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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78화 (78/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78화>

    막중한 소임을 맡았다

    ***

    전쟁을 하기 위해 출정을 했지만 의외로 전쟁 분위기는 전혀 나지 않았다.

    어쩌면 전쟁 치고는 북상하는 내내 너무 평온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17일 서대문을 통해 출정한 우리는 출정한 지 이틀 째 되던 날 개성에 도착했다.

    진격을 거듭해 그로부터 닷새 후에는 평양에 여장을 풀 수 있었다.

    일주일이 넘는 진군길이었지만 말했다시피 아무 일도 없었다.

    심지어는 탈영병도 없을 정도니 말 다 했다.

    평양에 도착했지만 곧바로 출발 할 수는 없었다.

    이번 전쟁에 동원된 군사는 총 29,255명이었다.

    3만에 가까운 병력이 모두 도성에서 출발한 건 아니었다.

    별충위를 포함한 일부 정병들은 수뇌부와 함께 도성에서 출발했지만 나머지 병력들은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세 개 도에서 차출한 병력들이었다.

    이들을 기다려야했다.

    가장 먼저 도착 한 건, 근접한 곳에서 가장 먼저 도원수 아저씨의 격문(檄文)을 받아본 평안도의 수령들이었다. 그 다음으로 황해도와 함경도 등지에서 군사들이 도착했다.

    군사들이 도착하고 회의가 시작되자 전쟁 분위기가 차츰 실감이 났다.

    “지부사(여자신)께서 좌위장을 맡으시고 참의(성희안)가 후위장, 판부사(구수영)가 우위장, 수원부사(장정)께서 중위장, 절도사(여윤철)께서 전위장을 맡아주십시오.”

    각각 보직(?)도 정해졌다.

    다른 사람들은 다 XX장이니 있어 보이는 직책에 보임됐는데 너는 뭐하냐고?

    나는 제일 중요한 보직을 맡았다.

    “그리고 대감께서는······.”

    “저는 뭘 할까요?”

    처자를 죽이고 황산벌에 나간 계백의 심정이 그러할까.

    전쟁에 나가기 전에는 심히 떨렸지만 막상 북상을 하니 그런 심경도 가라앉았다.

    나도 뭔가 맡았으면 하는 바람에 비장한 표정으로 되묻자, 도원수 아저씨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감께서는 예비대를 맡아주시겠습니까?”

    “예, 예비대요?”

    “예.”

    예비대.

    그러니까, 후방에서 기다리다가 일이 틀어지면 투입 되는 병력인 것이다.

    ‘안전하긴 한데······.’

    안전으로 치면 이만한 보직이 없겠지만 약간 허무했다.

    나름 각오를 다졌다고 다졌는데 예비대라니······.

    ‘그래도 뭐, 전쟁이 애들 장난은 아니니까.’

    하지만 내가 도원수 아저씨였어도 나같은(?) 놈한테 제대로 된 보직을 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

    소위 말하는 낙하산인데다가 내가 부상 입거나 하면 그 책임은 도원수 아저씨가 물어야 할 테니까.

    “목숨을 바쳐서라도 잘 예비하겠습니다.”

    “···목숨까지 바치실 필요는 없습니다.”

    농담이었는데 너무 진지하신 걸?

    “도하는 언제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전위장 여윤철 아저씨였다.

    듣기로는 좌위장을 맡으신 지부사 할아버지와는 부자지간이라던데, 크게 닮진 않은 것 같다.

    “부교를 가져오긴 했소만 다행히 강이 얼어 있다고 하니 지금이 적기 아니겠소?”

    일리가 있는 말인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진족은커녕 평안도 자체를 처음 와 보는 나는 그런가 보다 싶다.

    “문제는 진격로인데······.”

    “조정에서 정벌을 논의 할 때 전하께서는 만포진 방면으로 가라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하지만 만포에 3만 대군이 출몰한다면 오랑캐들이 어찌 모르겠소?”

    “놈들이 우리 계획을 알고 대비를 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얕게 침음한 도원수 아저씨가 탁자에 깔린 지도를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어느 순간 벽단(碧團)이라고 쓰여진 곳을 가리켰다.

    “길을 우회해서 이 벽단에 파진(진영을 세움)하는 것은 어떻겠소?”

    “벽단 말입니까?”

    “조종조 이래 오랑캐들에 대한 토벌이 있다면 토벌군은 만포를 지나치거나, 머물렀소. 오랑캐들도 머리가 있는 자들인데 당연히 정탐을 게을리 하진 않을 거요. 하지만 벽단.”

    도원수 아저씨가 다시금 벽단 방면을 가리켰다.

