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74화>
별충위장의 열병식
***
겨우내 막연하기만 하던 전쟁 분위기는 새싹 돋는 봄이 다가오면서 실감이 났다.
이제 정말 빼도박도 못 했다.
지난 가을~겨울 동안 전국 각지에서 조운선을 통해 군량미가 보내졌다.
물론 군량미 대부분은 사족들에게 나왔다.
너 군대 갈래?
이 질문의 효과는 생각 이상으로 컸다.
평시에도 군대에 끌려가기 싫은 법인데 지금은 전쟁이 예상된 시점이었다.
개죽음도 분수가 있지, 전쟁터 끌려가서 죽는 것 만큼의 개죽음은 없다고 생각했는지 평소에 흉년이 들어도 쌀 한 톨 안 내주던 양반님들은 앞다투어 국방세(?)를 납부했다.
이게 모두 60만석이었다.
도중에 썩어서 버리고 조운선이 좌초돼 쓸 수 없어서 버린 곡식들은 제외하고 60만석.
이 정도면 조선의 한 해 예산에 맞먹는 수준의 돈이라니 얼마나 대단한 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국방세(?)를 납부하고 군대를 빼려고만 했던 건 아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용어만 없지, 사회적 책무를 다하려는 사람들은 자제를 입대시키려고 하거나 혹은 본인이 자원하는 일도 많았다.
그게 자그마치 900명이 넘었다.
천만 인구에서 900명이면 적은 거 아니냐고?
천만에 말씀 만만의 콩떡.
천만 인구에서 양반 인구는 20만도 채 안 된다.
그 20만도 노인과 여자를 포함한 수치인데, 그중에서 900명이 자원 입대를 결정했으니 절대 적진 않다.
이들은 모두 별충위(別忠衛)라는 명칭의 부대로 배치가 됐다.
보통 양반의 자제들은 별시위(別侍衛)에 배치를 시키거나 취재(시험)를 거쳐 각 오위에 갑사로 배치 시켰는데 정원이 꽉 차 있다보니 별도의 부대를 창설 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게 바로 별충위 인 것이다.
양반 자제들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겠답시고 자원 입대했는데 그럼 너는 뭐하냐고?
나는······.
“대감. 전하께서 이제 막 궐을 나오셨다고 하옵니다.”
내 부관으로 참전하게 된 억수 씨였다.
부관으로 참전하게 된 덕에 종9품의 아이권관에서, 아이진에 부임도 안 해보고 종7품의 부사정(副司正)으로 파격 승진을 해버렸다.
“갑시다.”
매서운 한파에 남바위(방한모)를 여미고 억수 씨를 따라 도착한 곳은 한강변이었다.
오날늘의 한강변에는 모래 사장을 찾아 볼 수 없지만, 지금의 한강변은 드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드넓은 모래사장에는 별충위의 위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대대장들좀 불러줘요.”
“예!”
잠시 후.
정식 명칭은 당연히 대대장이 아니지만, 내가 편의상 대대장이라고 부르고 있는 분들이 일제히 내달려왔다.
“불러 계시옵니까?”
“이제 곧 전하께서 행차하십니다. 만반의 준비를 갖췄으니 실수는 없겠지만, 긴장을 늦춰서는 안 돼요. 무슨 뜻인지 알지요?”
“이를 말이옵니까. 염려 마시옵소서.”
“억수 씨.”
“하명하십시오.”
“뭐 그렇게 바짝 얼어 있어요. 평소처럼 하면 되지.”
바짝 얼어 있는 억수 씨에 가볍게 농을 던지자, 억수 씨가 경직된 표정 그대로 어색하게 미소 짓는다.
피식.
“갑동 씨 도착했대요?”
“파진군들 말입니까.”
“네.”
“이미 위사들보다 먼저 도착해서 준비를 끝마쳤사옵니다.”
“좋습니다.”
말에서 내린 나는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긴장된다.
뭐 때문에 긴장이 되냐고?
오늘 열병식(閱兵式)이 있다.
다른 게 아니라 이 별충위의 장이 바로 나다.
900명의 양반 자제들이 자원 입대를 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사회적으로 봤을 때, 엘리트라 해도 부족함이 없는 자원들이다.
그런 엘리트를 최전방에 배치 시키는 지휘관들은 없고, 그건 전하와 중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따로 별충위라는 이름으로 부대까지 창설이 된 건데, 공교롭게도 그 장은 내가 맡게 되었다.
