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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88화 (88/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88화>

    금석리 사는 절충장군

    ***

    아직 도성의 상황이 완전히 수습된 건 아니라서 별충위장으로서 할 일이 태산 같았지만, 집안 걱정 때문에 일이 손에 들어오질 않았다.

    이기적이래도 어쩔 수 없다.

    말이 나와서 말이지, 쿠데타였다.

    역적들은 원래 역사대로 내가 아니라 제안대군을 추대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역적들에게 추대된 제안대군의 왕위를 위협하는 것은 바로 내가 된다.

    이건 굳이 역알못이 아니라 여덟살 코흘리개도 알 만한 사실이다.

    게다가 내 생물학적인 친모는 대비전에 계시니 내 가족들을 볼모로 잡을 수 밖에 없다.

    이미 입성하면서 백성들의 진술을 통해 내 집 주변으로는 사람들이 얼씬도 못 하게 군사들이 통제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던지라, 궐의 상황이 얼추 수습이 되자마자 나는 형님께 양해를 구한 뒤, 집으로 뛰어갔다.

    역적 잔당들이 어디로 숨어들었을지 모른다며, 형님께서는 위사 마흔 명을 붙여주셨다.

    그렇게 위사들과 함께 집에 도착했다.

    집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을씨년스러웠나 싶은 것도 잠시.

    저 멀리 집이 보이자 나는 나도 모르게 인상이 굳었다.

    우리 집과 바로 이웃한 집이 두 채가 있는데, 하나는 열칸짜리 기와집으로 일대에선 흔히 ‘김 선달댁’으로 통용됐고, 또 하나는 열다섯칸 기와집으로, 흔히 ‘박 거상집’으로 통용이 됐는데 이 두 집이 전소된 것이 눈에 보인 것이었다.

    비록 김 선달댁과 박 거상댁 사람들하고는 별 교류가 없어서 이웃의 정이고 뭐고 느낄 것도 없었다만, 불과 한 달 전만해도 생기 넘치던 두 집이 전소된 모습에 불안감만 증폭 되는 기분이다.

    담장에는 기와 파편이 널부러져 있었고 멀쩡하던 문은 박살이 나있었다.

    위사들에게 기다리라 말한 나는 말에서 내린 채 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참 이 시간이면 분주해야 할 노복들의 기척이 들려오지 않는다.

    불안한 마음이 더 커지던 그때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감마님!”

    덕산이었다.

    ***

    “저, 전하··· 시, 신은 잘못이 없습니다. 그저 지부사(박원종)가, 지부사가 혀, 협박을 했었습니다. 싫다고 발악을 해도 강제로 용포를 입히고, 그래서는 신이 싫다고 했는데도 막 전하라고 부르고··· 전하 제발 신의 충심을 믿어주십시오.”

    며칠만에 다시 어좌에 앉았다.

    때로는 이 자리가 따분하기도 하고 고되기도 했으며 또한 부담이 됐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며칠만에 되찾은 어좌는 감개무량하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될 정도로 감격스러웠다.

    어좌의 팔걸이를 부드럽게 어루만진 융은 제안대군을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당숙.”

    “예. 저, 전하······.”

    “내 당숙의 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당숙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순간 제안대군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그, 그렇습니다, 전하. 신은 죄가 없습니다. 신은 그 날 집에서 잘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역적 놈들이 쳐들어와서는 강제로 끌고······.”

    “한데.”

    어좌 깊숙이 몸을 파묻은 융은 가볍게 손을 들었다.

    지금 변명을 털어놓지 않는다면, 당장 요참(허리를 베어 죽이던 형벌)이라도 될 것 같았는지 횡설수설하던 제안대군이 입을 꾹 다물었다.

    “···”

    “결국 이 자리에 자의로 오른 것은 당숙이 아닙니까?”

    “나, 나는··· 전하, 소신은······.”

    세간에서 모자라다는 평이 다분한 제안대군이다.

    혹자는 그게 임금의 노여움을 피하기 위한 고도의 연기라고도 하고, 또 혹자는 그게 제안대군의 본모습이라고 혀를 놀려댔다.

    물론 후자에 가까웠다.

    융은 지난 수십년간 제안대군을 곁에서 지켜봐왔다.

    원자시절부터 세자시절, 그리고 보위에 오른 지난 10년간 말이다.

    제안대군은 한결 같았다.

    만약 제안대군이 호사가들의 평처럼 고도의 연기를 펼치고 있는 것이라면, 오히려 죽여 마땅하다.

    사람이 속내를 감추는 건 범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말했다시피 제안대군의 본모습은, 지금 보여주는 모습 그대로다.

