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69화 (69/365)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69화>

이등대군의 편지

***

「···하므로 아래와 같은 곡졸로 인해 우리나라는 참으로 해괴하다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첫째. 출사한 자들에게 면역을 주는 것이 나라의 법이라지만, 국법 그 어디에도···중략. 이에 신 이장곤 등은 부디 나라의 폐단이 바로 잡히길 바라고, 나라의 기강과 정의가 바로 서길 바라며, 또한 사족들이 주어진 의무를 충실히 행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서로 뜻을 합쳐 날인하여 연명을 올립니다.」

도승지 김감이 만면에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로 상소문을 읽어나가자, 마찬가지로 융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져 나갔다.

상소문이 얼마나 천군만마처럼 느껴졌으면, “이에 신 이장곤 등이 서로 뜻을 합쳐 날인하여 연명을 올린다”라는 부분에서는 옳지! 탄성과 함께 가볍게 팔걸이를 내려쳤을 정도였다.

촤락!

“신 승정원 도승지 김감. 간밤에 올라온 이장곤과 같은 젊은 선비들의 우국(나라를 걱정함)의 열정을 아뢰지 않을 수 없어 부득불 중신들과 전하께서 정무를 보시는 와중에 편전을 찾았으니 그 무례가 참으로 크옵니다.”

“그게 어찌 무례겠는가? 도승지는 개의치 말라.”

김감이 옅은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조아렸다.

도승지 김감이 그나마 중신들의 눈치를 살펴, 옅은 미소를 띠고 있다면 융은 아예 입이 귀에 까지 걸린 모습이었다.

‘이장곤을 벌하지 않은 것이 절호의 한 수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원래는 이극균을 처벌하면서 시일을 두고 이장곤도 벌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장곤을 천거한 게 바로 이극균이었고, 신진(新進) 선비를 대표하는 이가 이장곤이었으며, 그 스승이 무오년의 김굉필이니, 함께 엮어서 숙청의 빌미를 만들면 제법 그럴싸한 그림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연찮게 진성에게 붙여준 이장곤이 왕자사부로서 소임을 톡톡히 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진성도 이장곤을 사부로 극진히 모시고 있었으며, 또 진성 덕에 몇 차례 어울린 장곤은 제법 호탕한 장부였고 그런 호탕한 장부를 숙청의 패로 토사구팽하고 싶진 않아 계획을 틀었었다.

그런데 그게 결국은 절호의 한 수가 되었다.

계획을 틀었을 때만 해도 설마 이장곤이 이런 기특한 일을 해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표정들이 가관이구나. 하하.’

떫은 감을 씹으면 저럴까?

중신들의 표정에 입이 찢어질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 목숨을 담보로 까지 내걸고 결사 반대하던 중신들은 창졸간에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들은 그저 상소문을 만지작거리는 김감과, 어좌에 앉아 있는 자신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이장곤의 상소로 최소한의 명분이 바로 섰다.

그리고 결사반대 하던 중신들로 인해 굳게 닫혀 있던 융의 입도 그 상소로 인해 드디어 열릴 수 있었다.

“젊은 선비의 우국하는 마음이 참으로 기특하다. 아니 그런가?”

융은 얼마 전, 여론을 의식해 한성판윤에 제수한 홍귀달을 직시하며 말했다.

질문은 공통되게 던졌지만, 사실 홍귀달 개인에게 물은 질문에 다르지 않았다.

홍귀달이 사족들이 전비를 바침으로써 인해 생길 폐단을 운운하는 등, 가장 악질이었던 까닭이다.

“···”

“판윤.”

“···예, 전하.”

“유향(전한 시대 활동한 학자)의 육사(六邪)를 들어보셨소?”

육사란 나라에 해가 되는 여섯 종류의 신하를 일컫는 말이었다.

지학의 학생들도 아는 단어이니, 홍귀달이 육사를 모를 리는 없었다.

“···물론이옵니다.”

