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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84화 (84/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84화>

    중2병 가라사대, 죄책감은 내가 살아있어야 느낄 수 있는 거라구!

    ***

    “이여! 박운동 씨!”

    장장 일다경을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드디어 성곽 위로 익숙한(?) 박운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 전까지 죽이네 살리네 하던 내가 친근하게 손까지 흔들고 있으니 의아하기 짝이 없었는지 박운동은 미심쩍다는 표정이었다.

    “난 또 안 나오길래 도망간 줄 알았지. 거기 계셨네?”

    “···”

    “묵비권을 행사하시겠다? 묵비권 좋지. 그런데 운동 씨. 나 하나만 여쭤봅시다.”

    그렇게 말한 나는 음흉하게 웃고는 성곽 위에 고개를 빼곰이 내밀고 있는 수문군들을 훑어봤다.

    모두들 내가 또 무슨 개소리를 하나 궁금해하는 표정들이지만 천만에 말씀 만만의 콩떡.

    이번에 할 소리는 개소리가 아니다.

    “···”

    “거, 전하께서 당직청에 계시다고 했나?”

    “차라리 화끈하게 일군을 몰아 들이닥치지 그러시오. 물었던 걸 왜 또 물으시오?”

    “답이나 해보세요. 전하께서 당직청에 구금되셨다고?”

    박운동이 수문군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론. 그러니 대군도 속히 군을 물려 보위에 오르신 전하께 하례하고 용서를 구하시오. 전하께서는 자애가 깊은 분이니 필시 대군께 관용을 베풀 것이외다.”

    “개소리는 집어치우시고. 당직청에 언제부터 구금되셨는데?”

    빠직-.

    “거사 당일에 지부사께서 금구(궁궐의 도랑)를 통해 도망가는 폐군을 잡았다고 분명히 말씀 드렸을 텐데?”

    “금구를 통해 도망가는 전하를 사로 잡았다? 그래서 당직청에 구금 시켰고······.”

    짝짝-!

    “···?”

    “아주 대단한 시나리오네. 영화 찍어도 되겠어.”

    “내 일찍이 대군이 궤변을 늘어놓고 노복들에게 해괴망측한 짓을 일삼는 기행을 벌인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소만 쉰소리 하시걸랑 관두시오.”

    “아니, 잠깐. 어딜 가셔. 잠깐만 기다려 보시라니까?”

    성곽을 내려가려는 박운동을 붙잡고 고개를 돌렸다.

    내 눈짓을 받은 별충위의 위사들이 영기(일종의 군령기)와 사명기(진영의 대장을 상징하는 깃발)를 들고 나타났다.

    깃발은 이 두 개가 전부는 아니었다.

    이들의 한가운데에는 윤덕 씨가 사명기와 영기의 서너배는 됨직한 큰 깃발을 들고 나타났는데 윤덕 씨가 든 깃발이 바람에 펄럭일 때 마다 용이 승천하는 모습이었다.

    “저거 용기(임금이 거둥할 때 드는 깃발) 아닌가?”

    “어라?”

    용기.

    즉 임금이 행차할 때나 들릴 깃발이 사령기와 영기 사이에 우뚝 서서 바람에 펄럭거리니 서대문의 수문군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던 그때.

    “주상전하 납시오!”

    상선 영감의 묵은 때까지 벗겨버리는 것 같은 호쾌한 가갈이 이어졌다.

    그 가갈을 끝으로 갑주를 착용한 형님이 말을 타고 모습을 드러내셨다.

    서대문이 삽시간에 시끌벅쩍해졌다.

    구경 나온 백성들은 수군거리며 의견을 주고 받았고 수문군들 중에서 형님을 알아본 사람들은 사색에 질린 표정으로 부복을 해댔다.

    절반 가까이 되는 인원이 부복해버리자 운동 씨의 표정이 압권도, 그런 압권이 따로 없을 정도였다.

    “이놈 박운동아! 내 너를 긴히 쓰고자 판관 직에 제수하였거늘 어찌 역적의 기치에 서서 역적이 주는 수문장직을 가납했단 말이냐!”

    꿀꺽.

    “네 나를 못 알아보지는 않을 터. 어찌 말이 없더냐! 네 말대로 당직청에 있어야 할 내가 이 서대문에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더냐?”

    “그, 그것이······.”

