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66화 (66/365)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66화>

예방접종을 시작하다

***

나흘 후.

신장개업을 목전에 둔 사장님들의 심정이 이랬을까?

두근거림이 좀체 가라앉지 않는다.

오늘이 드디어 디데이였다.

“줄을 서시오!”

“거기! 새치기 하지 말라니까!”

“질서를 지키시오, 질서를!”

혜민서 의원들과 군사들의 고함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내가 16세기 조선으로 오게 된 뒤로 처음으로 이름을 남길 만한 일을 벌였기 때문이겠지?

‘이름이 좀 남냐.’

영화 《황산벌》에서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계백의 말에 계백의 부인이, 호랑이는 그놈의 고운 가죽 때문에 죽고, 사람은 그놈의 이름 때문에 죽게 된다는 명언을 남겼었다.

물론 내가 그놈의 이름 좀 남기자고 일을 크게 벌인 건 아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내 이름이 수세기, 어쩌면 십수세기 동안 전해질 거라는 사실이었다.

역알못인 나도 지석영을 알고 있었으니, 모든 사람들이 내 이름을 알게 되겠지.

아, 지석영 선생의 종두법을 가로챈 데 대해서 찔리는 건 없다.

저작권이고 특허권이고 나발이고, 사람 살리는 게 먼저잖아?

“얼마나 모였습니까?”

떨리는 마음으로 혜민서 마당을 거닐고 있다가, 김 과장님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흔히 문어적 표현으로 혀를 내두른다고 하는데, 실제로 김 과장님은 혀를 내두르고 계셨다.

“예상치를 훨씬 웃돌고 있습니다.”

“얼마나요?”

“어림잡아 2천······.”

“2천 씩이나요?”

“예. 사실 2천인 것도 어림짐작이지, 실제로는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더 떨린다.

통신과 교통이 극히 제한된 시대의 2천은 작은 수가 아님을, 반년간 진성대군으로 살면서 아주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데 첫 접종이 2천명이다.

그 수는 2차, 3차 접종 이후 더 불어날 테고 머잖아 도성 사람들은 모두 접종을 맞을 것이었다.

그게 아니어도 최소 수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은 접종을 맞겠지.

극단적으로 그 수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목숨을 내가 살린 게 된다.

물론 극단적인 예시다.

예방 접종 안 맞았어도 천연두 안 걸리고 잘 살거나, 천연두 걸렸어도 금방 쾌차할 팔자인 사람들도 있었을 테니까.

‘수만명이라······.’

생전 느껴보지 못 한 보람이 느껴진다.

‘신처럼 받드는 거 아닌지 몰라.’

예방접종이 대대적으로 시행되면 천연두도 차츰 자취를 감출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정말 사람들은 날 신처럼 떠받들지 않을까?

신성모독에 가까운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그때.

“어찌 천한 상놈들과 줄을 세울 수 있단 말이냐!”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사실 소란 자체는 꼭두새벽부터 있었던 것이라, 무시하려 했지만 군사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옴으로써 무시 할 수도 없게 되었다.

“대, 대감.”

“무슨 일입니까?”

“밖에 일부 선비들이 행패를 부리고 있습니다요.”

“행패 부리는 사람들은 맨 뒷줄로 빼세요.”

“그, 그러려고 했사온데 막무가내인지라······.”

꼭두새벽부터 신분을 앞세워 새치기 하는 사람들은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군사들은 내 이름을 빌려서 맨 뒷줄로 보내버렸는데, 이번에는 그조차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럴땐 현피지.

군사를 따라 가니 그거 조금 못 기다린답시고 행패를 부리고 있는 선비님들이 보였다.

수는 대략 아홉.

‘방귀 깨나 뀌는 집안 도련님들이구만.’

하나같이 복색들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십중팔구는 먹고 살기도 빠듯한 시대에 얼굴에 포동포동 살까지 올라있는 것 까지 감안한다면, 확실히 혜민서에 배속되거나 지원 온 군사들이 함부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한참 말리는 군사들에게 손찌검까지 가하는 선비들에게 참을 인자를 되뇌이며 다가가자, 선비들이 일제히 내 위아래를 훑었다.

저놈은 뭐하는 새낀지 알아보기 위해서겠지.

“뭐요?”

널찍한 갓이 인상적인 선비가 인상을 팍 쓰며 되물었다.

“말씀을 가려하십시오. 대군마마십니다.”