“육사에 이르기를, ‘녹봉만 기다리고 사사로운 이익만 취하면서 조정의 관직만 차지하는 신하는 구신(具臣). 임금의 눈과 귀를 가리고 온당하다만 외쳐대며 뜻에 영합하는 신하는 유신(諛臣). 음험하지만 겉으로는 근면한 척 하고 임금의 총기를 흐리는 자는 간신(姦臣). 일신의 지혜와 재주는 뛰어나지만 안으로는 골육의 정을 이간하고 밖으로는 조정을 어지럽히는 자는 참신(讒臣). 권세를 갖고 나라에서 엄금한 붕당을 하여 자기 세력을 쌓고 위세를 부리는 자는 적신(賊臣).’ 이렇게 유향은 조정의 신하들을 분류하였는데 지금 조정에는 과연 어떤 신하가 있는 것 같소?”

“···”

“이 과인이 보기엔 조정에 절반은 구신이고, 다시 절반은 참신, 또 나머지 절반은 적신 밖에 없는 것 같소만, 경은 어찌 생각하시오?”

홍귀달을 비롯한 중신들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껏 결사 반대를 외치긴 했어도 임금은 임금이다.

임금의 입에서 적신이니 구신이니 하는 단어가 나왔으니, 그들로서는 또 다른 불충을 저지른 셈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러나 저러나.

역시나 명분은 융에게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신들이 미처 전하의 뜻을 헤아리지 못 하옵고, 또 전하를 힘껏 보필하지 못 하였으니 죄인으로서 무슨 할 말이 있겠나이까?”

교묘히 질문을 벗어나는 홍귀달에 융은 피식거렸다.

더 캐묻는다면 캐물어서 홍귀달을 난처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궁지에 몰린 쥐는 결국 고양이도 무는 법이다. 이쯤 망신을 줬으면 됐다.

“경들은 들으시오.”

“···”

“이장곤 등이 올린 상소가 과연 이장곤과 함께 연명하여 상소를 올린 자들에 국한되는 생각이겠소? 나는 우리 나라의 선비들이 우국하는 마음이 대국의 선비들 못지 않다 생각하니, 그로 말미암아 나온 것이 바로 이장곤 등의 연명소가 아니겠소? 경들이 우려하는 바가 무엇인지 내 모르지는 않으나, 지금 나라에 재화가 부족하다 하여 무엄한 오랑캐를 벌하지 않는다면 후세에는 저들이 더 난폭하게 굴 것이고, 더 잔인하게 변경의 백성들을 약탈하고 군사를 해칠 것이오.”

“···”

“임금이 내리는 결단은 용단이라 하였으니, 임금의 결단으로 말미암아 나라가 좌지우지 되기 때문이오. 하지만 상황이 이에 이른 즉, 용단을 내리지 않고서는 오랑캐를 교화 할 수 없으니 내 용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소이다. 빠른 시일 내에 군사를 일으켜 강 너머 오랑캐들을 벌하겠소. 그리하여 그들이 더 이상 우리 변경을 약탈하지 못 하도록 하겠고,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을 구해오겠소이다. 경들은 이견이 있소?”

사족들에게 전비를 걷게 한다는 사안을 반대한다는 일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중신들이었다.

여차하면 숙청이라는 계략으로도 얼마든지 전비를 확충 할 수 있었을 테니까.

이미 반대는 이장곤 등의 상소로 인해 물건너 갔다.

여기서 더 반대 한답시고 질질 끌어봐야, 임금의 인내심을 시험에 들게 하는 일 밖에 더 되겠나?

“···전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면 사족들로 하여금 전비를 걷게 하라는 사안을 팔도의 만백성이 알 수 있도록 포고 하겠소이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전하.”

판부사 노공필이었다.

“말해보시오.”

“사족이라 말씀 하셨습니다만, 사족들이라 한들 각각의 처지와 형편이 다를 텐데 이는 어찌 하명하시겠사옵니까?”

“양안(토지 대장)과 호적을 살펴 1~9 까지 그 등급을 매기고 기부를 받으면 되는 문제요.”

“흐음.”

노공필이 침음과 함께 물러가자, 또 다른 신하가 한 발 자국 앞으로 나왔다.

누군가 살펴보니 홍귀달이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대군은 어찌 하시겠사옵니까?”

“대군? 진성을 말함이오?”

