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85화 (85/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85화>

    비격진천뢰, 악마를 보았다.

    ***

    박원종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철컥거리는 비갑(팔과 손등 보호대)이 영 신경을 거슬렀지만 쓰라린 통증도 답답한 마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따.

    청색 허리띠를 꽉 졸라매며 마음을 다진 그가 손을 내뻗자 눈치백단 부관이 자연스럽게 투구를 가져다 줬다.

    “진성대군의 진영도 분주한 듯 하오이다.”

    함께 거사에 동참한 데 모자라 출정도 같이한 전(前) 의주판관 신윤무(辛允武)의 말에 원종은 투구 처마를 만지작거리면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육안으로 진성대군의 진영이 확인이 됐을 때부터, 이미 적진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삼척동자가 와서 보더라도 복의군을 대비하고 있음이 확실했다.

    “어찌 하시겠소. 대군께 투항을 권고 하리까?”

    복의군을 정돈하고 있던 신윤무는 폐군이 진성대군에 무사히 몸을 의탁했다는 말을 듣지 못 했다. 그러니 저런 순수한 말이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이미 신윤무와는 밀약을 맹세한 사이기도 하니 감출 필요는 없었다.

    “폐군이 진성대군과 함께 있소.”

    “그 무슨······.”

    “대군께는 이미 박운동을 통해 수차례 투항을 권고했는데도 듣지 아니 하셨는데 이젠 폐군의 신병까지 확보하고 계시니 도리가 없소이다.”

    “하면 어쩌시려는 생각이시오? 대군의 털끝하나 잘못 건드렸다간 대비전이 노할 텐데······.”

    “교전 중에 생포하면 그만큼 다행스러운 일도 없소만, 대군이 설치다가 눈 먼 화살 맞고 요절한다면 그걸 어찌 막겠소? 다 대군의 업보지.”

    “참판(유순정)은 아시오?”

    “알면 노발대발 했을 노친네가 아니오.”

    동감하는지 신윤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진성대군을 생포하고 말고는 그 다음의 문제외다. 중요한 건 무엇보다 폐군의 신병이오. 판관에게 좌위의 일군 400을 주어 선봉을 맡기겠소이다. 뚫을 수 있으시겠소?”

    “물론. 별충위라 한들 오합지졸들 아니겠소. 다만 걱정 되는 것은 위사들의 신분인데······.”

    “그건 걱정 마시오. 줄을 잘못 타 개죽음을 당한 것인데 어찌하겠소? 피해를 줄이면 좋겠소만 그랬다간 우리가 절단 나게 생겼으니 손속에 사정을 두진 마시오. 오히려 그게 더 피해를 최소화시킬 수 있는 방편이 될 수도 있음이니.”

    원종은 답답한 마음이긴 했어도 패배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북정군이 출정하기 전에 별충위의 열병은 이미 봤었다.

    그리고 감탄도 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개인은 집단을 상대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별충위의 위사들이 암만 일당백이라 한들 이건 질 수 없는 싸움이었다.

    “이따 뵙겠소이다.”

    신윤무과 말허리를 걷어찼다.

    그가 먼저 앞장서 나아가자, 복의군 좌위의 400 군사들이 뒤따랐다.

    진군을 독려하는 북소리와 나팔소리가 서대문 일대에 장엄하게 퍼져나가자, 그게 신호라도 된 듯 굳게 닫혀 있던 서대문도 끼이익- 불쾌한 소리와 함께 활짝 열리기 시작했다.

    열린 성문 틈사이로는 윤귀수에게 준 소수의 금군들과 박운동이 맡고 있던 서대문 수문군들이 일제히 튀어나왔다.

    “학익진인가······.”

    늠름한 복의군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던 원종이 미간을 좁혔다.

    진성대군의 진영에 변화가 생긴 때문이었다.

    가만보니 진형을 갖추는 것 같았다. 익숙한 학익진이었다.

    형성된 학익진에 원종은 냉소했다.

