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70화>
어서와, 지옥은 처음이지?
***
크흑!
연신 내 걱정만 구구절절(?)하게 읊는 형님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하지만 진짜 울어서는 곤란했다.
나는 자못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하께서 아우를 생각하는 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전에 편전에서 말씀 드렸던 것처럼,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일수록 책임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종친으로서 사회적으로는 최상위에 있다 할 수 있는데, 그런 제가 아무런 도덕적 의무를지지 않는데 누구에게 도덕적 의무를 강요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 튕긴 것에 불과했다.
사실 밀당은 연애 관계에서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냥 사람대 사람 관계에서 밀당은 꼭 있어야 했다.
아무리 형님께서 굳이 그럴 필요 없다 말씀하신다 한들 내가 사회적 운운한 게 바로 엊그저께인데 덥썩 무는 건 역시 너무 없어 보인다.
“내 네 의도를 모르지 않는다. 네가 전쟁에 나아감은 여러 사족들에게 도덕적 의무를 지울 명분이 되는 셈이고, 하물며 전장에 나아감은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는 일이니 내 어찌 너의 갸릇하고 깊은 뜻을 모르겠느냐?”
알아주셔서 다행이다.
“하지만 만일 너가 전장터에 나가 일군을 지휘하다 오랑캐들에게 생포라도 되면 어떡하겠느냐?”
안 된다.
절대 안 되지.
내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아, 물론 내 목숨이 아깝긴 한데 그것보다 나 같은 높은 신분의 사람이 포로로 잡히면 일단 적극적인 공세를 할 수가 없게 될 테니, 국가적인 차원에서 손해일 수 밖에 없다.
“다시 생각해보면 안 되겠느냐? 혹 중신들의 눈치가 보이는 것이라면 걱정할 필요 없다. 그들이 감히 왕자대군을 전장터에 보내라는 말을 감히 꺼낼 수나 있겠더냐?”
애절하기 까지한 형님의 음성을 받은 건 내가 아니라 풍원위 숭재 씨였다.
숭재 씨 역시 자못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대감. 재고해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하께서 말씀하신 부분은 다 차치하더라도, 대감께서 전장터에 나가신다니요. 살(화살)도 잘 못 쏘시지 않습니까.”
“그래. 풍원위의 말이 맞다. 우리끼리 살 쏘기 내기를 하면 넌 늘 골찌를 하지 않았더냐? 그런 네가 어찌 전장터에 나간다고 하느냐?”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한 번만 더 튕겨야겠다.’
지금 형님과 숭재 씨의 말을 덥썩 물기엔 애매하다.
뭔가 실랑이가 오가는 그림 속에서 형님의 제안을 마지못한 척 수락하는 그림이 나와야한다. 그러러면 한 번 더 튕겨야 한다.
“형님 전하와 풍원위의 걱정을 천번이고 만번이고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포로로 잡히는 것도 문제고, 대군 신분으로 전쟁터에 나간 일은 국초 이래 예에 없던 일이니 지휘적인 부분에서도 문제일 겁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지휘에 혼선이 생길지 어찌 안단 말이냐?”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아까와 같습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일수록 그에 따른 책임과 의무를 져야합니다. 말로만 책임과 의무 운운한다면 누가 따를까요?”
“···”
“왕실에서 모범을 보여야 나머지 사족들이 마지 못해 따르는 척이라도 할 수가 있는 겁니다. 물론 왕실에서 모범을 보여야 할 사람이 굳이 저만 있는 건 아닙니다. 근데 어쨌건 전 부왕의 적통인 몸 아닙니까? 그 옛날······.”
잠깐 기억이 안 난다.
뭐였지.
화랑 뭐였는데.
‘아!’
생각났다.
“그 옛날 화랑 관창이 왜 죽음을 무릅쓰고 단기로 적진에 쳐들어갔겠습니까? 죽을 자리인 걸 몰라서요? 목숨이 두 개라서요?”
“···”
“본인이 죽어야만 가라앉은 신라군의 사기가 오를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역사를 돌이켜보면 관창의 일화만 있겠습니까? 형님.”
“···말하거라.”
“형님은 만날 술만 드시면 성군이 되고 싶다고 하셨었죠?”
“그랬지.”
“그렇다면, 제가 정치는 잘 모르지만 이번 전쟁도 형님이 성군이 되시기 위한 일환중 하나시겠지요?”
“그렇다마다.”
“근데 알맹이만 쏙 뺀 채 사족들한테 전쟁이 벌어지니 전비를 너희들이 충당하라고 하면, 그들이 할까요? 지금 당장은 할지도 모르죠, 지금 당장은. 하지만 5년 뒤에는요? 10년 뒤에는요?”
“···”
“제가 기부만 하고 막상 전쟁터에는 안 나가게 되면, 그 사람들은 5년 뒤에, 또 10년 뒤에 ‘옛날에 편전에서 그렇게 사회적 의무 운운하던 진성대군도 결국 전쟁을 앞두고는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지 않았냐’라는 논리로 의무와 책임을 회피하려 들 겁니다. 그럼 세상에는 권리만 누리고 의무는지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겨나게 되겠죠. 이게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태평성대는 아니지 않나요?”
