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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83화 (83/365)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83화>

일등공신 팔석 씨

***

정신 없이 남하했었다.

군량도 거의 현지조달 식으로 해결했었는데, 혹시 몰라 비격진천뢰만은 챙겨오길 잘 한 것 같았다.

비록 비격진천뢰를 쏘아 올릴 화포는 가져오지 못 했지만 천행으로 경기감영에 화포 5문이 있었다.

화포가 있다는 윤덕 씨의 말에 냉큼 화포를 가져오라 지시한 나는 참담한 표정으로 서대문 방면을 바라보았다.

서대문에도 비상이 걸렸는데 수문군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들이 어수선한 느낌마저 줄 정도였다.

“착잡하신가 봅니다.”

한참 서대문을 바라보고 있는데 옆으로 그늘이 졌다.

억수 씨였다.

나는 억수 씨를 한 번 흘기고는 다시 서대문을 바라봤다.

“내전이니까요.”

“도리가 없사옵니다.”

“압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진 않았다.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따지고 보면 저 사람들이 뭔 죄가 있겠나. 있으면 반역 일으킨 웃대가리들이 죄지.

“다시 무기를 버리라 권고 하시겠사옵니까?”

착잡한 표정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억수 씨가 약한 소리를 한다.

하지만 그 약한 소리가 내심은 반가웠는지 나는 나도 모르게 반색을 했다.

“그래 줄래요?”

“어려운 일도 아닌 걸요.”

“어차피 관찰사께서 오시려면 아직 시간이 좀 남았으니 그럼 한 번만 더 해볼까요?”

“알겠사옵니다.”

무장을 해제한 억수 씨가 위사들 몇 명을 대동해서 서대문 앞으로 나아갔다.

갑작스런 억수 씨의 등장에 분주하게 성루 위를 뛰어다니던 수문군들이 하던 짓을 멈추고 억수 씨를 자못 멍청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북정군 부원수 합하의 말을 전하나니, 지금 너희가 무기를 버리고 성문을 연다면 자비를 베풀어 목숨만은 살려주시겠다고 하신다! 이는 우리의 세가 너희에 미치지 못 하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합하께서 자비를 베푸시고자 하는 마음이니 너희가 조금이라도 목숨을 아까이 여긴다면 속히 너희의 문지기 박운동이를 주살하고 기쁜 마음으로 성문을 열어라! 지금이 아니라면 너희가 구명할 길이 없으니 진실로 안타까워 이르는 것이다.”

억수 씨의 말에 성루 위에서는 욕설이 들려왔다.

수문장 박운동의 음성이 분명했다.

잠시 후.

억수 씨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진영으로 돌아왔다.

때마침 화포를 가지러 간 윤덕 씨도 돌아오셨다.

“모든 채비는 마쳤사옵니다.”

화포 배치까지 끝났는지 휘하에 들어온 수령들의 모두 날 바라보고 있었다.

장막을 나온 나는 투구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투구 끈을 질끈 동여맸다.

“예정대로 비격진천뢰를 쏘아 올리면 각 군현의 보군들이 선진입하겠습니다. 보군들이 선진입해서 성문을 연다면 곧바로 별충위의 마군들을 투입시키죠.”

“명을 따르겠사옵니다!”

수령들이 한껏 고조된 목소리로 대답을 하던 그때였다.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혹시 성안에 있는 역적들이 기습을 가할지 몰라 초병으로 보낸 기억이 있는 별충위의 위사였다.

***

“도대체 판부사와 참의는 언제쯤 도착하는 겁니까!”

“그래요, 약조와 다르지 않습니까? 지금 쯤이라면 도착을 했어야 맞는 겁니다.”

“혹 변절을 한 건 아니겠습니까?”

중구난방으로 떠들어 대는 사람들에 귀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이런 한심한 인사들을 데리고 거사를 계획했으니 후회가 막심할 정도였지만, 지금 이들이 이탈한다면 복의군은 당군이 안시성에서 세웠던 토성처럼 와르르 무너지고 말 것이었다.

“옵니다.”

“아니, 언제 온다는 것입니까?”

“그래요, 지부사. 어제부터 곧 온다, 온다 하지 않으셨소.”

“온다는 사람은 코빼기도 안 비추고 진성대군만 모습을 드러냈으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원종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셨는데 진성대군이 나타난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폐군을 정말 당직청에 가둔 것 맞소?”

