독이, 남주와 여주의 어색한 상황을 간접적으로 연출하기 위해서 동시다발적으로 말문을 여는 경우가 많은데 영화로 볼 땐 ‘뭐 저래.’ 하고 넘어갔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니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집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집안 식구들 모두가 버선발로 뛰쳐 나왔다.

    집안 식구들은 괜찮냐는 내 질문에 덕산이는 다친 사람은 없고 그저 역적들이 발호한 시점에, 이 역적 놈들이 도적으로 가장해 재화를 훔쳐갔다고만 말했다.

    아무렴 어떤가.

    사람만 안 다치면 그만이지.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식구들과 해후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데 부인 여울씨가 울먹이면서 나오셨다.

    그러고는 지난 날 겪었던 고초를 엉엉 울면서 모두 토해냈는데 조금 진정이 되자 아랫것들(?) 보는 앞에서 통곡했다는 게 창피했는지 후다닥 안채로 들어가버렸다.

    멀뚱멀뚱 서있긴 뭐해서 나도 모르게 안채로 따라 들어왔고, 그 이후는 보다시피······.

    “먼저 말씀하셔요.”

    “아니, 먼저 말씀하세요.”

    서로에게 발언권을 양보하는 어색한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궐에는 안 가보셔도 되십니까?”

    “아, 뭐··· 전하께는 이미 말씀드리고 와서 괜찮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방 안에는 다시 적막이 감돌았다.

    어색함을 풀지도 못 한 채 출정을 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어색함은 좀 풀고 출정을 할 걸 그랬다.

    “근데 고초가 심하긴 했나 봐요. 엉엉 울 정도신 거 보면······.”

    할 말이 없어 말을 막 던지게 된다.

    “무섭고 긴장됐는데 돌아오셨다는 말에 저도 모르게··· 못 볼 꼴을 보여드렸으니 송구하기 짝이 없습니다.”

    “내외 사이에 송구는 무슨요. 근데 하실 말씀 있지 않으셨습니까?”

    “아!”

    갑자기 여울 씨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지금 같은 때에 말씀드리는 것이 도리상 맞지 않다는 건 알지만······.”

    “알지만?”

    “아버님께서 지아비께 속히 말씀 아뢰라 하신데다 질동 할아범도 지금이 아니면 말할 기회가 없어질 테니 돌아오시는 대로 말씀 드리라고 했으니··· 저도 고민하다가, 그래서 이렇게··· 그, 갑자기 말씀 드리면 당황하실 것 같긴 하지만······.”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이렇게 횡설수설하시나 모르겠다.

    게다가 얼굴까지 벌게진 채로 말이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말하기 어려우시면 굳이 안 하셔도 되는데······.”

    “아닙니다, 말씀 드릴 겁니다.”

    뭔가 결연하고 단호한 대답에 어리둥절한 것도 잠시.

    여울 씨가 입을 오물거린다.

    하지만 앞전의 결연한 모습과는 상반되게 목소리가 하도 작아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진 들리지 않았다.

    “뭐라구요? 잘 안 들려서 그런데 좀 크게 말해줄래요?”

    “회······.”

    “회 먹고 싶다구요?”

    “아니, 그게 아니라······.”

    “괜찮으니까, 편하게 말씀하세요.”

    여울 씨가 심호흡을 몇 차례했다.

    그래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지 눈을 감은 채 애꿎은 입술만 잘근거렸다.

    ‘빨갛네.’

    드릴 말이 있다는 말은 없고, 입술만 잘근거리니 나도 모르게 자연스레 여울 씨의 입술에 시선이 갔는데, 틴트가 있을 리 만무한데도 입술이 참 빨갛다.

    자, 그보다.

    “그러니까, 제가 말입니다··· 이게, 어디서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모르겠지만?”

    “회······.”

    “회?”

    다시금 여울 씨가 심호흡을 하신다.

    그러고는 두 눈 질끈 감고 소리쳤다.

