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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76화 (76/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76화>

    술김에 섭소천을 봤다

    ***

    언젠가 친구의 추천을 받아 《천녀유혼》이라는 영화를 봤다.

    “중국 영화 노잼이잖아. 왜 봐?”

    아닌 게 아니라 나한테는 그런 편견이 있었다.

    내가 재밌게 본 중국 영화는, 감명 깊게 본 중국 영화는, 《마지막 황제》와 《색계》, 《일대종사》, 《말할 수 없는 비밀》정도였거든.

    그마저도 마지막 황제와 색계는 미국에서 제작했고, 말할 수 없는 비밀 대만에서 제작했으니 엄연히 중국 영화라고도 할 수 없었다.

    시원찮은 내 반응에 친구는 명작이니 꼭 봐보라고 했다.

    안 본다는 말을 하자 이런 건 혼자만 볼 수 없다며 만원을 손에 꼭 쥐어줬다.

    “뭔데?”

    묻자 친구는 만원의 댓가로 추천한 영화를 봐달라고 했다.

    “미친놈인 건 알았는데 돈까지 쥐어주면서 영화 보라고 하냐?”

    “꼭 봐!”

    친구의 신신당부와 함께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날을 정확히 기억한다.

    9월14일이었다.

    집에 가서 예전에 읽었던 김영하 작가의 《빛의 제국》을 다시 읽었다.

    시간이 남아 노트에 시를 끄적거렸고, 시를 다 끄적거리고도 시간이 남아 컴퓨터를 켰다.

    컴퓨터를 켜고 보니 친구 녀석이 말한 《천녀유혼》이 생각났다.

    얼마나 감명 깊게 봤으면, 나도 그 여운을 느끼게 하려고 돈까지 쥐어줬을까?

    인터넷에 검색하니 개봉 연도가 나 태어나기 한참 몇 년 전인 1987년도다.

    헛웃음이 나왔지만 전체적인 스토리 라인은 나쁘지 않은 것 같고, 감명 깊게 봤었던 마지막 황제도 1988년 개봉작이니 결국 영화를 봤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그 날 잠을 못 잤다.

    영화의 여운은 차치하고, 비단옷 펄럭거리며 날아다니던 작중 섭소천의 모습이 떠올라 거짓말 않고 밤을 꼴딱 새워버렸다.

    나 태어나기 전에는 한류 대신 항류(港流)가 있었다더니 왜 그런 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날 천녀유혼 2편과 3편까지 다 찾아보고 결국 수업에도 못 갔다.

    겨우 영화 한 편 본 게 무슨 대수라고 그걸 지금 시시콜콜 떠들고 있냐고?

    자고로 사건 없는 발단은 없다.

    사건이 없는데 술에 절어서 제 몸도 못 가누고 있는 내가 뭐한다고 구구절절하게 발단을 설명하고 있겠나?

    장황하게 천녀유혼의 섭소천을 언급한 건, 놀랍게도 지금 내 앞에 섭소천이 아른거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 섭소천?’

    창백하리만치 희고 고운 얼굴.

    가녀린 목덜미.

    보름달처럼 떠오른 볼의 홍조와 붉은 입술.

    버들처럼 가는 허리.

    마지막으로 바람에 나풀거리는 비단옷.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거, 취해도 너무 취한 것 같다.

    그러게 오늘은 좀 적당히 마시려고 했는데 부어라 마셔러 하니 헛 것이 다 보이는 것 같다.

    찰싹!

    이러면 술 좀 깰까 싶어 뺨을 세차게 걷어 올렸다.

    통증도 안 느껴질 만큼 술에 취했지만, 효과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섭소천의 모습이 조금씩 벗겨지기 시작했다.

    “여울 씨?”

    분명히 내 부인인 여울 씨였다.

    여울 씨가 왜 내 방에?

    의문이 들었지만, 그 이상의 생각을 할 순 없었다.

    또 정신을 잃었거든.

    망할 놈의 술.

    ***

    사람들은 인생을 흔히 위기의 순간들이라고 표현한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단 한 번의 선택으로 극락과 지옥을 오가게 되니 뭐,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지금 나도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았거든.

    무슨 절체절명의 순간이냐고?

    목이 타는 듯한 갈증 때문에 눈을 떴다. 자연스럽게 늘 머리맡에 두는 자리끼(머리맡에 두는 물)를 찾아 손을 뻗었고, 주전자 통째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으! 시원하다.

    원효대사가 느꼈던 해골물 맛이 이럴까.

