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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75화 (75/365)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75화>

그래서 후사 계획은 없냐?

***

“이제 보름도 안 남았구나.”

“예.”

활시위에 화살을 먹이던 형님이 날 돌아봤다.

“의외로 담담하구나?”

전혀 담담하지 않다.

지금도 사실 입이 바싹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초조하고 긴장됐다.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지금도 심장이 두근거립니다.”

“하하. 네 장부처럼 굴더니 역시 내 알던 진성이로다.”

쐐애애액-!

피식거리던 형님이 활시위를 놓았다.

저 멀리 내관이 깃발을 펄럭거렸다. 과녁 한가운데 명중이었다.

“솜씨가 여전하십니다, 전하.”

풍원위 숭재 씨가 활터에서 내려오는 형님에 나이스를 외쳤다. 형님은 싫지만은 않은 듯 짐짓 거만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리셨다.

“그런가? 내 요새 활을 못 잡았더니 영 안 맞는 듯 한데.”

“하하. 설마요. 백발백중 아니셨습니까.”

그렇게 말한 숭재 씨가 앞전의 형님처럼 활시위에 살을 먹였다.

“그래도 별충위가 있으니 안심 아닙니까?”

“안심은 안심이지. 중신들의 말을 들었으면 큰 일 날 뻔 했어.”

난 어색하게 웃었다.

별충위.

그래, 얼마 전 한강변에서 열병식을 한 화제의 그 부대.

내가 처음 그 부대에 대한 훈련을 시키겠다고 하니 형님은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셨었다. 그러면서 “훈련만 시키지 말고 별충위는 네 직속으로 삼도록 하라.”하셨다.

너무 당연히, 그리고 너무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시길래 원래 왕자 씩이나 되는 사람이 전장터 나가면 이렇게 친위부대 성격의 부대도 하사(?) 해주는 거구나 싶었는데 웬 걸.

내막을 들은 장곤 선생님이 거짓말 않고 거품을 물었다.

그러면서 “행동거지에 각별히 주의하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연신 호통을 쳐댔다.

장곤 선생님에게 들으니 그건 대단히 무례한 일이라고 했다.

아니, 무례한 일이란 것도 장곤 선생님이 순화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지, 다른 대군이었다면 당장 역적으로 몰려도 할 말이 없는 처사였단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랬다.

별충위는 명실상부 사회 엘리트 층에 속하는 부대다.

양반 자제들 답게 말도 잘 타고 활도 잘 쏜다.

체격도 있는 집안 자식들이라 잘 먹어서 그런지 장대한 편들이었다.

실전만 안 겪었지, 제식 훈련만 하고 나면 정예라 해도 손색이 없는 수준의 부대인 것이다.

그 부대는 당연히 도성에 주둔 중이었다. 여기까진 문제가 안 된다.

근데 도성에 주둔 중인 부대의 훈련을 왕자대군이 시키고, 그 부대의 장이 왕자대군이다.

사람이 한 번 의심을 갖게 되면 방귀만 뀌어도 의심하게 된다고, 역모를 꾸미려고 한다는 의심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좌우지간, 그런 생각을 나만(?) 못 했지 다른 중신들은 다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별충위를 훈련 시키겠다는 말에 개거품 물면서 중신들이 반대했었다.

뭐, 보다시피 전하가 대수롭지 않게 수락하신데 모자라 내 휘하에 넣어주셔서 이미 다 지난 일이 되었지만.

“그러게 말입니다. 중신들의 말을 가납했으면 그런 정예군을 어디서 구할 수 있었겠사옵니까?”

퉁!

쐐애애액-!

“오. 풍원위의 실력도 과연 죽지 않았다. 명중이 아니냐.”

“운이 좋은 듯 합니다. 하하.”

과녁에서 살짝 빗나가게 명중을 시킨 숭재 씨가 활터를 내려오자, 그 자리에 내가 올랐다.

나 역시 활시위에 화살을 먹였다.

