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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82화 (82/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82화>

    서대문에 파진하다

    ***

    “괜찮을까요?”

    팔석은 아내 덕금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채 꼬던 볏짚을 마저 꼬았다.

    “괜찮겠냐구요.”

    “아, 대체 뭐가?”

    “저분······.”

    날 선 팔석의 답변에 덕금은 어딘가로 곁눈질을 했다.

    그녀가 곁눈질 한 곳은 마당에 있는 평상이었다.

    평상에는 노인과 청년이 수수밥을 고상 떨며 잡수고 있었다.

    “저분은 무슨 저분. 내 조카라니까.”

    “당신이 조카가 어딨어요?”

    “아, 있어.”

    “내가 백치인 줄 알아요? 나랏님이잖······.”

    화들짝 놀란 팔석이 꼬던 볏짚을 내던지고 덕금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 이 사람이 지금 크, 큰 일날 소릴 하고 있어! 개똥이놈 애비 없는 새끼 만들고 싶어 그래?”

    “애비 없는 새끼 안 만들고 싶으니 이러죠. 잡히면 당신이나 나나 개똥이··· 아니, 마을 사람들까지 싸그리 목 달아나는 거라구요.”

    “···”

    “듣고 있기는 해요?”

    “멀쩡한 귀가 막혔겠나, 그럼. 듣고 있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집에 들인 거예요. 저, 개똥이 봐요. 진짜 삼촌인 줄 알잖아.”

    팔석은 고개를 돌렸다.

    마루에서 곱게 책이나 읽고 있으라던 개똥이 녀석이 어느 새, 평상에 앉아 헤헤거리고 있었다.

    “저놈은 진짜 누굴 닮아서 저렇게 모지랄까? 당신 닮았나? 날 닮았으면 저럴 리가 없는데.”

    덕금과 개똥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는 팔석에 덕금이 빽 소리쳤다.

    “지금 농이 나와요, 농이?”

    “농이라도 안 하면?”

    “허, 평소엔 쥐 새끼 한 마리 못 잡던 사람이 무슨 간이 이리 커?”

    아내 덕금이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덕금의 말처럼 팔석의 간이 큰 게 아니었다.

    전하를 뫼시고 오게 된 건 우연이었다.

    개똥이 놈이 읽는 책은 모두 대군마마 댁에서 빌려오는 것들이었다.

    대군께서 전쟁에 나가셨어도 개똥이에게 책은 꾸준히 읽게 하라고 아주 신신당부를 하셨기 때문에, 팔석은 엄동설한에도 옷을 단단히 여미고서 대군댁을 찾았다.

    그런데 글쎄, 난리가 났다면서 동대문이 꿈쩍도 안 하지 뭔가.

    곧 새로운 임금이 즉위하니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라나 뭐라나.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긴 개뿔··· 역적 놈의 새끼들.

    그때 본 전하는 괜찮으시려나?

    궁시렁 거리면서 발길을 돌리고 집으로 돌아오던 팔석은 두 눈을 의심했다.

    분명 전하였다.

    비록 그가 봤던 근엄한 모습과는 상반되게 어딘가 초췌하고 남루한 옷차림을 하고 계셨지만 전하였다.

    난리가 났다던데 그래도 몸을 빼시긴 빼셨다는 안도감이 드는 한 편, 걱정이 되어 후다닥 달려갔다.

    사람 잘못 봤다며 발뺌을 하던 노인을 대신해 전하가 자신을 알아봤고, 몸을 좀 의탁 할 수 있겠냐고 하셨다.

    망설여졌지만 그 똥통에 튀겨 죽여도 시원찮을 민택 놈을 마을에서 쫓아낸 게 바로 전하였다.

    생명의 은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분의 부탁이니 팔석은 흔쾌히 전하를 뫼시게 된 것이었다.

    “사람이 인정(人情)하고 의리가 없으면 그게 사람인가? 짐승 새끼지. 자네도 전하 때문에 두 발 뻗고 살게 된 거 알면서 그래?”

    “아니, 아는데··· 그건 아는데··· 어후.”

    “잔말말고 모른 척 하고 있어. 누가 묻거든 내 조카라고 하고.”

    “여기 사람들 다 당신 깨복장이 동무들인데 그걸 누가 믿어?”

    긁적긁적.

    “그러네. 그럼 당신네 식구라고 둘러 대.”

    덕금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덕금이 자리를 뜬 뒤에도 아무렇지 않게 볏짚을 꼬던 팔석은 평상의 전하를 바라보았다.

    “나라 꼴이 대체 어찌 될는지. 쯧쯧.”