    종친으로서의 위엄이 전연 없고 경박하고 천박하다.

    무식하고 무지하며 선비의 도는 차라리 한낱 기생에게 바라는 것이 더 나을 정도로 닦을 생각이 없다.

    그래서 더 가엾다.

    박원종과 같은 역적 무리의 탐욕이 아니었더라면 평생을 본인의 무식과 무지를 인지하지도 못한 채 아름답게 생을 마감했을 것이 아닌가.

    더 이상 말을 섞는다면 괜히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 여전히 횡설수설하는 제안대군을 일별한 융은 위사에 눈짓했다.

    위사가 가볍게 목례하더니, 제안대군을 끌고 나갔다.

    “저, 전하! 살려주세요! 살려주십시오!”

    제안대군의 발악을 마지막으로 홀로 남은 편전.

    “전하 아뢸 말씀이 있사옵니다.”

    상선이었다.

    “들라.”

    “서대문에 파진했었던 박원종이 결국 경교(현 종로구에 있던 다리)를 건넜다고 하옵니다. 진성대군께 사람을 보내 별충위로 하여금 추격케 하라 전하올지요?”

    융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별충위가 도성에 주둔하는 것이 이롭다. 역적 무리를 모두 뿌리 뽑지 못 하지 않았더냐.”

    박원종이 경교를 넘었다는 건, 남하하고 있을 성희안과 또 다른 역적 무리와 합류하려는 생각임이 분명했지만 지금은 추격대를 보내기 보다, 사태를 수습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박원종과 다른 역적들을 토벌하는 것은 삼남의 관찰사들에게 보낸 선전관들이, 하삼도의 관찰사들과 함께 상경할 때 해도 늦지 않은 일이었다.

    “알겠사옵니다. 하옵고······.”

    상선이 쭈뼛거리자,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 챈 건지 융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얼마나 됐는가?”

    “벌써 반시진이옵니다.”

    콧방귀 뀐 융이 말했다.

    “그럼 반시진 더 기다리라고 전하라. 반시진 뒤에 거둥하겠다.”

    “그리 전하겠나이다.”

    상선이 물러가자 융은 팔걸이에 턱을 괸 채 역적들의 처분을 고민했다.

    아니, 이 고민에는 역적들에 대한 처분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방관자들에 대한 처분도 함께였다.

    그렇게 반시진이 흐르자 융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적지는 근정전 뜰이었다.

    외곽은 불상사를 대비해, 위사들이 꽉꽉 채우고 있었고 그 중심으로는 패초를 받고 입궐한 중신들이 벌써 한시진(두시간)이 넘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완연한 봄볕에 일부 중신들은 땀을 뻘뻘 흘리거나 지친 모습이 역력했지만, 그 누구도 품석(품계에 따라 서는 돌)을 벗어나는 이는 없었다.

    머잖아 그가 근정전 섬돌 위에 마련된 자리에 착석하자, 중신들이 일제히 읍을 했다.

    “전하께서 다시금 신들을 호령하게 되었으니 신들은 참으로 그 호령을 받듦에 있어······.”

    입 바른 소리에 융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가만히 자리에 앉은 융은 꿀먹은 벙어리가 된 중신들을 하나, 하나 눈에 담았다.

    중신들의 피마르는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융이 입을 연 건 한참이 흘러서였다.

    “팔석과 그 아내 덕금이를 데려와라.”

    명을 받든 위사들이 잠시 진성의 저택에 머물고 있던 팔석과 덕금이를 데려왔다.

    어리둥절한 팔석은 의관도 정제하지 못 한 채 입궐했는데, 어리둥절함을 넘어 황망한 상황은 그 이후에 벌어졌다.

    “공신을 대하는 경들의 태도가 매우 불경하다. 불과 며칠 전에는 천세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더니 과연 알 만하다.”

    흠칫한 중신들이 일제히 팔석에 고개를 조아렸다.

    화들짝 놀란 팔석이 주눅 든 채로 중신들의 사이를 가로지르자 융이 손짓했다.

    “섬돌 위로 오르라.”

    그렇게 말한 융은 준비된 자리를 권했다.

    팔석과 덕금은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쭈뼛거리며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저녁은?”

    “아, 아직입니다요.”

    “수라를 들여라.”

    수라가 오기 전까지 융은 수십, 수백이 넘는 중신들은 제쳐둔 채 오직 팔석, 덕금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눴다.

    방금 전, 살얼음 진동하는 모습은 어디갔는지 입가엔 미소까지 그렁거릴 정도였다.