    적들은 윤귀수가 맡은 서대문 군과 자신의 복의군 때문에라도 군사를 둘로 쪼갤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원진(둥근 진형)을 형성해야 했다.

    원진을 형성하고 그 주변에 거마창과 검거를 깔아 철통수비를 해야 함이 마땅하다 못 해 상식적인 진형인 것이다.

    그런데 학익진이라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생각보다 쉬울지도 모르겠소이다.”

    직무 태만으로 파직됐다가 이번 거사에 참가한 전 훈련원첨정(訓鍊院僉正) 장일신(張日新)이었다.

    그 역시, 진성대군 측의 진형에 어이가 없었던 탓이리라.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형조정랑 박영문(朴永文)이었다.

    “꿍꿍이는 무슨, 진성대군은 세간에서 어리석고 기행을 벌이는 일이 잦다는 평이 있는 인물일세. 병법에 어두운 게지.”

    “하지만 그 휘하에 있는 사람들이 병법에 어두운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당장 대군의 부관으로 참전한 김억수만 하더라도 10년 넘게 북방에서 굴렀사옵니다.”

    “뭐, 동귀어진의 심정인가 보지.”

    일리가 아주 없는 말도 아니었기에 박영문은 그 이상 토를 달진 않고 물러났다.

    “이보시오, 지부사.”

    곧 있을 별충위와 신윤무가 맡은 좌위의 접전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원종을 부른 것은 장일신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씀을 드린 다는 것이 민망하오만··· 그, 녹훈은 언제쯤···?”

    “어련히 기다리면 알아서 전하께서 챙겨주실 터인데 어찌 그리 채근을 하신단 말이오?”

    “아니, 생각해보시오. 인재(성희안의 호)가 아직까지 당도하지 않았소. 근데 막상 생각한다면 그들이 이번 거사에 한 일이 무에 있겠소? 경복궁의 담장을 넘은 것도 우리고, 지금 진성대군을 쫓아내고 폐군의 신병을 확보하는 것도 우리가 될 터인데 일이 다 끝나고 입성한 사람들이 감놔라 배놔라 하는 꼴이 일어나지 않겠소?”

    벌써부터 침을 질질 흘리면서 편가르기를 하려나 보다.

    마음 같아선 욕지거리라도 그 면전에 쏟아 붓고 싶지만, 장일신이 대동한 노복도 노복이거니와, 그가 거사에 참가시킨 중신들도 한 둘이 아니니 그럴 순 없었다.

    “걱정마시오. 폐군의 신병만 확보하면 전하께 주청을 드릴 터이니.”

    “하하. 지부사가 다 알아서 할 참이었는데 내 괜히 무안하구려.”

    무안하면 잠자코 전투나 지켜보자는 말을 하려던 그때.

    쾅!

    귓전을 울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원종이 고개를 돌렸다.

    “화포?”

    분명한 포성이었다.

    다만 포성은 한 두 번으로 그치진 않았다.

    쾅!

    콰콰쾅!

    한 번을 시작으로 연달아 포성이 울려퍼진 것이었다.

    적들에게 조심스레 진입하던 선봉장 신윤무가 예기치 못 한 포성에 당황했는지 말머리를 급히 당기는 모습이 육안에 확대돼서 비췄다.

    다만 무과에 뒷돈을 써서 급제 한 건 아니란 걸 증명이라도 하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장종들을 독려하는 모습이 이어서 눈에 들어왔다.

    “화포로 진형을 붕괴시키고 선봉대를 삼중으로 포위하려는 심산 같소.”

    입이 방정인 게 문제지만, 무관으로서는 제법 탁월하다는 평이 있는 장일신의 의견이었다.

    원종도 동감했다.

    “한데······.”

    원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에는 장일신의 말처럼 예기치 못 한 포격으로 선봉대를 당혹케 하고 삼중을 포위하려는 심산인 줄로만 알았다.

    그게 더 이치에 합당했고 말이다.

    문제가 있다면, 그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별충위가 꿈적도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반대로 신윤무의 좌위도 선뜻 진군을 못 하고 있었다.