“진성아, 호흡이 중요하다. 숨을 깊게 들이 마시고 손 끝에 느낌이 든다면, 그때 살을 놓거라.”

“후우······.”

형님의 말처럼 숨을 깊게 들이 마셨다.

그리고, 지금!

쐐애애애액!

펄럭!

쏜살같이 쏘아져 나간 화살이 과녁 한가운에 꽃혔다.

과녁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서 이를 지켜보던 내관이 명중을 알리는 깃발을 펄럭거리자 나는 신이 나서 펄쩍펄쩍 뛰었다.

“호우! 호우!”

이번에도 역시 호우 세레머니를 터뜨리면서 말이다.

“하하하. 그리 기쁘냐?”

“과녁 한가운데 명중 시킨 건 처음 아닙니까. 크크크.”

“나도 이제 좀 마음이 놓인다.”

나는 숭재 씨를 바라봤다.

숭재 씨는 당연히 내가 쏜 살이 과녁을 빗나갈 줄 알았던지, 장난스레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그런 숭재 씨에 나는 말없이 고갯짓을 했다.

내 시선이 닿은 곳은 술상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술상 위에 벌주가 한가득 담긴 대접.

“이거 마시면 정말 취하겠군요······.”

“벌주는 벌주니까? 원샷.”

“후.”

숭재 씨는 대접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도 그럴 게 폭탄주다.

소주와 탁주 별에 별 술이 다 들어갔다.

벌컥벌컥!

“풍원위가 벌주를 다 들이키고 있지 않느냐! 풍악을 울려라!”

인상을 구기면서 대접 안에 든 술을 원샷(?) 하는 모습이 그리도 우스웠던지 킬킬거리던 형님이 악공들에게 지시했다.

악공들이 풍악을 울리자, 경회루에는 때아닌 음악 소리가 장쾌하게 울려퍼졌다.

“크으. 독하군요.”

숭재 씨의 반응에 우린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그러고는 술상으로 가 앉았다.

술이 몇 순배 계속 돌았다.

나는 나대로 불콰하게 취했고, 형님은 형님대로 불콰하게 취했으며, 벌주를 한 대접 먹고도 끄떡없던 숭재 씨는 술자리가 한시간 이상 지속되니 소리 소문 없이 떡이 되어 있었다.

“풍원위 이놈이 이제는 임금 앞에서 고꾸러져 있구나?”

딸꾹!

“저도 고꾸러질 것 같습니다.”

“안 된다. 불경이다, 불경. 한 잔 더 하자꾸나.”

“예, 형님.”

쪼로록-.

술잔을 받은 나는 스트레이트로 술을 꺾어 마셨다.

얼마나 마셨으면 술맛이 나지도 않았다.

분명 한시간 전까진 역겨운 맛이라도 느껴졌던 것 같은데······.

“보름도 안 남았구나.”

“예? 보름달 떴어요?”

피식.

“아니··· 전쟁 말이다, 전쟁. 이제 보름도 안 남았어.”

“안 가면 안 될까요. 가기 싫은데··· 으으.”

“하하. 가기 싫다면 아니 가도 된다. 누가 뭐라 하겠는고?”

“···농담이었어요. 가야죠. 가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해야죠. 어우, 취한다.”

“진성아.”

“네.”

“네가 이제 곧 전장터에 나가게 됐으니 하는 말인데 말이다.”

“말씀하세요.”

“후사는 언제 볼 참이더냐?”

“무슨 사요?”

“후사 말이다, 후사.”

“아, 후사. 후사 좋죠. 근데 후사가 뭡니까?”

“푸하하. 밤일을 모른단 말이냐?”

“밤일요? 아, 그 후사······.”

“들어보니 안방에서 잠을 청한 적이 한 번도 없다더구나?”

“그걸 또 들으셨네.”

형님이 어깨를 으쓱거리신다.

“내가 이래뵈도 임금 아니냐.”