    그렇게 팔석이 팔자에도 없는 나라 걱정을 하고 있는 그때였다.

    “이봐, 팔석이! 팔석이!”

    누군가 허둥거리며 싸리문을 들어섰다.

    금석리 천석꾼 댁에서 더부살이하고 있는 김 씨였다.

    헉헉거리며 마당으로 들어서던 김 씨는 평상에 앉은 상선과 융을 보고 흠칫거리더니, 간단한 목례와 함께 팔석이 있는 마루로 다가왔다.

    “누구여?”

    “응. 우리 장인 어른하고 처남.”

    “개똥 어멈 아버지하고 동생?”

    “그럼 장인 어른하고 처남이 개똥 어멈 아버지하고 동생이지, 내가 딴 살림이라도 차렸겠는가? 사람이 무슨······.”

    “아니, 그럼 그런 거지. 왜 신경질은 내고 그런데? 거, 사람 무안하게.”

    “크흠. 근데 김 씨가 어쩐 일이대? 개똥이한테 글 배우러 왔남?”

    순간 팔석의 어깨가 으쓱거렸다.

    까막눈이 대부분인 금석리 사람들은 틈나는 대로 개똥이에게 언문을 배우곤 했다.

    김 씨도 그중하나였다.

    “아니, 지금 글씨가 대순가? 난리난 거 못 들었어?”

    “사람하고는, 난리 일어난 게 언제적 일인데 호들갑인가?”

    “아니, 그 난리 말구. 그, 자네 진성대군 마마하고 연줄좀 닿지?”

    “연줄이랄 게 있나. 그저, 대군마마께서 은혜 베풀어주시는 게지. 한데 왜?”

    마른 침을 꼴깍 거린 김 씨가 누가 들을새라 귀엣말로 속삭였다.

    “방금 보부상이 마을에 왔다 갔는데 말이여. 글쎄, 진성대군께서 서대문에 나타났다지 뭔가?”

    “뭐?! 그게 참말인가?”

    “그래! 그래가지고 내가 아니, 진성대군은 부원수로 오랑캐 놈들 무찌르러 가셨는데 그게 뭔 개똥··· 아니, 자네 자식 개똥이말고 말이 그렇다는 거여. 하여간, 개똥 같은 소리냐고 하니까, 보부상이······.”

    꿀꺽.

    “보, 보부상이?”

    “나랏님 구하러 왔다잖아.”

    팔석이 벌떡 일어났다.

    “아이쿠, 이, 이 사람이 백주대낮에 낯술이라도 걸쳤나. 사람 간 떨어지게 왜 그래!”

    “어, 어디 있는데? 아니, 그 보부상 이제 어디로 간다는가?”

    “송악(개경)으로 간다던데 보부상은 왜?”

    “어, 얼른 데려와! 얼른! 아니지. 지금 어디있어?”

    “지금쯤 동구(마을입구)에 있을걸?”

    “일어나세, 얼른 일어나!”

    엉겁결에 팔석을 따라 집을 나서는 김 씨였다.

    ***

    군사들과 군마의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파주에서 곧장 남하한 우린 고양군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이 촉박하지만 최악의 경우를 염두에 둬야했다.

    무슨 최악의 경우냐고?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 일이지만, 아군끼리 칼을 섞는 일이 바로 최악의 경우다.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만에 하나란 게 있으니 아군끼리 칼을 섞을 일이 생긴다면 군사들이 장시간 행군으로 칼 한 번 못 휘둘러보고 픽픽 쓰러지는 불상사는 막아야지 않겠는가?

    그것만큼 어이없는 일도 없을 테고.

    우리는 고양군수 장백손(張伯孫)의 도움을 받아 반나절 가량 고양에 머물렀다.

    머무르는 중간에 황해도 각 군현의 수령들과 개성유수(정이품의 지방관직), 그리고 파주목사가 보내온 군사들도 합류를 했다.

    마찬가지로, 사정을 들은 고양군수 백손 씨도 관군 130명을 보충해주면서 우리와 뜻을 함께 하기로 했다.

    각 군현에서 보내온 군사들은 보병이 600에 마군이 80명이었다.

    수십 군현에서 징발해온 것 치고는 군사의 수가 적었는데, 아무래도 북정군에 1차적으로 징발이 됐다 보니 그 수가 많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반나절 정도 휴식을 끝마친 우리는 서오릉을 넘어 쭉 동진했다.

    가는 길목에 있는 경기감영(관찰사가 감무를 보는 곳)에서 추가로 300의 군사를 벌충하고, 우리가 마침내 파진한 곳은 서대문 근방의 새문밖(新門外) 마을의 어귀였다.

