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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79화 (79/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79화>

    회군하라!

    ***

    장막 안으로 억수 씨가 들어오자 나는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어때요?”

    밑도끝도 없는 내 질문에 억수 씨는 비통에 잠긴 표정으로 투구를 탁자 위에 올리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전령이 죽었단다.

    한 두 번 봤던 전령도 아니었다.

    도원수께서 수십번 보냈던 전령이었고, 도원수의 말씀을 수십번 전달했던 전령이었다.

    한 번은, “우리는 후방에서 쉬고 있는데 덕칠 씨만 고생해서 어쩐데요.” 라는 내 말에 멋쩍게 웃으며 “이기기만 하면 고생이 대수겠습니까?” 군인 정신을 보여주기도 했었다.

    그런 사람이 죽었다니, 죽음이 익숙하지 않은 내게는 더더욱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더 큰 충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지금 이런 말씀을 올리는 것이 아닌 줄은 압니다만······.”

    “···?”

    “아무래도 모반이 아닌가 싶사옵니다.”

    억수 씨는 어렵게 본인의 견해를 피력했다.

    모반이라니······.

    “그, 근거는요?”

    “전령이 남긴 말이 사실이라면 적의 정탐 임무와 더불어 후미를 책임진 후위장과 중위장이 진영을 이탈할 까닭이 없사옵니다. 전령이 저리 된 걸 보면, 도원수께서도 어찌 되셨을지······.”

    “하지만 왜······.”

    나는 멍청하게 고개만 내저었다.

    중위장 장정.

    후위장 성희안.

    두 사람과 친분이 깊은 건 아니다.

    다만 이번에 북진하면서 제법 많은 대화를 나눴었다.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두 사람에게서 쿠데타의 기미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었다.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사람들이, “얼른 전쟁 끝나고 돌아가서 술이나 옴팡지게 마시고 싶군요.” 라던가, “개선 장군으로 돌아가게 되겠군요.” 같은 농담을 하진 않을 것 아닌가.

    하지만 보여지는 정황상 둘의 쿠데타를 부정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조선 생활에 나름 익숙해졌다고는 하지만 돌아가는 추이만 보고도 상황을 척척 알아 맞추지는 못 한다.

    돌아가는 추이만 보고도 상황을 알아 맞추는 일에는 오히려 억수 씨가 더 뛰어날 것이었다.

    그런 억수 씨가 조심스레 모반을 언급했으니, 두 사람과 나눴던 대화만 가지고 둘의 쿠데타를 부정 할 순 없었다.

    사람은 뭐든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야 하니까.

    “어떡해야 합니까?”

    별충위에 먹물 깨나 먹었다는 위사들이 널리고 널렸지만 그들에게 자문을 구할 수는 없었다.

    정말로 모반이라면 별충위에도 가담자가 있을지 몰랐고, 지금 상황에서 내가 믿고 의지 할 수 있는 사람은 억수 씨 밖에는 없다.

    흡사 판단을 종용하듯 묻자 억수 씨 역시 쉽사리 입 밖으로 꺼낼 일이 아닌 듯,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말씀 드리겠사옵니다.”

    “예.”

    “중위장과 후위장이 모반에 가담한 것이 사실이라면, 대감께서는 회군을 하셔야 하옵니다.”

    “···”

    역알못인 나도 위화도 회군은 골백번 들어봤다.

    굳이 위화도 회군이 아니더라도 왕정 국가인 조선에서 회군이 어떤 의미인지는 지난 1년의 경험을 통해 대충 알게 되었다.

    여기 조선에서 회군은 보는 시선에 따라 역모가 될 수도 있었다.

    “둘은 필시 도원수 대감을 인질로 잡을 것이옵니다. 중위장과 후위장이 함께 가담했다고 하니, 아마 후위와 중위 한 부대에서 도원수를 잡는 데 주력할 것이고, 남은 부대는 남하를 할 테지요.”

    “···”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말씀 아뢰겠다고 했으니 여기서 부터는 도원수가 생포됐다는 전제 하에 말씀 드리겠사옵니다.”

    끄덕.

    “도원수가 생포 된 게 확실하다면 북정군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 할 것이옵니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있지만 일단 전방에서 적과 대치 중인 전위와 우위는 군을 빼기 어렵사옵니다. 또, 이미 정보를 차단했을 가능성이 크옵니다.”

    “쿠데타··· 아니, 모반이 일어났는데요?”

    “전령은 중위장과 후위장만 언급했지만 얼마나 많은 가담자가 있을지 모르지 않겠습니까?”

    “아······.”

