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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81화 (81/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81화>

    내가 지금 탱크를 몰고가서 네놈들 머리통을.......

    ***

    광희문을 빠져 나온 상선은 그간 참고 있던 숨을 토해냈다.

    극도의 긴장감 때문인지 아직도 손이 벌벌 떨렸다.

    까닥 잘못하면 걸릴 뻔 했다.

    “전하. 괜찮으시옵니까?”

    도무지 멈추지 않은 손을 뒤로 감춘 그는 뒤늦게 임금의 상태가 떠올라 허둥거리며 거적을 들췄다.

    “괜찮겠는가?”

    “전하를 한낱 거적에 감춘 데 모자라 한낱 촌부의 시체로 위장하였으니 신의 불충이 참으로 크옵니다.”

    부복하는 상선에 손을 내저어 보인 융은 이마를 매만졌다.

    아까 돌부리에 머리가 박힌 게 화근인지 손마디만한 혹이 자라있었다.

    “불층은 무슨. 상선의 기지가 아니었다면 내 어찌 역적들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길 수나 있었겠느냐. 그보다······.”

    “하문하시옵소서.”

    “상선의 연기가 일품이구나. 나례(잡귀를 쫓는 행사)에 배우로 서도 되겠어.”

    “듣기 민망하옵니다······.”

    당혹스러운지 허둥거리는 상선에 피식 웃은 융은 수레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런데 말이다.”

    “예, 전하.”

    “백돌이?”

    반문하자 상선이 사색에 질린 표정으로 부복했다.

    아닌 게 아니라 백돌은 그의 아명이었다.

    어린 시절에도 소수의 사람들에게 불려졌었고 장성한 후에는 아예 이 이름을 들을 일도 없었다.

    잊혀진 이름에 가깝지만 세종대왕 시절 궐에 들어와 50년 넘게 내시부에 적을 둔 상선은 이 이름이 융의 아명임을 모를 리 없었다.

    “마, 마땅한 이름이 생각이 안 나서 신도 모르게 그만··· 죄는 전하께서 다시 어좌에 오르시면 달게 받겠사옵니다.”

    “농이었다. 다만 어린 시절 이름을 들으니 내 감회가 새롭구나. 하루 아침에 처지가 바뀌는 것이 인간사의 묘미라더니,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느냐.”

    “전하······.”

    나직하게 한숨을 내쉰 융은 저 멀리 연기가 피어오르는 도성을 눈에 담았다.

    역적도당들이 일부 전각들을 연소 시킨 것이 분명했다.

    “충신불사이군(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음)이라더니 결국 곁에 남은 충신은 상선 밖에 없구나. 내 보위에 있으면서 얼마나 학정을 일삼았으면 이런 때를 맞아 떨치고 일어나는 이가 한 사람도 없단 말인가.”

    “부디 심지를 굳건히 하시옵소서. 지금은 저들의 기세와 창졸간에 일어난 일에 백료들이 대처를 못 한 것이지, 시간이 조금만 흐른다면 역적들을 타도하자는 말들이 들불처럼 번져나갈 것이옵니다.”

    “과연 그러겠는가?”

    “예. 그러니 일단 가시지요. 옥체를 보전하셔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음이옵니다.”

    “내 처지가 이리 되었는데 어디로 간단 말이냐.”

    분위기가 다시 가라앉았다.

    사실이 그랬다.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신하들의 집에 찾아가자니 반정이 일어난 시점에 누굴 믿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하삼도로 내려가는 일도 어려웠다.

    이미 강변의 나루터란 나루터는 역적들이 점거했을 게 분명하다.

    길을 돌아 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도중에 발각될 우려가 컸다.

    둘의 사색이 깊어질 무렵.

    “전하.”

    “음?”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나이다.”

    “그런데?”

    “갈 만한 곳이 한 곳 있는 듯 합니다.”

    ***

    “대비께서 완강하신데 이제 어쩐단 말입니까?”

    “이미 예견한 일이거늘 어찌 사람이 이리 조급해 한단 말인가?”

    “하지만 생각 이상으로 완강하지 않습니까? 이대로 폐군이 하삼도로 튀기라도 하는 날에는······.”

    원종은 생각도 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털어냈다.

    “이미 사대문과 사소문을 걸어잠갔네. 지금은 폐군이 쥐새끼처럼 숨어있네만 그래봤자 불씨(부처)놈 손바닥 안이지. 그보다, 옥새는?”

    “다행히 옥새는 상서원에 모셔져있었습니다.”

    순정은 기가 찬 듯 콧방귀를 뀌었다.

    “결국 폐군도 제 목숨 귀한 줄은 아나보군. 옥새도 팽개치다니.”

    “익선관도 버리고 도망하지 않았습니까.”