“스읍. 후사 계획은 아직 없어요. 나이도 어린데······.”

“그래도 후사는 봐야지. 어마마마께서 부부인(대군의 부인)을 부르는 일이 많던데.”

“그래요?”

“오늘 딱 가서, 어? 거사를 어? 치러야 하느니라.”

“에이, 둘다 미성년자예요.”

“미, 미성··· 응?”

“아직 이르다구요.”

“어명이다, 어명. 치르거라. 알겠느냐?”

형님이 하는 말이 이제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것 같긴 한데 뭐라고 하시는 거지?

“으으.”

철푸덕!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

사랑방에는 세 명의 선비가 마주 앉아 있었다.

세 선비 모두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흡사 무슨 일이라도 치룰 듯, 표정도 비장했다..

기껏 사랑방에 마주 앉은 세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자색빛이 감도는 답호를 입고 있는 중년인이었다.

“결국 오고 말았군.”

“후회되는가?”

“후회랄 게 있겠는가. 이미 시작된 일인데.”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다시 세 사람은 말이 없었다.

그러기를 한참.

너풀 수염이 인상적인 노년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누굴 추대하는 게 좋겠는가들?”

“진성대군은 어떻습니까?”

자색빛 답호 사내가 말하자, 상석의 인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성대군은 아니되네.”

“하지만 진성대군만한 적임자가 없지 않은가?”

“진성대군은 오늘도 경회루에서 주상과 노닐다가 갔네. 따르는 바가 마치 부모를 공경하는 것과 같은데 아무리 진성대군이 뭘 모른다 한들 우리의 추대를 달갑게 여기겠는가? 더군다나 그때 쯤이면 오랑캐들과 칼을 맞대고 있을 텐데······.”

“오늘도 경회루에 왔단 말인가?”

상석 사내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노년 사내가 물었다.

“예. 공좌부(관리들이 출근 때 적던 명부)에 수결 놓는 것도 아니고, 오늘로 벌써 사흘 연속입니다.”

“허. 말세구만.”

“그러니 우리의 거사가 더 의의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흐음.”

“누가 좋겠는가?”

다시 자색빛 답호 사내였다.

“예종께서 승하하시고 선대왕께서 정통을 잇지 못 했으니 정통이 돌아가야 한다면 제안대군(齊安大君)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제안대군? 하지만 제안대군은 평원대군의 봉사손(후사가 없는 이의 제사를 받드는 자손)으로 출계(出系)하지 않았는가? 이미 출계하였는데 어찌 예종대왕의 정통을 운운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천하에 정통이란 게 남아있던가? 그깟 정통이 무에 대수인가.”

“흐음.”

“제안대군 외에 대안은 없음일세. 알지 않는가.”

“다른 왕자군도 많지 않은가.”

“보위에 올라 제안대군만한 왕자군이 있는가?”

“그렇기는 하네만······.”

“제안대군이 적격일세.”

상석의 사내는 금방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소위 주무르기 쉬운 인물은 제안대군이 전무후무했다.

눈은 늘 게슴츠레 뜨고 다니고 정신도 흐리멍덩해서는, 천치도 그런 천치가 없었다.

왕실 종친으로서의 체통도 전혀 없어, 길을 가다 나자빠져도 벌떡 일어나 헤실거리기 일쑤였고, 심지어는 변덕도 심해 선대왕이신 성종에게 부인과 갈라서게 해달라 떼를 쓸 정도였다.

그 떼가 구중궁궐의 담장 밖까지 전해진 지라 알 만한 백성들은 다 알 만한 일이었다.

부인과 이혼시켜주지 않는다면 앞으로 식음을 전폐하겠다는 말에 식겁한 선대왕이, 마침내 전 부인 김씨와 갈라서게 해주었는데 병신도 그런 병신이 없지, 대뜸 헤어진 전 부인과 은밀히 사통하고 있다는 보고가 곳곳에서 날아들었지 뭔가?