    “여긴 조종조 이래 토벌군이 진격로로 이용한 적이 단 한 번 밖에 없소이다. 영변을 거치고 삭주와 창주를 지나 벽단에 파진하여 적의 동태를 살피고 은밀히 강을 넘는다면 빠른 시일 안에 놈들을 토벌 할 수 있게 될 것이오.”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선대왕 시절에도 적에게 노출되는 바람에 토벌이 무색한 일이 되지 않았습니까.”

    역시, 선대왕 운운하고들 있으셨지만 선대왕의 일을 알게 뭔가.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는 그 날의 일은 모른다.

    그냥 잠자코 듣고만 있자 회의 결과는 자연스럽게 진격 루트를 수정하는 쪽으로 귀결이 됐다.

    조정의 재가를 받아야 하네 마네 잠시 설전이 오갔지만 전쟁의 권한은 일선 장수에게 위임이 된 데다, 시간을 지체하면 예전처럼 놈들이 알아채고 도망 갈 수 있다고 해서 선조치후보고 형식으로 진격 루트는 벽단 쪽으로 수정이 됐다.

    진격 루트가 수정되자마자 우리는 평양에 도착한 군사들을 점검했다.

    그리고 이튿 날.

    우리는 은밀하고 위대하··· 아, 아니.

    신속하게 벽단 방면으로 진격했다.

    평양을 떠난 게 25일 즈음이었고, 벽단에 도착한 건 그로부터 열흘이 지난 3월 5일이었다.

    ***

    벽단에 도착한 지 이틀이 지났다.

    정탐을 보냈던 척후병들이 돌아오자마자 도원수 아저씨는 도강을 개시했다.

    가져온 부교는 쓸모도 없었다.

    도원수 아저씨가 말한대로 강이 얼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강은 단 하루만에 이루어졌다.

    별충위를 제외한 2만 7천의 대병력이 하루에 걸쳐 도강한 것이었다.

    도강이 끝나자마자 도원수 아저씨께서는 전령을 보내오셨다.

    전령은, 북정군 전체가 이제 막 내부 협조자 격에 가까운 온하위의 영토에 들어섰고 정탐을 조금 더 해보다가 군사들을 추슬러 총공격을 개시하겠다는 말을 했다.

    나?

    아, 나는 가장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었다.

    무슨 임무?

    보급 기지는 진격 루트였던 평양-영변-삭주-창주-벽단-온하위에 세워졌다.

    벽단에서 예비대(?)를 맡게 된 나는 겸사겸사 벽단의 보급 기지를 지키는 임무도 할당 받았는데 다들 알잖은가?

    보급 기지를 지키는 일이 얼마나 막중한 일인지!

    막말로 이 보급 기지가 털리면 온하위 영토로 넘어가 있는 아군에 대한 보급이 끊길 수 밖에 없다.

    보급이 끊기면 당연히 아군은 지리멸렬이고.

    나는 별충위를 시켜 경계에 만전을 기하게 하면서 전령을 기다렸다.

    도원수 아저씨는 틈틈이 전령을 보내오셨다.

    아침에는 여진족 수급 30을 베었다는 전령을, 정오에는 밥을 지어 먹었다는 전령을, 오후에는 여진 부락 2개를 쳤다는 전령을······.

    전화기는커녕 전보(電報) 같은 게 있을 턱이 없으니 도원수 아저씨가 보내온 전령의 말을 나는 직접 받아 써서 평양으로 올려보냈다.

    그럼 평양에서는 다시 서울로 올려보내는 식이었다.

    그렇게 사흘이 흘렀다.

    다행히 도원수 아저씨가 보내오는 소식들은 대개 승전보들이었다.

    역알못에 이은 전알못(전쟁을 알지 못함)인 나였지만 만포를 거치지 않고 벽단으로 치고 올라가는 전략이 아주 다행히도 먹힌 것 같았다.

    소식을 들어보면 북정군은 아예 건주위를 유린하고 다니는 것 같았다.

    총공격 첫 날부터 지금까지 여진족의 수급만 1,000이 넘었다. 파괴한 가옥은 700채가 넘었으니 확실히 전황 자체는 밝은 편이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그래도 전쟁에 나왔는데 이렇게 꿀 빨아도 되나 죄책감이 들 정도로 시간은 지루하게 흘러간 어느 날이었다.

    “대, 대감! 대감!”

    잠에 취해 비몽사몽하는 날 부르는 목소리는 분명 억수 씨의 것이었다.

    “장기는 나중에 두게요, 나중에.”

    역시나 잠에 취한 채로 억수 씨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나 혼자 속단해서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 그게 아니오라 잠시 나와보셔야 할 듯 하옵니다.”

    “적이라도 왔어요?”

