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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77화 (77/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77화>

    마음 한구석의 서늘함

    ***

    텅텅 빈 편전은 적막만 가득했다.

    적막 가득한 편전의 어좌에 홀로 앉아 대신들이 서던 반열을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융은 인기척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상선이었다.

    “채비가 끝났다고 하옵니다.”

    채비가 끝났다는 말에도 융은 한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상선.”

    “예, 전하.”

    “이번에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살아올 것 같은가?”

    “···”

    “또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거적에 실려 돌아올 것 같은가?”

    “···송구하옵니다.”

    상선의 말에 융은 한차례 피식거렸다.

    수만명을 사지로 떠밀었음에도 죄책감은 그다지 없다.

    다만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말로 형용하기 힘든 찝찝함이었다.

    이 찝찝함은 예전에도 느껴 본 적이 있는 기분이었다.

    어머니께서 폐비되던 날이었다.

    융은 그 날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그 날은 어머니에 대한 문안을 아뢰지 않았다. 가기 귀찮아 탈이 났다고 핑계를 대며 아뢰지 않았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찝찝했었다.

    철없던 어린 아이가 느끼기에도 거북한 찝찝함이었던지, 아침을 들자마자 문안을 드리러 갔지만, 그 때는 이미 늦었다.

    지금 느껴지는 찝찝함도 그랬다.

    “출정을 미루는 것은 어떻겠는가?”

    “예? 갑자기 말이옵니까?”

    융은 입을 오물거렸다.

    아무리 평생을 함께한 상선이라지만 단순히 기분이 쎄- 하다고 출정을 미루자는 말을 할 순 없었다.

    “아닐세. 가지.”

    “신이 뫼시겠사옵니다.”

    내관과 금군들의 호위를 받아 융이 도착한 곳은 서대문이었다.

    출정을 앞둔 장졸들은 이미 서대문에 모여 진을 치고 있었다.

    저 멀리 손을 흔들고 있는 진성 아우도 보였다.

    진성 아우를 보니 마음의 찝찝함이 조금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왕은 전한다.”

    털썩!

    수천에 달하는 장졸들이 일제히 부복했다.

    “나는 본시 덕이 없고 왕으로서 체통이 부족해 위엄을 갖추지 못 했다. 하지만 건주위의 족속들은 내 잘 안다. 이놈들은 비록 면상은 사람의 탈을 쓰고 있을지 모르지만 마음은 간사하여 돼지와 다름이 없으니 선동하고 약탈하며 병란을 일으키는 것이 곧 그들의 오랜 습성이다. 옛날에 여러 대왕들이 이 짐승들을 교화시키고 감화시키려 노력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그래서 무력으로 놈들을 무릎 꿇렸는데 지난한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들의 간사함이 실로 만천하에 드러나지 않았는가?”

    “···”

    “대왕들이 군사를 일으킬 때는 충돌이 없더라도 백기를 들고 나와 이마가 피로 흥건해지도록 땅에 찧어대면서 ‘우리는 번신입니다. 마땅히 입조하겠습니다.’ 굽실거리면서 목숨을 구걸하더니 지금 보라. 옛날 제놈들의 조상들이 머리를 땅에 쳐박고 목숨을 구걸하던 때를 잊고 다시금 변경을 어지럽히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

    “지금 놈들을 정토하지 않는다면 놈들은 필시 천세에 이르도록 우리를 얕잡아 보고 변경의 백성을 약탈하고, 우리의 진보를 넘으려 들 테니 내 어찌 군사를 일으키지 않겠는가? 이에 우의정 허침을 북정군의 도원수로 삼고, 진성대군 이역을 부원수로 삼아 휘하에 3만의 군사를 사령 할 수 있는 부월을 하사하니 도원수는 들어라.”

    “하교(下敎)하시옵소서.”

    “내가 바라는 것은 정토다. 하지만 그보다 더 바라는 것은 놈들이 다시는 날뛰지 못 하도록 아예 박멸을 시키는 것이다. 그대는 휘하의 3만 군사로 건주위를 철저히 박살내도록 하라. 설령 대국의 장수들이 황제의 위엄을 빌리더라도 건주위를 박살하는 일에 한치 주저함을 갖지 말아라. 그리하여 마침내 건주위를 역사에서 사라지게 만들라. 그러기 전에는 회군치 말라.”

    “명 받드옵니다!”

    “출정하라.”

    융의 명령에 고수들이 전고(戰鼓)를 쳐대기 시작했다.

    이어서 도열한 북정군이 질서를 지키면서 서대문을 빠져나갔다.

    북정군의 끄트머리 행렬의 군사까지 서대문을 빠져나갔지만, 융은 한동안 자리를 지키면서 그들의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늘이 맑구만.”