    “더욱이 지금 대감께서 회군을 망설여서는 안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에 나간 장수들만 모반을 일으킨 일은 없습니다. 필시 도성에서 주동하는 자들이 있을 겝니다.”

    아니, 그건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시피 한 문제였다.

    북정군이 정병들로 이뤄졌다고는 하지만 중위장과 후위장의 직할 부대는 8천에 불과하다.

    수도를 장악하지 못 한다면 금방 도처에서 모여드는 사단에 지리멸렬 할 게 뻔하다.

    그걸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들도 모르지는 않을 터.

    이렇게 된다면 오히려 8천의 중위와 후위는 북정군의 발목을 잡거나 도처에서 모여드는 구원군들을 차단할 목적일 가능성이 컸다.

    “아니, 잠깐.”

    “···”

    “도성에서도 반란이 일어난 거면 형님은요? 형님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하지만 섣불리 회군하시는 것도 위험합니다. 도성의 상황이 어찌 됐는지 알 수가 없는데 만약 반역도당들의 손에 대궐이 넘어 간 것이라면, 그래서 누군가 추대가 된 것이라면 어찌 추포령이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평안도 첨사(절도사)와 감사(관찰사)까지 가담을 한 것이라면··· 회군은 더더욱 어려운 문제가 되옵니다.”

    “허. 하지만 도대체 왜······.”

    빈혈기가 도는 것 같았다.

    휘청거리는 몸을 탁자에 의지한 채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내 스스로 훗날 중종이 된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반정을 막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이 왕자라는 직업으로 평생 꿀을 빨아야겠다는 단순한 생각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은 바뀌었다.

    저 사람이 성군으로 불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반정의 시발점이 되는 폭정과 사치는 없었다.

    공포 정치가 몇 차례 있긴 했지만 백성들을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니었고, 사치는 더더욱 없었다.

    가끔 사냥을 나가고 연회를 벌이긴 했지만 그거 조금 한다고 쿠데타가 일어나는 거라면 남아날 왕조는 없을 것 아닌가?

    그런데 반정이라니······.

    “어찌 하시겠사옵니까?”

    머리가 어지러워 속이 절로 울렁거리는데, 억수 씨는 판단을 종용했다.

    반정이 일어난 거라면 빠른 판단이 중요할 테니 내 부관으로 참전한 억수 씨로서는 당연한 종용일 테지만, 쉽지 않은 건 당연하다.

    나는 책임지는 삶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으니까.

    하다못해, 치킨이냐VS피자냐 짬뽕이냐VS자장면이냐를 두고 고민하다가 밥 때를 놓친 적도 있을 만큼 어물어물한 성격이었으니까.

    그런 내 눈에 부월이 들어왔다.

    형님이 하사한 부월이었다.

    “이걸 직접 쓸 일은 없겠다만 만에 하나라도 직접 쓰게 되는 것이라면 아군이 고전하고 있다는 뜻일 테니 최대한 몸을 사려야 한다.”

    형님이 이 부월을 주시면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시발, 진짜······.”

    어이없게도 눈물이 났다.

    아마,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과 저 부월을 하사하면서 내 걱정을 해 준 사람이 처한 어려운 상황이 얽히고 설켜서 생긴 눈물 같았다.

    “대감.”

    “···억수 씨.”

    “예.”

    “만약 회군이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장담을 할 순 없지요. 하오나 대감께선 대비마마께서 각별히 생각하시는 바가 있사오니 역적도당들이라 한들 교서를 받고 싶다면 함부로 하진 못······.”

    “아뇨, 나 말고.”

    “예?”

    “별충위는 어떻게 되는 거냐구요.”

    “아, 별충위요. 대부분이 반가의 자제들이니 역적도당들이라 한들 모두를 주살하진 못 할 것입니다. 그들을 전부 주살한다면, 후폭풍을 그들이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그래요.”

    “예.”

    “회군 합시다, 그럼.”

    “채비 하겠사옵니다!”

    투구를 챙겨 장막을 빠져나가는 억수 씨의 뒷모습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

    “주상, 속이 후련하시오?”

    백골의 윤필상이 일갈하자, 융은 허둥거렸다.

    “사, 상선! 상선!”

    “내 무슨 큰 죄를 지었소?”

    익선관까지 내팽개치며 도망치는 융의 다리를 누군가 붙잡았다.

    이극균이었다.

    “으아악!”

    이극균 역시 백골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놔라! 이, 이거 놔라!”

    융은 이극균을 뿌리친 채 하염없이 내달렸다.

    어둠 속에 사리분별이 쉽진 않았지만 무작정 달렸다. 조금이라도 지체한다면 백골이 된 윤필상과 이세좌가 또 모습을 드러낼 것 같았다.