이들의 임무는 전쟁 발발시 수뇌부에 대한 호위지만, 전쟁이 발발하기 까지 놀리고만 있을 수 있겠나?
나야 뭐, 전쟁터 가면 안전한 후방에 있겠지만 만약 여진족들이 기습 공격이라도 감행하면?
그런데 이들이 전부 훈련이 안 돼 있으면?
나는 그 날로 인생 하직이다.
대군으로 인생 꿀빨게 된 것도 잠시고, 시호하나 덩그러니 올라간 채 개죽음 맞는 것이다.
그럴 순 없다는 생각에 전하께 직접 부탁해서 지난 3개월간 이들을 훈련시켰다.
훈련이라고 해도 별 건 없었다.
병장으로 만기 전역한 내가 무슨 훈련을 시키겠나?
양반 자제들답게 활쏘기에는 능통했고, 말타는 일에도 능통했다.
그저 3개월간 제식··· 아니, 진법 훈련 정도만 했을 뿐이다.
그리고 오늘은 그 훈련의 결과물을 보고 싶다던 형님에 의해 열병식을 하게 된 날이다.
전쟁을 앞두고 아군의 사기를 고취시키고, 백성들의 동요도 잠재울 겸, 정예한 병력들로 열병할 필요성도 있다는 중신들의 의견도 반영이 된 열병식이었다.
“주상 전하 납시오!”
얼마나 기다렸을까.
임금의 행차를 알리는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형님이 모습을 드러내셨다.
“네 이리 보니 늠름하구나.”
나는 멋쩍게 웃었다.
“바로 시작할까요?”
“경들은 어떠한가?”
“시작하시지요.”
전하께서 날 보고 고개를 끄덕거리자,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등채를 높이 들어올렸다.
멀찍이 떨어져서 신호를 기다리던 고수(鼓手)들이 준비된 북을 쳐대기 시작했다.
둥! 둥! 둥!
장엄하기까지한 북소리가 시작이었다.
북소리를 시작으로 모래사장에 도열해 있던 별충위의 마군들이 창을 곧추 세우고 말을 내달렸다.
두두두두!
천지를 진동시키면서 내달린 그들의 창 끝에 걸린 건 표적이었다.
그들이 마침내, 표적으로 내걸어 둔 표주박을 산산조각내자, 한강변에는 감탄이 크게 울려퍼졌다.
표주박을 산산조각내버린 마군들은 곧장 창을 내버리고 대오를 맞춰서 회군을 했다. 돌아오면서 그들이 꺼내든 것은 등에 맨 궁시(활과 화살)였다.
쉭! 슈슉!
그들이 쏜 화살은 일제히 준비된 과녁들에 꽃혔다.
“마군들은 물리고 삼수(三手)들 투입할까요?”
묻듯이 명령하자, 억수 씨가 기패수에게 적색 깃발을 들게 했다.
그러자 예의 고수들이 북과 징을 3번 교차해서 두드렸다.
북과 징소리에 천지를 진동시키면서 위엄을 보여줬던 마군들이 좌우로 산개하듯 모래사장을 벗어나고, 그 자리를 삼수병들이 메웠다.
팽배수(방패병), 사수(궁병), 살수(근접병) 순이었다.
삼수병들의 앞에는 적색 두건을 착용한 가상 적군(?)들이 시립해 있었는데, 그들의 등장에 1보, 2보씩 절도 있게 전진하던 삼수병들이 걸음을 멈춰세웠다.
팽배수들은 장방패를 모래사장에 내꽃고 진열을 가다듬었고, 그 뒤의 사수들은 활시위에 화살을 먹였다.
“발사하라!”
군관들의 외침에 사수들이 시위를 놓았다.
그들이 시위를 놓자마자 쏘아 올라간 화살들이 가상 적군들에게 내리꽃혔다.
화살촉을 제거하고 끝을 뭉툭하게 만들어 살상력이 전혀 없는 화살이었지만, 가상 적군들이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시늉을 하자, 역시나 감탄성이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열병식을 구경나온 백성들은 물론이고, 중신들 마저 감탄을 터뜨렸다.
가상 적군들이 화살에 맞고 픽픽 쓰러지자, 화살을 쏜 사수들은 일제히 좌우로 물러났고, 모래사장에 임시로 방패벽을 세웠던 방패수들 역시 썰물빠지듯 좌우로 물러났다.
그러자 흔히 사극에서, 아니 요즘도 경복궁가면 볼 수 있는 별감복차림의, 쉽게 말하면 홍철릭과 빨간 깃이 인상적인 주립 쓴 살수들이 일제히 짓쳐 나갔다.