“대군마마? 크흠. 무례를 범했습니다.”

“예, 뭐··· 근데 어찌 소란을 일으키고 계십니까?”

“글세, 이놈들이 소인들을 줄 세우지 않겠습니까.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이겠습니까? 하여 항의좀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대군께서 오셨으니 한 말씀 해주시지요.”

내가 선비들을 말린 군사들을 흘기자, 군사들은 저희들이 잘못한 것도 아니면서 흠칫 놀라는 기색들이었다.

“이자들한테 뭐라고 하면 됩니까? 감히 선비님들을 줄 세웠으니 각오하라고 협박이라도 하면 됩니까?”

“그건 아닙니다만··· 크흠.”

“여기 군사들이 분명 잘 알아듣게 설명했을텐데요. 반상의 구분없이 모두 줄을 서라구요.”

“여염집을 살펴봐도 종놈이 들어가는 개구멍이 따로 있고, 집주인과 주인댁 손님이 들어가는 대문이 따로 있는데 어찌 천한 상놈들과 줄을 함께 서라 하십니까?”

이런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은 이 선비들 뿐만이 아니다.

그래서 딱히 화가 나지도 않았다.

다만 짜증은 좀 났다.

별 것도 아닌 일로 불려온 기분이거든.

“그럼 줄을 안 서면 되잖습니까.”

자연스레 퉁명스런 대꾸가 튀어나왔다.

“어인 말씀이십니까?”

“줄을 안 서고 접종을 안 받으면 되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뭐, 그 상놈들이 받는 종두 접종을 고상하신 선비님들이 받으려고 하는지 모르겠네.”

“아니, 대감.”

“그래서 받는다구요, 안 받는다구요.”

“받긴 받을 겁니다.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 거, 좀 사람이 점잖게 좀 삽시다. 알만한 사람이 왜 새치기나 하고 그래? 아니, 생각하니까 더 열 받네. 어느 집안 사람이요?”

“···”

“어느 집안 사람이냐니까?”

“···크흠. 송구합니다.”

기를 쓰면서 소란을 피우던 그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집안이 어디냐고 묻자마자 꼬리를 말고 자진해서 뒷줄로 사라지는 선비님들이다.

“뒤에서 또 한 번만 행패 부려봐요. 그땐 호구조사 제대로 할 테니까! 예!?”

선비님들의 뒷통수에 대고 소리치자, 선비님들의 걸음이 한결 빨라진다.

“별 것도 아닌 것들이 사람 귀찮게 하고 있어.”

손 터는 시늉과 함께 나는 혜민서로 돌아갔다.

일련의 사건 아닌 사건을 겪었기 때문인지, 긴장감도 많이 완화되었고, 그와 함께 종두 접종이 시작되었다.

접종은 해가 뜰 때 시작해서, 해가 질 때 까지 이어졌다.

이때 접종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2,053명이었다.

***

강녕전.

“시작 되었다 하옵니다.”

상선의 말에 융은 주먹을 말아쥐었다.

“호응한 백성들은 얼마나 된다던가?”

“혜민서 주부 김공저의 말로는 2천명이라 하온데 이게 또, 의원들마다 말이 다른지라··· 일단 최소 2천명이 접종을 받는 건 확실해 보이옵니다.”

“소란이 없게끔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안 그래도 대군마마께서 잘 통제하고 계신 듯 하옵니다.”

“진성이?”

“예.”

“진성이 참으로 기특하지 않는가?”

상선의 말에 흐뭇히 미소지은 융이 눈앞의 상대에게 말했다.

얼마 전, 예조판서로 복귀한 임사홍이었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이 또한 우리 조선의 홍복이 아닐 수 없사옵니다.”

“내 도성을 시작으로 종두를 확대 해 나갈 것이다. 그리된다면 더는 자식이 두창에 걸려 고통 받는 아비는 없어지겠지.”

당사자만이 그 고통을 헤아릴 수 있다.

융도 그 당사자중 하나였었다.

창녕이 완쾌해서 참으로 다행이지만, 당사자는 정말 고통 속에서 몸부림쳐야 한다. 더 빌어먹을 일은 자식이 사경을 헤매도, 아비로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임금이 이럴진대 여염집(민가)의 아비들은 오죽할까 싶다.

“전하께서 백성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후세의 인구에도 회자 될 것이옵니다.”

“그런가.”