    저 멀리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희무끄레하지만 분명 도포와 갓을 쓰고 있었다.

    “헉! 헉! 여, 여봐라! 저기, 지금······.”

    사람의 형체에 가까워지자 융은 그의 어깨를 돌려잡았다.

    예의 형체가 고개를 돌렸다.

    “허어억! 으악!”

    동공에 들어온 형체에 융은 볼썽사납게 나자빠지며 비명을 내질렀다.

    이번에는 이세좌였다.

    윤필상과 이극균이 백골의 모습을 하고 있었더라면, 이세좌는 목은 비틀려있었고 쩍 벌어진 입에서는 혀가 허리께까지 나와있었다.

    “주상.”

    “으아악! 네, 네놈은 죽었다! 주, 죽은 자가 어찌 산 자를 해치려 한단 말이냐!”

    “내 무슨 불경죄를 저질렀소. 도대체 무슨 불경죄를 저질렀기에 날 죽인 것이오?”

    “네, 네놈은 내 어미를 비명에 가게 만든 장본인 아니냐!”

    “주상··· 주상.”

    이세좌가 점점 다가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에게 손을 내뻗었을 무렵.

    퍼억!

    우지끈 소리와 함께 이세좌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았다.

    “뭐야, 이 자식은. 한 주먹거리도 안 되네. 형님 괜찮아요?”

    “지, 진성아!”

    ***

    “허억!”

    융은 단말마 비명을 토해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주변을 살폈다.

    곧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꿈이었다.

    “무슨 식은땀이······.”

    이불이며 옷가지며 모두 젖어 있었다.

    얼굴의 식은땀을 소매로 대충 닦아낸 그는 밖을 바라봤다.

    “밖에 장 내관 있느냐.”

    “···”

    “어허. 장 내관 있느냐.”

    “···”

    평소에도 꾸벅꾸벅 졸곤 했던 장 내관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융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을 막 열어젖혔을 무렵.

    “상선?”

    “저, 전하.”

    “아, 마침 잘 되었다. 내 방금 꿈을 꿨는데 꿈 속에 진성이 나왔다. 꿈이 비록 사람을 해치지는 못 하는 것이라 하나 내용이 뒤숭숭하니 벽단에 사람을 보내서 진성은 괜찮···응? 상선 괜찮은가?”

    융의 눈에 뒤늦게 상선의 몰골이 들어왔다.

    관모를 삐뚤하게 쓰고 있는 건 예삿일에도 끼지 못 했다.

    얼굴에 땀이 한가득이었다.

    “여, 역모이옵니다, 전하!”

    “역모?”

    융은 순간 인지부조화가 일었다.

    역모라니?

    애당초 역모의 징후는 전혀 없었다. 어처구니 없는 감이 없잖아 있었다.

    털썩!

    “박원종이 지금 흥인지문을 장악하고 장정들을 몰아 광화문에 도열했사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역모라는 것도 역모지만 역모의 주동자가 박원종이라니?

    박원종은 외척이었다.

    비록 요새는 그가 부르는 일이 뜸해졌지만 임사홍과 더불어 그의 총애를 사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속히 환복하시옵소서, 역적도당들의 기세가 만만찮아 곧 광화문이 뚫릴 것이옵니다. 빠져나가야 하옵니다, 전하!”

    “내가 이 나라의 임금이거늘 어딜 나간단 말이냐!”

    “전하. 크흑.”

    상선의 흐느낌 소리가 들려오던 그때.

    밖에서 창칼과 비명이 뒤섞이는 소음이 들려왔다.

    상석이 사색에 질린 표정으로 그의 손을 붙잡았다.

    “광화문이 뚫린 게 분명하옵니다! 소, 속히 빠져나가셔야 하옵니다!”

    융은 상선의 이끌림에 얼떨결에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상선을 뒤따랐다.

    저 멀리 요란한 비명소리와 함께 화마가 일렁이고 있었다.

    궁녀들은 겁에 질린 채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내관들 역시 허둥지둥이었다.

    이따금 금군들이 광화문 쪽으로 뛰쳐나가긴 했지만 그 수는 소수에 불과했다.

    상선의 말대로 역모가 확실했다.

    “신을 용서치 마시옵소서.”

    마침내 도착한 곳은 금구(궁궐의 도랑)였다.

    상선은 그를 금구 안으로 밀어넣었다. 그러고는 뒤늦게 본인도 들어왔다.

    “어, 어디로 가는 것이냐?”

    “일단은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이옵니다.”

    잠시 망설였지만 비명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상선의 말처럼 역적도당들의 기세가 만만찮은 것 같았다.

    그는 곧 엉금엉금 기어 상선을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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