    “회임을 했습니다!”

    ***

    당초 근정전에서 약속됐던(?) 친국은 광화문과 홍례문 사이에 있는 공터로 변경됐다.

    의금부에서 추국을 명받고 죄인들을 추포했는데, 죄인들은 일단 역적들과 직계존속이거나 간단한 혐의만 있어도 끌려 왔기 때문에, 그 많은 죄인들을 근정전에서 심문하기에는 자리가 협소 할 수 밖에 없었다.

    광화문-홍례문 사이에 있는 공터.

    아직 사태가 수습되지 않았기 때문에 해체되지 않은 위사들은 창칼을 높이 빼든 채 외곽을 경계하고 있었고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금군들 역시 재소집 돼서 공터를 매의 눈으로 경계하고 있었다.

    당장 공터만 경계하는 위사와 금군만 이백이 넘고, 경복궁 외곽을 숙위하는 위사와 금군은 그 곱절은 되니,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 걱정은 안 해도 되었다.

    본의 아니게 친국을 참관하게 된 중신들이지만, 그 수는 오후 늦게 임금께 하례하던 때에 비하면 현저히 줄어들었다.

    일부 익숙한 얼굴들은 봉두난발을 한 채 백의차림으로 무릎 꿇려 있거나, 포승줄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한순간에 죄인이 된, 그리고 죄인이 된 중신들을 착잡하고 불편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중신들의 눈에 화톳불이 타닥- 튀어오르는 모습이 들어왔다.

    청동화로에서 튄 불똥이 누군가에겐 불길한 징조로, 또 누군가에겐 길한 징조로 받아 들여질 무렵.

    “주상 전하 납시오!”

    그 어느 때보다 걸쭉하고 시원한 상선의 가갈에 공터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부복했다.

    자리에 착석한 그는 한데 모인 중신들과 죄인들을 쓱 훑어보았다.

    형틀이 부족했는지, 아예 몇몇은 바닥에 무릎 꿇려지기만 했는데 대부분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역적들이 스스로 파륜(패륜)하여 나라 안팎이 혼란스러웠다. 정황을 보자면 이 대역죄인들은 하나같이 틈을 노리고 기다리다가, 마침내 북정군이 출정한 때에 군사를 일으켰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겠는가? 이는 더 이상 종묘(왕실)와 사직(나라)를 받들지 않겠다는 의미나 다름이 없다. 내 친히 그들을 벌해 국기(國基)를 다시 세우고자 함이니 내 친국 중에 판단이 흐려진다면 경들이 말리라.”

    공터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그 적막과 함께 융은 도열한 금부도사 안처직에게 눈길했다.

    안처직 역시 임사홍처럼 꼴이 말이 아니었는데, 역적들이 궐과 도성을 점령했을 당시 ‘당직청에 갇힌 폐군’을 받들고 전횡을 일삼았다는 명분으로 고초를 겪었었다.

    그의 차자가 이 과정에서 아비를 구하려다가, 역적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아 병석에 앓아 누웠다고 하니, 이 때문인진 몰라도 안처직은 역적들을 추국하는 일에 가장 적극직이었다.

    임금의 눈길을 받은 안처직은 한차례 읍(揖)을 하고는 두루마리 하나를 가져다 전했다.

    죄인들에겐 살생부에 가까운, 공초를 기술한 문서였다.

    미리 거둥하기 전에 약식으로 살펴본 바는 있었기에, 대부의 이름이 들어있어도 놀랍진 않았다.

    장부를 읽은 그는 착 가라앉은 눈으로 죄인들을 흘겼다.

    “죄인 유순정은 그 죄가 감히 하늘도 사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구나.”

    흠칫.

    이미 원한이 있는 안처직에게 공초 과정에서 두들겨 맞은 건진 몰라도, 얼굴이 탱탱 부은 유순정이 몸을 떨며 고개를 들었다.

    “죄인에게 묻는다. 이 공초가 모두 사실이렷다?”