“이를 말이옵니까. 지금도 저자에는 전하의 위업을 칭송하는 목소리가 한가득이옵니다.”

“하하. 그게 어디 과인의 덕인가. 진성의 덕이지. 진성이 아니었다면 종두를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래서 말이온데······.”

“말해보라.”

“김운열을 팽형에 처한 뒤로 민심이 흉흉하옵니다.”

“어느 민심을 이름인가?”

“반가의 민심을 이름이옵니다.”

“그자들은 태생이 불평분자들이 아닌가.”

“그렇긴 합니다만, 암암리에 김운열이를 팽형에 처했으니 이것이 곧 선례가 되었다면서, 이제는 자잘한 일에도 팽형에 처해질 것을 우려하고 있는 듯 하옵니다.”

예상 못 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예상을 하고서 벌인 일이었다.

진성이 말한대로 시대에 따른 벌이란 게 존재하는 법이다.

이로 말미암아 백관들은 팽형을 경계하게 될 것이고, 조금이라도 더 맡은 바 소임에 충실하게 될 것이었다.

다만 사홍이 말한 건 동요였다. 동요는 또 다른 의미일 수 밖에 없었다.

“이제는 되도록 인(仁)으로 다스리란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차라리 화두를 전환시키는 건 어떠한가?”

“화두를 말이옵니까?”

“내 보위에 오른 뒤로 여진 오랑캐 놈들이 슬금슬금 변경을 넘나드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김운열이의 일까지 있은 뒤로는 놈들만 생각하면 치가 떨릴 지경이다.”

“토벌을 말씀하시옵니까.”

융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오나 백관들이 따를지··· 아무래도 재정 문제가 있는지라······.”

공포정치 속에서도 본인들의 권리가 침해 당한다고 생각하면 할 말은 하는 종자들이었다.

팽형도 같은 맥락이었다.

당장은 군주의 위엄에 압도되어 설설 기어 다녔던 이들이지만, 김운열에게 팽형을 가한다니 그 두려움 속에서도 꿈틀거리지 않았던가.

토벌도 마찬가지였다.

여진족을 두려워하기보다는 현실적인 문제, 즉 재정 문제로 인한 반발이 클 터였다.

국고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다.

근래 들어서 죄인들이 바친 속전으로 나라 살림이 크게 피긴 했지만, 전쟁을 일으킬 정도의 전비는 되지 못 한다.

“하지만 설욕조차 하지 않는다면 놈들이 우릴 어찌 생각하겠는가? 당장 내 보위에 오른 뒤로 놈들에게 끌려간 백성들만 수천이 넘는다. 그들이 놈들에게 끌려가기 직전에 누굴 떠올렸겠느냐? 임금을 떠올리지 않았겠느냐 말이다.”

“···”

“말로는 만백성의 어버이라면서, 천하의 어느 어버이가 자식이 포로로 끌려가는데도 수수방관한단 말이냐? 또 김감에게 들으니 조정 내에서도 놈들을 토벌하여 다시는 변경을 침탈하지 않게끔 경고해야 한다는 말들이 많다지 않는가?”

사홍은 기억을 더듬었다.

확실히 요즘 주전론자들이 늘긴 했었다.

하지만 역시 재정이 문제였다.

사홍은 여태 간신으로 불렸고, 지금도 간신으로 불린다.

대놓고 그를 간신이라 말하진 않지만, 예조의 수하 관원들도 뒤에서는 저 간신 놈의 새끼가 나라를 좀 먹고 있다는 말을 수시로 해댄다.

그걸 사홍도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참간신이 어떤 자들인가.

임금의 귀를 막고, 임금의 눈을 막는 자들이 아니던가.

최소한 사홍은 그런 부류는 아니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전하께서 마음을 먹으셨다면 응당 따름이 신하의 도리이오나, 역시나 재정이 걸리옵니다. 만약 전쟁을 일으켰다가 전비를 부담하지 못 하게 된다면 그 원성이 어디로 향하겠사옵니까?”

“흐음. 하면 어쩐다······.”

융은 진실로 그들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그래서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도 모조리 구출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홍의 말처럼 전비가 문제였다.

일부 부락에 대한 소탕은 큰 돈이 들어가지 않지만, 대대적인 토벌이라면 크게 부담이 갈 테니까.

그렇게 융의 고민이 깊어지는 사이.

“전하. 진성대군 들었사옵니다.”

“벌써 왔단 말이냐? 들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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