    물을 맛있게 먹고 다시 잠자리에 들려던 순간.

    뒤늦게 방 안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르다.

    아무리 봐도 내 방과는 무척 다른 모습이었다.

    당장 경대(거울 달린 화장대)는 내 방엔 없는 물건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순간.

    새근새근, 옆에서 숨소리가 들려왔다.

    아닐 거야. 설마, 아니겠지.

    싶은 마음과 고개를 돌리자······.

    불행하게도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어떡하지?

    ‘일단 쥐도 새도 모르게 나가서 생각하자.’

    고민은 길었지만 행동은 짧았다.

    나는 옷가지를 조심스레 챙겨 도둑 고양이 마냥 까치발을 든 채 여울 씨 방을 빠져나갔다.

    아니, 빠져나가고 싶었다(?)

    “기침 하셨습니까?”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펄떡거리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괜히 경대를 만지작거렸다.

    “저, 기침 안 했습니다.”

    “하셨는 걸요?”

    “안 했······.”

    아, 그 기침이 아닌가 보구나.

    “흠흠.”

    어색함에 기침 안 했다고 우기다가 헛기침만 연신 터뜨리고 있는데, 문득 여울 씨가 눈에 들어온다.

    흰 소복에 곱게 풀어 헤친 머리.

    꿈에서 본 섭소천이 오버랩된다.

    ‘설마.’

    설마 싶지만 그 설마는 늘 언제나 사람 잡는다.

    첫째로, 나는 옷을 벗은 상태로 일어났다.

    둘째로, 부인도 소복차림이지만 옷을 벗은 상태였다. 여기선 여자가 소복 차림이면 실오라기 하나 안 걸쳤다고 표현하거든.

    셋째로, 허벅지가 땡긴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그래, 꽃샘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2월이지만 더워서 벗었다고 치자. 실제로 방안 열기가 후끈후끈 하니까.

    그런데 세 번째 이유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된다.

    이건 ‘그게’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더 얼굴이 화끈거린다.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런 일이 처음 있던 건 아니다.

    물론 진성대군이 되고 나선 없고, 내가 말한 건 전생이다.

    전생에 가끔 자고 일어났더니 전날 같이 술 마셨던 여자와 모텔에 함께 있는 경우는 왕왕 있었다.

    그때는 같이 모텔 나오면서 해장국 먹고 쿨하게 헤어졌었다.

    그런데 여기선 그럴 수도 없잖아?

    아니, 그럴 수 있고 없고를 떠나서 법적으로 부인되는 사람이다.

    ‘난 술 먹어서 아무고토 몰라요’라고 할 수가 없다는 소리다.

    “저기, 어제는······.”

    “···”

    여울 씨의 볼이 발갛게 물들어간다.

    “아니, 편히 쉬세요. 저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후다닥 방을 빠져 나온 나는 덕산이부터 찾았다.

    덕산이는 행랑에서 배를 벅벅 긁으면서 자고 있었다.

    “야, 덕산아. 덕산아! 덕산아 얼른 일어나 봐!”

    “음? 어쩐 일이세요, 대감마님?”

    “야, 나 어제 어떻게 들어왔냐?”

    “어제요?”

    “응, 어제 어떻게 들어왔어?”

    잠깐 기억을 더듬던 덕산이 대답했다.

    “어제 난리난 거 기억 안 나세요?”

    “난리? 무슨 난리?”

    “전하께서 행차하셨잖아요.”

    “형님이?”

    “네. 전하께서 직접 대감마님 업고 집에 왔는데요?”

    “그, 그리고는? 그리고 난 바로 잠들었지?”

    제발 그렇게 말해줘라.

    내 눈은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건만 눈치 없는 덕산이의 대답은 달랐다.

    “아뇨. 마당에서 펄떡거리면서 뛰어다니시더니 환궁하시려는 전하 붙잡고 한 잔만, 딱 한 잔만 더해요 하셨잖아요. 정말 기억 안나세요?”

    “···안 나.”

    “그리고 전하랑 한 잔 더 하셨는데?”

    기억에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리고?”

    “그리고 술에 잔뜩 취하신 전하께서······.”

    “전하께서?”

    “저희 시켜서 대감마님 안방에 뫼셔다 드리고 했어요.”

    전날 형님이 후사 운운하던 기억이 또렷하다.

    그 이상의 설명은 안 들어도 될 것 같다.

    “근데 그건 어찌 물으세요?”

    “됐다······.”