    강요에 의해 작성한 진술은 아닌지 묻는 것이지만, 사실 형식적인 질문에 지나지 않았다.

    이미 유순정이 박원종, 성희안 등과 함께 역모의 주동자임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것이었다.

    “···사실이외다.”

    “이외다?”

    “임금은 하늘을 버리고 도리를 저버렸소이다. 왕이 보위에 오른 뒤로 재해가 끊이지 않고 작년에는 황해도와 강원도에 큰 기근이 들어 수백이 아사했소. 또한, 무오년(무오사화가 있던 해) 이후에는 한여름에도 우박이 내리는 일이 매해 있었고, 작년에도 기호(경기도)와 충청과 강원도에 우박이 내려 농민들이 크게 피해를 입었으니 이같은 이변이 조종조 이래 언제 있었겠소? 이는 제왕의 본업에 소홀했기 때문에 하늘이 내리는 벌인 것이외다. 이에 종묘와 사직을 구하기 위해 떨치고 일어난 것 뿐, 그대가 말한대로 종묘사직을 버린 적은 없소.”

    유순정의 당돌한 언행에 중신들은 숨을 죽였고 융은 기가 차다는 듯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는 실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네가 이제는 우박과 하늘을 운운하면서 궤변을 늘어놓는구나.”

    “변수가 아니었다면 그대는 지금쯤 강화나 어디 산간에 이배되었을 테니, 변수를 막지 못 함이 원통하나 이게 사실인 걸 어쩌겠소?”

    “궤변으로 파륜한 일을 정당화하지 말라. 너희는 결국 한낱 권세에 눈이 먼 것이 아니더냐? 권세에 눈이 멀어 거병했다고 말하기엔 인륜을 저버린 네놈도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니 결국 궤변으로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닌가. 네 차라리 이실직고라도 한다면, 살려라도 두겠다만 조금이라도 기인으로 보이기 위해 죽기 직전까지도 궤변을 늘어놓는 널 보니 도저히 살릴 마음이 없다. 여봐라.”

    “예, 전하!”

    “저놈의 죄는 완악하니 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놈의 종자가 글렀기 때문이니, 놈의 조상묘는 모두 파헤쳐 참시하고, 저놈은 죄가 극에 달해 때를 기다릴 수가 없으니 부대시(길일을 정하지 않고 즉시 처형)에 처하도록 하겠다. 내일 날이 밝는대로 한쪽 눈알과 한 쪽 귀를 파내, 조리돌림 시킨 연후에 정오 즈음에 능지(산 채로 포를 떠서 죽임)하겠다. 본래 우리나라의 풍속이 어질고 여러 임금들이 덕이 있어서 극악한 죄인일지라도 함부로 능지하진 않고 거열(사지를 찢어 죽임)하는 자비를 베풀었는데 이놈은 능지로 벌하지 않는다면 효수의 의미가 사라지니 만인이 보는 앞에서 능지를 해야만 한다. 이에 이견을 내놓는 자는 똑같이 벌하겠다. 끌고가라.”

    유순정이 끌려갔음에도 친국은 계속되었다.

    박원종처럼 미처 도망가지 못 한 신윤무, 장일신, 김종계, 윤귀수는 유순정처럼 능지형이 내려졌고, 이들보다는 죄질이 조금 더 나은 박운동, 홍경주, 민효증, 송질, 박한필 신계종(申繼宗), 민자방(閔子芳), 이활, 최한홍(崔漢洪), 윤형로(尹衡老) 등은 거열형이 내려졌다.

    참수 이상의 극형을 선고 받은 사람들은 생각 보다 적었지만, 참수형은 그 수만 60명이 훌쩍 넘었다.

    하지만 중신들을 살 떨리게 만드는 친국은 이제 시작이었다.

    나장들이 선고를 받은(?) 죄인들을 모두 끌고 나가자, 공터에는 중신들만 남게 되었다.

