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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86화 (86/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86화>

    응, 무혈입성 해버리기

    ***

    원종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불씨들이 말하는 지옥도가 따로 없었다.

    피는 내를 이루고 뜯겨진 살점들은, 여기가 의를 북돋는(敦義) 문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널부러져 있었다.

    이건 지옥도였다.

    비록 불씨를 숭상하진 않지만 이게 지옥도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뿌우우우-!

    얼이 나간 원종의 정신을 일깨운 것은 적진에서 들려오는 나팔 소리였다.

    살펴보니 적들이 학익진을 펼친 채로 진군하고 있었다.

    원종은 기겁했다.

    이미 선봉대의 진형은 붕괴됐고 전투 능력은 상실한 지 오래였다.

    그러한 때에 적들이 들이닥친다면?

    “어, 어서 후퇴 나팔을 불······.”

    아찔한 마음에 선봉대를 뒤로 물리고자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학익진의 중위(가운데 진영)의 대열이 갑자기 좌우로 열리더니 그곳에서 마군들이 뛰쳐나온 것이었다.

    이미 두 다리가 멀쩡한 선봉대 일부는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고 있긴 했지만, 마군의 속도를 감안한다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요행으로 보였다.

    신윤무의 얼굴도 보였다.

    일다경 전까지만 해도 호언장담을 해대던 신윤무는 사색에 질린 표정으로 수하들까지 내팽개 친 채 홀로 도망치고 있었다.

    “지부사! 소, 속히 돌아갑시다! 적들의 기세가 만만찮소!”

    하지만 신윤무 보다 더한 추태를 보이는 것은 장일신이었다.

    인상을 구긴 원종은 장일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돌아가긴 어디로 돌아간단 말이냐!”

    “아니, 지부사!”

    “첨정께서 못 볼 꼴을 보시고 실성하신 듯 하니 속히 남대문 안으로 뫼셔라.”

    창졸간에 실성한 사람이 됐지만 이 지옥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일신은 순순히 원종이 붙여준 부관을 따라 진중을 벗어났다.

    “대감. 첨정께서 적들의 화력에 놀라서 추태를 보이셨지만 틀린 말씀을 하신 건 아니옵니다. 환군을 양찰(헤아려 살핌)해주십시오.”

    “폐군이 저기 있는데 환군은 무슨 환군이란 말이냐!”

    “하오나······.”

    “지금 환군하면? 적들의 기세는 파죽지세처럼 타오를 것이다. 조만간 성내에는 폐군과 진성대군이 돌아왔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질 것이고, 그리되면 불순분자들은 옳다구나 들고 일어날 텐데 그리되면 우리가 설 자리는 없음을 네 정녕 모른단 말이냐!”

    박영문도 그걸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이미 예봉은 꺾였다. 적들의 위력에 아군은 주춤거렸다.

    사기는 곧 군의 생명이다.

    사기가 꺾인 군은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저들을 맞서 대치한다면 싸울 순 있겠지만 피해는 커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도성 내에 반란이 일어난다면 그걸 막을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하오나 지금 무리하게 군을 운영했다가는 패퇴가 아니라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옵니다!”

    원종이 패용한 환도를 꺼내들었다.

    “지금 우리가 패배라도 했단 말이냐! 지금 여기서 폐군을 사로 잡지 못 하면 후일을 어찌 도모 할 수 있······.”

    “장군!”

    도성에 있어야 할 김종계였다.

    으르렁거리며 박영문을 일별한 원종이 칼을 거둔 채 말했다.

    “무슨 일인가?”

    “바, 반란이옵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반란이라니! 알아 듣게 설명을 해보게!”

    김종계의 설명이 이어졌다.

    육조거리를 중심으로 모인 붉은 띠를 착용한 정체불명의 괴인들이 난리를 일으켰고, 광화문으로 짓쳐 들어갔으며, 그 소식을 듣고선 도성의 백성들 일부도 반란에 가담해 광화문의 군사들과 대치 중이라는 것이 김종계가 전한 설명의 전부였다.