크흑.
응?
울먹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왜 울고 있어.’
동석한 사관이다.
사관이면 기사나 쓰고 있지, 왜 울고 자빠졌지?
아니, 그보다······.
‘이 분위기 뭔데.’
뭔가 숙연한 분위기.
그래도 뭐, 기분 탓이겠지? 숙연해질 이유가 없잖아?
일단 마저 튕기기나 하자.
“저는 형님 전하께서 만드시려는 태평성대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일수록 사회적 의무를 질 줄 알고, 사회적으로 책임을 통감할 줄 아는 그런 세상일 거라 믿습니다.”
크흑.
이번엔 동석한 또 다른 사관이다.
앞전의 사관이 사관 A 였다면 이번엔 B 사관이 울먹인다.
왜, 흐름 끊고 있어.
궁시렁 거린 내가 말을 이어나갔다.
“형님 전하는 이 나라의 지존이시고, 또 이 나라를 이끌어가셔야 할 임금입니다.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서 사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시면 안 되는, 임금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고 했던가요? 전하께서는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절 전쟁터에 보내셔야 합니다. 물론 거기서 끝나면 안 되고, 선전을 하셔야 합니다. ‘봐라! 어린 진성대군도 전쟁터에 나가지 않았냐! 명색이 유학을 공부한다는 너네들은 뭘 하냐!’ 마치 옛적 신라의 수뇌부들이 화랑 관창의 죽음으로 선전했듯이요.”
전쟁터 나간다고 해도 기껏 안전한 후방에 머물면서 머리는 벅벅 긁고 있을 테니, 관창의 죽음과 비교하기엔 무리가 따르지만 마음만은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관창의 그것처럼 아뢨다.
그래야 이 일화가 전국 팔도에 알려져서 양반들이 조금이라도 반성을 할 테니까.
근데······.
“크흑.”
아까부터 느낀 거지만 이 분위기 뭔데?
울먹이던 사관 A씨는 기어코 눈물을 터뜨린다.
‘얼씨구?’
사관 B씨는 부복··· 아니, 부복이 아니다. 왜 절을 하는 건데?
그리고 상선 아저씨.
늘 무뚝뚝함으로 일관해서 딱딱한 느낌을 주던 상선 아저씨마저 눈시울이 붉어져 있는 건데!?
뭔가 이상함을 느낄 무렵.
나는 삐걱거리는 모가지를 돌려 형님 전하를 바라봤다.
역시나 상선 아저씨처럼 눈시울이 붉어져있다.
덥썩!
그러고는 내 손을 마주 잡으신다.
“···?”
“저, 전하?”
“내 너의 기특한 마음을 들었으니 어찌 사지로 내몰 수 있겠느냐?”
그렇지.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지로 몰아선 안 되지.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네 마음이 이리 갸릇한데 네 청을 거절하면 내 어찌 훗날 너의 면을 마음 편히 볼 수 있으랴? 네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이처럼 애절하고, 또한 깊으니 너 또한 왕가의 종친이기 전에 한 사람의 선비라, 선비의 청을 임금이 거절하는 것은 곧 암군이나 할 짓이다.”
···이, 이게 아닌데?
이등대군이 아니라 이등똥별을 시켜줘도 전쟁터에 나가는 건 좀 아닌데······.
꿀꺽.
“전하. 신이 한 말씀 아뢰어도 되겠나이까?”
예조판서 임사홍 아저씨다.
풍원위 숭재 씨의 아버지.
역시나 눈시울이 붉어져 있는 게 뭔가 불길하지만, 내가 저 입을 막을 수도 없고 더군다나.
끄덕.
전하께서 편히 말하라는 듯 고개까지 끄덕거리는데 내가 어떻게 막아?
“말해보라.”
“신은 수십년 동안 유배지를 떠돌면서 하호(서민)들의 삶을 지켜 볼 수 있었나이다. 또한 그들이 하는 말을 숱하게 들을 수 있었사온데, 그 어디에도 대군과 같은 분이 계시다는 말은 듣지 못 했으니, 외람되오나 고사 고굉지신(股肱之臣)으로 유명한 개자추(介子推)가 감히 이에 비기겠사옵니까? 하물며 지금하는 말씀은 옛날 옛적 주왕의 폭정에도 굴하지 않은 비간(상나라의 충신)의 직언과 같으니 비간이 이에 비기겠사옵니까? 신은 출사 이래 이런 아름 다운 모습은 본 적이 없으니, 전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를 거절하는 것은 훗날 대군과 마음 편히 만날 수 없는 일일 것이옵니다. 청컨대 대군의 우국과 충정을 받아들이시옵소서.”
“···”
아니, 이 아저씨가 유배지에 너무 오래 계셔서 상황 파악을 못 하시나.
비간이나 개자추 같은 충신하고 비교하면 내가 진짜 안 갈 수가 없잖아.
