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67화 (67/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67화>

    노블리스 오블리제, 내가 먼저 실천한다!

    ***

    나는 형님의 하소연을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들에게 설욕하는 일이 내 욕심인 것이냐?”

    “누구라도 그런 생각이 들 겁니다. 안 들 수가 없죠.”

    조선인들의 여진족에 대한 사고는 한국인의 일본인에 대한 사고와 흡사하다.

    증오한다는 부분에서는 오히려 더 할 지경이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설욕 자체는 욕심일 수가 없다.

    국민적인 염원에 가까운 일이니까.

    “후··· 내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군을 일으켜 변경의 군사들로 하여금 놈들을 벌하고 싶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가슴만 미어지는 기분이구나.”

    “사정이요?”

    형님이 기다렸다는 듯 하소연을 시작했다.

    ‘돈이 문제였구만.’

    하소연의 끝은 결국 돈이었다.

    이놈의 돈, 돈, 돈 거리는 세상.

    진절머리가 나 미칠 지경이지만 개인이든 국가든 모든 문제는 결국 돈으로 귀결된다.

    “너라면 어찌하겠느냐?”

    “저요?”

    “그래. 편히 말해보거라.”

    음.

    나라면?

    “사실 저라면 전쟁은 안 할 것 같아요.”

    “어찌?”

    “전쟁도 결국 명분과 돈이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전쟁을 일으킬 명분은 된다지만, 형님 전하께서 말씀하신대로 재정이 부족하잖습니까. 없는 살림에 굳이 전쟁을 일으키는 건 백성들을 더 힘들게 하는 것 밖에 안 되지 않을까요?”

    “으음······.”

    “물론 전쟁도 피해야 하는 전쟁이 있는 반면, 꼭 해야 하는 전쟁도 있는 법이니 꼭 해야 한다는 전제로 한다면······.”

    “꼭 해야 한다는 전제로 한다면?”

    나는 생각에 잠겼다.

    사실 전쟁이라고 모두 다 같은 전쟁이 아니다.

    불필요한 전쟁도 있지만 필요한 전쟁도 있는 법이다.

    물론 불필요한 전쟁이든 필요한 전쟁이든 싸우지 않고 이기면 그게 장땡이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싸우지 않고 이기긴 그른 것 같고, 결국 전쟁 비용 마련이 제일 큰 일인데······.

    ‘돈이라.’

    전쟁을 치루는 것이니 절대 작은 돈이 들진 않을 것이었다.

    군사들을 먹이는 군량미만 해도 곡물이 곧 화폐인 조선에서는 꽤 많은 돈이 소모 되는 셈일 테니까.

    거기다가 화약을 비롯한 병기들을 마련하는 일도 결국은 돈이다.

    오죽하면 천조국 미국 형님들도 이라크전 한 번에 나라 경제가 휘청거렸다는 말이 나왔을까.

    뭐, 여기엔 복합적인 요인이 있긴 하다만, 어쨌든.

    ‘근데 그건 현대니까 전비 마련이 어려운 거고, 여긴 좀 더 쉽지 않나.’

    나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아니, 단순하게 생각했다기 보다는 일전에 덕산이에게 설명했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떠올렸다.

    여긴 모든 사람들이 권리를 누리는 시대가 아니었다.

    특정 기득권층들만이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이었다.

    법으로는 모두가 출사 할 수 있고, 실제로 내 상식과는 다르게 제법 많은 평민들이 공직 사회로 진출 하기도 하지만, 사실 현대처럼 개천에 용나는 케이스는 거의 드물고 출사한 평민들도 따지고 보면 대다수가 기득권의 일원들이다.

    물론 그들이 잘못됐다는 건 아니다.

    다만 권리를 누리는 사람에겐 그에 해당하는 의무도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좀 간단하지 않나?

    “형님.”

    “편히 말해보거라.”

    “서양 아시죠, 서양?”

    “서양? 서이(서쪽 오랑캐)를 이름이냐?”

    “네네, 서이요.”

    “알지. 한데?”

    “서이들 말에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이 있거든요?”

    “노, 노블리··· 스. 뭐?”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에 있거나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도덕적 의무 같은 건데요. 이게 뭐냐면요······.”

    나는 최소한 내가 알고 있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뜻을 형님께서 잘 알아 들으시도록 설명을 했다.

    “서이에게도 그런 문화가 있단 말이냐? 조선으로 치면 사족(양반)들이 일대에 기근이 들었을 경우 구휼미를 푸는 것과 같은 거겠구나.”