    황급히 고개를 돌린 원종이 고수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둥! 둥! 둥!

    눈길을 받은 고수들이 북을 울리자, 예기치 못 한 공격에 허둥거리던 신윤무의 좌위가 서둘러 대열을 가다듬고 진군을 서둘렀다.

    아니, 서두르려는 그때였다.

    콰콰쾅!

    연쇄적으로 들려온 화약고 터지는 소리와 함께 선봉대가 우후죽순 쓰러지기 시작했다.

    ***

    둥! 둥! 둥!

    뿌우우우-!

    진군을 알리는 북소리와 나팔소리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새삼스럽게 긴장되서는 아니고, 이래서 군악대(?)가 있나 싶다.

    적진에서 들리는 소리임에도 뭔가 전의가 불타오른다.

    “대감!”

    이거, 어째 나보다 억수 씨가 더 긴장한 모습이다.

    적들의 진군에 서둘러 명을 내려달라는 듯 억수 씨가 채근한다.

    아마 말없이 적진을 바라보는 내가 패닉 상태에 빠진 건 아닌가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했고 차분했다.

    “아직입니다, 기다리세요.”

    “···예.”

    꿀꺽.

    누군가 침 삼키는 소리는 억만배는 더 크게 울렸고,

    철컥-.

    누군가 몸을 움직이며 일어난 마찰음 소리는 포성처럼 귓전을 때렸으며,

    휘이잉-.

    작게 일어난 바람은 허리케인처럼 느껴졌다.

    무의미할 것만 시간이 흐르면서 적들은 우리에게 점점 더 가까워졌다.

    “600보입니다!”

    “···”

    “550보!”

    화포장 갑동 씨가 감으로 적들의 거리를 재는 사이.

    억수 씨는 초조한 모습으로 날 바라봤다.

    “대감, 이제는······.”

    “더 끌어들여야 됩니다.”

    “500보!”

    “2중대와 3중대는 학익진을 펼치십쇼.”

    명에 따라 2중대와 3중대가 빠르게 움직였다.

    “450보!”

    그 와중에도 적들의 거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군관들이 쓴 투구의 술(털실) 흩날리는 모습이 어렴풋하게나마 보일 정도였다.

    “400보!”

    “대감.”

    “350보!”

    “지금입니다, 발사하세요!”

    내 명을 기다렸다는 듯 억수 씨가 화포장들에게 말했다.

    쾅!

    콰콰쾅!

    귓전을 때리는 포성과 함께 비격진천뢰가 적진으로 날아갔다.

    흩먼지가 일었고, 그 흩먼지 사이로 기세등등하게 진군하던 적들이 보였다.

    적들은 당혹함 때문인지 진군을 멈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선봉대를 이끌던 장수가 고래고래 소리를 치면서 휘하 장졸들을 독려하는 모습이 보이는가 싶더니, 선봉대가 다시금 나아가기 시작했다.

    아니, 나아가려고 할 때였다.

    콰콰콰쾅!

    비격진천뢰의 심지가 타들어가면서, 그 파편들이 터져나왔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는 모습에 토악질이 일고 정신이 절로 아득해졌지만, 여기서 멈출 순 없었다.

    “2중대와 3중대는 대오를 갖추고 진군하십시오!”

    “진군하라!”

    ***

    반정 무리가 거사에 성공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재상들의 집에 패초를 보내고 그들에게 거사의 당위성을 설명하면서 설득과 강요를 한 것이었다.

    그 꼬드김에 넘어간 재상이 기십명이 넘었지만 소극적으로나마 저항한 사람들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반정 무리가 보낸 패초에는 일절 응하지 않고 병이 도졌다고 핑계대면서 근신했다.

    일부는 노복들을 이끌고 반정 무리가 점령한 궐을 찾아가기도 했었는데 도성의 여론이 과격화 될 조짐을 보이자 반정 무리는, 또 다른 반정이 일어날까 두려워 해서 불순분자들을 구금시켰다.