    “순라(순찰)를 게을리 하지 말라 그리 이르지 않았던가!”

    “며, 면목 없사옵니다. 한데 어찌 하올지······.”

    원종은 적들을 바라봤다.

    선봉대에 도달한 마군들은 이미 선봉대를 ‘학살’하고 있었다.

    그들이 내지르는 비명이, 살려달란 구걸이 예까지 들려온다.

    ‘군을 쪼갤 순 없다.’

    군을 쪼갤 순 없었다. 여기서 반란을 막고자 군을 쪼갠다면 각개격파를 당하고 말 것이었다.

    “반란의 정도는 얼마나 되는가?”

    “지금은 기백 정도이온데 얼마나 더 가담을 할 지는 모르겠사옵니다.”

    “동대문과 남대문의 수문군들을 여든명 가량 차출해서 반란을 진압하게. 그리고 금부 나장들과 포졸, 순라꾼들까지 모조리 대동해서 백성들이 둘 이상 모이는 일이 없도록 하고. 필요하다면 참해도 좋네.”

    “대감께오선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저기 폐군이 있네. 지금 승기를 잡을 수 있는 일은 폐군을 사로 잡는 일 밖엔 없어.”

    “성 장군님을 기다리시는 것은······.”

    “그럴 시간이 없음을 정녕 모르는가!”

    물론 김종계가 이른대로 희안을 기다리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 될 터였다.

    하지만 폐군이 이대로 패주해서 하삼도로 간다면 그것만큼 큰 일은 없었다.

    하삼도에선 폐군을 중심으로 근왕병들이 속속 모일 터였고, 이 반정은 장기전이 된다. 장기전에 돌입하면 명분을 상실한 반정군에서 이탈하는 자들이 하나, 둘 속출 할 것이었다.

    “자네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성 내의 반란을 막게. 목숨으로라도 막아야 하네!”

    “알겠사옵니다.”

    김종계가 물러나자 원종은 황급히 진형을 변경시켰다.

    마군에 대응할 원진(둥근 진형)이 바로 그것이었다.

    임시방편으로 창을 꽃아박고 수레나 새문밖 마을 사람들의 세간까지 끌어다 적들의 진입로에 배치했다.

    만반의 준비라면 만반의 준비인 전투 태세가 아슬아슬하게 끝이 났다.

    준비가 끝이 나고 전방을 바라보니 이미 선봉대는 전멸한 뒤였다.

    끙끙 신음 하는 자들이 일부 있는 것 같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

    한데 뭔가 이상했다.

    기세 좋게 내달려서 선봉대를 궤멸시킨 별충위의 마군들이 말머리를 돌리는 게 아닌가?

    이미 기세가 한껏 달아 올랐으니, 그 기세를 이용해 밀어붙여도 시원찮은데 회군이라니?

    혹시 서대문의 박운동과 윤귀수가 선전을 한 때문이 아닌가 싶었지만, 그건 아닌 듯 싶었다.

    이미 서대문 군은 본대의 진입이 불가해지면서 각개격파 당한 지 오래였다.

    ‘설마 비격진천뢰가······.’

    아닐 것이다.

    그게 남아 있었다면 진작에 썼을 터였다.

    고개를 털어 불길한 예감을 떨쳐낸 원종이 칼을 높이 빼들고 소리쳤다.

    “역적 진성을 사로 잡는 자에겐 후하게 포상할 것이다!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라!”

    ***

    “적장이 미친놈일까요?”

    적의 선발대를 궤멸시킨 마군들을 불러낸 나는 적들의 진형 변화에 혀를 내둘렀다.

    “박원종이 무관이긴 하지만 실전은 처음이다 보니 당황한 듯 하옵니다.”

    “아무리 당황해도 그렇지, 저건 바보 아닌가?”

    어이없어서 실소가 터져나올 지경이었다.

    적들은 원진을 형성했다.

    철저히 수비적인 진형이다.

    “저기에 비격진천뢰 한 두 발만 떨어져도 난리 날 거 뻔히 알 텐데··· 허, 참.”

