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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80화 (80/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80화>

    노인과 수레

    ***

    투구 끈을 풀어 헤친 박원종은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소란을 듣고 궐을 빠져 나간 듯 하옵니다. 흔적이라도 남길 법 한데 도무지 보이지가 않사옵니다.”

    거사가 틀어지면 원종 본인만 죽는 게 아니었다.

    그와 연관된 사람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할 것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치밀자 원종은 욱하는 마음에, 수문장 김종계의 가슴팍에 발길질을 날렸다.

    그의 발길질에 윽, 신음과 함께 나자빠진 흥인지문 수문장 김종계가 오뚜기처럼 벌떡 일어나 부복했다.

    그는 날이 잔뜩 선 눈빛으로 김종계를 흘겼다.

    “그게 말이나 된단 말이냐!”

    “송구하옵니다!”

    원종은 입술을 자근자근 씹어댔다.

    글쎄, 폐군의 행적이 묘연하단다.

    여태 복의군의 기세는 등등했다. 내통한 김종계와 휘하의 군사들을 몰아 광화문을 포위했고, 금방 광화문을 함락시켰다.

    복의군은 파죽지세와 같은 기세로 궐을 점거할 수 있었고 각 전각들을 모조리 점거했다.

    이제 마지막. 거사의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폐군만 복의군의 손에 들어왔다면 거사는 성공적일 것이었다. 그런데 거사의 주목표인 폐군의 행적이 묘연하다니······.

    원종은 아득해지는 기분에 한차례 휘청거렸다.

    “샅샅이 뒤진 게 맞더냐?”

    부관의 부축을 받고 중심을 잡은 원종이 김종계에게 재차 물었다.

    “···예. 샅샅이 뒤졌사옵니다.”

    “폐군의 신병을 확보하지 못 하면 이번 거사는 실패란 점을 모른단 말이냐!”

    퍼억!

    “윽!”

    김종계가 다시 오뚜기처럼 일어섰다. 원종은 그를 잡아 먹을 듯 노려봤다. 한참 죽일 듯 김종계를 노려보던 원종이 시선을 거뒀다.

    그의 시선이 머무른 곳은 노선비, 유순정이 있는 곳이었다.

    “이제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제안대군은?”

    “살곶이 다리를 넘기 전에 한성부 판관 신윤무를 시켜 뫼셔오도록 했습니다. 군사를 시켜 폐군을 쫓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겠지요?”

    “···복의군 대장은 그대가 아닌가. 어찌 이리 안절부절 못 한단 말인가?”

    “그럼, 당장 목이 달아나다 못 해 멸문을 걱정하게 됐는데 태평하겠습니까?”

    “흠.”

    강녕전 주변을 돌아보던 유순정이 말했다.

    “일단 대비께 거사를 아뢰세.”

    “폐군은 어쩐단 말입니까? 몸을 숨긴 폐군이 기호(경기도)의 군사들을 끌고 오기라도 한다면······.”

    “성문을 모조리 걸어잠그라 지시하고, 쥐새끼 한 마리도 성문을 통과해선 안 된다 하명하시게. 그리고, 별동대를 보내 폐군을 수색토록 하고. 아, 대비전에 가기 전에 패초도 보내도록 하지. 만에 하나 있을 일을 대비해서 백관들은 우리가 붙들고 있어야지.”

    “그게 좋겠군요. 알겠습니다.”

    원종이 부관에게 지시를 내리는 그때.

    “장군!”

    군관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의 손에는 익선관이 들려있었다.

    “폐군을 찾았더냐?”

    “그건 아니온데 금구에서 발견했사옵니다.”

    “금구?”

    “예!”

    “안내하거라.”

    박원종과 유순정은 군관의 안내를 따라 익선관이 발견된 금구에 도착했다.

    “여기서 발견된 것이 분명 하렷다?”

    “이를 말이겠사옵니까?”

    호언장담하는 군관에 원종은 화색이 깃든 표정으로 유순정을 돌아보았다.

    “금구를 통해 빠져 나간 듯 합니다.”

    “속히 군사들을 보내시게.”

    “예.”

    원종은 다시금 군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그리고 몇몇 군사들이 폐군을 추포하러 간 사이.

    복의군의 수뇌들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대비전에 들었다.

    궐의 난리와 다르게 대비는 의연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저벅저벅.

    “이 무슨 무례란 말이오?”