    나는 털레털레 내 방으로 돌아갔다.

    ***

    어색함 속에 하루, 이틀 보내다 보니 결국 결전의 날인 17일의 동이 트고 말았다.

    준비는 이미 2월 1일부터 했으니 따로 할 건 없었다.

    그저, 전하께서 하사하신 갑주와 부월만 챙기면 된다.

    동이 트자마자 집은 사람들도 북쩍거렸다.

    그간 알게 모르게 정이든 행랑 식구들은 물론 금석리의 소작농들, 그리고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모두 우리 집을 찾아왔다.

    “대감, 꼭 가셔야 해요?”

    이제는 내 제자이기도 한 개똥이가 훌쩍거리면서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가기 싫은 마음은 지금도 유효하다.

    하지만 안 갈 수는 없었다.

    “너도 같이 갈래?”

    “잘 다녀오세요.”

    개똥이가 배꼽 인사를 올린다.

    “개똥이 너.”

    “네?”

    “나 안 보인다고 공부 게을리 하면 안 된다.”

    “그럼요. 책 많이 읽고 있을게요.”

    팔을 크게 휘저으면서 책 많이 읽고 있을 거라는 개똥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대감. 꼭 큰 공을 세우시고 무사귀환하십시오.”

    개똥의 아비 팔석 씨였다.

    사실 공훈을 세우는 건 생각도 않는다.

    팔석 씨의 말처럼 살아서 돌아만 왔으면 하는 심정이다.

    “그리고 이거.”

    팔석 씨가 무언갈 건넸다.

    “뭡니까?”

    “저희 금석리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해서 용한 박수에게 받은 부적입니다요. 그 용하다는 박수가 삼십일간 치성을 들여서 쓴 부적이니 몸에 꼭 지니고 계십시오. 화살이 전부 비껴나갈 겁니다요.”

    조선판 카스트 제도에서 브라만 계급에 해당하는 나에게 무당이 만든 부적이라니··· 다른 사람이 들으면 경을 칠 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팔석 씨가 건네는 부적을 감사히 받아 들었다.

    “대감.”

    다음은 숭재 씨였다.

    “여, 숭재 씨.”

    “인기가 많으십니다.”

    “헛 살진 않았나 봐요.”

    피식.

    “함께 따라가고 싶습니다만, 부마가 종군한다는 건 또 다른 의미인지라 마음에만 그칩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요. 마음 쓰지 마세요.”

    한동안 말이 없던 숭재 씨가 내 손을 마주 잡았다.

    “닭살 돋는 표현은 따로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우리의 정이 깊어질대로 깊어졌으니, 대감께서 아니 계시면 제가 어찌 살을 쏘겠고, 누구와 술을 마시겠습니까?”

    “고맙습니다. 갔다 와서 거하게 쏘겠습니다.”

    “쏘신다고 하셨습니다. 기억하고 있지요.”

    이후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마지막은 부인 여울 씨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리를 비켜줬다.

    “안 가셔도 되지 않습니까?”

    눈시울이 붉어진 채 금방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여울 씨의 모습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이제 출정인데 안 갈 순 없죠.”

    “그래도······.”

    “걱정 마십시오. 남들 다 가는 군대고 어차피 안전한 후방에만 있을 텐데요. 또, 제가 만일에 대비해서 별충위를 훈련 시킨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

    “이거 받으십시오.”

    “뭡니까, 이건?”

    “원각사(圓覺寺)의 해용 스님께서 써주신 겝니다.”

    부적인 것 같았다.

    절에 다니시는 건 알았는데 부적까지 받아올 줄은 몰랐다.

    “원각사에 시주한 보람이 있네요.”

    무거워진 분위기에 나는 괜히 농담조로 말했다.

    실제로 여울 씨가 다니는 원각사에 시주를 몇 차례 한 적이 있었다.

    “흑.”

    여울 씨의 붉어진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또로록 흘러내렸다.

    당혹스러운 마음에 소매로 눈물 자국을 닦아줬다.

    “왜 울고 그래요?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울지 마십쇼.”

    “꼭 후방에만 계셔야 해요. 남들이 간다고 가지 마시고, 남들이 하자고 해서 하시면 아니 됩니다.”

    “염려 마십시오.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습니다. 하하.”

    어색하게 웃음을 터뜨린 나는 발길을 돌렸다.

    괜히 더 있으면 발길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별충위 위사의 안내를 받아 말에 오른 나는 대문 앞에 도열한 수십명의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다들 반 년 뒤에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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