    “박원종이도 머리가 아주 없는 인물은 아니니 비격진천뢰가 소진 됐음을 아는 듯 하옵니다.”

    뭐, 하긴.

    비격진천뢰를 선봉대에 썼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갖고 있는 비격진천뢰는 소량이었다.

    대량으로 갖고 있었다면 적의 선봉대가 아니라, 선봉대를 끌어들인 뒤 본대가 진입했을 때 썼을 것이다.

    억수 씨의 말처럼 박원종도 머저리는 아니니 비격진천뢰가 소진 됐다는 걸 어떤 느낌적인 느낌으로 알긴 할 테지.

    진정한 문제는······.

    “아니, 비격진천뢰가 소진 됐다는 건 느낌적인 느낌으로다가 아는 양반이 왜 서대문 군이 전멸했다는 건 몰라?”

    나는 박원종을 조소했다.

    미친놈이 따로 없었다.

    “마군들의 기세가 워낙 파죽지세 같았던지라 박원종으로서도 도리가 없었을 겝니다.”

    음.

    하긴 박원종 입장에선 서대문이 뚫렸다는 걸 인지하고 있더라도 선봉대를 궤멸시킨 마군에 주력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비를 안 한 상태에서 그들이 짓쳐 든다면 대열이 무너질 테니까.

    그래도 미친놈은 미친놈이다.

    차라리 내가 마군들을 불러들인 상태에서 공세적으로 나왔다면 미친놈 소린 안 했을 텐데.

    절레절레.

    고개를 휘휘 저은 나는 억수 씨를 바라봤다.

    “잔당들은 어때요?”

    “모조리 제압한 상태이옵니다.”

    “박운동은요?”

    “끌고올까요?”

    끄덕.

    잠시 후.

    억수 씨가 피투성이가 된 박운동이를 데려왔다.

    성문이 굳게 닫혀 있을 때만 하더라도 역적 운운하더니, 지금은 비에 쫄딱 젖은 개새끼 마냥 덜덜 떨고 있다.

    “어이, 박운동 씨.”

    “···사, 살려주시옵소서, 대감.”

    “나보고 역적이라매? 역적한테 왜 살려달라고 하나?”

    “그, 그때는 소인이 미처··· 아! 소, 소인이 실성을 했었던 것이옵니다. 박원종의 모략에 속아 넘어가··· 그, 그래서 대군을 미처 알아보지 못 했사옵고 그 결과 감히 대군께 결례를 범했으니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

    영화 《해바라기》의 명대사가 떠오른다.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게 세상 이치라고 했었나?

    뭐, 아무튼.

    “난 당신 못 살려줘.”

    “대감, 대감. 제발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당신 역적이잖아? 역적은 원래 팔족인가 구족을 멸한다며?”

    아리송한 기억에 억수 씨가 정답을 내놓는다.

    “구족이옵니다.”

    “아, 구족이예요?”

    “예.”

    “봐, 구족을 멸한다는데 내가 어떻게 살려줄 수 있겠냐구.”

    이건 내 권한 밖의 일이다.

    뭐, 형님께 말씀은 드릴 수 있겠지만 내가 굳이 왜?

    “이놈들은 어디 도망 못 가게 잘 감시하고 계세요.”

    “물론이옵니다.”

    “그리고, 형님은······.”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형님도 제 말하니 오신다.

    “지, 진성아! 괜찮으냐?”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보다시피요.”

    “박원종이는?”

    “저쪽에 있어요.”

    “항복을 한 것이냐?”

    “아뇨. 저 사람 좀 이상한 게 안 쳐들어오더라구요. 쳐들어올 줄 알았는데······.”

    형님은 너머의 박원종 진영을 살펴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진?”

    “모르겠어요. 박원종이는 저러고 있으라 하고, 우린 들어가시죠.”

    이미 서대문 군은 1중대가 잘 조져놨다(?)

    박원종의 본대가 진입하는 순간, 우리 별충위를 두 개로 쪼개려는 심산 같았는데 알다시피 박원종의 본대는 진입은커녕 선봉대가 전멸한 지라, 병신처럼 홀로 튀어나온 서대문 군은 제대로 쌈 싸 먹히고 말았다.