    허둥거리는 박운동을 일별한 형님이 웅성거리는 수문군들을 눈에 담고 소리쳤다.

    “하늘이 임금을 내세우는 것은 대개 인륜을 펴고 나라의 기강을 세워 위로는 조종(조상)과 열성조의 덕을 기리고 아래로는 온백성을 안정시키기 위함이니라.”

    “···”

    “내 비록 덕이 없고 용렬하며 또한 시기심이 많아 군왕으로서 적격치 못 해 대간의 탄핵을 받는 일이 많았지만 명색이 천자의 고명을 받아 왕위에 오른지 벌써 10년이 되었음이니 그간 덕이 없어 실정을 한 적은 있어도 저들이 말하는 것처럼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거나 참소하는 간신의 말을 듣고 재상을 해한 적은 없느니라.”

    “···”

    “정녕 저들의 말처럼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고 무구한 인명만 골라 형살(刑殺)시켰다면 어찌 박원종이 호언장담한 것처럼 거사가 일어났는데도 이에 동조하는 이들이 없겠는가? 오히려 박원종이 무력과 그릇된 권위로 억압을 하고 있으니 어찌 종묘사직의 신령을 받들겠는가?”

    “···”

    “내 긴 말은 하지 않겠다. 박운동의 목을 치고 속히 성문을 열라. 그리한다면 내 너희의 죄는 묻지 않겠도다.”

    형님은 곧 말머리를 돌리셨다.

    의도한 것처럼 수문군들 사이에서는 미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그때였다.

    “적이다!”

    ***

    이래서는 안 됐다.

    원종이 생각한 거사는 이런 게 아니었다.

    칠흙 같은 어둠에 재빨리 동대문을 통과하고 궐을 포위한다.

    그러고는 경복궁의 담장을 넘어 폐군의 신병을 확보한다.

    대비의 교서를 반포하며 제안대군을 추대한다.

    혹시 일어날 불상사는 인재(성희안의 호)에게 맡기고 빠르게 서울의 민심을 수습하는 한 편, 전국에 포고하여 새 임금이 즉위한 사실을 알린다.

    폐군의 신병과 대비의 교서 반포, 그리고 민심을 수습하는 일을 제외하면 지금까지는 착착 들어맞았다.

    이미 심복을 자처한 김종계를 통해 도성에 무혈입성했고 곧 궐을 함락시켰다.

    비록 폐군의 신병과 대비의 교서는 받아내지 못 했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이미 독안에 든 쥐나 다름이 없는 폐군이었다.

    복의군을 시켜 일대를 샅샅이 수색하게 했으니 조만간 그 신병을 확보 할 수 있을 것이었고, 대비의 교서도 마찬가지였다.

    생각보다 반응이 없는 민심이 문제였지만, 이것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선비로서 신념을 지키는 자는 결국 소수에 불과하다.

    대개 선비라는 감투를 쓰고 있는 자들은 소인종자들에 다르지 않았다.

    그런 자들은 대세에 순응하기 마련이었다.

    계획에 차질이 생긴 건, 진성대군이 남하하면서 부터였다.

    인재가 보내온 전령을 통해 벽단에 있어야 할 진성대군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내부에서도 남하하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었고, 실제로 얼마 안 돼, 평안도 관찰사 채수가 ‘대군은 이미 남하했다.’라는 진술을 했다며 전령을 보내 알렸다.

    여기서부터 점점 불안이 싹트더니 종국에는 대군이 황해도와 경기도 일부의 수령들과 세를 합해 남진을 해버렸다.

    그리고 결국은 서대문에 파진.

    여기까지만 해도 원종은 불안하기는 할지언정 이미 대세는 기울지 않을 거란 어떤 확신이 있었다.

    그런 확신이 산산조각난 건, 윤귀수에 의해서였다.

    폐군이 진성대군의 진영에 들어갔다니······.

    이렇게 된다면 거사는 실패 할지도 몰랐다.

    ‘전하께서 던져주는 감투에 감읍하면서 여생을 편히 보내면 됐을 것을 진성이 결국······.’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이미 다 성공한 거사를 진성과 폐군 때문에 말아먹을 순 없었다.

    “출성을 준비하라.”

    “예?”

    “폐군이 당직청이 아니라 진성대군과 함께 있음이 한성부 전역에 알려진다면 동요하는 민심을 잠재울 길이 없다. 출성할 것이니 채비하라.”