    대비전을 지키던 상궁이 그들을 꾸짖었다. 뒤늦게 잘못을 인지한 원종과 수뇌들은 휴대한 무기들을 내려둔 채, 다시금 대비전에 들었다.

    “참판(유순정)과 지부사(박원종)가 이 밤중에 어인 일이시오?”

    “신 박원종이 감히 아뢰건대, 지금 임금은 도리를 잃어 온천하의 인심까지 잃은 지 오래이옵니다. 민생은 도탄에 빠져 저자에 나갈 때마다 백성들의 아우성이 가득하고, 종사(종묘사직)는 위태로와졌으니 신 등은 근심과 우려 속에 나날을 보내다가 마침내 시기를 노려 거사하였으니 제안대군께서는 대소 신민의 인망이 두터운 지 오래이니, 대군을 추대하여 종사의 계책으로 삼고자 감히 밤중에 무례를 범하면서 까지 대비의 분부를 여쭈게 되었사옵니다.”

    “거사?”

    “예.”

    “지부사.”

    “하문하소서.”

    “하나만 묻겠소.”

    “···”

    “내 비록 아녀자의 몸이나 정치를 모르지 않소. 또한 바깥 세상의 일을 모르지도 않으며, 고금의 병사(군대에 관한 일)에 대해 얕게나마 지식을 갖고 있소. 이제 묻겠소이다. 아무리 시국이 혼란스럽기로서니 나라가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거사한 의병들이 대관절 어디 있소이까?”

    “···그점을 신들도 우려하고 있기 때문에 서둘러 대비전을 찾은 것이옵니다.”

    “그렇사옵니다. 지금 폐군이 인심과 덕을 잃어 나라가 암울해진 지 오래인데, 이제는 큰 전쟁까지 일으켜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사옵니다. 이를 말리지 못 한 것이 신들의 큰 죄이오나 이미 벌어진 일이니 이를 수습하는 것 또한 신들의 몫일진대 지금 어좌를 계속해서 비워둔다면 일선의 장수들이 혼란스러워 할 수 있사오니, 대비께서는 서둘러 결단을 내려주셔야 할 듯 하옵니다.”

    “참판은 지금 날 겁박 하는가?”

    털썩!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시옵니다.”

    “지부사.”

    “예.”

    “지부사는 방금 민생이 도탄에 빠져 저자에 나갈 때마다 백성들의 아우성이 가득하다 했는데, 내 그런 말은 듣도 보도 못 했소. 오히려 혜민서와 종두도감의 일로 칭송하는 일이 많다 들었는데, 지부사가 언급한, 민생이 도탄에 빠진 나라는 대관절 어느 나라요?”

    “···”

    “또, 종사가 위태로워졌다고 했으나 그 말은 참으로 맞소. 주상의 총애를 사던 이들이, 주상의 관심이 조금 뜸해졌다고 하여 변심하여 창칼을 거꾸로 겨누었으니 과연 종사가 위태로워졌다 뿐이겠소. 말법시(불가에서 말하는 말세)가 따로 없구려.”

    “···대비께오서는 지금의 일을 통촉하여주셔야 하옵니다. 사세가 급박하니 만일 북변에서 역모가 발생한다면 이는 나라가 파국으로 치닫는 일이 될 것이옵니다.”

    “내 주상을 봐야겠소. 주상은 어디 있소이까?”

    쭈뼛거리는 박원종에 유순정은 그를 한심하다는 듯 일별하곤 입을 열었다.

    “지금은 당직청(의금부 예하의 관아)에 있사옵니다.”

    “패륜도 이런 패륜이 없도다.”

    “신들 역시 비록 폐군이라 하나 예를 갖추어 정중히 뫼시고자 했으나, 지금 궐 밖에 모인 신민들의 의사가 이러하니 따를 밖에 도리가 없었나이다.”

    “허. 이는 천인공노한 짓이다. 명분이 없는 거사를 내 어찌 동참한단 말이냐? 나는 그대들의 말을 따를 수 없다.”

    “대비마마.”

    “···”

    “융이 노신을 쳐내고 사족들을 쥐어 짠 일은 어디 명분이 바로 선 일이었습니까? 이제 대국에도 건주위의 일이 알려질 테니, 노한 황제에 의해 천병들이 들이닥칠 것입니다. 그때가 돼도 대비께선 명분이 없다 말씀하시겠사옵니까?”