    융은 하늘을 눈에 한가득 담았다.

    날씨가 서늘해서일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건만 마음 한구석은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

    《중종실록》

    명(明) 정덕1년(1506) 9월 2일.

    <중종 반정을 일으키다>

    임금의 폭정에 지중추부사 박원종, 부사용 성희안, 이조판서 유순정 등이 거사를 주동하여 군자감부정 신윤무, 군기시첨정 박영문, 수원부사 장정, 사복시 첨정, 홍경주 등과 함께 거사하기를 밀약하였다.

    거사 전날 성희안이 김감과 김수동의 집에 가서 모의한 것을 고하고 이어 박원종, 유순정과 훈련원에서 회합하였다.

    삼경(오후11시~오전1시) 즈음 박원종이 곧바로 창덕궁으로 달려가 하마비동(용산구 효창동) 입구에 진을 치자, 이에 문무백관과 군민들이 소문을 듣고 나와 길을 가득 메웠다.

    유순, 김수동, 신준, 정미수, 송일, 이손, 이계남, 박건, 강혼, 한순도 함께 따라나왔다.

    주동자들이 구수영, 운산군, 덕진군을 진성대군의 저택에 보내 거사하는 곡절을 아뢰고 군사를 거느려 호위하게 하였다.

    또 윤형로를 경복궁에 보내어 대비께 아뢰게 한 다음 무사들을 시켜 신수근, 신수영, 임사홍 등의 집에 나누어 보내어 임금이 보냈다 핑계하고 끌어내 쳐죽였다.

    곧 한순, 서경생을 폐군(쫓겨난 임금)이 머무는 창덕궁에 보내 상황을 고하게 하니 폐군이 대답하기를,

    “내 죄가 중대하여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좋을대로 하라.”

    하고 곧 시녀를 시켜 옥새를 내어다 상서원 관원에게 내어 주었다.

    미시(오후1시~3시)에 백관이 궐에 들어와 반열에 따라 시립하고 대비의 교지를 반포하였다.

    “우리 나라가 덕을 쌓은지 백년이 더 되었고 두터운 은택이 민심을 흡족하게 하여 만세토록 뽑히지 않을 기초를 마련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지금 임금이 지켜야 할 도리를 잃어 민심이 흩어졌으니 마치 도탄에 빠진 듯 하다. 내가 생각해보건대 어리석은 이를 폐하고 밝고 어진 이를 세우는 것은 고금에 통용되는 의리이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 진성대군을 사저에서 맞아 대위(大位)에 나아가게 하고, 전왕은 교동에 안치하게 하노라.”

    교시를 들은 군신들이 부복하여 명을 받들고 기뻐서 날뛰고 환호하니, 환호성이 꼭 우레와 같았다.

    곧 진성대군이 익선관과 곤룡포【즉위할 때는 마땅히 곤룡포의 면류관(冕旒冠)을 사용해야 하지만, 이 관복을 사용한 것은 창졸간에 갖출 겨를이 없어서이다】차림으로 경복궁 근정전에서 백관의 하례를 받고 즉위하였으니 그가 곧 훗날의 중종대왕이시다.

    ***

    예의 사랑방에는 두 명의 선비가 마주 앉아 있었다.

    “인재(성희안의 호)와 인사는 좀 나누셨습니까?”

    하석에 앉은 사내가 상석의 노년인에게 물었다.

    노년인은 너풀거리는 수염을 한데 쥐어 모으면서 말을 받았다.

    “인사랄 게 있겠나. 그저 잘 다녀오라 말해줬네.”

    “황천길이 될지도 모릅니다.”

    노년인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 담이 약한 자가 어찌 거사를 주동했는지 모르겠군.”

    아닌 게 아니라 하석에 앉은 사내는, 노년인과 다르게 안절부절 못 하고 있었다.

    “이번에 치지 못 하면 내가 죽기 때문 아닙니까?”

    “인재(성희안의 호)가 있을 적에는 임금의 폭정 운운하더니 결국 본색은 제 목숨 때문인가.”

    “미물도 제 목숨 귀한 줄은 압니다. 그러는 영감도 제 목숨 귀한 줄 아시니 거사에 동의한 것 아니십니까?”

    노년인은 부정하지 않았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모습에 하석의 사내가 초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때가 되면 장수들이 인재와 함께 거병하겠지요?”

    “걱정도 팔자구만?”

    “제 목숨만 걸린 거면 이러지도 않습니다. 집안의 여러 목숨까지 걸린 일 아닙니까?”

    노년인은 다시 한 번 껄껄 웃었다.

    “백윤(박원종의 자). 하나만 묻겠네.”

    “지금 신선 놀음 할 때가 아닙니다. 선문답 같은 소리 하시걸랑 마십시오.”