    박운동도 그 과정에서 생포 할 수 있었던 것이고.

    이제 경복궁으로 튀어나가는 일만 남았다.

    “마군들하고 화포장, 그리고 부상자들부터 차례차례 진입하라고 하세요.”

    “예!”

    나는 1~3중대에게 일자진을 세웠다.

    괜히 우리가 서대문에 무혈입성 한다는 걸 박원종한테 보여 줄 필요는 없잖아?

    그렇게 화포장들이 화포까지 갖고서 무사히 서대문에 들어가니, 뒤늦게 박원종 진영에서도 눈치를 챈 것인지 진형을 변경하고 달려나왔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그땐 3중대까지 무사히 성에 들어온 뒤였거든.

    “2중대와 3중대는 각각 숭레문하고 흥인지문을 지키십쇼.”

    무사히 성에 들어왔지만 할 일은 남았다.

    숭레문과 흥인지문에 군사를 보내는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도성 밖에 박원종의 군사들이 남아 있긴 했지만 이렇다 할 공성 장비도 없을 테니, 각각 1개 중대 씩만 남겨둬도 별 탈은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서대문에는 1중대의 몇 개 소대와 수령들이 거느리고 온 관군들을 남겨두고, 나는 별충위의 마군, 그리고 관군 일부, 도합 240명의 군사를 대동한 채 형님과 함께 경복궁으로 향했다.

    ***

    울상이 된 제안대군은 익선관을 팽개쳤다.

    “내가 이래서 곤룡포는 안 입겠다고 한 것이다! 너희들 때문에 엄한 나까지 죽게 생겼으니 이를 어쩐단 말이냐!”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박원종이 휘하의 장졸들과 진성대군을 막으러 갔으니 조만간 승전보를 갖고 돌아올 것이옵니다.”

    반정의 일등공신(?) 유순정이 울상이 되다 못 해 울먹이기 까지 하는 제안대군을 진정시키려 안간힘을 써댔다.

    하지만 유순정의 위로는 이미 임금을 상징하는 익선관까지 팽개친 제안대군의 귀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싫다! 나는 서인(서민)이 되더라도 이 자리에는 한시라도 더 못 있겠다!”

    “전하께서는 심지를 굳건히 하셔야만 하옵니다. 소신들이 전하를 결사의 각오로 보위할 것이니 역적 놈들은 전하의 털끝하나 건드리지 못 할 것이옵니다. 고정 하시옵소서.”

    제안대군이 어좌에서 후다닥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넙쭉 바닥에 엎드렸다.

    황망한 표정의 유순정이 일으켜세우려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바닥에 엎드린 채로 머리를 쿵쿵 찍어댔다.

    “참판. 나를 좀 보내주시오. 나는 군왕이 돼서는 아니 되는 사람이외다. 내 이리 간청하겠소. 제발 좀··· 난 살고 싶단 말이오.”

    “이미 전하께서는 보위에 오르셨사옵고, 보위에 오르셨으니 누군들 전하께 해를 끼칠 순 없사옵니다. 신들을 믿으시옵소서.”

    입바른 소리만 해대는 유순정에 머리를 찍어대던 제안대군은 벌떡 일어나 편전 밖을 가리켰다.

    “밖에서 소란이 한참인데 너희들이 날 어찌 지킨다고 개소리를 늘어놓느냐! 눈이 있으면 내 꼴을 보아라! 이게 어디 왕이란 말이냐?!”

    한숨을 내쉰 유순정이 지랄병(?) 도진 제안대군을 다시 진정시키려 입을 오물거리던 그때였다.

    “우리 당숙께서 아주 실성을 하진 않은 것 같아 이 종질은 마음이 놓입니다.”

    정체불명의 음성과 함께 편전 문이 우지끈 박살났다.

    그리고 박살 난 문 밖엔 갑주를 입은 진성대군과 당직청에 구금됐다던 폐군이 우두커니 서있었다.

    “역적들을 모조리 추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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