    “송구한 말씀이나 폐군은 지금 실성하여, 정사를 돌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해치고 있사옵니다. 경연을 폐한 지 벌써 반년이 훌쩍 지났고 정사는 내팽개친 채 종친들을 불러 사냥과 연회로 소일하고 있으니, 대관절 고금의 어느 군왕이 이런 사치를 벌였단 말이옵니까? 대비께선 필히 교서를 반포해주셔야 하옵니다.”

    “못 하겠다면?”

    “이미 북정군에 함께 한 참의(성희안)와 수원부사(장정), 그리고 판부사(구수영)이 거병에 동참하기로 했고, 사흘 전에 이미 도원수와 제장들을 사로 잡았으며 이제 북정군을 정돈하여 남하하겠다는 전언을 바로 오늘 보내왔사옵니다. 기병들로 하여금 말을 달리면 닷새 안에 당도할 터이니, 외람된 말씀이나 전쟁의 참혹함을 눈으로 지켜본 자들이 어떤 참람한 짓을 벌일지 신은 알 수가 없겠사옵니다.”

    “이놈! 지금 어느 안전이라고 겁박을 한단 말이냐!”

    “겁박이 아니옵니다. 참의와 수원부사와 판부사가 남하하는 길목에는 부원수께서도 계시옵니다.”

    “뭐라?!”

    “교서를 반포해주시지요. 종사를 위한 일이옵니다.”

    “이, 이······.”

    평생 당하지 못 한 치욕에 대비는 몸을 부르르 떨어댔다.

    ***

    광희문에 옷인지 누더기인지 모를 남루한 행색의 노인이 수레를 끌고 나타나자, 군사라기에는 어딘가 껄렁껄렁한 면을 보이는 장정들이 노인을 막아섰다.

    “노인장은 어딜 가는 길이시오?”

    “시구문에 시체 내다 버리러 왔지, 관짝 박으러 왔겠는감?”

    “나는 송장 하나 치르러 왔나 했지.”

    예의 장정이 노인을 위아래로 훑으며 낄낄거렸다.

    주변에도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한데 노인장은 난리가 일어난 것도 모르시오?”

    “난리? 무슨 난리?”

    “우리 복의군 대장께서 제안대군을 추대하시지 않으셨겠소. 보아하니 못 들으셨나 보구만.”

    “댁 말대로 이제 관짝 알아볼 나인데 바깥 소식은 알아 무얼 하오. 아들 녀석마저 뒈져버렸으니 관짝 박을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게지.”

    푸념 섞인 노인의 말에 장정은 검집으로 거적을 쿡쿡 찔렀다.

    “아드님이 노부 두고 요절이라도 하셨나? 불효막심하구먼.”

    “그럼 노환으로 죽었겠소? 자식놈 먼저 보낸 부모 속 박박 긁지말고 길이나 트시오.”

    “안 되오.”

    “안 되긴 왜 안 돼? 어제까지만 해도 훤히 열려 있더구만.”

    “윗전 명이라 안 되오.”

    “윗전? 누구, 나랏님?”

    “우리 복의군 대장께서 제안대군을 추대했다고 하지 않았소.”

    “윗분들 뭐 하시던 나같은 노친네는 상관할 바 아니지만서도, 그거랑 시구문 틀어막는 거랑 뭔 상관인데?”

    “그걸 우리가 알면 이러고 있겠소? 윗전에서 개미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 하게 막으라 했으니 그런가 보다 하는 게지. 좌우지간, 돌아 가시오.”

    “아니, 아들놈 먼저 보낸 것도 억울해 뒈지겠는데 숨 끊긴 지 며칠 지난 아들놈 향 냄새나 맡으라 이거요?”

    “거, 참. 글쎄, 안 된다니까요.”

    “이런 염병할 놈들!”

    “뭐? 노인장 뭐라 하셨소?”

    “천하에 염병 맞아 뒈질 놈들이라고 했다, 왜!”

    “노인장. 명줄 재촉 할 거요?”

    “하련다! 넌 이놈아 부모 애비도 없단 말이냐? 이 천하에 못 돼 먹은 놈! 까마귀도 시체 안 파먹을 놈! 에라이, 퉤!”

    “허. 무슨 노인장 입이 이렇게 걸어?”

    “내가 이놈아 소싯적에 노름판에서 소 댓마리는 날려먹은 사람이다. 입이 안 걸고 배기겠느냐?”