“맞다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찌 그 면상을 한 번을 못 봤소이다. 게다가 복의군의 일부는 성밖으로 내보냈다고 들었는데 혹시 거사 당일에 폐군을 사로잡지 못 한 것 아니오?”

거사를 주도한 건 박원종이었다. 그리고 당초에 거사를 밀약한 건 성희안과 유순정 두 사람 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거사가 점점 구체화되면서 동대문 수문장 김종계와, 숭례문 수문장 박한필(朴寒筆), 경성판관 박운동, 북정군 종사관 윤귀수 등이 가담했고, 시간이 차차 흐르면서 북정군의 중위장 장정이 거사에 합류를 했다.

이들 모두가 반정의 일등공신들이라면, 지금 세치 혀를 나불거리는 것들은 이등공신은커녕 삼등공신에도 녹훈되지 못 할 자들이었다.

대부분 도성을 함락시키면서 눈치를 살피다가 뒤늦게 패초를 받고 입궐해 자의반 타의반 가담한 자들이니까.

당장 폐군을 당직청에 가뒀다는 말에 의문을 제기하는 형조판서 송질도 그런 부류중 하나였다.

“지금 우릴 믿지 못 한다는 것이오?”

“그런 건 아니지만 지부사가 분명 거사 당일 폐군은 당직청에 가뒀다고 하지 않으셨소. 한데 그 면상을 한 번도 보지 못 했으니 상황이 이에 이르러서 어찌 의심치 않을 수 있겠소?”

쾅!

“우릴 믿지 못 하는 분이 전하께서 즉위하시는 날에는 그렇게 목이 터져라 주상전하 천세를 외쳐대셨소이까?!”

“아니··· 그, 크흠.”

“모두들 똑똑히 들으시오. 폐군은 당직청에 가둬두었소. 내 제공(여러분)들께 그 상판을 보여드리지 못 함은 괜히 그 상판을 봤다가 마음이 약해질까 그것이 우려돼서였소이다. 또, 복의군의 일부가 성밖을 나간 것은 폐군을 추종하는 무리를 쫓기 위함이었소. 난리가 평정되지 않았으니 어찌 군사를 내보내지 않을 수 있었겠소이까?”

“크흠.”

“형판. 그리도 폐군의 면상을 보고 싶으시오? 정히 그 상판을 보고 싶다면 내 보여드릴 테니 말씀해 보시오. 보고 싶으시오?”

“그게, 지부사를 믿지 못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오기로 한 자들이 감감무소식인지라 불안함에 잠시 흥분을 한 것이외다. 별 뜻은 없었소.”

“그래. 지부사도 이쯤하시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진성대군이 군사를 몰고 왔으니 형판도 오죽 불안하면 그러셨겠는가.”

“젠장.”

가만히 좌중을 살피던 유순정이 타이르자, 박원종은 마지못한 척 자리에 착석했다.

“전하께서는 별 말씀 없으시오?”

형조판서 송질과는 다르게 복의군이 동대문에 무혈입성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복의군에 가담한 한성판윤 민효증(閔孝曾)이었다.

저쪽이 삼등공신 축에도 못 끼는 인사라면 이쪽은 그나마 삼등공신에 녹훈될 만한 자격은 있는 인물이랄까.

“없으시긴, 좌불안석이신지 추포한 자들을 방면해야지 않겠냐고 하루가 머다하고 성화시오.”

복의군이 동대문을 무혈입성하고, 연이어 광화문을 넘고, 도성 내에 폐군의 신병을 확보했다는 소문이 무성해졌을 때도, 그래서 박원종이 직접 패초를 각 중신들의 집에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복의군에 가담하지 않은 자들이 태반이었다.

사실상 가담한 자들보단 불복한 자들이 더욱 많았다. 개중에 행동이 과격한 자들이 몇몇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은 모두 금부나 형조에 가둬둘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쯤되니 보위에 오른 제안대군도 불안했는지 순정을 불러서 하는 말이 하옥시킨 자들을 방면해야 구명할 길이라도 생기지 않겠느냐는 것들 뿐이었다.

“정말로 그래야 되진 않을지······.”

민효증의 독백에 화를 누그러뜨리고 앉아있던 박원종이 다시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판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거요! 그자들을 풀어주면? 옳거니 노복들을 대동할 게 불보듯 훤한데 그러기를 바라시오? 도성에 소란이 일어나면 진성대군이 금방 서대문을 넘을 것인데, 어찌 그런 미련한 생각을 입밖으로 꺼낸단 말씀이시오!”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진성대군은 선왕의 적자시오. 비록 폐군이 당직청에 갇힌 몸이 됐다지만 정통성이 누구에게 있겠······.”