그들은 가상의 적들과 가상 전투(?)를 벌였다.
물론 사전에 짜여진 각본대로 가상의 적군들은 살수들의 목검질에 픽픽 쓰러져나갔다.
가상의 적군들이 모두 쓰러지자, 다시금 팽배수들이 다가와 살수들을 겹겹이 에워쌌다. 그러고는 유유히 장내를 빠져나갔다.
‘뻑이 가겠군.’
이제 대망의 하이라이트다.
이번 건 감탄 정도론 안 끝날 터였다.
“파진군들 들이죠.”
“예!”
역시, 신호에 따라 이번엔 취수(吹手)들이 나발을 길게 불었다.
그러자 가벼운 무복차림의 파진군(화포장)들이 등장했다.
물론 파진군들만 등장하진 않았다.
갖가지 화약 무기들도 함께 등장했는데, 대표적인 건 화차였다.
파진군들은 화차와 화포로 분위기를 분위기를 띄웠다.
그리고 드디어 하이라이트였다.
파진군들이 모래사장 한 가운데 허수아비를 촘촘이 세워두기 시작했다.
한강변의 열병식을 구경하러 온 백성들은 물론이거니와, 중신들 마저 고개를 갸웃거릴 무렵.
모래사장에 허수아비를 세운 파진군들은 이번에는 낑낑거리며 중완구(중간 크기의 화포)를 배치시켰다.
“화포는 아까 쏘지 않았었나?”
“그랬지. 뭐, 또 쏘려나 보지.”
백성들의 수군거림이 커질 때, 나는 억수 씨에게 말했다.
“구경온 사람들 다칠 수 있으니 각별히 주의해서 선 넘는 사람들은 제지하라 하시고, 팽배수들한테는 방패벽 세우라고 해주세요.”
“예!”
장방패를 든 팽배수들이 혹시 모를 사태에 일렬횡대로 방패벽을 세우자, 백성들의 소란은 더 커졌다.
그 사이.
파진군들이 낑낑거리며 박 형태의 포환 비스무리한 걸 들고 나타났다.
예의 포환을 완구에 장전한 파진군들이 명령을 기다렸다.
“전하께서 방포령 내리실래요?”
“그럴까?”
구군복 차림의 형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내게 건네 받은 등채를 높이 쳐들었다.
“방포하라!”
“방포하랍신다!”
뿌우우우-!
둥! 둥! 둥!
일전의 취고수(고수와 취수)들이 각각 하나의 악기로 신호를 알렸다면, 이번에는 취수와 고수들이 각각 북과 나발을 불었다.
신호를 받자 파진군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심지에 불을 붙였다.
쾅! 콰쾅!
심지 끝이 타들어가고, 총 20여 문의 화포에서 일제히 불을 뿜어댔다.
“···?”
강력한 포성이 무색하리만치 데구르르 힘없이 모래사장으로 굴러간 포환에 모두의 얼굴에 의문문이 떠오를 즈음.
동시다발적으로 폭발이 일었다.
펑! 퍼펑!
폭발력은 어마무시했다.
파진군들이 방금 전 세워둔, 허수아비들이 갈기갈기 찢겨나가거나 픽픽 쓰러졌다.
“저, 저게 무엇이냐?”
갑작스러운 폭발에 놀라기는 형님도 마찬가지였는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물으셨다.
“제가 예전에 설명드린 거 있죠?”
“예, 예전에?”
“비격진천뢰요.”
“비, 비격진천뢰··· 비격진천뢰··· 아, 생각이 나는구나. 그게 저것이란 말이냐?”
나는 생글거리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바로 한달반 전쯤 완성된 비격진천뢰가 맞았다.
“허어. 신통하구나. 참으로 신통해.”
***
열병식 아닌 열병식은 성황리에 끝이 났다.
비록 별충위에 국한된 열병식이었지만 한강변에 모인 사람들 모두 만족한 표정으로 돌아가는 걸 지켜 볼 수 있었다.
비격진천뢰의 위력을 직접 보신 형님께서도 군기시에 따로 명해 비격진천뢰의 생산량을 늘리라 주문하실 정도였고, 편전에서는 비격진천뢰의 위력을 본 중신들과 함께 전방에 배치 여부를 논할 정도였다.
그렇게 나는 나대로 비누 사업 때문에, 조정은 전쟁 준비 때문에 하루를 바쁘게 보내다보니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그리고 2월.
결전의 날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