    “영상.”

    융은 그의 눈치만 살피는 중신들 중에서도 영의정 유순을 불렀다.

    유순은 흠칫 몸을 떨며 읍을 했다.

    “하문하시옵소서.”

    “내가 오늘 죄인들을 벌한 일이 후세에 알려지면 후세는 나를 어찌 평하겠소?”

    “마땅한 일을 하셨으니 감히 후인들이 어찌 평하겠사옵니까. 이는 천만번 지당한 일이옵고 윤당한 일이었사옵니다. 전하께서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셨으니 실로 사민들의 홍복이 아닐 수 없나이다.”

    피식.

    “영상의 말에 모두가 동감하는가?”

    좌중을 둘러보며 묻자, 겁에 질린 중신들이 일제히 외쳤다.

    “천만 윤당한 일이옵나이다.”

    “영상께 하나만 물읍시다.”

    “하, 하문하시옵소서.”

    “경은 선비란 무엇이라 생각하시오?”

    “명분과 의리로 늠름한 풍도를 보이고 기개와 절개를 굽히지 아니하며, 또한······.”

    “아니. 성현들이 말하는 선비를 물은 것이 아니외다. 경의 의견을 물어본 것이오.”

    “시, 신의 의견 말이옵니까?”

    “그래. 경은 선비란 무엇이라 생각하시오? 가감없이, 경이 본래 가진 생각을 말해보시오.”

    어리둥절해 하던 유순이 곧 입을 열었다.

    “배운 지식을 실천으로 옮기고 또한 배운 것을 뭇 사람에게 베풀며, 교언영색(남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아첨함)하지 않음이 몸에 배었고 박기후인(본인에게 박하고 남에겐 관대함)한 기질이 있으며, 또한 청빈하고 검약스러우나 인근에 기근이 들면 이를 아파하고 구휼할 줄 알고 스스로 갈고 닦을 줄 아는 이가 바로 선비라 생각하옵니다.”

    “극기복례(욕심을 누르고 예의범절을 따름)한 사람이야 말로 선비란 뜻이로군.”

    “그러하옵니다.”

    “하나만 더 묻겠소.”

    “하문하소서.”

    “그러면 극기복례와 천인합일(자연과 인간이 조화하는 선비로서는 이상의 경지)에 이르지 못 한 선비는, 선비라 불릴 수가 없는 것이오?”

    “극기복례하고 천인합일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면 선비가 아니라 위군자지만, 비록 두 경지에 이르지 못 했다 하더라도 의지가 충만하다면 어찌 선비라 불리지 않겠사옵니까.”

    “그러면 말이오.”

    “예.”

    “극기복례하고 천인합일하고자 하는 의지는 있지만 난리통에 침묵한 선비들은 선비요 역적이요?”

    꿀꺽.

    “어인 말씀이시온지······.”

    “경은 극기복례하고 천인합일하고자 하는 의지만 충만하다면 능히 선비라 불려도 손색이 없다 했소. 하지만 우리가 보통 선비를 기릴 땐 기개와 충절을 우선시해서 기리게 되는데, 난리통에 침묵한 선비들은 기개와 충절을 저버린 것이 아니오. 이들은 역적이요, 선비요?”

    “그, 그것이······.”

    “이게 어렵소?”

    마른 침을 꼴깍거리는 건 유순에 국한 된 문제가 아니었다.

    모두가 이어질 융의 말에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입이 열렸다.

    “그들이야 말로 역적 중의 역적이다. 금부는 들어라!”

    “···”

    “방금 끌려간 죄인들만이 죄인이 아니다. 역적들을 방관하고 또한 난리에 침묵한 자들도 죄인이다. 이에 명하노니 역적에 아첨한 자. 역적의 조정에 기웃거린 자. 역적들의 발호에도 침묵한 자. 역적들의 언행을 비판하지 않은 자. 이들 또한 모두 벌할 것이니 빠짐없이 발본색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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