여기서 끝이 아니다.

후처로 들인 박씨가 여종과 동침한다는 혐의로 압송이 되었는데 내막을 알고 보니 여종들의 모함이었다. 그 여종들의 모함도 결국은 제안대군의 사주로 인한 것이었다.

여종을 사주해 부인을 모함한 일이 알려졌음에도 철면피도 그런 철면피가 따로 없지, 끝까지 본인은 사주하지 않았다고 잡아떼면서 박씨와 이혼시켜달라 또 떼를 써댔다.

두손, 두발 다 든 선대왕이 결국 이혼을 시켜주자 이제는 헤어진 전 부인 김씨와 재결합해달라는 상소를 올리면서 아예 “이것도 허락 안 해주면 평생 혼인은 하지 않겠습니다.” 으름장을 놓았다.

결국 헤어진 전 부인 김씨와 다시 살게 되었는데, 평범한 사람들은 평생가도 안 저지를 병신짓을 불과 약관의 나이에 다 저질렀으니 아둔하기도 이만큼 아둔한 인사가 없는 것이었다.

“흠. 하지만 세간에는 제안대군이 일부러 어리석은 척을 하고 다닌다는 소문도 무성하지 않나?”

피식.

“제안대군의 어리석음은 이미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사실일세. 아무리 총명함을 숨기려 하는 사람일지라도 죄없는 부인을 버리고, 다시 들인 부인을 모함하여 버리고, 다시 전처와 합하는 경우는 없음일세. 그리고 자네 못 들었는가?”

“뭘 말인가?”

“일전에 제안대군이 길을 가다가 계집종이 오줌 누는 걸 우연히 봤다고 하네.”

“한데?”

“제안대군이 몸을 구부리고 계집종의 음부를 쓱 살펴보더니 뭐라고 했는줄 아는가?”

자색빛 답호 사내의 말에 노년 사내는 이미 알고 있는 일화인 듯 피식거렸다.

“뭐라고 했는가?”

“메추리 둥지를 품고 있구나. 라고 하였다지 뭔가?”

“메추리 둥지?”

“음부를 보고는 털이 무성하게 자라있으니 그걸 보고 메추리 둥지라 한 게지.”

“하. 설마.”

“참말일세. 이런 자를 보위에 올려야 우리가 살 수 있는 걸세. 그리고 우리 살아야 나라의 앞길이 밝지. 지금 보시게. 주상이 미쳐도 보통 미쳤는가?”

“···”

“제 애미가 뒤진 게 어디 우리 탓인가? 거기다, 어련히 잘못이 있었으니 폐했지, 잘못이 없다면 어찌 명군이라 이름 드높은 선대왕께서 폐하셨겠는가. 그런데도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서 제 애미 치마폭 안에서 놀려고 하니, 지금 시국이 어찌 되었나?”

“우습게 됐지.”

“바로 그걸세. 지금은 광증이 조금은 잠잠해졌지만, 언제 또 발작할지 모르네. 그때는 주상의 눈 밖에 난 자네와 내가 화를 입겠지. 조지서가 어찌 화를 입었는가? 직간을 하다가 화를 입은 걸세. 제 애미의 일은 명분에 지나지 않아. 결국은 심기를 언짢게 하는 것들은 모조리 쓸어버리겠다는 게지.”

맞았다.

그래서 이렇게 거사를 도모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거사는 언제가 좋겠나?”

질문을 받은 자색빛 답호 사내는 노년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참판께서는 언제가 좋을 듯 싶습니까?”

“당초 예정된 대로 전쟁이 터지면 함세. 나라의 온신경과 무력이 북쪽으로 쏠리게 될 테니, 그때가 절호의 기회일세.”

“하면 17일에 출전하기로 되어 있으니······.”

“북정군이 강을 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거병해야지. 아마 25~8일쯤 되겠군.”

“북정장수 중에 동조하기로 한 사람은 모두 몇 입니까?"

노년 사내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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