    하지만 모두가 구금된 건 아니었다.

    모두가 구금됐다면 반정 세력의 거사는 하루천하로 끝났을 터였다.

    그들은 행동이 과격한 자. 언행에 신중함이 없는 자. 노복을 많이 거느린 자. 영향력이 있는 자.

    나름의 기준을 세워 구금을 시켰다.

    다행히 장곤은 이 기준에는 들어가지 않았었고, 그는 자택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소식에 탄식만 할 따름이었다.

    처음에는 도성 내에 반정 무리를 쫓아내자는 여론에 사민들이 들불처럼 일어날 줄 알았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실망한 것도 잠시.

    장곤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라의 녹을 받는 사람들 중 한 사람도 떨치고 일어나는 이가 없는데 과연 백성들인들 들고 일어나겠냐는 생각이었다.

    장곤은 그 이후 거사를 준비했다.

    복의군이 도성을 점령한 뒤로 순라(순찰)가 낮에도 돌아다니고 포졸들은 애먼 사람들까지 잡아댈 정도였지만, 그들의 눈을 피하는 게 아주 어려운 일도 아니었던지라 장곤은 교분이 두터운 벗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키기로 마음 먹었다.

    그 결과 장곤 본인을 포함해 홍문관 부응교 이행(李荇), 학생 최수성(崔壽城), 홍문관 교리 정붕(鄭鵬), 승문원 박사 김안국(金安國), 학생 공서린(孔瑞麟), 총 여섯 사람이 결의를 다졌다.

    이후 여섯 명은 틈틈이 사람들을 모았다.

    누군가 고변을 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그럴 기미가 안 보인다며 묵살 된 적도 있었다.

    이렇게 모은 사람은 예순 여덟명이었다.

    개중에는 선비도 있었고 재상도 있었으며, 신진 관리도 있었고, 노비나 상민도 있었다.

    이들의 우두머리로 추대된 장곤은 거사를 점쳤고, 바로 오늘이 적기라 판단, 은밀히 지령을 내렸다.

    오늘 미시(오후 1시~3시)에 개개인이 순라도는 군사들을 피해 홍두건을 쓰고 육조거리에서 회합하자는 것이 지령의 골자였다.

    그렇게 회합할 시간이 다가오자 장곤은 홍두건과 부엌칼 따위의 무기를 챙겨 들고 약속 장소인 육조거리로 향했다.

    육조거리에 도착한 장곤은 가져온 홍두건을 질끈 동여맸다.

    그가 홍두건을 질끈 동여매자, 뜻을 함께 하기로 한 예순 일곱의 동지들도 일제히 홍두건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육조거리가 떠나가라 외쳤다.

    “도성의 백성들은 모두 들을지어다! 임금을 쫓아낸 무리가 지척에 있는데도 떨치고 일어나는 이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말이나 된단 말이냐! 노신들은 명줄이 다한 지금에도 하루라도 더 살고 싶다며 구차하게 가군(假君)을 받들고 있으니 개국 이래 이처럼 참람한 적이 없었다! 이에 우리라도 일어나고자 함이니 비록 오늘 우리는 피를 토하고 죽을지 몰라도 만대에 기억되리라, 또한 오늘 반정 무리를 추숭하며 목숨을 구걸하고 있는 자들 또한 만대에 기억되리라!”

    육조거리의 행인들과 관리들의 웅성거림을 뒤로한 채 장곤과 예순 일곱명의 사람들은 광화문으로 뛰어나갔다.

    조악한 무기 따위로 반정 세력이 점령한 광화문을 함락시킬 수 있으리란 생각은 애당초 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떨치고 일어나는 것은 오직, 모두가 대세에 순응하고 비겁하게 목숨을 연명하는 작금의 사태에 대해 작은 파장이라도 일게 하고자 함이요, 선비의 본분을 다하고자 하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 반정 세력을 쫓아내고자 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이들이 하나라도 생긴다면, 그것으로 족한 일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