    “음··· 어떻게 보면 비슷해요. 좌우지간 제가 왜 이런 말씀 드리는 거냐면, 형님께서 잘 생각해보세요. 우리 나라에 고관대작이라 불리는 분들 자제들이 변경에서 군역 치르는 거 보셨어요?”

    “못 봤지.”

    “그럼 그 사람들이 세금 똑바로 납부하는 건요?”

    “거의 못 봤구나.”

    “그건 잘못된 거 아닌가요?”

    “으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소위 말하는 사대부 집안의 사람들한테 전비를 지원 받으면 되지 않을까요? 막말로, 전쟁 일어나도 그 사람들이 전쟁 나가는 것도 아니고, 다 서민들이 나가는 건데 전비 정돈 댈 수 있는 것 같아서요.”

    “반발이 클 텐데?”

    “반발은 솔선수범이 없다면 있겠죠. 근데 솔선수범이 있다면 얘기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솔선수범이라니?”

    “제가 이번에 형님 전하께서 하사해주신 땅에서 나오는 소출하고, 기존에 있는 땅에서 나오는 소출 합하면 1만5천석 쯤 나올 것으로 예상 되는데, 만약 전쟁 일어나면 1만석 정도 기부하겠습니다. 이러면 솔선수범 아닐까요?”

    생각없이 말한 건 아니다.

    실제로 나는 전쟁이 일어나면 1만석을 기부할 의사가 있다.

    막말로 목숨값이라 쳤을 때 1만석이 많은 돈인가?

    적은 돈이지.

    아, 물론 땀흘려 번 돈이 아니라 이리 흔쾌히(?) 쾌척 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저 1만 5천석 모두 앉아서 버는 돈이나 다름 없으니까.

    내가 땀 흘려서 번 1만 5천석이라면 저 정도로는 못 내지 않을까 싶긴 하다.

    “1, 1만석을 말이냐? 그리 큰 돈을?”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에 있는 사람에겐 도덕적 의무가 있는 거라구요. 솔직히 제가 지금 당장 1만석 없다고 굶어 죽는 것도 아니고,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났는데 1만석도 쾌척 못 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죠.”

    “으흠.”

    “제가 1만석 쾌척한다고 하면 다른 사대부 집안 사람들한테도 의무를 지라는 명분이 생기고, 그 사람들한테도 전비로 얼마간 내라고 하면 좀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네 말을 들으니 확실히 그렇긴 하다만, 너무 파격적인 일인지라······.”

    이게 그렇게 파격적인 일인가?

    그럼 임진왜란때 의병장들은 다 뭐지?

    “아니면 접종비를 따로 받는 건 어떠세요?”

    “접종비? 종두를 말함이냐?”

    “네.”

    “하지만 종두에 따로 접종지를 매긴다면 헐벗은 백성들은 접종이 불가할 게다. 그들의 사정이야 모두 빤하지 않느냐.”

    “아뇨, 헐벗은 백성들한테 접종비를 받는 게 아니라 사대부들한테만 받는 거죠.”

    “사대부에게?”

    반문하는 형님께 이번에 접종을 하면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모두 말씀드렸다.

    새치기를 하는 선비님들부터, 행패를 부리는 선비님들까지.

    “따지고 보면 그 사람들한테 접종비를 명목으로 돈을 받는 게 이상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네 말이 틀리진 않구나. 하지만 사대부 모두를 적으로 돌리는 것은 이롭지 못 한 일이다. 사대부의 호응을 잃으면 임금은 호령을 잃는다.”

    “이런 걸로 호응을 안 하는 사람들이면, 형님 전하께서 어떤 정책을 펴신다 해도 반대하지 않을까요? 이게 국가적인 차원에서 나쁜 정책도 아니구요. 있는 사람이 돈 좀 내라는 건데요. 물론 이걸 강제하거나, 악용해선 안 되겠지만 그거 좀 못 내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경전을 눈으로만 외운 사람들이죠. 명색이 과거 급제까지 했다는 분들이요.”

    “흠. 네 말이 맞구나. 내 군주이기 전에 한 사람의 장부인데 해보지도 않고 망설일 필요도 없거니와, 해보지도 않고 뜻을 꺾을 수야 없다. 네 말을 들으니 참으로 위안이 되는구나. 고맙다.”

    긁적.

    힘이 됐다니 다행이다.

    사실 잘 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잘 한 거겠지.’

    ***

    “아니, 그럼 제가 참전할게요. 제가 참전하면 모든 사대부들한테 모범이 되는 일 아닙니까?”

    한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내 말에 편전엔 적막이 휘몰아쳤다.