쾅!

민효증의 말을 자른 박원종이 허리에 패용한 환도를 꺼내 민효증에게 겨눴다.

“듣자, 듣자니 도저히 들을 수가 없겠구만! 어디 지금 같은 때에 정통성을 운운한단 말이냐! 그래, 진성대군 손에 죽으나 내 손에 죽으나 결국 죽기는 매한가지이니, 내 지금 네 목을 쳐서 해이해진 기강을 바로 잡아야겠다.”

박원종이 금방이라도 민효증의 목을 칠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에, 박원종을 말린 것은 유순정이 아니었다.

“대, 대감!”

윤귀수였다.

“역도들이 드디어 공격을 시작했다더냐?”

“그건 아니옵고······.”

윤귀수가 연신 쭈뼛거렸다.

긴히 할 말이 있는거라 판단한 박원종이 눈치를 주자, 유순정을 제외한 이들이 탐탁찮은 표정으로 장내를 빠져나갔다.

“아무래도 폐군의 신병을 진성대군 쪽에서 확보한 것 같사옵니다.”

“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박원종이었다.

***

나는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상선 영감?”

“대군마마······.”

분명 팔석 씨의 뒤에 봇짐장수의 복색을 한 보부상은 상선 영감이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가 휘휘 고개를 털었다.

꿈은 아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전하는요?”

영문을 묻자 상선 영감이 울먹거리시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또 다른 봇짐장수가 나와 삿갓을 벗었다.

“형님!”

어안이 벙벙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어안이 벙벙한 것도 잠시, 바로 달려나간 나는 형님의 몸부터 확인했다.

어디 다친 데는 없으신 것 같았다. 다만 마음 고생이 심했는지 전반적으로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나는 괜찮다.”

“어떻게 된 겁니까?”

형님을 대신해 상선 영감의 입에서 지난 날의 전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그리고 상선 영감이, “이렇게 대감께서 서대문에 파진했다는 소식을 듣고 보부상으로 변장하여 찾은 것이옵니다.”라고 말을 맺자 결국 흐느낌 소리가 들렸다.

형님의 흐느낌이었다.

한참을 흐느끼기만 하는 형님을 나는 그저 토닥거릴 수 밖에 없었다.

“하늘이 도왔습니다. 저흰 형님이 역도들한테 사로잡힌 줄 알았었습니다.”

“역도들이 농간을 부린 것이다. 궐이 그리 손쉽게 함락됐으니 역도들이 당연히 날 생포한 줄 알았겠지······.”

아닌 게 아니라 나는 형님이 당직청에 구금되신 줄 알았다.

경기도 관찰사 윤덕 씨나 고양군수 백손 씨도, 그렇다고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정말 다행입니다. 팔석 씨 수고 많으셨어요.”

팔석 씨가 멋쩍게 웃는다.

“그간 대감과 전하께 받은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지요.”

반역이 일어났고 궐이 함락됐다. 그 과정에서 역도들이 임금의 신병을 확보했다는 선언을 했고, 역도들이 추대한 임금이 즉위했다.

이런 상황에서 폐군이 된 임금을 숨겨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는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큰 일 해주신 거예요.”

“진성의 말이 맞다. 내 환궁하면 네게 큰 상을 내릴 것이다.”

팔석 씨가 감읍하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그 모습에 나는 잊고 있었던 게 떠올랐다.

“아, 형님 이제 어쩌죠?”

“뭐가 말이냐?”

“사실 저희는 형님이 당직청에 구금되신 줄 알고 지금 막 공격하려던 참이었거든요.”

내 말에 형님도 생각에 잠기신 듯 턱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제 생각이요?”

“그래.”

“음. 원래 형님이 당직청에 구금됐다고 알려졌잖습니까?”

“괘씸하게도 그렇지.”

“그런데 형님이 갑자기 저희랑 같이 모습을 드러내면 굳이 싸우지 않고도 서대문을 함락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전만은 막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리고 구금됐다던 형님이 우리랑 함께 모습을 드러낸다면 적들은 크게 동요할 터였다.

소문은 금세 좁디 좁은 도성 안으로도 퍼져나갈 테고.

내 생각과 같은지 형님이 고개를 주억거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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