    “자네는 어찌 거사를 주동했는가?”

    빠직.

    하석의 사내, 박원종의 이마에 힘 줄이 돋아났다.

    “선문답 같은 소리를 할 때가 아니라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묻는 말에 답해보시게. 자네는 어찌 거사를 주동했는가? 자네는 주상의 총애를 입는 인물이 아닌가?”

    총애 운운하는 노년인에 박원종은 실소를 터뜨렸다.

    “총애요? 영감의 눈에는 내가 지금 총애를 받는 것 같습디까?”

    “그게 아니면?”

    “내 저번에 목이 달아날 뻔 하지 않았겠습니까?”

    노년인은 금시초문이라는 듯 눈을 치켜 떴다.

    아닌 게 아니라 눈앞의 박원종은 자신의 먼 친척이기도 했지만 그 관계를 확실히 하자면 왕실의 일원이었다.

    그의 큰 누이 승평부부인(昇平府夫人)은 월산대군에게 시집 갔고, 작은 누이는 제안대군에게 시집을 갔었다.

    선대왕 이후 당대에 이르기 까지 그는 젊을 때부터 요직을 두루 전전했었다.

    그런 자가 목이 달아 날 뻔 했다니?

    “민망하여 인재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만, 넉 달 전에 풍원위의 종들이 패악을 일으킨 일이 있었습니다.”

    “그랬는가?”

    “주상께 그 일을 아뢰니 어찌 된 줄 아십니까?”

    “뭐라 했는가?”

    “천한 것들이 벌인 일로 네 명줄을 재촉하고 싶지 않거들랑 입 닥치고 있거라. 하셨습니다.”

    “농담 아니신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농담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진담이라면요? 최근 들어서 주상이 풍원위를 더욱 깊이 총애하고 있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숙청 문제도 그렇고··· 윤필상과 이극균이 그리 허망하게 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흐음.”

    “주상은 제 정신이 아닙니다. 당장 전쟁을 일으킨 것만 해도 알 수 있는 일 아닙니까?”

    “맞지.”

    “명에 귀부한 족속들을 토벌이 아니라 아예 박멸을 시키겠다니요? 대국에 주문한 연후에 황제의 재가를 받고 일을 벌이면 명분이라도 있겠지만, 아예 편전에서 대놓고 대국과 대국의 사신들이 알지 못 하게 전쟁을 준비하라 이르지 않았었습니까?”

    노년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실 모두가 전쟁을 찬성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이장곤과 같은 신진 관리만 아니었다면 주화파가 대세를 잡았을 것이고 주상도 함부로 전쟁을 일으키진 못 했을 것이었다.

    “대국이 알면 어찌 되겠습니까?”

    “뭐, 그것까지 우리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

    “연좌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보다, 괜찮겠나?”

    “뭐가 말입니까?”

    “제안대군 말일세. 자네와는 원한이 좀 있지 않은가.”

    아닌 게 아니라 제안대군이 김씨 부인 이후 들인 게 바로 박원종의 누이 박씨였다.

    그 다음 다시 이혼을 하겠다고 박원종의 누이를 종들을 시켜 모함했고, 끝끝내 이혼하자 박씨는 얼마 못 가 화병으로 죽고 말았다.

    박원종에게는 사사롭게는 제안대군이 매제였지만 그 관계를 파고 들면 원수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거사를 앞두고 원한은 무슨 원한입니까. 십수년 지난 일인데 잊은 지 오래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일세.”

    “문제는 대비전입니다. 제안대군을 내세운다면 대비전에서 승낙을 할까요?”

    “대비가 주상을 더 어여삐 여기겠나, 진성대군을 더 어여삐 여기겠나?”

    “배아파 낳은 자식은 진성대군이니, 진성대군을 더 어여삐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 진성대군을 볼모로 잡고 있으면 대비전에서 어찌 경거망동하겠는가. 대비전은 문제 될 게 없음일세. 거사가 벌어진 다음 그 저택을 포위해서 부부인을 인질로 잡고, 인재로 하여금 진성대군을 볼모로 잡게 하면 되니까.”

    “북정군이 회군할 가능성은요?”

    “주상이 건주위를 정토하기 전까지는 회군치 말라 하였으니 그들이 회군한다면 오히려 역모의 굴레를 씌울 수 있는 일 아니겠나?”

    “흐음.”

    “3만이란 숫자가 얼핏 보면 많아 보이네만 그것도 그들이 도열을 해야 많아 보이는 법이지, 장부상 3만이 무슨 대군인가?”

    “그렇긴 하겠습니다.”

    “무조건 속전속결일세. 조금이라도 지체되면 거사를 아니 일으킨 것만 못 하니.”

    “명심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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