‘전하, 제발 한 번만 더 가지말라고 해주세요. 제발.’
전하께서 딱 한 번만.
더도말고 덜도말고 딱 한 번만 “널 전쟁터에 보낼 순 없다”라고 말씀하시면 진짜 비장한 표정으로 “후··· 전하께서 반대하시는 일을 부득불 하겠다고 하는 것 또한 불충이니 신이 어찌 따르겠습니까?”라고 할 수 있는데··· 진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예판의 말이 맞다. 지극히 온당하고 지극히 옳은 말이다. 또한 진성이 너의 말이 맞다. 임금은 만백성의 어버일진대 어찌 혈육의 정에 이끌려 사리에 어긋나는 일을 벌일 수 있으랴? 내 말했다시피 너 또한 일가를 이뤘고 한 사람의 선비의 몫을 하고 있으니 내 너의 청을 거절 할 수가 없음이다.”
덥썩!
전하께서 다시금 내 손을 마주 잡으셨지만 엇나간 설계에 넋이 나간(?) 나는 형님이 내 손을 잡는 건지, 염라대왕이 ‘어서와, 지옥은 처음이지?’ 손을 잡는 건지 분간이 안 갔다.
“너의 일을 전국 팔도에 알려 사족들에게 본이 되도록 하겠다. 이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너에게도 부월을 하사하여 사령관의 예로 대할 것이니, 진성이 너는 부디 몸을 단련하거라.”
“···”
좆됐다.
***
혜민서.
“그게 사실이옵니까?”
“사실이다 마다. 이건 자네만 알고 있게.”
“뭔데 그러시옵니까?”
“그 자리에 있었던 사관 김자경이 내 사돈의 사촌의 옆집 사는 사람인데, 대군께서 머리에 피가 나도록 바닥에 머리를 쿵쿵 찍으면서 전쟁터에 보내달라고 했었다는군.”
“허어. 대군께서 그런 면이 있으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 사실 말이 나와서 말이지 의녀들 사이에서는 대군을 빨래 대감이라고 부른다잖습니까?”
“빨래 대감? 그건 또 뭔가?”
“만날 의녀들이 하는 빨래 도와준다고 해서 의녀들이 빨래 대감이라고 부른답니다.”
“뭐, 그만큼 잔정이 많으신 게지.”
“그렇긴 한데··· 그런 모습 생각하면 전쟁터라니··· 상상이 안 가지 않사옵니까.”
“그렇지. 늘 헤실헤실거리고··· 심지어는 방자(관아에 딸린 하인)들과 사령(관아에서 심부름 하던 사람들)들한테 까지 존댓말 하시는 모습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지. 나도 말이 나와서 말인데, 대군께서 아래 사람한테 막말한 건 덕산이 녀석한테 뿐이 없잖는가. 아래 사람이래도 나이가 많으면 무조건 공대하시는데, 그런 나약하고 선한 심성을 가지신 분이 전쟁터라니······.”
“우리도 가게 되는 거 아닙니까?”
“예끼! 우리가 왜 가나?”
“그래도 대감께서 도제조시니······.”
“안 가. 아니, 우린 못 가지. 여기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안 그런가?”
부하 의원에게 의견을 구하는 김 과장(혜민서 주부 김공저)님에, 부하 의원의 대답은 내가 대신했다.
“안 가도 되십니다.”
털레털레.
“헙!”
“대, 대감. 어, 언제부터 거기 쪼그려··· 아, 아니. 앉아 계셨사옵니까?”
“···반시진쯤 됐죠.”
“아, 아니. 왜 그런 데 앉아 계십니까. 하, 하하. 소인은 대감께오서 등청(출근)을 아니 하신 줄 알았지, 뭡니까. 오셨으면 미리 인사라도 드렸을 텐데요.”
인사?
인사하니까 하직 인사가 떠오른다.
전쟁터라니!
“후··· 오늘은 몇 사람이나 왔나요?”
반시진이나 멍(?) 때리고 있었으면 됐다.
늦게나마 할 일은 해야지.
“이제 곧 수확철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이 줄었습니다. 3~400명쯤 왔지요. 오후에도 그만큼은 올 듯 합니다.”
“명단에 양반들은 얼마나 포함돼있습니까?”
“1할 가량이 양갓집 도령들과 규수들이지요.”
“꼭 돈 받으세요. 한 번 접종할 때 마다 50석씩······.”
따지고 보면 그놈들 때문에 전쟁터 나가게 생겼으니까.
돈이라도 왕창 받아야 한다.
그 사람들이 돈 낸다고 내 곳간이 빵빵해지는 건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나의 주옥같음을 느끼고 해주고 싶다.
“아!”
“···?”
“저 먼저 퇴청좀 하겠습니다.”
“가, 갑자기 말이시옵니까?”
“갑자기 할 게 생각 났거든요. 그럼 저 먼저 갑니다!”
퇴청 준비를 서두른 나는 집으로 후다닥 뛰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