“대군께서 일찍이 솔선수범하여 군문에 들기로 하였는데, 이는 장병들의 사기를 진작 시키는 차원에서도 이로운 듯 한데 전하께선 어찌 처결하실 생각이시옵니까?”

융은 눈살을 찌푸렸다.

“진성이 오죽 답답했으면 군문에 들겠다고 했겠소. 판윤은 설마 진성이 군을 사령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 거요?”

“부원수로 하여금 도원수를 보좌 할 수 있는 일이니, 만약 이처럼 군문에 들어 부원수로서 전장터에 나아간다면 우리 장병들의 사기가 실로 하늘을 찌를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전쟁에 회의적인 사족들에게도 명분이 서지 않겠사옵니까?”

왕자를 전장터에 보낸 일은 없다.

하물며 왕자대군을 전장터에 딸려 보내는 일은 더욱 없다.

이건 융이 진성을 총애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실권을 주지 않는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다만, 군의 무력이란 어디 실권으로만 움직이던가?

실권으로만 움직였다면 역적 이시애가 어찌 군을 일으켰겠으며, 그 옛날 태조께서 어찌 군을 일으키셨겠는가?

대군이 회군을 하는 정치적인 문제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진성이 하사 받은 부월(사령관의 표식)을 역으로 쥐는 일은 천지가 개벽하는 한이 있더라도 없겠지만, 휘하의 장수들과 하다못해 도원수가 이용해먹을 수도 있는 문제다.

“왕자대군이 전장터에 나아간 일은 국초를 제외한다면 없소. 어찌 부월을 하사하여 전장터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단 말이오?”

“하오나 대군께서 친히 언급하신 일이 있는데, 어찌 마다 할 수 있겠사옵니까?”

이런 말을 이장곤 같은 충신들이 했다면, 그 의도가 대군의 회군과 도원수의 역적질과 같은 정치적인 문제에 있다고 판단 했겠지만, 이쯤하면 그런 정치적인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속된 말로 나가 뒈지라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전쟁터에 나가서 병신불구가 되면 그 또한 복수의 일환이고, 전쟁터에서 뒈져버리면 큰 복수를 이루는 셈이며, 그게 아니라 만약 전쟁에 패하거나, 사건이 일어나면 책임을 물을 수 있으니, 이 또한 복수의 일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사족들에게 전비를 걷자는 말은 대군에게서 나온 것이니 말이다.

“차라리 나가 뒈지라 하지 그러시오? 왜, 내가 직접 진성 아우를 불러 네가 나라를 위해 뒈져줘야겠다고 명을 내리면 되겠소?”

퉁명스러운 대꾸에 홍귀달이 바짝 부복했다.

“천부당만부당 하신 말씀이시옵니다. 신이 곰곰이 생각해보건대, 과연 대군께서 일선에 나아가 장병들을 지휘하는 일은 모범이 되는 일일뿐더러 군의 사기에도 직결되는 문제이니, 그것이 참으로 이롭다는 판단에서 아뢴 말이지, 신이 감히 참람하게 불순한 의도를 갖고서 대군을 전장터로 등떠미는 것이겠사옵니까?”

“그래?”

“그렇사옵니다.”

“경들은 모두 들으시오.”

“···”

“앞으로는 전쟁이 발발하면 병신불구가 아닌 이상 당상관(정3품 이상의 관리) 이상의 자제들을 모조리 군문에 들게 하겠소. 어디, 대군이 군문에 든다 하여 사기가 오르겠소? 이처럼 재상들의 자제가 군문에 들어야 사기가 오르지.”

“···”

본전도 못 찾은 홍귀달에 중신들은 그를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진성 아우에게 부월을 하사하는 일은 없을 테니, 궤변으로 임금을 기만하려는 생각일랑 말고 오랑캐 놈들을 어찌 토벌할지, 건설적인 생각이나 좀 하시오.”

쯧쯧 혀를 찬 융이 김감과 임사홍을 위시한 왕당파들과 함께 편전을 빠져 나갔다.

***

쑤우웅-!

이건 절대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다.

쐐애애액!

이것도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다.

“하압!”

이건 입에서 나는 소리가 맞지만······.

“아야!”

“대, 대감마님!”

“아오, 아퍼.”

젠장.