    “하긴. 자네는 수색을 게을리 하지 말라 전하게. 내 말했다시피 이미 독안에 든 쥐나 다름이 없지만 만에 하나라도 폐군이 도성을 벗어난다면 우리의 거사는 끝일세, 끝.”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압니다.”

    “제안대군은?”

    “강녕전에 계십니다.”

    “뫼시러 가지.”

    순정은 원종과 함께 강녕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강녕전에 도달한 그는 인상을 찡그렸다.

    소란도 보통 소란이 아니었다.

    “난 싫단 말이다! 싫어!”

    전각에서 들려오는 음성의 주인은 제안대군의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된 일인가?”

    박원종이 전각을 호위하고 있던 종사관 윤귀수를 불러 묻자 윤귀수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대군께서 도무지 환복을 하지 않고 계시옵니다.”

    “그 무슨······.”

    원종 역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순정을 바라보자, 순정이 씩씩거리며 전각을 올랐다. 그러고는 침소로 곧장 향했다.

    침소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소음은 더 크게 들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침소에 든 순정은 혀를 내둘렀다.

    침소 꼴이 가관도 아니었다.

    산산조각난 집기와 체경(거울)은 소란 축에 끼지도 못 했다.

    옷을 갈아 입히려던 내관들은 얻어맞은 건지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대군.”

    순정이 착 가라앉은 눈으로 제안대군을 부르자, 제안대군은 그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아니, 영감. 백주대낮에 이 무슨 참람한 일이란 말이오. 글쎄, 저놈들이 나더러 용포를 입으라지 뭐요. 제발 영감이 저놈들 좀 말려주시오.”

    칭얼거리는 제안대군에 순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이 천치를 모시고 살아야 한다니 본인의 신세도 참 지랄 맞다.

    “내막을 듣지 못 하셨습니까?”

    “들었소. 들었는데··· 아니,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이오? 내가 임금이라니··· 내가 어떻게 전하라 불린단 말이오? 나는 사서삼경도 제대로 못 뗐소. 나같은 천하의 백치가 어떻게 국정을 돌본다고··· 그리고, 그리고 융이 알면 날 가만 놔두지 않을 거요. 그 성정에 이 사실을 알면 아마··· 아, 아마 내 목을··· 으으.”

    “종숙이 돼서 종질이 그리도 두려우십니까?”

    “하지만 영감도 알지 않소. 난 융이에게 크게 성은을 입은 몸이오. 거기다가 이번에 노신들을 숙청하기까지 했는데, 그 성정에 날 가만 놔두겠소?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날 살려두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까 날 좀 내버려두시오. 난 살고 싶소, 살고 싶어!”

    성격 같아서는 그 따귀를 걷어 올리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안 하신대도 하셔야만 합니다. 이미 대군께서는 저희와 한 배를 타셨습니다.”

    “하, 한 배라니··· 아니, 그 무슨 두려운 말을 하시오. 내가 타고 싶어서 탄 배도 아닌데!”

    “어쨌든 같은 처지라 이 말입니다. 저희의 거사가 실패하면 대감도 함께 역적이 되는 것이지요.”

    제안대군은 결국 참았던 울음보를 터뜨렸다.

    얼굴을 감싸고는 엉엉 목놓아 울어댔다.

    그 모습이 꼴불견도 그런 꼴불견이 따로 없을 정도였다.

    “난 못 해! 난 못 한단 말이다!”

    “하셔야 합니다. 안 하셔도 하셔야하고, 못 하셔도 하셔야 합니다. 이제 그것만이 대감께서 목숨을 보전 할 수 있는 길입니다.”

    “이 역적 놈아! 이 천하에 때려 죽일 역적 놈! 왜 하필 나란 말이냐! 난 죽어도 역적이 되긴 싫다! 싫어, 이놈들아! 흐흐흑. 제발 날 좀 보내주거라··· 난 편히 살고 싶단 말이다.”

    흐느끼는 제안대군을 일별한 원종이 내관에게 말했다.

    “해가 밝는대로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시니 속히 환복시켜라. 못 하면 너희가 죽는다.”

    “아, 알겠사옵니다.”

    순정은 흐느껴우는 제안대군을 뒤로한 채 강녕전을 빠져나왔다.

    종사관 윤귀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감. 임숭재의 행방이 묘연하옵니다.”

    “쥐새끼 같은 놈. 임사홍은?”

    “신병을 확보해서 의금부에 가둬두었습니다.”

    “대군이 즉위하신 후에 놈을 참하는 것은 길(吉)하지 못 한 일이다. 날이 밝기 전에 놈과 당여(수하)들을 참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니 어디 못 도망가게 감시를 철저히 하거라.”

    종사관 윤귀수가 명을 이행하려 할 때.

    누군가 그를 막아세웠다.

    “잠깐. 잠깐만요, 영감.”

    박원종이었다.