    “예!”

    윤귀수가 군례를 올리며 물러나자, 원종은 김종계에게 말했다.

    “자네는 속히 입궐해 이 일에 가담하지 않은 재상들의 집에 패초를 보내도록 하고, 패초에 응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모조리 끌어내 금부에 가두게. 또, 만일에 수상한 거동을 보이는 자는 즉각 체포하고 경중에 따라 즉참하시게.”

    “그래도 괜찮겠사옵니까? 민심이 크게 이반할 것이옵니다.”

    “사안이 사안인데 가릴 게 어디있겠는가!”

    “···”

    “그리고 부부인 말인데.”

    “신수근의 따님 말씀이십니까?”

    “그럼 신수근의 따님을 말하지, 내 누굴 이름이겠는가? 답답하긴.”

    “하명하십시오.”

    “혹 소란을 틈타 도망할지도 모르니 군사들을 시켜 잘 감시하시게.”

    “대비전에서 가만 있지 않을 것이온데······.”

    “잔 말 말고 이르는 대로 하게!”

    “알겠사옵니다. 하오면 참판(유순정)께는 어찌 전하올까요?”

    음흉하게 웃는 그 낯짝이 떠오른 원종은 눈살을 찌푸렸다.

    “전하를 잘 보필하고 있으라고나 전하시게.”

    “알겠사옵니다.”

    잠시 후.

    “대감. 출성 채비를 마쳤사옵니다.”

    원종은 윤귀수를 따라 남대문으로 이동했다.

    숭례문에는 이미 복의군과 거사에 가담한 일부 금군과 갑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군사들의 도열한 모습을 흡족히 지켜본 원종은 윤귀수를 바라봤다.

    “내 이 군사들을 몰고 금방 서대문에 파진한 적도들을 칠 테니 자네는 서대문으로 가서 난리가 일어나거든 곧바로 성문을 열고 뛰쳐나오시게. 아, 창의문(북소문)으로 사람 하나를 내보내서 인재에게 도성의 상황도 전하고. 알겠는가?”

    “그리하겠사옵니다.”

    윤귀수가 서대문으로 뛰어가자, 그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원종은 곧 도열한 군사들을 몰고 남대문을 빠져나갔다.

    ***

    “적이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음성 하나에 진영이 술렁거렸다.

    소리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댔다.

    머잖아 남쪽에서 다소 산만한 모습으로 진군해오는 적들이 보였다.

    행렬의 선두에는 복의대장영기(復義大將令旗)라는 글자가 새겨진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전하를 보위하라!”

    억수 씨의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적의 기습에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복의대장영기라는 깃발을 보면 형님의 등장에 궁지에 몰렸다고 판단한 박원종이 직접 출성을 한 게 분명했다.

    명분 없는 반역을 일으켰지만, 박원종도 대가리를 폼으로 달고 있는 건 아닐 테니 필시 서대문의 수문군들에게도 따로 명을 내렸을 것이었다.

    서대문의 수문군들까지 튀어나온다면 양쪽에서 협공을 당하고 만다.

    얼핏 봐도 수적으로도 열세다.

    “뭣들 하느냐! 속히 마름쇠를 깔고 거마창(拒馬槍)과 검거(劍車)를 세우라!”

    갑작스러운 적의 등장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윤덕 씨였다.

    나이스한 판단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마름쇠나 거마창 같은 무기들은 대기병전이나 공성전에서나 쓰임이 있는 무기란 게 함정이었다.

    ‘저걸론 못 막는데······.’

    박원종이 이끌고 나온 군사는 모두 보병이었다. 비록 박원종과 일부 군관들이 말을 타고 있긴 했지만, 저 사람들이 직접 돌격은 하지 않을 것 아닌가?

    ‘어떡하지, 어떡하지.’

    우왕좌왕하는 꼴이 꼴불견이래도 할 수 없다.

    안 당해본 사람은 모른다.

    “저 역적 놈이 임금을 배반하더니 이제는 아예 대놓고 칼까지 겨누는구나!”

    당황한 나와는 다르게 형님은 화가 단단히 치미는지, 위사 한 명에게 활과 화살을 받아 박원종이 있는 곳으로 활시위를 당겼다.

    물론 거리가 거리인지라 활은 맥없이 고꾸라졌다.

    “대군마마! 명을 내려주십시오.”