손 베었다.

“괘, 괜찮으십니까요?”

“괜찮겠냐?”

덕산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더니, 붕대를 가져왔다.

“그러게 왜 안 하던 칼질은 하십니까요. 보는 쇤네가 다 아찔했는데 기어코 사달이··· 어유.”

“사나이 이역. 곧 전쟁터 나갈지도 모르는데 미리 대비좀 해놔야지. 아! 야, 감정 실지 말고 살살 좀 감아.”

“가, 감정이라뇨. 쇤네가 대감마님께 무슨 감정이 있다구··· 그리고, 전쟁터가 장난도 아닌데 왜 나가려고 하십니까요?”

“난 이 자식아. 누구들처럼 한 입 갖고 두 말······.”

“두 말···?”

“두 말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해······.”

나는 금세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터덜터덜 마루에 걸터 앉았다.

젠장!

팟! 팟!

이놈의 방정맞은 입이 문제다. 이놈의 입을 확 꿰매버리던가 해야지, 진짜.

전쟁터.

덕산이 말처럼 전쟁터가 무슨 애들 장난인가?

당연히 안 나가고 싶지.

근데 편전에서 어? 내가 뭐라고 말했나?

-의무는 나몰라라하고 권리만 쫓으니 참, 태평성대입니다, 그죠?

라고 비아냥거리기 까지 했다.

어디 그것 뿐인가?

형님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설파(?)하기 까지 했고, 편전에서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일수록 도덕적 의무를 져야한다는 말을 중신들을 꾸짖듯 말했었다.

그런 내가, 막상 내 말마따나 전국에 양반이란 양반들은 죄다 전부 돈 걷어라는 말이 포고된 지금!

-아, 생각해보니까. 나는 양반하고는 차원이 다른 왕족이니 전쟁터는 좀 에바참치군요. 전쟁터는 여러분들이 가십시오. 뒤에서 응원하겠습니다, 파이팅!

사람이 자존심이란 게 있지, 이런 말을 어떻게 하겠나?

언제, 어디서, 갑자기 전쟁이 발발할지 몰랐다.

그리고 그 전쟁에 내가 참전할 가능성은 99.2%다.

근데 내가 활을 잘 쏠 줄 알아, 아니면 체격이 우람해, 기세만으로 사람을 잡아먹을 줄을 알아?

대비 차원에서 무예를 연마하려는 것이다.

전장터에 나가면 최고 지휘관 격일 테니, 최전선에서 여진족들과 뒹굴진 않겠지만 혹시 모르잖나.

‘그래도 비굴하게 끌려가진 말자.’

꼭 자존심 지키자고 전장터에 자진해서 가려는 건 아니다.

뭐, 최고 지휘관으로 참전하게 될 테니 최악의 경우 부상은 입어도 죽진 않을 거라는 최소한의 확신은 있는데다, 사회지도층의 의무 운운한 내가 전장터에 참여하면 좋은 선례가 될 거다.

다른 양반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국방세든, 군대든 가게 되겠지.

“야, 덕산아.”

“네?”

“너 여진족 본 적 있냐?”

“여진적이요? 한 번도 본 적 없습죠. 근데 얘기는 들었습니다요.”

“들어나 보자.”

“쇤네의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겪은 일이라고 저희 아버지가 저 어렸을 때 말해주셨는뎁쇼. 그때 할아버지께서 군역을 치룬다고 변경에 가 계셨는데······.”

덕산이의 입에서 여진족의 일화가 술술 흘러나왔다.

사람 얼굴 가죽을 산 채로 벗겨버린다더라.

사람을 산 채로 불에 태워버린다더라.

사람을 말 꼬리에 묶고서 질질 끌고 다닌다더라.

카더라에 가까웠지만 듣기만 해도 섬뜩하고 울적해지는 일화들이었다.

이런 섬뜩하고 절로 울적해지는 일화들을 듣고 있노라니, 노래 하나가 떠오른다.

“···집 떠나와~! 열차타고 훈련소오오오로~ 가는 날. 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 밖을 나설 때. 가아아슴 속에~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지만······.”

“그건 무슨 가락이옵니까?”

스윽.

풍원위 숭재 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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