    어찌나 당혹스러웠으면 설전 아닌 설전이 오가던 편전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날 바라보고 있었다.

    편전에 혼자가는 건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다면서 날 끌고 오신 형님도 당혹스럽기는 매한가지인지, 입을 쩍 벌리면서 말잇못(말을 잇지 못함) 상태에 빠지셨다.

    물론 당혹스러운 건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이 말을 언급한 건 순전히 발끈해서였다.

    지금 편전의 화두는 간단했다.

    전쟁좀 하게 소위 말하는 있는 사람들 곳간에 있는 거 조금만 나라에 바치자.

    간단하잖아?

    그런데 이 간단한 말에 편전의 영감님들은 그건 어렵다는 의견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조금만 뱉어라.

    그건 안 된다.

    장장 한시진에 가까운 설전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편전 한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나도 슬그머니 화가 치밀었다.

    난 솔직히 이 정도로 아니 되오!를 외쳐댈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아닌 게 아니라 형님의 뇌피셜(?)에 의하면 이번에 김운열의 사건과 아이진성의 침략 사건이 있고 난 후, 하관들 사이로 주전론이 퍼져 나가고 있으니 어쩌면 재상들이 흔쾌히 전비를 내놓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을 하셨었다.

    일리가 있는 말인지라 나도 내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호응을 해줄까, 편전에 참관을 하게 됐는데 호응은 개뿔.

    도대체 주전파는 코빼기도 안 보였다.

    아니, 잠깐 보였던 주전파들도 너희들 곳간좀 열어라는 말에 우디르급 태세 전환을 보여주었다.

    이 우디르급 태세 전환에 1차로 빡치고 2차로 설전이 한시진 넘도록 계속 되다보니 슬슬 화가 치밀었다.

    거기다 3차로 대사간 민이(閔頤)라는 분은 어이 없게도 이 일련의 사태에 대한 책임을 나한테 떠넘기는 추태 아닌 추태를 보였다.

    장설을 풀어 놓으셨지만 그 골자는, 책임도지지 않을 놈이 왜 괜히 너네 형을 부추겼느냐는 말이었다.

    이 말에 소위 꼭지가 돌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참전을 운운하고 말았다.

    ‘제기랄. 여진족이랑 칼 맞대고 어떻게 싸운다고··· 미쳤냐? 미쳤어?!’

    여진족은 상상만 해도 무서운 존재다.

    그 여진족을 대상으로 한 전쟁에 참전하겠다니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사나이 이현호.

    자존심이 있지, 이미 내뱉은 말을 철회 할 수도 없었다.

    은근슬쩍, ‘말이 헛 나왔네요. 하하!’ 얼버무릴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윗전들이면 모범을 보여야지 이게 무슨 추태입니까? 난 오히려 전하께서 전쟁을 하시자고 하면, 여기 계신 분들께서 나라 형편이 어려우니 흔쾌히 얼마간 쾌척하실 줄 알았습니다. 근데 쾌척은 개뿔이고, 어떻게든 곳간문 걸어잠그려는 여러분들 보니, 왜 맨날 여진족한테 당하고 있는지 잘 알겠습니다. 뭐, 저처럼 1만석을 기부하라는 것도 아니고 각자 형편에 따라 얼마씩 기부좀 하라는 건데, 그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예?”

    “···”

    “아니, 왜요. 백성들이 흉년이 들어서 기아에 허덕이면 나랏님한테는 반찬 가짓수도 줄여라, 비가 오게 제사를 지내야 한다 허구헛날 직언이랍시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막상 나라가 위급에 처해서 전비좀 보태라니까, 그거 조금 못 내놓습니까?”

    “···”

    “요즘 선비들 염치 없어졌다, 없어졌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내 이제 보니 잘 알겠습니다. 염치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나몰라라 식이네. 나라에 꼭 필요한 전쟁에서 그거 조금 못 보태시는 분들이 나라에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기아에 허덕이면 곳간문은 열라나 모르겠네.”

    “···”

    “그러면서 공조판서네.”

    움찔.

    “판부사네.”

    움찔.

    “영의정입네.”

    움찔.

    “우의정입네.”

    움찔.

    “대사간입네.”

    움찔.

    “길 갈 때 마다 가갈이란 가갈은 다 했을 거 아닙니까?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있으면 그에 따른 의무도 수반할 줄 알아야지, 의무는 나몰라라하고 권리만 쫓으니 참, 태평성대입니다, 그죠?”

    “···”

    마음 속에 있던 말, 없던 말 다 뱉어놓고 뒤늦게 편전 분위기를 살펴보니 아차 싶었지만 뭐, 어때?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