    “임사홍이가 천하의 간신이긴 하지만 함께 거사에 동참한 판부사(구수영)와도 사돈 관계에 있는데 판부사가 껄끄러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구수영의 장녀와 임사홍의 장남인 임희재가 부부의 연을 맺은 지 오래이니 확실히 박원종의 말대로 사돈 관계는 사돈 관계다.

    하지만.

    “임희재는 제 아비를 부끄러워하는 선비이고, 구수영 역시 사돈을 창피해하고 있으니 껄끄러워질 게 있겠나.”

    “임사홍이를 간적으로 처단하면 임희재에게 역시 죄를 묻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럼 판부사의 장녀는 청상과부가 되는 셈 아닙니까?”

    “흐음.”

    “임사홍의 일은 차제에 대군께서 보위에 오르신 뒤에 논하시지요. 그게 좋겠습니다.”

    고민한 순정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네 말대로 하세.”

    대충 일을 매듭 지은 원종과 순정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 향한 곳은 사정전이었다.

    사정전에는 이미 패초를 받고 입궐한 중신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입에서 단내가 났다.

    그건 말 못 하는 미물들도 마찬가지인지, 내가 전쟁에 나가기 전에 ‘날쌘돌이’ 라고 직접 이름 붙여준 내 말도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헉헉거리고 있었다.

    날쌘돌이가 헉헉거릴 때마다 허연 입김이 대기 중으로 흩어졌다.

    “얼마나 남았습니까?”

    하마한 내가 억수 씨에게 물었다.

    “지척입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시지요.”

    “후. 허벅지 찢어진 것 같은데요.”

    한 겨울에 땀이 다 났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소매로 대충 닦은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내 뒤로 별충위의 위사들이 보인다.

    모두들 지친 모습들이 역력했다.

    벽단에서 전원 기병들로만 말을 달린 지 오늘로 나흘째였다.

    다행히 억수 씨가 우려한 일은 기우에 그쳤다.

    사흘 전.

    우리는 벽단에서 하루를 꼬박 말을 달려 평양에 도착했었다.

    벽단에 있어야 할 내가 평양에 모습을 드러내자, 감영(관찰사 업무를 보는 곳)에도 긴장감이 감돌았다.

    진짜 거짓말 안 하고 거의 일촉즉발이었다.

    뭐, 이해는 갔다.

    조정에서는 물론 온하위에서도 아무런 연통이 없었는데, 북정군의 부원수이자 성종대왕의 적자인 내가 평양에 군대를 몰고 나타나니 놀랄 만도 하지.

    나는 긴장감이 감도는 감영에 억수 씨를 보냈다. 그러고는 관찰사 채수(蔡壽) 씨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처음에는 믿지 못 하겠다는 반응을 보이던 채수 씨도 온하위에서 따로 전령이 온 적이 있냐는 말에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사건을 설명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도성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 같고 불행하게도 우리 북정군에는 후위장 성희안과 중위장 장정이 가담한 것 같다고.

    아직 도성의 상황이 어떻게 된 지는 북방에 있는 우리가 알 길이 없지만 반란이 확실하다면 우리가 구원해야 한다고.

    고민하던 채수 씨는 다행히 내 말을 믿어주었다.

    그러는 한 편.

    후방에 조금씩 남겨뒀던 매복조와 척후들에게서 소식들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온하위에 존재해야 할 본영이 사라졌다는 보고가 들어오더니 그 이후에는 정체불명의 대군이 남하 중이라는 말과 그 깃발의 모양, 그리고 부대의 모습 등을 볼 때 후위장 성희안과 중위장 장정의 부대가 확실하다는 보고, 그 다음으로는 판부사도 가담한 것 같다는 보고까지.

    반란에 쐐기를 박는 보고들이었다.

    그들보다 빨리 선수를 쳐야했고, 그러려면 채수 씨의 도움이 절실했다.

    나는 채수 씨에게 반란군의 남하 저지를 ‘부탁’이 아니라 부원수로서 ‘명령’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들이 남하하게 된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을 테니까.

    채수 씨는 흔쾌히 내 명령을 들어주었다.

    그래도 여간 걱정 되는 게 아닌지라 반나절에서 하루만 놈들의 남하를 저지해도 성공적이니 적당히 막았다 치면 놈들에게 투항하라고 권했다.

    그렇게 후방은 채수 씨에게 맡긴 채 미치도록 남하했고, 지금 여기는······.

    “억수 씨. 근데 여기 어딥니까?”

    “이제 파주입니다.”

    음, 그래 파주다.

    이 정도면 거의 다 온 것이나 다름이 없다.

    “출발하시지요, 대감.”

    억수 씨의 채근에 나는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겼다.

    이미 가랑이가 피로 흥건하다.

    허벅지가 찢어진 것 같다는 말은 앓는 소리가 아니었다. 진짜로 찢어졌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에 오른 나는 별충위를 다시 한 번 돌아봤다.

    "자, 조금만 더 힘들 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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