    “이 봐, 김 씨. 확인이나 해 봐.”

    “그래, 아드님 상판이나 어디 좀 봅시다.”

    “보려면 살아 있을 때 봐야지, 뒈진 지 며칠 지난 시체는 봐서 뭐하게?”

    “수상하게 어찌 막는단 말이오?”

    “그럼 보고 토악질이나 하지 마시오.”

    “이래뵈도 시체 보는 데에는 이골이 난 사람인데 토악질은 무슨.”

    김 씨라 불린 장정이 괜히 허세를 떨어대며 거적을 들췄다.

    창백다하다 못 해 밀랍 같은 피부의 청년이 가지런히 손을 포갠 채 누워있었다.

    “무슨 남정네 얼굴이 이리 희고 고와?”

    “이게 희고 고와보이면 댁도 뒈지던가.”

    “큼. 시체는 확실해 보이네. 돌아가시오.”

    “뭐, 돌아가? 시체까지 다 봐놓고 돌아가라니! 어? 돌아가라니! 댁은 말만한 처녀 속치마까지 풀어 헤쳐놓고 ‘볼 장 다 봤으니 이만 가시게나.’ 하면 돌아가겠소?”

    “수레는 수상쩍어서 본 거고. 시체가 확실하니 돌아가란 게지.”

    노인이 별안간 수문하던 김 씨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이놈아! 아들 놈이 굶어 죽은 것도 억울해 돌아가시겠는데 내 손으로 직접 묻지도 못 한단 말이냐? 이게 무슨 나라 법이냐 이놈들아! 이 천하에 벼락이란 벼락은 다 맞아 뒤질 놈들!”

    “아, 글쎄!”

    김 씨가 신경질을 부리며 노인을 밀쳤다.

    노인이 헐리웃 액션을 알 턱이 없겠지만, 노인은 누가보더라도 과장된 몸짓으로 수레에 나자빠졌다. 거기서 끝났다면 다행이련면, 충격에 의해 수레가 덜커덩 요라한 소리를 내더니 모로 기울어버렸다.

    당연히 수레 위에 있던 창백한 시체도 바닥을 나뒹굴었다.

    바닥을 나뒹군 시체는 마침 박혀 있던 돌부리에 부딪혔다.

    잠시 적막이 흘렀다.

    적막과 함께 철푸덕 주저 앉은 노인은 하늘이 떠나가라 통곡을 했다.

    “하이고, 백돌아! 백돌아! 살아 생전 못 난 애비 만나 갖은 고생 다하더니 죽어서는 못 난 수문군 만나 이렇게 욕을 당하는구나! 어이고, 우리 백돌이! 우리 백돌이 불쌍해서 어쩌누! 어째!”

    “아, 아니. 그러게 안 된다니까, 기어코 떼를 써서··· 크흠. 거, 미안하게 됐소. 그래도 뭐··· 겉보기엔 멀쩡해보이는구만.”

    벌떡 일어난 노인이 김 씨의 멱살을 다시 움켜잡았다.

    “뭐? 멀쩡? 이놈아 멀쩡! 네놈 뒈지고 나서 돌부리에 얼굴이 콱! 박혀도 멀쩡하네 마네 말이 나올 것 같더냐!”

    “큼. 흠흠.”

    김 씨가 헛기침을 터뜨리던 그때.

    “김 씨. 그냥 내보내.”

    그래도 시체를 상하게 했다는 데 대한 미안한 마음은 있었는지, 김 씨라 불린 장정은 멋쩍은 표정으로 ‘그럴까?’ 반문했다.

    “수문장 나리 오시기 전까지 후딱 내보냈다가 다시 들여보내면 되지. 괜히 망자한테 해코지 했다가 밤에 시달릴 일 있나?”

    “그, 그렇긴 하지. 크흠. 노인장. 묏자리가 어딘진 모르겠소만 반시진 내로는 돌아오셔야 하오.”

    방금 전까지 죽이네 살리네 거리던 노인이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그렇게 노인이 광희문에서 멀어질 즈음.

    그 뒷모습을 찝찝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김 씨는 괜히 어깨를 털어냈다.

    “망자가 해코지 하진 않겠지?”

    “정 무서우면 오늘은 자네 마누라 안고 자던가.”

    “예끼! 그게 더 무섭네, 이 사람아!”

    생각만 해도 오금이 저린 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김 씨는 다시금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낯이 좀 익은데, 어디서 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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