    나는 퉁명스럽게 말하면서 장막을 빠져나왔다.

    장막을 빠져나온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레 치켜떴다.

    “아니, 이게 뭔 일이랍니까? 의, 의원! 억수 씨 어서 의원 불러요!”

    나는 체통이고 뭐고 호들갑을 떨어댔다.

    아닌 게 아니라, 장막에서 날 기다리던 사람은 이미 수차례 본 전령이었다.

    평소와 다른 게 있다면 피칠갑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속히 소식을 조, 조정에 전해야··· 전해야 하옵니다······.”

    “이, 일단 몸부터 추스르구요. 의원 멀었어요?!”

    “대감.”

    “···?”

    “주, 중위장 장정과 후위장 성희안이 진영을 이탈했사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게? 중위장과 후위장이 진영을 이탈하다니요?”

    선뜻 이해가 안 가 되물었지만 전령은 이미 혼절한 뒤였다.

    나는 황망한 표정으로 억수 씨를 바라보았다.

    ***

    살곶이 다리.

    다리에는 사내들로 바글거렸다.

    특이점이 있다면 전원이 갑주나 무복을 입었다는 것이었다.

    “···”

    살곶이 다리 일대에는 이미 수백이 넘는 장정들이 도열해 있었지만 그 누구도 입하나 뻥긋하지 않았다.

    그들은 패용한 무구들을 만지작거리면서 초조한 모습으로 시간만 보냈다.

    반시진, 한시진, 두시진······.

    그렇게 밤이 깊어갈 무렵이었다.

    저 멀리 인마 한 기가 달려왔다.

    “영감.”

    하마한 사람은 안면이 있는 자였다.

    함께 거사를 도모하기로 한 북정군 종사관 윤귀수(尹龜壽)였다.

    먼 길을 달려왔는지 그의 몸에서는 역한 냄새가 풀풀 풍겼지만 원종은 아랑곳 않고 그를 맞았다.

    “인재가 보냈는가?”

    “예.”

    “인재는?”

    “진영을 이탈하시고 소인을 보내셨사옵니다. 중위장 나리와 함께 진영을 무사히 이탈하였으니 거병하시랍니다.”

    윤귀수의 말에 원종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곧 몇 사람을 지목했다.

    “자네들은 속히 제안대군의 저택으로 가서 극진한 예로 뫼시고, 자네들은 진성대군의 저택으로 가서 부부인을 뫼시게.”

    “알겠사옵니다!”

    원종에게 지목 당한 몇 사람이 서둘러 다리를 빠져 나가자, 원종은 철퇴를 집어 들었다.

    “드디어 때가 무르익었소. 북정군의 후위장과 중위장이 진영을 이탈하였으니 도원수도 함부로 남하하진 못 할 것이외다. 동지들, 이제 무얼 하면 되겠소?”

    좌중을 찬찬히 둘러본 원종은 손에 든 철퇴로 죽은 나무를 내려 찍었다.

    나무가 곧 우지끈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났다.

    “저 궐 안의 임금은 성품이 포악하고 주색에 미쳐 날뛰고 있소이다. 제 어미가 뒈진 일을 노신들에게 덮어 씌우고 조금이라도 폐비를 추숭하지 않는 기색을 보이면 쳐죽이려 하고 있으니 그 죄악을 어찌 귀신도 모르겠소?”

    “···”

    “지금이 절호의 기회요. 옛말에도 어리석은 임금은 폐하고 어진 이를 세우는 것은 신하의 도리라 하였소이다. 지금 임금이 하는 짓들을 보시오. 어리석은 걸 넘어 폭정이 따로 없소이다. 이에 마땅히 의리로서 군사를 일으키니 이 군사들을 복의군(復義軍)이라 칭하겠소.”

    “장군을 따라 뫼시겠사옵니다!”

    장정들이 군례를 올리자 흐뭇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원종은 준비된 말에 올랐다.

    목적지는 흥인지문(동대문)이었다.

    흥인지문에 도착한 그는 말에서 내린 채 조용히 기다렸다.

    갑주와 무기까지 챙겨든 모습에서, 분명 불순한 뜻을 갖고 접근한 무리란 걸 알 수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흥인지문의 수문군들에게서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끼이이익-.

    기다렸다는 듯 성문이 열렸다.

    열린 성문 틈으로 흥인지문 수문장 김종계(金從誡)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인이 뫼시겠사옵니다.”

    원종은 김종계의 안내를 받아 신속히 경복궁으로 향했다.

    머잖아 그들이 도착한 곳은 광화문이었다.

    “폐군을 사로잡아야 한다!”

    분주히 움직이는 수문군들을 일별한 원종이 손짓하자, 수백명의 군사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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