    지난 가을과 겨울내 함께 훈련시켰던 별충위의 위사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에 참다 못 했는지 억수 씨가 뛰어와 말했다.

    “다, 다른 분들은요?”

    “별충위장은 대감이십니다!”

    맞다, 별충위장은 윤덕 씨나 백손 씨가 아니라 나다.

    침착하자, 침착······.

    심호흡을 몇 차례 하자 조금은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아까 전까진 혼란스럽게만 상황도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단 전하와 다른 분들은 모두 뒷쪽으로 피신시키십쇼. 그 다음··· 아, 그 다음은 전방에 있는 1중대는 서대문 적들을 대비해서 구진(口陣)을 형성하라 하시고, 2중대와 3중대는 일자진을 하고 있다가 적들이 3~400보 안에 들어오면 바로 5열 학익진을 형성해서 박원종이를 대비하라고 하세요.”

    구진은 소대니 중대니 하는 것처럼 지난 제식훈련 때, 편의상 내가 붙인 진형의 이름이었다.

    구(口)라는 글자처럼 사각 방진을 형성하는 것이었고, 학익진은 본래 병법에 있는 진형이었다.

    다들 한 번 씩은 들어봤을 그 학익진 맞다.

    다른 게 있다면 5열 학익진인데, 중앙에 군사를 적게 배치하는 대신 좌우 날개를 두텁게 배치시키고, 예비대에 팽배수(방패병)와 창병을 둬서 속된 말로 적들을 쌈싸먹는 진형이었다.

    “알겠사옵니다!”

    “아, 그리고 지금 당장 갑동 씨랑 다른 파진군(화포병)들 좀 불러다 줄래요?”

    비격진천뢰를 개발한 공을 세운 갑동 씨는 파진군으로서 나와 함께 북정군에 소속돼서 벽단에 머물렀었다.

    물론 남하 할 때도 같이 왔었고.

    “예!”

    잠시 후.

    억수 씨가 군례를 올리고 물러나자 진형에 변화가 생겼다.

    그리고 그 무렵, 갑동 씨가 도착했다.

    “불러 계시옵니까, 대감?”

    갑동 씨도 곧 있을 실전에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그의 긴장을 농담으로 완화시켜주고 싶었지만, 나도 심장이 벌렁벌렁,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아 미칠 지경이라 본론만 간단히했다.

    “갑동 씨. 지금 서대문에 배치한 화포 여기에 배치 시킬 수 있죠?”

    박원종이 이끄는 군대의 진군 속도를 가늠하던 갑동 씨가 곧 고개를 끄덕거린다.

    “예. 가능하옵니다.”

    “여기에 배치 시켜주시겠어요? 그리고 서대문에 쏘아올리기로 돼있던 비격진천뢰, 박원종이 군대에 쏘아 올려야 될 듯 한데 민가에 해가 갈까요?”

    여진족을 인명 피해 최소화하면서 무찌르자고 개발한 신무기(?)를 아군한테 쓰는 건 너무 하지 않냐고?

    당장 내가 죽게 생겼는데 그딴 게 어딨어?

    죄책감도 살고 나서 느낄 수 있는 건데.

    자, 좌우지간.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옵니다.”

    갑동 씨가 고개를 가로젓는 걸 보면 해가 가진 않는 것 같다.

    하긴 대인살상용이니 다들 집안으로 피신한 상태에서 애꿎은 사람들이 해 입을 가능성은 갑동 씨 말대로 희박할 것 같다.

    “그럼 바로 준비해주실래요?”

    “목곡은 어찌 하올까요?”

    목곡은 폭발 시간을 조절하는 장치였다.

    일종의 도화선 역할을 하는 것인데, C4처럼 정교한 폭탄은 아니다 보니 심지를 얼마나 감느냐에 따라 폭발 시간이 달라졌다.

    한마디로, 심지를 얼마나 감아야겠냐는 물음이었다.

    “5, 7, 10번 감는 걸로 하죠.”

    “예!”

    갑동 씨가 다른 파진군들과 함께 화포와 비격진천뢰를 가지러 간 사이.

    굳게 닫혀 있던 서대문이 열렸다.

    ‘개새끼들, 이렇게 뒷통수 칠 거 알았으면 교전 피한답시고 연설 늘어놓는 대신 비격진천뢰부터 쏘아 올리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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