    작고 아담하지만 판자촌처럼 다닥다닥 집이 붙어있는 새문밖 마을 사람들은, 나와 별충위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며 집안으로 피신(?)을 했다.

    입맛을 다신 나는 마음을 다잡고 마을을 가로질러 서대문으로 향했다.

    서대문은 때아닌 군사들의 등장으로 이미 소란스러운 상태였다.

    소란이 잠재워진 것은 서대문 성루 위로 누군가 오르면서였다.

    그는 도열한 별충위의 위사들을 헛바람 들이키면서 쓱 훑어보다가 근엄한 태를 내보이면서 소리쳤다.

    “본관은 경성판관(鏡城判官) 겸 돈의문 수문장 박운동(朴雲仝)이다! 표신을 보여라!”

    “이 역적 놈아! 어디 감히 역적 놈이 표신을 운운한단 말이냐! 네 정녕 모가지가 잘려 군문에 효수되어야 정신을 차린단 말이냐?”

    나 대신 버럭 호통친 것은, 서대문으로 오는 길목에 합류한 경기도 관찰사 안윤덕(安潤德)씨였다.

    어찌나 화가 나셨는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할 정도였다.

    사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안윤덕 씨도 이런저런 모욕을 당한 걸로 알고 있다.

    도성과 경기감영은 지척이다.

    당장 서대문에서 말을 타고 달리면 반시진도 안 걸리는 곳에 안윤덕 씨가 개좌(출근)하는 경기감영이 있다.

    들어보니 도성이 역도들에게 함락당하고 역도들에게 합류해라 마라로 욕을 좀 당한 것 같다.

    실제로 합류하는 척까지 했었고, 윤덕 씨를 만난 것도 경기감영이 아니라 감영과는 멀찍이 떨어진 까치내(불광천) 일대였었다.

    반역 주동자들은 경기 관찰사인 윤덕 씨에게는 거동이 수상한 자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추포하라는 령이 떨어졌었다고 했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역적 놈이 본관의 이름은 알아 무얼 한단 말이냐?”

    “지금 누구 더러 역적이라고 하는······.”

    서대문 수문장 박운동이 열에 받쳐 소리치건 말건, 윤덕 씨를 뒤로 물린 내가 말을 몰아 앞으로 나아갔다.

    말이 투레질을 반복했다.

    워워, 말을 진정시킨 나는 말안장에 메워 둔 부월을 꺼내보였다.

    “나는 성종대왕의 적자이자 금상의 아우인 진성대군이다! 너희 역도들이 지난 밤에 형님 전하를 겁박하고 감히 반기를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오랑캐와 맞서는 중에 남하하였으니 너희는 속히 성문을 열어야 할 것이다!”

    이 대사는 고양군수 장백손 씨가 써준 각본의 하나였다.

    파진하기에 앞서 우리는 짧게 작전회의를 했고, 고양군수 장백손 씨는 정통성이 없는 적도들에겐 정통성을 강조하여 압박하는 것이 우선될 것이라 하여 이런 멘트도 써줬었다.

    과연 백손 씨의 말처럼 효과가 있는지, 성곽의 수문군들이 술렁이는 게 확연히 보였다.

    “박운동이라 했는가?”

    방금 전까지 윤덕 씨의 말을 고래고래 악까지 써가며 받아치던 수문장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뭐, 상관 없었다.

    내가 원하는 건 수문군들의 동요였으니까.

    “너희가 감히 복의군이라 참람하게 자칭하여 백성들을 핍박하고, 너희에게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창칼로 억압한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만약 나의 말에 한치 거짓이 있는 것이라면 속히 성문을 열 것이요, 너희가 성문을 열지 않는 것이라면 과연 이 소문이 사실이라 짐작하고 나는 잘 정돈된 1만대군으로 하여금 너희를 칠 수 밖에 없다! 속히 성문을 열어라!”

    성곽 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질 즈음.

    “거, 거짓이다! 동요치 말라! 이미 우위장과 후위장, 중위장께서 말머리를 돌렸으니 대군은 지금 허장성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 틀림 없느니라! 모두 동요치 말라!”

    겁먹고 찌그러진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다.

    예의 박운동의 목소리였다.

    하긴, 순순히 성문을 열어줄 것 같지는 않았다. 역모가 실패하면 제놈들도 모가지가 잘릴 테니까.

    나는 결국 말머리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무력으로 제압하는 수 밖에 없겠습니다.”

    장막으로 돌아오자마자 함께 서대문을 정탐 나갔던 윤덕 씨가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생각도 같았다.

    이렇게 된 이상, 만에 하나라고 생각했던 아군끼리의 교전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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