    “그래? 이제 보니 진성이 공처가였구나. 후사 걱정은 아니 해도 되겠어.”

    안 그래도 궐의 상황이 마무리되자마자 저택으로 돌아가겠다는 진성이 의아했는데, 팔석의 말로는 그간 역적들에게 연금돼있던 부인과 식구들이 걱정돼서 였다고 한다.

    이만하면 후사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아 흐뭇하다.

    드넓은 근정전에서, 수십이 넘는 병풍을 세워둔 채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기도 잠시.

    수라가 들었다.

    세 사람이 수라를 들 동안에도 중신들은 망부석마냥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지루한 기다림은 세 사람이 수라를 다 든 뒤에 끝이 났다.

    “경들은 들어라.”

    “···”

    “진성대군이 난리통에 임금을 구한 공신이라면, 팔석은 명실상부 난리통에 임금을 호종한 공신이다. 이를 치하하지 않는다면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질 것이며, 후세에 의문을 갖는 이들이 있을 테니 내 팔석을 정삼품 절충장군(折衝將軍)에 봉하고, 아내 덕금을 숙부인(淑夫人)에 봉하겠다. 하니, 만일 방금 전처럼 팔석과 덕금에 예를 갖추지 않은 자가 있다는 말이 들려온다면, 그 죄는 구족에게 물을 것이다. 이를 장안의 사민 모두가 알고 따르라.”

    충격적인 소리였다.

    무품무직인 상민을 정삼품의 서반직에 봉한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몇 자급을 뛰어넘는 승진은 있어도, 무품무직의 상민을 단번에 당상의 반열에 들게 한 일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소리는 팔석과 덕금에 티끌만한 잘못이라도 저지른다면 대역죄인으로 간주해 처벌하겠다는 소리였다.

    상식 밖의 하명이었지만 이견을 제시 할 순 없었다.

    말을 잘못 꺼냈다간 임금에게 역정을 듣는 게 아니라 역적 소리를 듣게 될 판이었다.

    “···”

    “오늘 초경(오후8~10시)이 치면 역적들을 이 근정전에서 친히 친국할 것이니 경들 모두 참석하라.”

    그렇게 말한 융은 다과나 들자며 팔석과 덕금을 데리고 사라져버렸다.

    임금이 사라진 근정전에는 중신들의 탄식 섞인 한숨소리만 맴돌았다.

    ***

    “전하의 의중은 어떠시옵니까?”

    편전.

    넓은 편전에는 그 흔한 사관도 입석하지 않고 오직 융과 사홍 두 사람만 자리하고 있었다.

    사홍의 질문에 융은 침음했다.

    “예판.”

    “예.”

    “그대는 나의 고초에 비하면, 그대가 겪은 고초는 아무 것도 아니라 하였지만 고초에 어찌 고하가 있겠는가? 그대가 겪은 고초도 분명 만만찮았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 심했을 테지.”

    융은 민망한 듯 고개를 조아리는 사홍의 손등을 흘겼다.

    인두로 지진 흔적이 역력했다.

    “그래, 의중을 물었는가? 내 이번에 치욕을 참고 견디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사람들은 그대를 간신이라 불렀다. 입조한 뒤에도 여전히 간신이 혀를 놀려 임금을 기만하여 판서의 자리에 올랐다는 말이 많았지.”

    “···”

    “세간에서 호사가들의 인구(人口)에 오르는 그대는 분명 간신이다. 그리고 이번 난리통에도 간신으로 몰려 그런 고초를 당한 것이 아닌가?”

    융이 사홍의 손등을 바라보자, 사홍은 민망한 듯 소매로 손등을 가렸다.

    “고신으로 손등의 살갖이 다 벗겨나갔으니 그대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어떤 고초를 당했는지 안다. 이처럼 간신은 고초를 당했다. 하지만 그대를 간신이라 부른 자들은 어땠는가? 침묵했다.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집안에 틀어박혀 경전만 외고 있었다, 그저 경전만 말이다.”

    “···”

    “나의 부덕함도 있지마는 결국 이 나라에 참선비는 얼마 없다는 방증이다. 군자가 되고자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출세를 하려 공부하니 어찌 이 나라에 선비가 남았겠는가?”

    “재상들의 불찰이지, 전하의 부덕이 아니옵니다.”

    “잘잘못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그대의 질문에 답을 하겠다.”

    “···”

    “나는, 나라를 바꿀 것이고 사람을 바꿀 것이다. 그게 나의 의중이다.”

    사홍이 아리송한 대답을 곱씹을 무렵.

    “전하. 지금 막 초경이 쳤사옵니다.”

    상선의 부름에 융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을 바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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